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천상열차분야지도 (4)
흰색
혼이 오후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편전으로 돌아간 후 난 홀로 교화당에 남아 있었다.
혼은 아픈 기색이 사라지지 않은 나를 두고 돌아가는 것이 못내 아쉬운지, 모든 업무를 일찍 마치고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교화당의 나인들은 자리를 깔아주었고 난 자리에 누웠다. 잠이 와서라기보다는 오늘 하루가 몸이 다 낫지 않은 내게는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렇게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 ‘아빠?’ ]
5살의 나였다.
5살의 내가 아빠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 ‘아빠, 어디 있어?’ ]
문득 아빠를 찾아 헤매던 5살의 나를 바라보며, 난 그곳이 익숙한 곳이란 걸 깨달았다.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이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전되기 전까지 전시되던 곳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종종 아빠와 왔던 곳. 그렇다면 이곳에서 아빠가 갈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어린 나를 바라보는 성인의 나만큼이나, 어린 나 역시도 아빠가 있는 곳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어린 내가 어디론가 바쁘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난 그런 어린 나의 뒤를 쫓았다. 이윽고 어린 내가 어딘가에서 멈춰 섰다.
그곳에는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바로 자신의 앞에 전시되어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앞에 있었다.
[ ‘아빠.’ ]
“아빠…….”
어린 내가 각석을 바라보며 서 있는 아빠를 부르는 순간, 나 역시 동시에 아빠를 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난 아빠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아빠의 뒷모습만 본채로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해가 졌는지 교화당 안은 캄캄했다. 난 스스로 몸을 일으켜 가까운 곳에 있는 촛대에 불을 켰다.
문 밖에 있던 나인들이 이를 알아차리고는 소리를 냈다.
“원빈마마. 기침하셨나이까.”
“보향이는?”
그러자 문이 열리며 보향이 안으로 들어왔다.
“예. 원빈마마.”
“시각이 얼마나 되었느냐?”
“술시(戌時 19~21시)가 가까워졌사옵니다. 늦었지만 수라를 올릴까요?”
“되었다.”
저녁을 안 먹겠다는 내 말에 보향의 표정이 굳는다.
“원빈마마. 이러다 전하께서 오셔서 물으시면 교화당 나인들이 큰일 나옵니다.”
“걱정 말거라. 전하께 내가 잘 말씀드릴 터이니.”
“하오나 원빈마마!”
“걱정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보다 넌 나와 갈 곳이 있다.”
“예? 갈 곳이라니요?”
영문을 모르는 보향과 함께 간 곳은 다름 아닌 창덕궁 흠천각이었다. 오후에 꾼 꿈속에서 보았던 각석을 보기 위해서였다.
각석과 함께 보았던 아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깨어서일까? 왠지 각석을 찾아가면, 그곳에 아빠가 있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창덕궁 흠천각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폐허로 변해버린 경복궁에서 옮겨진 이후, 아직 적당히 놔둘 자리를 찾지 못해서인지 각석은 흠천각 앞마당에 임시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해가 진 흠천각에는 지나가는 이 하나 없이 조용하고 또 어두웠다.
“이것은……. 낮에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었던 그 돌덩이 아니옵니까? 이 돌덩이를 보시려고 이 시각에 흠천각에 납신 것이옵니까?”
보향이 들고 있는 등으로 각석의 이곳저곳을 비춰보며 말한다.
난 보향의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천천히 각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힘없이 각석의 표면을 쓸었다.
그러자 내 손 길이 닿는 각석에서 희미하지만 아침 바다의 색을 닮은 푸른빛이 살짝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난 놀라서 급히 손을 떼었다.
“원빈마마?”
보향인 각석에서 나는 빛을 보지 못한 것인지, 놀라며 각석에서 손을 뗀 나를 걱정스럽게 불렀다. 난 애써 침착한 척하며 보향을 향해 말했다.
“돌을 더 자세히 봐야겠으니, 교화당으로 가서 등을 좀 더 가져오너라.”
“예? 하오나 그때까지 홀로 이곳에 계시게요?”
“그래보았자 창덕궁 안이 아니더냐. 경운궁도 아니고. 어디 안 갈 터이니, 어서 다녀오거라.”
“예에……. 원빈마마.”
