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그 후
흰색
같은 시간에 두 개의 다른 기억이 존재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분명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인데, 왜 나는 같은 시간에 각각 다른 곳에서 두 사람으로 존재했던 것일까?
나는 많은 의문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 광해군은 조선의 제 15대 왕으로 이름은 ‘혼’이다. 선조와 공빈 김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임진왜란 동안 분조를 이끌며 수많은 치적을 쌓았으나, 부왕 선조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16년 뒤 왕위에 오른 그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위기 상황에서 실리외교를 펼쳤으나, 그의 왕위 계승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대북파로 인해 당쟁에 휘말리게 된다. 이후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것은 내 삶이었다.
“경민아.”
난 보던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중학교 때부터 친구인 은미가 서 있었다.
“나 청소당번 끝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더니, 또 도서관에서 책 보고 있었어?”
난 어색하게 웃으며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소 지금 끝났어?”
“응. 빨리 가자.”
난 보고 있던 책을 반납대에 올려놓았다.
[ 광해군 ]
그런 나를 보며 은미가 입을 열었다.
“너 요즘 이상해.”
“뭐가?”
“너도 모르지? 얼마 전부터인가, 말수도 줄고 무뚝뚝해졌어. 애늙은이 같고. 집에 뭔 일 있어? 너희 아빠가 저번 모의고사 성적 같고 뭐라고 하시디? 너 모의고사 잘 봤다며?”
“아니야. 우리 아빠가 언제 성적 갖고 뭐라고 하시는 거 봤니?”
“못 봤지. 근데 우리 엄마는……. 됐고. 여튼 기억나지? 모의고사 끝나면 놀이동산 가기로 한 거. 언제 가지? 언제 갈까? 응?”
“아빠에게 물어보고.”
“언제? 그러지 말고 당장 물어봐. 너 아빠랑 카톡 한다며? 카톡 보내.”
“아빠 강의 중인데 카톡 보내면 신경 쓰이실 거 아니야. 이따 저녁에 퇴근하시면 물어보지 뭐.”
그러자 은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한다.
“너 진짜 이상하다?”
“뭐가?”
“내가 알기로 너 그렇게 예의 바른 애 아니었거든? 옛날에는 너희 아빠가 만드는 밥이 그렇게 맛이 없다며? 그러던 애가 매일 아침 아빠가 해주는 밥을 꼬박꼬박 먹고 나온다고 학교 지각을 하지 않나. 너 좀 이상해. 넌 그거 못 느끼냐?”
나는 실없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며 은미가 어깨에 멘 가방을 툭툭 쳤다.
“가자. 나 떡볶이 먹고 싶어.”
그러나 은미가 눈을 흘기며 나를 보며 말한다.
“그것도 이상하네? 내가 알기로 너 매운 거 잘 못 먹었던 것 같은데?”
“그건 원래 잘 먹었거든요! 어서 가자.”
은미는 방금 전 자신이 가졌던 의문도 곧바로 잊어버린 채 재빨리 앞으로 뛰어나갔다. 나도 그런 은미의 뒤를 바짝 뒤쫓으며 학교 도서관을 나섰다.
17살. 조선에서, 혼의 품 안에서 사라져버린 30살의 나는 2013년의 어느 가을날 17살의 여고생으로서 깨어났다.
그것은 내가 조선으로 가기 전과 전혀 다른 삶이었다.
그 뒤로 내 머릿속에는 같은 시간, 두 개의 기억이 공존하게 되었다.
하나는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던 혼과의 인연으로 조선으로 가게 되었던 기억이다.
또 다른 기억은 바로 지금, 현재 내가 살아가는 시간 속의 기억이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니?”
부엌에서 저녁 준비 중이시던 아빠가 내 목소리를 듣고 반갑게 맞이하신다. 나는 메고 있던 가방을 한 쪽에 내려놓고는 조용히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물 마실래?”
“네.”
아빠가 물 컵에 물을 따라주시며 내게 묻는다.
“오늘 어땠니?”
“학교에서요?”
아빠의 물음에 되레 반문하는 나를 보며 아빠가 피식 웃으신다.
“그래. 학교에서든 아니면 친구하고든.”
“아……. 좋았어요.”
“그래?”
아빠는 더 이상 내게 묻지 않으신다.
