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천상열차분야지도 (1)
흰색
그날 경운궁에서 일어난 화재로 불을 끄던 두 명의 내관이 죽었다. 또한 신 숙원은 연기로 인해 두 눈을 크게 다쳤다.
그리고 화재의 주범으로 찍힌 문 상궁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문 상궁의 행방을 묻는 내관들에게 대비는 이렇게 부르짖었다고 한다.
‘문 상궁을 내어 놓으라? 내가 했다. 내가 원빈을 죽이려 했다. 그러니 나를 끌고 가거라! 나를 주상의 앞으로 끌고 가 원빈을 죽이려 한 범인이 나라고 전하란 말이다!’
하루아침에 부친 김제남과 세 오라버니를 잃고 집안이 풍비박산난 대비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매서운 말들이 쏟아졌다. 더 이상 문 상궁의 행방을 대비에게 묻는 것은 불가능했다.
불이 난 이후의 치안을 이유로 경운궁을 지키는 무예별감의 수가 더 늘었다.
아무런 사정을 모르는 백성들의 눈에는 이런 경운궁의 변화가 어린 이복동생 영창대군의 위협을 느낀 왕이 대비의 가문을 멸문지화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대비를 창살 없는 감옥에 가둬놓은 것으로 비춰졌다.
“모두 끝났으니 쉬시지요.”
의녀의 말에 누워 있던 나는 오래도록 감았던 눈을 떴다.
의녀들이 자리를 정리하며 모두 나가자 난 그때까지도 남아 있던 보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보향은 울음을 참기 위해 인상을 잔뜩 쓴 채로 끅끅 소리만 내고 있었다.
난 그런 보향을 향해 입을 열려고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한 손을 들어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보향은 재빨리 내 옆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 옆에 앉자마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보향을 보며 난 희미하게 웃었다.
“왜 우는 것이냐?”
내가 힘없는 목소리로 겨우 소리 내어 묻자, 보향이 이젠 소리 내어 운다.
“원빈마마……. 흐흑.”
“그리 쓸데없이 울면 철없단 소리를 들을라. 능양군도 네가 이리 눈물도 많다는 걸 아느냐?”
보향이 울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내가 다시 한 번 그런 보향을 보며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으려던 순간이었다.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주상전하 납시오.”
곧바로 보향이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그런 보향을 따라 일어서려고 했지만, 도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난 일어서는 것을 포기한 채, 대신 무거운 표정으로 들어선 혼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나름 애교 있게 용서를 구한다고 말을 하는데, 몸에 힘이 없으니 목소리도 애교 있게 들리지 않는 것 같다. 혼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다.
보향이 나가고 둘만 남게 되자 혼이 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나는 그에게 한 손을 내밀었고, 그는 주저 없이 내 손을 잡았다.
잡은 그의 손이 데일 듯이 뜨거웠다. 그의 손이 이렇게 뜨거웠었나? 아니면 내 손이 차가웠었나?
“경민아.”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안쓰러움이 묻어난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의녀가 말하기를 둘 다 여자아이였대. 그것도 쌍둥이었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안 된다면서 몰래 귀띔해줬는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혼이 두 팔로 누워 있는 나를 끌어당겨 안았다.
“혼아?”
그의 행동에 당황한 내가 그와 눈을 맞추려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날 끌어안은 채로 그는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채 말이 없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부르려 입을 열려다가 그만두었다. 그가 내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처음이었다. 그의 흐느낌을 본 것은 말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난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명이가 죽은 날, 그가 울었던 것을 보았다는 말을 최 내관에게서는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들은 것이지,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그의 흐느낌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랫동안 세자라는 지위에서 살아온 그에게 가장 약한 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어서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지금 울고 있다. 나를 안고서.
혹시라도 내가 아이를 잃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그가 느끼는 것일까? 나는 힘없이 한숨을 내쉬며 한 팔로 그의 넓은 등을 쓸어내렸다.