보향은 내 발치에 들고 있던 등을 내려놓았다. 등 없이 어두워진 길을 뚫고 교화당까지 가야한다는 사실에 표정은 밝지 못했지만 말이다.
보향이 흠천각을 떠나자, 난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한 번 더 주의 깊게 살폈다.
처음부터 등이 여러 개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각석을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하기 위해 보향을 떼어놓을 핑계가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난 다시 한 번 조심스레 각석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조금 전 보았던 빛은 더 이상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전 내가 보았던 푸른빛은 헛것이었단 말인가?
그렇게 몇 번을 각석을 쓸며 만져보던 나는 씁쓸한 웃음만 흘리며 각석에서 손을 떼었다. 신기한 현상을 보았든 보지 않았든 결국은 다 쓸모없는 짓이란 걸 깨달아서였다.
‘그래서? 아빠가 말한 대로 시간의 문이 열린다면?’
아빠는 나 때문에 죽은 엄마를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는 시간의 문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문의 존재를 안 뒤에 아빠를 살리는 것에 대해 생각했지만, 결국 명이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이 문을 넘었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경우, 명이와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명이는 죽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혼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일어날 비극을 막는 것이었다.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영창대군의 신변에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그가 반정으로 인해 폐위되는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은 인목대비의 유폐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되고, 다시 말해 그날 나타나게 될 아빠와의 만남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 수 있다는 말도 된다.
‘결국……. 내겐 쓸모없는 건가. 내겐?’
임진년의 회령으로 가서 왜군의 손에 목숨을 일은 아빠를 살려낸다?
풍질이라는 병명을 모른 채 아픈 상태로 비를 맞던 명이의 죽음을 막는다?
‘이 돌이 대체 무얼 할 수 있다는 거지?’
아빠가 죽는 순간과 명이가 죽는 순간이 동시에 떠올라서일까? 내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제라도 두 사람의 죽음을……. 아니, 내게 지금까지 일어난 비극적인 일들을 모두 막을 수 있을까? 이 돌이?’
그러나 평범해 보이는 이 돌 하나에 내가 겪은 모든 아픔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기엔 난 너무 지쳐버렸다.
몸도 마음도, 지금의 내겐 아픈 기억을 되돌려 지우는 것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아픔을 막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아빠…….”
어쩌면 내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아빠가, 그리고 내가 시간여행자라는 사실도 모른 채 살던 그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 어린 나에게 있어 가장 큰 고민이라면 식사 전에 간식을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정도였다.
그러나 8살. 조선 세종대왕 시대를 다녀온 뒤로 나의 인생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아빠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눈에 고이기 시작한 눈물이 흘러내리기도 전에 서둘러 훔쳐냈다. 그리고는 다시 돌 위에 손을 올렸다.
‘아빠가 보고 싶다. 그리고 사소한 걱정거리에 고민하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아주 많이.”
이제는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기에는 너무나도 늦어버린 그때 그 시절이.
난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어깨를 무겁게 만든 힘든 일들을 단번에 털어내기 위해서였다. 사람은 힘들면 힘들수록 고민이 적거나 없었던 과거를 떠올리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힘든 과거에 오래도록 안주하는 건 옳지 않다. 다가올 미래의 중요성을 잊게 될 테니까.
다짐하듯 각오하며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재차 눈을 깜빡여야만 했다. 그곳은 흠천각이 아니었다.
방금 전 내 손이 닿아있던 각석도 사라지고 난 뒤였다. 난 놀라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있는 곳은 밖이 아니었다. 방이었다.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꾸며진 방 안에는 인형과 동화책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왠지 이런 풍경은 내게 익숙했다.
‘여긴…….’
서울 종로구 북촌. 어린 시절 살았던 한옥집의 내 방이었다.
이 집에서의 지냈던 시절의 마지막 기억은 내가 첫 시간여행을 한 뒤로 끊겨버렸다. 그리고 5년 뒤 다시 돌아왔을 때, 이 집은 없었다.
나를 찾는다고 생업을 포기한 아빠로 인해 이 집은 경매로 넘어갔던 것이다. 그 뒤로 이 집은 내 추억 속에만 남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바로 그 집, 그리고 8살 때까지 지냈던 내 방 안에 있는 것이다.
“경민아! 책 다 읽었으면 이제 밥 먹어야지?”
“네, 아빠.”