능숙하게 식탁에 저녁을 차리신 아빠와 나는 평소처럼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 주로 말을 하는 건 아빠였다. 아빠는 하루 종일 강의를 나간 대학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수업시간에 엉뚱한 질문을 한 학생이라든지, 성적 때문에 사정하기 위해 사무실을 찾아온 학생의 이야기라든지…….
난 그저 아빠의 말을 듣고 재미있는 이야기에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아빠가 식사가 끝날 때쯤 내게 이런 말을 하셨다.
“그런데 이상한걸.”
“뭐가요, 아빠?”
“예전에는 네가 더 많이 재잘거렸던 것 같은데. 요즘은 말이 없으니……. 우리 딸, 또 사춘기가 온 건가? 아빠, 걱정해야 하는 거야?”
“사춘기는요. 얼마 전에 모의고사가 끝나서 진이 빠졌나 봐요.”
“성적 갖고 고민하니? 네 성적이면 그렇게 나쁘진 않은데. 그리고 아직 고삼도 아니잖니. 긴장 풀어. 지금은 놀 때 아니니?”
“네.”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용돈 떨어지면 말해라.”
“네.”
“말 나온 김에, 용돈 필요하진 않고?”
“아니요.”
“경민아.”
“네?”
웃으며 단답형의 대답만 하던 나를 보며 아빠가 갑자기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피곤하지? 가서 쉬어.”
“예. 아빠도 쉬세요.”
“그래.”
식탁에서 일어난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문을 닫는 순간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최근 아빠는 내가 말수가 적어졌다고 걱정하신다. 모의고사 전후로 달라진 나의 태도에 대해 종종 말하시기도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특히 은미를 비롯한 다른 학교 친구들도 내게 그런 말들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조선에서 사라진 뒤로, 그리고 다시 이곳에 나타난 뒤로 난 예전의 김경민이 될 수가 없었다. 내 안에는 두 개의 기억이 공존하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그나마 확실한 대답을 해 줄 사람은 아빠뿐이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아빠는 내가 시간여행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지금 아빠의 기억 속에 나는 단 한 번도 시간여행을 한 적이 없는 김경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빠는 내가 우리 집안이 시간여행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고 알고 계신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겪은 일들을 모두 아빠에게 털어놓는다면?
털어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이미 죽은 사람이어야만 하는 아빠에게 어떤 해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또한 내가 조선에서 겪은 일들을 모두 알게 된 아빠가 얼마나 힘들어하실지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빠 앞에서 연기를 한다. 평범한 여고생의 모습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말수가 줄었다.
무엇을, 어떤 이야기를 아빠에게 해야 할지 나 스스로도 정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혼아. 사랑해…….’ ]
모든 것을 잃은 순간 난 아주 오래전 내가 바라던 평범한 삶을 갖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한 생각을 하고,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평범한 생활을 한다.
오래전 내게는 그런 삶을 가지게 되면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나서 얻게 된 평범한 삶은, 행복도 불행도 그 무엇도 아닌 것으로 내게 다가올 뿐이다.
***
창덕궁, 후원.
광해군 혼이 죽은 뒤 사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문화해설사와 동행하지 않고서는 입장이 불가능한 그런 곳이다.
“이곳이 후원이라는 이름과 함께 비원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조선왕실에서 ‘비원’이라는 이름의 관청을 두어 이 후원을 관리하게 된 기록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원도 맞는 말이고, 후원도 맞는 말입니다.”
친절한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창덕궁 후원 관람코스가 시작되었다.
“자, 지금 여러분들이 후원 관람을 시작하신 이 넓은 길은 처음 후원을 조성할 때는 없던 길입니다. 대한제국 때 후원으로 자동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든 길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조선의 임금님은 어느 길로 어떻게 다녔는가? 임금님이 계시는 편전에서 이곳 후원까지는 거리가 상당하죠? 궁이 크니까. 임금님이 후원으로 오실 때는 가마를 이용하셨습니다. 흔히 옥교라고 불리죠. 옥교를 탄 임금님이 지금 이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힌 길을 따라 후원으로 들어오시게 됩니다. 자, 이동하겠습니다.”
문화해설사가 앞장서고 그 뒤를 관광객들이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관광객 중에는 유치원에서 단체로 온 어린 아이들 스무 명 가량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해설사가 늘어놓는 어려운 말들보다는 쉴 새 없이 떨어지는 자신들의 얼굴만 한 낙엽들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바람 따라 붉게 물든 단풍잎들이 살랑거리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치원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단풍잎들을 줍기 시작했고, 관광객들은 단풍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단풍은 변절을 상징하지. 예로부터 궐에는 심을 수가 없는 나무야. 일제강점기의 잔재일까?’