“너무 슬퍼하지 마. 그리고 다 내 잘못인걸. 아이를 잃은 탓을 누군가에게 해야 한다면 그건 바로 나잖아.”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내 마음도 너무나도 아프다. 굳이 내 마음 안을 들여다본다면 갈가리 찢어지다 못해서, 피가 철철 넘쳐흐를 것 같다. 그런데도 눈물은 나지 않는다.
너무 아파서일까? 아픈 통증에 눈물마저 잊게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
눈물이 씨가 마른 것 같다. 차라리 웃는 게 우는 것보다도 더 쉽게 느껴진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
한약 냄새가 교화당을 가득 메운다.
경운궁에서 아이를 잃고 난 뒤로 내 몸 상태는 크게 나빠졌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입맛을 잠시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혹여 혼에게 걱정이라도 될까 입맛을 되찾으려 애를 썼다. 그러면 그럴수록 음식을 먹는 족족 체하거나 게워냈다.
이러다보니 입맛을 되찾고 싶어도 쉽사리 되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나는 입맛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단순 입맛을 되찾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잃은 슬픔이 아직 나를 떠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막연히.
하지만 혼은 이런 나의 상태를 알고 있었고, 의관이 수시로 교화당을 드나들며 올리는 탕약 때문에, 교화당에 한약 냄새가 가득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나는 바깥일에 관심을 끊고 하루 종일 넋 놓고 보내는 일들이 많아졌다.
“숙원마마 드시옵니다.”
신 숙원이 왔다는 말에 나는 문 쪽을 쳐다보았고, 곁에 있던 보향이 재빠르게 일어나 가서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나인의 손을 붙잡은 채 신 숙원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나는 그녀의 두 눈을 가린 흰 천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미안함과 안쓰러움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신 숙원은 모를 텐데, 문이 열리면서부터 그녀는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송구하옵니다. 원빈마마.”
그녀는 부축을 받으며 걸어 들어오는 자신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숙원. 눈은 어떻소?”
그녀의 눈이 낫기 어렵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러자 숙원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름 아니라 그 때문에 원빈마마를 찾아 뵌 것이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전하께서 소인이 원하면 사가로 나가 눈이 나을 때까지 요양을 해도 된다는 명을 내리셨사옵니다. 중궁전에서도 이를 허하셨고요. 그래서 원빈마마께서만 허락해주신다면 그리 하고 싶어 이리 찾아왔사옵니다.”
신 숙원을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그녀가 이처럼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있었다.
왕이 후궁에게 출궁을 허락한다는 것은, 사실상 그녀의 눈이 나을 가망이 없음을 의관에게 전해 들었기에 가능한 것일 터였다.
신 숙원도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행복해하고 있다. 단지 궐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말이다.
“신 숙원이 원한다면야 내가 어찌 막겠소.”
“송구하옵니다. 원빈마마. 오래도록 출궁을 바란 소인의 마음이야 출궁하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사오나, 한편으로는 더 이상 원빈마마를 더는 뫼시지 못하고 출궁하게 되어 마음이 무겁사옵니다.”
“다 아오. 다 알고 있소.”
목소리만 들을 수 있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궁궐을 떠날 수 있도록, 나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문득 오래전 궁궐을 떠나 정원군의 사가로 들어간 인빈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신 숙원의 소원은 인빈을 따르는 것이었다.
내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은 양화당의 나인 생활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때 인빈은 무섭고도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혼의 즉위 이후 그녀는 마치 죽은 듯이 정원군 사가에서 지내고 있었다.
“인빈께서도 숙원의 출궁 사실을 아시오?”
“예. 하루속히 만나길 고대한다고 전해 오셨사옵니다.”
“인빈이…….”
믿기 어려운 말이지만 유일한 질녀인 숙원에게라면 그런 말을 했을 것도 싶어 나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숙원이 이런 내 웃음소리를 듣더니 입을 열었다.
“소인 역시 오래 인빈마마의 곁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듣는 귀가 있어 인빈마마와 얽힌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사옵니다. 지난날 인빈마마께서는 경운궁에 계실 적에 옳은 일만 행하신 분은 아니셨지요. 그러나 처음부터 그리하시던 분도 아니셨을 것이옵니다. 궐이, 궐의 여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분을 그리 만들었겠지요.”