문밖에서 들려온 아빠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잠시, 어린 나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오자 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책상 아래 그 틈에 몸을 웅크린 채 숨듯이 들어가 앉은 어린 내가 책을 읽고 있었다.
‘설마…….’
난 어린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을 보았다.
[ 어린이 위인전기, 세종대왕 ]
책에 푹 빠져있는 지, 얼굴에 함박미소를 짓고 있는 나는 분명 8살의 나였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어린 나와 마주하고도, 그리고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서도 말이다. 더욱이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헤헤. 응?”
어린 내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며 책에서 눈을 뗐다. 나는 그 이유를 금방 알아차렸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은 지금 방에 서 있는 내게도 전해져왔다. 그리고 난 그 바람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
“아……. 안 돼…….”
무엇 때문이었을까? 난 어린 경민이가 곧 사라질 것이라는 걸 알고 막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린 시절 겪었던 가장 끔찍했던 시간. 그 5년의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과 맞닥뜨린 것이다.
아주 오래전, 다시 현대로 돌아온 내가 그 무엇보다도 막고 싶다고 간절히 바랐던 순간이 지금 내 눈 앞에서 펼쳐진 것이다.
“안 돼!”
내 입에서 나온 비명소리가 작은 방안을 울려 집 밖까지 퍼져나갔다. 동시에 바람에 휩싸인 어린 내가 나를 발견하고는 놀란 눈을 떴다.
동시에 닫혀있던 방문이 활짝 열리며, 밖에 있던 아빠가 뛰어 들어왔다. 앞치마를 입고 있는 아빠는 한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
아빠는 그 자리에서 제일 먼저 나를 보았다.
조선시대 후궁의 복장을 한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잠시 짓더니, 방 안을 가득 채운 바람을 느꼈는지 서둘러 책상 밑에 있는 어린 나를 돌아보며 들고 있던 국자를 떨어뜨렸다.
“경민아!”
아빠는 즉시 어린 나를 두 팔로 꼭 끌어안으며 책상 아래에서 끌어냈다. 동시에 바람은 언제 일었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아빠아…….”
“너 대체! 아니다. 아니다. 다행이야…….”
아빠는 어린 나를 꼭 끌어안은 채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러더니 뒤늦게 방 안에 있던 나를 떠올렸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누구시죠? 어떻게 이 방에 들어오셨죠?”
“전…….”
아빠와 어린 나.
나는 그들 부녀를 보면서 무슨 말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당혹스러운 것도 잠시, 나를 보던 아빠의 표정이 다시 놀람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곧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내 몸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의 뒤틀림으로 잠시 만났던 아빠를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자리였다.
나는 아빠를 앞에 두고 하고 싶은 말을 채 꺼내보지도 못한 채, 사라져 가는 나 자신을 보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아빠아. 저 언니가…….”
아무것도 못한 채, 다시 아빠와의 이별을 해야 하는 순간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입을 열었다.
“아빠…….”
“……!”
“아빠……!”
그리고 나는 사라졌다.
“원빈마마! 원빈마마!”
“마마! 어디에 계시옵니까? 마마!”
“원빈마마!”
좁은 흠천각이 한밤중 횃불을 든 내관과 등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나인들로 시끄러웠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아픈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쉽사리 일어날 수가 없었다.
“원빈마마!”
바로 내 앞에서 보향이 나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난 그런 보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다. 여기…….”
하지만 보향은 바로 앞에 주저앉은 나를 보지 못한다.
“네 이년! 원빈마마를 제대로 뫼시지 않고, 자리를 비워 이 사태를 만들었으니 이제 어찌할 것이냐?”
“그것이 아니옵니다. 그것이 아니오라……!”
“어찌되었든 네 소임을 다 하지 못한 사실을 이젠 전하께서도 아셨으니 나중에 경을 칠 줄 알아라.”
“소인은 원빈마마의 명으로 등을 가지러 간 것뿐이온데…….”
최고 상궁까지 한 밤중에 흠천각에 나타나 보향을 꾸짖는 것 보니, 무언가 문제가 크게 터져도 터진 것 같다. 아마도 내가 시간의 문을 넘어 사라진 뒤로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었다.
“보향아.”
난 다시 보향을 불렀다. 그러나 보향은 나를 보지 못한 채 울먹이며 다시 나를 부른다.