내 기억 속 사백 년 전의 창덕궁과 지금의 창덕궁은 달라도 너무 많이 달랐다. 아무리 조선에서의 기억을 떠올려도, 공통점이 아닌 차이점만 눈에 띌 뿐이다.
[ ‘아빠. 광해군의 후궁 중에서 ‘원빈 노 씨’ 라는 사람이 있었나요?’ ]
[ ‘원빈 노 씨?’ ]
[ ‘네.’ ]
[ ‘조선 왕조를 통틀어서 ‘원빈’이라는 빈호를 가졌던 여인은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 씨뿐인데? 원빈 노 씨라는 후궁은 없었단다. 심지어 고려사, 조선사를 통틀어서도 말이야.’ ]
국사학과 교수인 아빠가 모르는 ‘원빈 노 씨’라면, 조선사에 존재한 적도 없는 여인이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기억 속 조선에서의 나의 삶은 모두 날조된 기억이란 말인가?
혼과 헤어졌다는 슬픔보다도 2013년에 깨어난 내게 가장 큰 충격이었던 사실은, 조선 역사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원빈 노 씨’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역사를 바꿨어. 각석을 통해서 시간의 문을 열었잖아. 그리고 세종대왕 시대로 가려던 어린 나를 막았어. 그 뒤에 나의 인생이 바뀐 거야. 광해군 혼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내 인생이 만들어진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정식 후궁의 작호를 받았던 나의 존재가 역사기록 그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혼과의 모든 이야기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렸다니.’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그와의 만남, 사랑, 슬픔. 그와 함께 하며 나누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남아 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평생 나 홀로 간직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30살의 나이로 조선에서 사라진 후, 17살로 깨어난 내게 주어진 비극적인 운명이 된 것이다.
부용지를 지나 규장각과 영화당의 설명을 마친 해설사는 불로문을 지나 애련지에 들어섰다.
사백 년 전 혼이 임진왜란에 불탄 창덕궁을 중건하며, 내가 머물 교화당을 지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교화당도, 교화당과 이어져 있던 어수당도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연못 두 개만 나란히 있었고, 그 사이에는 버려진 공터와 어린 나무들만이 곳곳에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었다.
자연히 해설사도 버려진 공터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해설사의 시선은 두 개의 연못 중 큰 연못에 있는 정자를 향했다.
“저기 보이는 정자는 애련정이라는 정자입니다. 숙종대왕께서 지으신 정자이죠. 이곳에 핀 연꽃을 좋아하셨던 숙종대왕께서 이 연못의 이름을 ‘애련(愛蓮)’이라고 지은 데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혼이 창덕궁을 다시 중건했을 무렵, 이 연못에는 이름이 없었다. 그저 궐 나인들은 ‘큰 연못’이라고 부르며, 한자로는 대연(大淵)이라고 썼다.
큰 연못은 오로지 어수당을 위해 만들어진 연못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있는 작은 연못은 교화당에서 바라보는 경치를 위해 만들어졌다.
한마디로 혼이 나를 위해 만든 연못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작은 연못 뒤로 교화당이 위치했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건물의 흔적조차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다음은 저 앞에 보이는 기와집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연경당이라는 곳인데 순조의 아들이었던 효명세자와 관련한 일화가 있는 곳입니다.”
해설사가 연경당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관광객들과 유치원 아이들도 해설사를 따라 연경당 안으로 사라졌다.
난 홀로 어수당이 있었던 자리 앞에 섰다. 어수당 터에는 돌 몇 무더기만이 굴러다닐 뿐, 낙엽들만 잔뜩 쌓여 있었다.
[ ‘그런데 여기는 왜 온 거야?’ ]
[ ‘따라오면 알게 되느니.’ ]
한밤중.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로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던 혼의 모습이 바로 어제의 모습인 양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러자 주변은 마치 혼이 날 처음 이곳으로 데려왔던 한밤중으로 바뀐 것처럼 깜깜해졌다.
난 천천히 어수당 터 안으로 들어섰다. 사백 년 전 혼의 뒤를 따라 어수당 안으로 들어섰던 그날처럼.
[ ‘여기에 뭐가 있어?’ ]
혼이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나보다 앞서 걸어 나간다. 나는 그저 궁금증을 가득 안고 그의 뒤를 따를 뿐이다.
