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흠칫 몸을 굳혔다. 마멜라와 비슷한 냄새며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 나는 그가 마멜라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릿속에서 오만 가지의 생각이 몰아쳤다.
설마 떨어지는 나를 본 건 아니겠지? 덤불이 날 제대로 가리고 있긴 한가?
물론 수많은 상념 중에서도 가장 굳건하게 떠오른 것은 단연 하나였다.
‘내 모습을 보이면 마멜라가 곤란해질 거야……!’
나는 숨을 죽인 채 내 귀와 꼬리가 수풀 밖으로 튀어나온 건 아닌지 살폈다. 다행히 몸집이 작아서 튀어나온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그사이 위쪽에서 마멜라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오라버니?”
“마멜라, 무슨 일이야?”
지척에서 부드럽게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나는 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진짜 코앞에 있나 봐…….’
수풀을 치워 내고 마멜라의 가족으로 추정되는 인간을 한번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마멜라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수염을 잡아당겨 충동을 참아 냈다.
‘조금만 버티자…….’
온몸을 뻣뻣하게 핀 채 움직이지 않으려 애썼다.
하필 나무에 양쪽 뒷발이 걸린 바람에 강제로 다리 찢기를 해야 했다. 그런데도 바스락 소리가 날까 봐 자세를 바꾸지도 못했다.
마멜라의 말소리가 들렸다.
“소, 손수건이 날아가서요. 아까 바람이 세게 불었잖아요. 혹시 보셨어요……?”
“아니. 보진 못했는데 찾는 걸 도와줄까?”
나는 멍하니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이상하기도 하지. 들리는 목소리는 일전에 들었던 것과 같은데 지난번과 느낌이 달랐다. 그때보다 훨씬 온화했기에 얼핏 들으면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왜인지 화들짝 놀란 듯한 마멜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오라버니는 곧 밤인데 어딜 가시는 거예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수도에 있는 마르젠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아, 요즘 자주 나가시네요. ……많이 바쁘신 거죠?”
마멜라의 기운 없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발이 삐끗했다. 다행히 곧바로 중심을 잡아서 작은 소리로 그쳤지만 큰 사고를 낸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렸다.
다행히 바로 옆에 있을 마멜라의 가족은 내가 낸 소리를 못 들은 모양이었다.
만약 들었더라면 당장에 수풀을 헤쳐 내 목덜미를 집어 들었을 거다. 지금처럼 마멜라의 말에 대답해 줄 것이 아니라.
“……마멜라,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다녀오면 오랜만에 저녁 식사라도 함께하지 않을래?”
“정말요? 전 좋아요……!”
아까와는 달리 제법 활기를 되찾은 목소리가 들렸다. 금세 다시 기운을 차린 듯했다.
옆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가벼우면서도 희미해서 소리는 금방 흩어지고 말았다.
“그래. 그럼 나는 이만 가 보마.”
“네. 다녀오세요, 오라버니.”
마침내 그가 걸음을 돌렸다.
기척이 멀어지며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 멀리서 마멜라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릴, 괜찮아?”
나는 파묻힌 수풀 속에서 번쩍 건져 올려졌다. 마멜라의 걱정스러운 금색 눈을 마주하자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다리 찢기를 하고 있던 탓에 사타구니에 찡한 마비가 찾아왔다.
마멜라는 내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데다 나무 덤불에 처박히기까지 했지만, 다행히 나는 다친 곳 하나 없었다.
달라진 거라곤 뽀송하던 털이 꼬질꼬질해졌다는 점 하나뿐이었다.
마멜라는 내 털에 붙은 풀잎들을 재빠르게 털어 내곤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게 왔지?”
“아옹.”
나는 마멜라에게 물고 있던 손수건을 보였다.
칭찬을 바라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마멜라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녀가 천천히 내 등을 쓰다듬었다.
“아릴, 고마워……. 그 손수건은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거라 잃어버렸다면 난 무척 슬펐을 거야.”
“아옹!”
나는 손수건을 가져가는 마멜라의 손에 머리를 문질렀다. 마멜라는 내 애교에 응하듯 턱을 만져 주며 말했다.
“하지만, 다음부턴 이런 위험한 행동은 절대 하면 안 돼. 알았지?”
이내 그녀는 내 조그만 몸이 옷자락에 파묻히도록 나를 품에 꼭 끌어안고 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다른 사람은 없는지 간간이 주변을 둘러보는 행동이 조금 씁쓸했지만, 내색 없이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향이 강하게 밀려오자 나는 그제야 마멜라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두 손으로 뭔가를 소중히 받쳐 든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요나가 보였다.
“아가씨? 어디 다녀오시는 거예요? 거기다 품에 그 솜뭉치는…….”
“아릴이가 창밖으로 떨어졌어.”
“네……? 세상에! 아릴은 괜찮은가요? 밖에 내놓기도 무서울 정도로 자그만데! 어떡하죠, 당장 수의를 부를까요? 아, 이를 어째. 아직 새끼라서 이 높이에 제대로 착지나 할 수 있을지…….”
“요나, 진정해. 아릴이는 멀쩡해. 이것 봐.”
마멜라가 나를 품에서 떼어 놓더니 요나에게 내밀어 보였다. 요나와 시선이 마주친 나는 울음소리를 냈다.
“아옹.”
요나는 마멜라의 손에 번쩍 들린 나를 두고 내 몸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심지어 엉덩이까지 유심히 살피길래 나는 기겁해서 꼬리를 휘둘렀다.
