8화
안색이 파랗게 질린 요나가 재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런가……?”
“네. 가주님이 4년 전에 참석하셨던 롤벤 후작의 연회, 잊으셨나요?”
“응? 아, 그 소문이 무성하던…… 근데 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몰라.”
마멜라의 표정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나는 두 사람의 변화하는 표정을 보며 어리둥절했다.
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제가 그때의 일을 들려 드릴게요. 가주님이 참석하셨던 연회에 롤벤 후작의 차남이 도베르만 두 마리를 데리고 왔었어요.”
“뭐? 개를 데리고 왔다는 거야?”
“네. 그런데 하필 가주님과 가장 먼저 인사를 나누러 왔었죠. 그땐 아직 가주님이 동물을 싫어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때인지라 다들 늠름한 도베르만에게 시선이 쏠려 있었어요. 그런데 그 개들이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는지 가주님께 딱 달라붙은 거예요.”
마멜라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오라버니가 그걸 참으셨어?”
“아니요. 가주님은 개를 노려보며 곧장 자리를 떠나 버리셨죠. 그러곤 몇 걸음 안 가서 들고 있던 유리잔을 깨 버리시더니 욕을 하시곤 연회장을 나갔어요.”
요나의 긴말을 듣는 마멜라의 표정이 점차 이상해지더니 말이 끝났을 때는 눈썹까지 찡그렸다.
“뭐? 말도 안 돼. 오라버니는 그런 무례를 범할 분이 아닌걸.”
“사실 저도 일부러 컵을 깨신 건지 실수로 떨어트리신 건지 잘은 모르지만, 불쾌한 표정으로 곧바로 연회장을 떠나셨다는 건 확실해요. 인상을 얼마나 험악하게 구기고 계셨는데요.”
두 사람의 분위기가 다시 심각해졌다. 나는 불편한 눈으로 그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하지만 언젠가는 말해야 할 텐데 조금 일찍 말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그러기엔 지금의 아릴은 너무 말썽꾸러기인걸요.”
요나와 마멜라가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나는 갑작스레 이목을 받자 부담스러워서 딴청을 피우듯 소파를 긁었다.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마멜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긴 해.”
마멜라가 근처에 있던 공을 멀리 던져 줬다.
나는 소파를 긁던 걸 멈추고 본능적으로 공이 날아가는 걸 쫓아갔다. 한달음에 공을 물어오자 마멜라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다시 공을 던져 줬다.
이번에는 공이 침대 밑으로 들어갔다. 내가 침대 밑으로 공을 물러 간 사이,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아릴이가 점점 얌전해지는 것 같지 않아? 처음 붕대 풀었을 때를 생각하면 말이야.”
“네, 확실히…….”
공을 물고 어두운 침대를 벗어났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장난감 바구니에 부딪히면서 장난감들이 쏟아졌다.
‘아야, 왜 내 길을 방해하는 거야.’
나는 바구니를 으르렁 노려봤다.
그런데 갑자기 그 옆에 있던 스탠드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게 아닌가.
불안하게 몇 걸음 물러난 순간, 와장창 소리를 내며 스탠드가 쓰러졌다.
“……!”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물고 있던 공이 툭 떨어졌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공은 눈치 없이 뿅뿅 소리를 내며 저 구석까지 굴러갔다.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있는데 마멜라의 허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한 말 다 취소할래.”
* * *
마멜라는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하필 조금 전 아릴이 사고를 친 탓에 이것저것 수습을 하다 보니 약속 시간에 늦게 되었다.
그녀가 약속 장소에 도착해 보니 먼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마멜라, 늦었구나.”
익숙한 목소리. 차분하고 잔잔해서 듣기에 편안하지만 묘하게 사람을 긴장시키는 낮은 목소리였다.
‘하필 오라버니와의 저녁 식사에 늦다니…….’
한 달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중요한 약속이다. 마멜라는 얼른 그의 맞은편에 앉아 사과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은커녕 가쁜 숨만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오라버니, 이딜로스가 물었다.
“뛰어왔어?”
“네…… 늦어서 죄송해요. 제가 깜빡, 잠이 들어서…….”