어느 순간 병풍이 앞을 가로막는다. 혼은 그 병풍 뒤로 사라졌고, 나도 그런 그의 뒤를 따랐다.
병풍 뒤의 작은 문 위에는 교화당(蕎花堂)이라는 작은 현판이 달려 있다. 그리고 그 문 안으로 들어서면 어수당과 교화당을 이어주는 폭이 좁고 긴 복도가 나타난다.
혼은 그 복도를 따라 교화당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복도 앞에서 멈칫했던 기억을 되살렸다.
활짝 열린 복도의 창문을 따라 달빛이 만들어낸 푸른 비단이 깔린 복도 바닥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백 년 뒤. 그 복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난 눈물로 그 사라진 복도를 따라 걷는다. 그리고 그 복도의 끝에서 교화당 안으로 들어섰던 그 순간! 혼은 교화당의 창문을 열고 나를 기다린다.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보았다. 교화당 창문 밖에 펼쳐진 메밀꽃 밭을. 달빛이 비추던 메밀꽃을 보며 혼은 내게 약속했다.
[ ‘매년 이곳에서 너와 함께 메밀꽃을 보도록 하마. 이곳 교화당은 그런 약조의 의미로 지었느니라.’ ]
내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허상처럼 보이는 메밀꽃이 아닌, 불그스름한 단풍잎들을 한 손 가득 잎이 부서지도록 쥐어 잡았다.
‘혼과 함께한 추억은 이제 모두 없던 일이 된 거야.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혼은 없어. 내가 사랑했던 혼은, 나를 사랑했던 혼은 없어. 없는 거야. 난……. 애초부터 조선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흐흑. 혼아. 혼아…….”
그리고 그와 함께한 시간을 되새기며 고통 속에 남은 건 오로지 나뿐이다.
이것이 시간이 내게 내린 죽음이 아닐까? 이런 마음을 품고 살다 죽는다면, 그것이 바로 시간이 내게 내린 저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참을 흐느끼던 내 앞으로 새하얀 티슈 한 장이 내밀어졌다. 그것을 내민 사람의 존재를 느낀 나는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일곱 살쯤 되어버리는 어린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는 노란색의 가방을 메고 마찬가지로 노란색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에는 ‘나리 유치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아이가 조금 전 해설사들 틈에 끼어 있던 유치원생들과 같은 옷차림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난 그 아이를 보며 혼과 함께 결코 내 머릿속에서나 마음속에서나 지울 수 없는 또 다른 한 명을 떠올렸다. 그것은 명이였다.
[ ‘마마…….’ ]
“고마워. 하지만 난 괜찮아.”
주저앉았던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자 아이는 고개를 들어 그런 나를 보며 작은 입을 열어 말했다.
“누나, 이제 안 울어요?”
“안 울어.”
그때 연경당 안으로 들어갔던 사람들 중 유치원 인솔교사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급히 뛰어나왔다.
“정원아! 얘가 어디로 갔지? 신 선생님. 어서 관리사무소에 연락해 주세요. 여기 후원에 연못도 많아서 위험한데!”
“예. 지금 연락해 볼게요!”
멀리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나는 아이의 가슴에 걸린 이름표를 확인했다.
[ 개나리반 이정원 ]
나는 남아 있던 눈물을 훔쳐내고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데려다 줄게.”
아이는 멀리서 자신을 찾는 선생님들을 보았는지, 씨익 웃으며 내가 내민 손을 잡았다.
난 그 아이와 함께 교화당이 있던 자리를 걸어 나오다 어수당이 있던 터에서 잠시 멈춰 섰다. 아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난 그런 아이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교화당이 있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낙엽만이 어지럽게 뒤덮여 있는 곳.
그곳에서 옛 교화당의 흔적을 찾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랬다. 교화당은, 교화당이라는 이름의 건물은 단 한 번도 이곳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혼과 나의 추억도, 사랑도, 그 모든 것도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유오디아 작가의 말
작가 블로그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경민이처럼 창덕궁 후원관람시 절대 개별행동 하시면 안 됩니다! 후원에서는 꼭 문화재 해설자와 동행하여 관람하셔야 해요. 특히 눈 내린 겨울에는 꽁꽁 언 연못 위에 눈이 쌓여서 자칫하면, 땅인 줄 알고 밟고 뛰어놀다가 연못에 풍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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