“이상이 없는 것 같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런데 요나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야?”
“아. 안셀 님이 아가씨께 전해 드리라 하셨어요.”
그들은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마멜라는 나를 무릎 위에 내려 두고는 요나에게서 어떤 조그만 상자를 건네받았다.
나는 그들의 일엔 관심이 없어서 마멜라의 옷에 붙은 레이스를 잡아당기며 놀았다.
그러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마멜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자를 보고 있었다.
“와아, 이건 루다비토의 가넷 다이아잖아…….”
“가주님이 아가씨를 위해 준비하셨다고 하시더군요.”
마멜라가 손을 뻗자 상자에서 화려한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걸 생전 처음 본 나는 신기해서 입을 벌렸다.
붉은색의 보석은 정교하고 섬세한 꽃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조명 아래에 있으니 빛이 반사되어 보석이 광을 내뿜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아름다운 보석에 시선을 모조리 빼앗겼다. 마멜라도 잠시간 말문을 잃은 듯 그걸 쳐다보기만 했다.
“정말 아름답네요. 아가씨께선 가넷 다이아를 실제로 보고 싶어 하셨잖아요. 기분이 무척 좋으시겠어요.”
“응. 그런데 오라버니가 이걸 어떻게 구하신 거지? 제국에선 구할 수가 없는 건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마멜라는 가만히 보석을 바라보다가, 보석을 들어 샹들리에의 불빛에 비춰 보았다.
보석에서 번져 나온 색색의 빛줄기가 방 안 곳곳을 물들였다.
나는 참지 못하고 보석이 바닥에 흩뿌린 빛의 흔적들을 열심히 쫓아다녔다.
앞발이 그 반짝반짝한 빛의 흔적에 닿을 때면 털색도 함께 예쁘게 물들었다. 신비한 광경에 매료된 나는 방 안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마멜라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요나, 아릴이 좀 봐. 너무 귀여워!”
“아직 어려서 빛이 신기한가 봐요.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아요.”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전담 화가를 붙여서 하나하나를 다 그려 뒀을 텐데…… 정말 아쉬워.”
내가 보석의 광채에 정신이 팔려 있을 동안,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 갔다.
“오라버니가 돌아오시면 고맙다고 전해야겠어. 사실 아까 마주쳤는데 알았더라면 그때 인사할 수 있었을걸…….”
갑작스레 보석의 빛이 자취를 감췄다. 고개를 들자 마멜라가 보석을 상자에 다시 넣는 게 보였다.
‘아, 이번엔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빛을 표적으로 사냥 놀이를 하던 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내 사정을 모르는 마멜라는 요나와 대화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나는 입을 쭉 내민 채 마멜라의 곁으로 돌아가 엎드렸다.
마멜라는 내가 옆에 달라붙자 익숙하게 나를 쓰다듬었다. 그 만족스러운 손길에 토라진 마음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 * *
“아릴, 나 어때? 깔끔해? 안 이상하지?”
“아옹?”
평소보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마멜라가 유난히 내 앞을 알짱거렸다.
뭔가를 말하고 있긴 한데 뭘 말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가 없어 고개만 갸웃거렸다.
뒤에서 나무 빗을 쥐고 선 요나가 말했다.
“아가씨, 평소보다 배는 더 예쁘시니 걱정 마세요.”
“그럼 다행이고. 하도 오랜만에 오라버니랑 식사하는 거라 별게 다 긴장돼. 이런 점은 평소처럼 혼자 먹는 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좋으시잖아요. 한 달에 몇 없는 날인걸요. 늘 손꼽아 기다리셨잖아요.”
“그건 그래.”
마멜라는 내 앞에 쪼그려 앉으며 내 등을 쓰다듬었다. 등을 어루만지는 느린 손길이 좋아서 늘어지자 그녀가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오늘은 애교를 부리는 데 왠지 위화감이 들었다.
왜 그럴까 이유를 찾아보니 뒤편에 선 요나의 입가에 웃음기가 없었다.
늘 내가 애교를 부리면 마멜라와 함께 웃던 요나인데 지금은 무슨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요나는 잠시 뒤 입을 열었다.
“아가씨, 역시 가주님께 조금 더 자주 시간을 내 달라고 부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아가씨께서 그리 부탁하신다면 가주님도 분명…….”
나를 쓰다듬던 마멜라의 손이 멈췄다. 나는 의문을 가지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마멜라의 입가에도 웃음기가 옅어지고 있었다.
“아니, 괜찮아. 오라버니는 바쁘신걸. 괜히 오라버니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아가씨…….”
“가끔은 함께 있을 수 있잖아. 내가 늘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이젠 아릴이도 있으니 예전만큼 외롭지도 않아.”
마멜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으나 정작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나를 다시 쓰다듬기 시작했다.
‘뭐지……. 마멜라의 기분도 안 좋아 보이고, 분위기도 조금 답답해졌어…….’
묘한 정적이 불편했던 나는 마멜라의 옷자락을 물고 잡아당겼다.
“아옹.”
“응? 머리 만져 달라고?”
내 이마로 손바닥을 옮긴 마멜라는 금세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한창 나를 쓰다듬던 그녀는 다시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있잖아, 이번 식사 시간 때 오라버니께 아릴이에 대해 살짝 말해 볼까?”
그러자 요나의 표정이 삽시간 만에 뒤바뀌는 것이 보였다. 염려가 담긴 눈빛이 불과 몇 초 만에 경악으로 뒤덮였다.
……뭐야? 마멜라가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