마멜라는 시간을 금같이 여기는 그를 흘긋 살폈다. 다행히 그는 화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딜로스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마멜라의 잔에 물을 따라 줬다.
“천천히 오지 그랬어. 물 좀 마셔.”
“오라버니는 늦는 걸 싫어하시잖아요. 죄송해요.”
마멜라가 고개를 떨구자 이딜로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을 안 지키는 건 달갑지 않지. 하지만 넌 예외야. 얼마든지 늦어도 상관없어.”
“……그러다 제가 한 시간이나 늦으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보름까지도 기다려 줄 수 있는데.”
“네?”
마멜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어수룩한 표정을 본 이딜로스가 가벼운 웃음을 흘리더니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지냈어?”
다정한 목소리에 온몸의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마멜라는 그가 출장을 떠난 일주일을 떠올려 봤다. 본래라면 늘 외로움뿐이어야 할 시간이 온통 아기 고양이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마멜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피워 내며 대답했다.
“네, 잘 지냈어요.”
그 모습에 이딜로스는 조금 놀란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행이구나.”
식탁 위로 음식이 차려졌다. 이딜로스는 익숙하게 마멜라의 그릇에 음식을 덜어 주고 스테이크를 썰어 줬다.
저보다 한참이나 어린 여동생을 어릴 적부터 먹여 주고 재워 주던 습관 중 하나였다.
마멜라는 얌전히 기다리다가 그가 그릇을 건네자 손을 모으고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 그래야 키도 크지.”
마멜라는 오라버니가 먹기 좋게 썰어 둔 고기를 한입 가득 넣었다. 늘 먹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와 함께 먹어서인지 평소보다 맛있게 느껴졌다.
행복감에 빠진 마멜라는 자연스레 누군가를 떠올렸다.
‘아릴이는 밥 잘 먹고 있겠지? 밥 먹을 때면 늘 내가 옆에 있어 줬는데…….’
혼자 먹으면 외롭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녀였다.
‘식사를 마치는 대로 돌아가야겠어. 아릴이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마멜라는 음식들을 입으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한창 포크에 집히는 대로 음식을 밀어 넣는데 갑자기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졌다.
마멜라는 슬그머니 시선을 들었다. 이딜로스가 식사를 멈춘 채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멜라.”
하필 입에 음식이 가득 들어 있을 때였다. 마멜라는 대충 씹어서 삼킨 후에 대답했다.
“네?”
“오늘따라 유난히 급하게 먹는구나. 체하겠어.”
“아…… 해야 할 숙제가 생각나서요.”
마멜라가 겸연쩍게 웃자 이딜로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꼭꼭 씹도록 해.”
“충분히 잘 씹고 있는걸요.”
“마흔 번 정도 씹어.”
“그, 그렇게나 많이요?”
“네가 너무 급하게 먹는 거고, 이게 적당한 정도지.”
“…….”
그의 표정을 보니 진심인 듯했다. 마멜라는 고기를 입에 넣고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그녀의 접시 한쪽에 몰려 있는 채소들을 본 이딜로스가 말했다.
“편식하지 말고.”
“……네에.”
마멜라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채소를 집어 먹었다. 채소를 거르던 마멜라는 피망을 씹을 때마다 오만상을 썼다. 이것보다 고기 향이 나는 아릴이의 사료가 더 맛있을 것 같았다.
힘들게 제 몫의 식사를 마친 마멜라는 시녀가 따라 주는 차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고개를 들자 스푼으로 차를 젓고 있는 이딜로스가 보였다.
마멜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한번 물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저, 오라버니.”
“응.”
“혹시…… 고양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가던 이딜로스가 일순 멈칫했다. 그러나 그건 찰나였을 뿐, 그는 느릿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마멜라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찻잔을 내려놓은 그는 기다림이 무색할 정도의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
“글쎄.”
“…….”
뭘까? 저 말은 나쁘지 않다는 건가?
의미심장한 대답에 마멜라는 의아했다.
‘조금만 더 물어볼까?’
묘한 기대를 품고 마멜라가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이딜로스가 초를 치듯 말을 덧붙였다.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아.”
한순간 얼음물을 뒤집어쓴 심정으로, 마멜라는 저도 모르게 안달 난 표정을 지었다.
“네? 왜, 왜요?”