“원빈마마. 어디에 계시옵니까? 원빈마마!”
그것이 이상하다고 깨달은 것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나를 찾으며 내 주변을 뛰어다니는 내관과 나인 들 중, 누구 하나 나를 제대로 바라보는 이가 없었다. 난 분명 그들 한가운데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에 놀란 내가 나의 몸을 살펴보았을 때였다. 나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이들은 달빛에 또 들고 있는 횃불과 등 때문에 땅에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림자가 없었다. 마치 죽은 혼백처럼 그림자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게 된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나는 흠천각 마당에 놓인 각석을 쳐다보았다.
내가 조금 전 시간의 문을 넘어 과거의 나를 만난 것이 맞는다면,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난 과거에서 8살의 나를 만났다. 그리고 내 인생의 첫 번째 시간여행을 막았다. 세종대왕의 시대로 가려던 나를 막았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단지 그것뿐이었다. 과거로 가는 나를 막았으니, 세종 조에서 보냈던 5년간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뒤에는? 그 5년의 시간이 사라진 나의 미래는?
‘내가 모르는 미래. 내가 알 수 없는 미래가 만들어졌다.’
내가 조선으로 오게 된 이유는 아빠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아빠가 임진년에 회령에서 죽게 된 것은 어린 인목대비를 구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흘러가는 역사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아는 아빠의 가장 큰 실수가 죽음을 만든 순간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아빠는 돌아가시기 직전 짤막하게 말씀해 주셨다.
[ ‘그저…….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구 년 전에 네가 사라졌을 때가 떠올랐다.’ ]
아빠는 어린 대비를 보고 어린 시절 날 잃어버린 때를 생각하시고 역사에 개입하셨다. 그리고 그 대가로 죽음을 맞이하셨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아니라도 아빠는 몇 년 전부터 광해군 시대를 연구하셨다. 그것은 조선에 있던 나를 <시간의 뒤틀림>으로 만났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나의 과거가 사라졌다. 그 5년여의 시간이 어떠한 나의 미래를 만들었는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지금의 나 자신이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 ‘하늘나라라니. 무슨 말을 하는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구나.’ ]
그리고 혼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과거의 나.
점점 몰려오는 불안감에 무서움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내 몸이 사라질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간의 뒤틀림>으로 만났던 아빠의 모습이 사라지려던 그 순간과 똑같았다.
난 겁이 났다. 내가 곧 사라질 것이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만약 여기서 내가 사라진다면 난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난 그 답을 절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의 뒤틀림>으로 나타났던 아빠는 사라지는 순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원래의 자리는 이제 이곳 조선이었다. 혼의 곁이었다. 그런 내가 사라지려고 한다.
‘혼아……!’
겁에 질린 나는 혼이 있을 편전 쪽을 응시하다가 달리다시피 편전을 향했다.
편전으로 가는 동안 수많은 내관들과 나인들을 스쳐지나갔다. 그들은 사라진 나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나를 보는 이들이 없었다.
나는 무서웠다. 그들은 나를 보지 못하더라도 혼이 나를 볼 수 있다면, 그가 나를 발견해 준다면 나는 이 무서움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김 상궁. 전하께서는 어디에 계시오?”
“조금 전 까지는 편전에 계시다 교화당으로 가셨사옵니다.”
“원빈마마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 것이오?”
“예. 헌데 상선영감. 혹 사악한 무리들이 궐 담을 넘어 원빈마마를 납치라도 한 것이 아닐런지요?”
편전에 도착한 나는 그 앞에서 최 내관과 개시를 보았다. 그들 뒤로 보이는 편전의 불은 꺼져 있었다. 혼은 그곳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이미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혼이 편전에 계속 있을 리는 없을 터였다. 나는 다시 교화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내 몸은 점점 느려졌다. 보통 흠천각에서 편전까지의 길은 가마를 사용하는 거리였다.
최근 몸의 기력이 다해 거동조차 힘든 나는 편전까지 오는 동안 모든 힘을 다 써 버린 듯한 걸음 한걸음 내딛는 것이 어려웠다.
교화당은 후원에 있었다. 편전을 벗어나 후원으로 들어선지 얼마 안 되어 나는 캄캄한 후원의 언덕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여전히 내 몸은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깜빡임은 처음 내가 발견했을 때보다도 더 희미하고 위태롭게 깜빡이고 있었다.