‘궐의 여인. 이 궁궐의 여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숙원의 말을 들으며 인빈을 시작으로 내가 만났던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많은 궁궐의 여인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 여인들 가운데에는 미영이도 있었고 운지도 있었다. 개시도, 홍 상궁도. 문 상궁과 인빈. 현재 경운궁 대비마마인 김 씨의 중전 시절의 모습까지도 말이다.
그러고 보면 궁궐은 참 이상한 곳이었다. 궁궐의 여인들은 누군가의 수족으로 삶을 마치거나, 같은 처지의 여인들을 공격하며 살아간다.
그래야만 살아남도록 구조가 짜인 곳이 바로 궁궐이었다. 그래서 인빈도 그렇게 말했던가? 내가 살기 위해 남이 죽어야 하는 것이 바로 궁궐의 생리라고.
이제라도 그걸 이해한 내가 누구를 원망할 수 있을까? 그들은 단지 이 궐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이려 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하지 않은 일은, 어쩌면 역사에 반한다는 핑계로 궐의 생리를 어기고 남을 죽이려 하지 않은 것뿐이다.
말을 모두 마친 숙원은 나인의 도움을 받아 내게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교화당을 떠나기 전,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는 천이 물기로 젖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내게서 인사하고 돌아서는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도 들었다.
그 해의 마지막 달. 인빈이 병환으로 사망하고 신 숙원은 국왕의 특명으로 인빈의 삼년상을 치를 수 있었다.
인빈의 삼년상이 끝난 다음 날. 신 숙원은 사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꿈을 꾼다.
[ ‘올해 몇 살인데요?’ ]
[ ‘열여덟이에요.’ ]
[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요.’ ]
[ ‘정말요? 그럼 앞으로 언니라고 부를게요. 언니.’ ]
[ ‘그래 동생. 근데 이름이 뭐야?’ ]
[ ‘제 이름은 이미영이에요.’ ]
미영이를 처음 만났던 행궁의 담벼락.
당시 담벼락 너머로 미영과 함께 보았던 혼은 내게 아주 멀게만 느껴지던 사람이었다.
[ ‘기억나? 내게 물었었지? 이게 무슨 의미냐고 말이야.’ ]
[ ‘그랬다.’ ]
[ ‘내가 살았던 곳에 인사야. 만났을 때, 그리고 헤어졌을 때 하는 인사.’ ]
[ ‘만났을 때와 헤어졌을 때라……. 그럼 지금 하는 인사는 어떤 의미냐?’ ]
[ ‘다시 만났을 때, 만나서 반가울 때. 그때 하는 인사야.’ ]
[ ‘경민아…….’ ]
행궁의 내 처소 앞에서 스물여섯 살의 혼이 내 손을 잡으며 나를 부르던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원빈마마께서는?”
“아침에 미음을 드시고는 내내 침수중이십니다.”
문 밖에서 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억지로라도 눈을 뜨려고 했다. 이대로 최 내관이 돌아가서 내 소식을 전한다면 혼은 분명 걱정할 것이다.
그에게는 오늘 저녁까지 왕으로써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내 걱정거리로 그가 교화당으로 오는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알겠다. 잘 뫼시거라.”
그러나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 최 내관이 교화당을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동시에 멀게만 느껴지던 약 냄새가 바로 코끝으로 다가왔다.
최근 매일 먹는 식사의 양보다도 마시는 탕약의 양이 더 많아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몸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약을 마시면 마실수록 몸에는 열이 많아졌다. 한마디로 열로 인해 별로 움직이지 않아도 쉽게 지치고 피로해진 것이다. 그러다보니 잠만 늘었다.
하루에 절반 이상을 잠만 자고 그나마 식사 시간에는 식사보다는 약을 마시는 일이 다반사다보니 살은 점점 빠지기만 했다. 모두 냄새도 맡기 역겨울 정도로 쓴 탕약들이었다.
[ ‘안녕? 이름이 뭐야?’ ]
[ ‘…….’ ]
[ ‘우리 인사할래? 자.’ ]
늘어난 잠 속에서 꿈만 많이 꾸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어린 명이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내가 내민 손을 명이는 잡지 않았다. 대신 나의 등 뒤에서 단단하고 큰 두 팔이 나를 끌어안는 촉감에 난 감았던 눈을 뜨며 잠에서 깨어났다.