“난 네 발로 다니는 짐승은 다 싫어해.”
그는 생각만으로도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보자 마멜라는 설득의 말도 선뜻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조금 전에 요나가 해 준 이야기까지 떠오르자…… 그녀는 아릴에 대해 말을 꺼냈을 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워졌다.
‘다음에. 다음에 말하자…….’
마멜라는 재빠르게 다른 화제로 바꿨다.
“오라버니가 보내 주신 선물은 잘 받았어요. 감사해요.”
마멜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자 이딜로스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가 엷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마음에 들어?”
“네! 사실 이전부터 가지고 싶었던 거였어요.”
마멜라는 꿀에 절인 달콤한 호박파이를 먹으며 그에게 선물 받은 가넷 다이아의 영롱함에 대해 조잘댔다.
한참이나 떠들던 마멜라가 이번엔 쿠키를 집었다. 그런데 꼭 고양이 사료 같은 진한 색의 초코 쿠키를 보자 불현듯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마멜라는 입에 넣으려던 과자를 툭 떨어트렸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그 상태로 굳어 버리자 이딜로스는 손수건으로 마멜라의 입 주위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털어 주고 그녀가 떨어트린 과자도 대신 주웠다.
그러곤 다시 조용히 차를 마시려는데 갑자기 마멜라가 테이블이 흔들릴 정도로 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이딜로스는 차를 조금 쏟았다. 마멜라는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헉, 죄, 죄송해요…….”
“괜찮아.”
이딜로스는 새하얀 옷을 물들인 차를 바라보다가 냅킨을 들어 닦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던 차를 쏟은 건데 뜨겁지는 않은지 그의 표정은 차분했다. 그는 곧 다시 아무렇지 않게 남은 차를 마셨다.
마멜라는 쉬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다가 말했다.
“오라버니, 정말 죄송한데요…… 전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밀린 숙제가 많아서요.”
“응, 되도록 숙제는 미루지 말고.”
이딜로스의 말에 마멜라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네. 그럼 다음에 봬요!”
크게 손을 흔든 마멜라가 서둘러 나갔다. 이딜로스는 여동생에게 따라 손을 흔들어 주다가 몇 걸음 물러나 있던 측근을 불렀다.
“안셀.”
“예, 전하.”
“찜질용으로 얼음을 좀 가져와.”
“갑자기 웬 얼음…… 전하, 손이 왜 이렇게 부으셨습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안셀이 이딜로스의 손을 보곤 눈을 부릅떴다. 이딜로스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데였어.”
“예? 괜찮으십니까?”
“유난 떨지 마라. 별거 아니니까.”
“아니, 이게 아무리 봐도 별거 아닌 게 아닌데…… 어어, 전하, 어디 가십니까?”
그의 손을 보고 걱정하던 안셀은 이딜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덩달아 시선을 올리며 물었다.
“집무실. 올 때 얼음이나 챙겨 와.”
“집무실이라뇨, 이 손으로 업무도 보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안셀이 기겁하며 물었다. 이딜로스는 그를 돌아보며 잘생긴 눈썹을 한껏 찡그리곤 말했다.
“말이 많다. 잘리고 싶나?”
안셀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이딜로스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의 머릿속엔 좀 전의 대화와 함께 작은 의문이 떠오르고 있었다.
고양이…….
‘마멜라가 고양이를 기르고 싶어 하는 건가?’
집무실로 향하는 이딜로스의 걸음에 무거운 한숨이 들러붙었다.
만약 마멜라가 고양이를 키우자고 하면 어찌해야 할까.
본능적인 거부감에 이딜로스가 걸음을 멈췄다.
부디 앞서 나간 생각이며 불안한 오해로 그쳐야 했다. 왜냐하면 동물은…….
‘동물은 무섭단 말이야…….’
그가 한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치명적인 비밀이자 약점.
이딜로스는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제 뺨을 살짝 꼬집었다.
마멜라가 고양이를 키우자고 한 것도 아닌데 지레 겁을 먹을 이유는 뭔가. 이럴 게 아니라, 다음에 마멜라와 제대로 대화를 해 보면 된다.
금세 마음을 추스른 그는 다시금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걸음걸이는 평소보다 기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