난 곧 내가 완전히 사라질 것임을 직감하고 좌절감을 느꼈다.
‘싫어…….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 혼의 곁을 떠날 수 없단 말이야.’
혼을 만나지도 못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사라진다면 내가 어떻게 될지도 몰랐다.
이대로 죽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이곳에서 사라지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난 진짜 혼백이 되어 구천을 떠돌게 될 지도 몰랐다.
‘무서워. 무서워 혼아…….’
바닥에 엎드린 채 어둠에 휩싸인 후원에서 떨던 내 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멈추어라!”
그 익숙한 목소리는 다름 아닌 혼의 목소리였다.
난 엎드렸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너무 느리지 않느냐? 걸어가겠다!”
“하오나 전하!”
“멈추라 하지 않느냐?”
혼이 재차 명을 내리자 그가 타고 있던 옥교가 땅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옥교에서 내린 혼이 직접 걸어서 후원을 걷기 시작했다.
당황한 가마꾼들과 내관들이 그런 혼의 뒤를 따르려 하자, 혼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들에게 호통 쳤다.
“뭣들 하느냐? 가서 원빈을 찾아라!”
“하오나 소인들은 전하를 모시는 이들이옵니다.”
“과인의 명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혼의 격앙된 목소리에 가마꾼들과 내관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흩어졌다.
혼은 이제 혼자였다. 그는 그들이 나를 찾으러 가는 것을 보며, 내가 엎드려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우리는 짧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혼은 곧장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나를 발견할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 이미 그는 나를 보고 다가오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런 나의 기대는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혼은 엎드려 있는 나를 그대로 지나쳐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나는 그의 눈에도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혼아…….”
나는 울먹이며 나를 지나쳐 지나가는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는 분명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였음에도 전혀 듣지 못한 듯 앞으로만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혼아!”
난 더 큰소리로 목청껏 그를 불렀다. 그러나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전히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는 좌절감에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나의 울음소리도 그는 듣지 못했다. 난 바닥에 엎드린 채 소리 내어 울었다.
“경민아.”
갑자기 탄식하듯 혼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 난 울음소리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만 걸어가던 혼이 걸음을 멈춘 것이다. 그는 내가 그의 뒤에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앞만 보며 나를 찾고 있었다.
“어디 있는 것이냐? 어디로 간 것이냐? 대체…….”
탄식하며 나를 애타게 찾던 혼이 후원 밖이 아닌 교화당 쪽으로 다시 갈 결심을 했는지, 내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분명 바닥에 엎드려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 분명했다.
“경민아!”
그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을 때, 난 그가 나를 분명히 보았음을 확신했다.
“혼아!”
혼은 재빨리 내게로 다가와 나를 부축해 안았다. 긴장으로 두근대는 그의 심장소리가 내 몸에 전달되어오자, 거짓말처럼 나의 울음은 멈췄다.
“어찌 된 것이냐?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느냐?”
“난…….”
그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으니, 모든 것이 잘 풀렸다고 생각하며 숨을 돌리려는 그때였다.
그의 품 안에서 내 몸이 다시 깜빡이기 시작한 것이다. 혼도 이를 본 것인지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안 돼……!”
“이것은?”
“안 돼. 안 돼…….”
나는 어찌할 줄 몰랐다. 그저 내 마음대로 제어되지 않는 몸을 보며 눈물만 흘렸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고 느낀 순간이었다. 난 그의 품 안에서 한 손으로 그의 얼굴을 쓸었다.
“미안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혼아……. 나 잊으면 안 돼. 나 잊으면 안 된다고…….”
네 기억 속에 미래에서 만난 나와의 첫 만남을 네가 잊었던 것처럼.
“무슨 말이냐? 아니, 경민아. 이것이 대체 어찌 된 일이냐?”
난 차마 말을 잊지 못한 채 고개만 저었다.
“미안해……. 끝까지 너와 함께 하려고 했는데, 이를 이루지 못해서. 이를 지키지 못해서…….”
그는 내가 그의 앞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일까? 적어도 내 말을 들은 그는 내가 그의 곁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를 물었다!”
더 이상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난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마지막 힘을 다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혼아. 사랑해…….”
이 말을 끝으로 난 처음 그의 눈앞에서 모습을 감췄던 회령에서처럼, 그의 품 안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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