몽롱한 상태에서 여전히 내 주변을 감싸고 있던 독한 한약의 냄새가 내 정신을 깨웠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 교화당과 어울리지 않는 향기의 주인을 깨닫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혼?”
흘깃 고개를 돌린 나는 뒤에서 나를 껴안고 있는 혼을 발견했다. 그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난 그의 너머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앉아 있는 최 내관을 보았다. 그는 두 눈의 시선을 땅에 둔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최 내관이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혼이 내 곁에 누우려고 찾아왔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머리를 들어보니 닫힌 창문 너머로 한낮은 햇살이 비춰 들어오고 있었다.
대략 내 머릿속 계산이 맞는다면 지금 그는 경연에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난 최 내관을 의식하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전하.”
막 잠에서 깬 내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아서일까? 혼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그가 정말로 잠이라도 든 건가 싶어, 몸을 비틀어보았다.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내가 빠져나오려는 걸 알아채기라도 한 것인지, 그가 두 팔에 힘을 주어 나를 자신 쪽으로 더욱 끌어안았다.
난 그가 잠에 들지 않았다는 걸 확신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 경연장에 계실 시각이 아니옵니까?”
그러나 여전히 혼은 대답하지 않은 채 두 눈을 감고 있다. 그는 분명 자신의 정해진 일정을 포기한 채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을 택한 것이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두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그가 익선관만 벗은 채 곤룡포 차림이라는 것을 알고는 놀라 말했다.
“냄새 배겨요.”
“무슨 냄새 말이냐?”
드디어 그의 입이 열렸다.
난 이제 몸을 완전히 틀어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는 눈을 뜨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난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약 냄새요.”
그러자 혼이 자신의 얼굴을 내 목 언저리에 파묻는다. 그의 코에서 나오는 바람에 간지럼을 타며 난 몸을 떨었다. 그러자 그가 내 목에 짧게 입을 맞추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춘다.
“약 냄새라니? 과인에겐 꽃향기만 나는구나.”
무표정으로 담담하게 대답하던 그가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그런 그의 웃음을 보는 나도 짧게 웃고 말았다. 내 짧은 웃음이 그치자마자 그가 나를 자신의 품으로 더욱 끌어안는다.
“정말로 냄새 배겨요. 그만 놓아주세요.”
그러나 혼은 끌어안은 두 팔을 풀지 않은 채 내 귓가에 속삭인다.
“날도 더워지는데 어찌 몸이 이리 한겨울인 것이냐?”
이불을 이리 오랫동안 덮고 있었는데 몸이 차가울 리 없다. 분명 끌어안은 팔을 놓고 싶지 않아하는 그의 핑계인 것이다. 나는 그의 재치 있는 핑계에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나를 향해 말한다.
“더운 여름이 지나고 나면 메밀꽃이 피는 가을이 찾아오겠지. 그때가 되면 압구정으로 나들이를 가자꾸나.”
“돌아오는 길엔 이현궁을 들리고요?”
내가 그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그가 상이라도 주려는지 내 양 볼에 한 번씩 짧게 입을 맞추고는 다시 그의 품 안으로 끌어안는다.
하지만 그의 품 안에서 안도감만 느껴야 하는 나의 마음은 원인 모를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 불안감은 교화당을 감싼 약의 냄새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분명하다.
지난 날 어린 종이는 의인왕후가 있는 중궁전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그것은 중궁전을 뒤덮은 약냄새 때문이었다.
그것은 죽음의 냄새였다. 새 생명처럼 막 꽃을 피운 어린아이들은 잘 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느낀다. 자신들과는 거리가 먼 죽음의 냄새를 말이다.
난 그저 살이 많이 빠졌을 뿐이고 몸이 많이 피곤한 것뿐이다. 그런데도 그때 의인왕후가 있던 중궁전에서 풍기던 한약의 냄새가 왜 이리도 생생하게 맡아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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