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해의 연인-100화 (100/110)

제100화. 공빈의 옥패 (1)

흰색

인정전에서의 사건 이후 중전의 자발적인 근신이 길어지고 있었다.

중전의 이런 행동에 얽힌 사연을 모르는 나인들 사이에는 이런저런 소문만이 무성했다. 그중 한 소문은 혼이 중궁전 방향으로는 앉아서 수라도 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가장 난처한 입장에 놓인 것은 세자 이지였다. 세자는 하루에도 수차례씩 대전과 중궁전을 오갔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는 걸로 보아서 이런 세자의 노력에도 큰 수확은 없는 것 같았다.

이런 가운데 이런 궐내의 상황을 분명 알고 있을 조정대신들은 중전의 근신에 대해 조용했다. 그 이유는 한 가지 사건 때문이었다.

그것은 ‘저주의 옥사’ 때문이었다. 중전의 장기 근신이 묻힐 정도로 이 옥사로 인해 조정은 매우 시끄러웠다.

선조가 사망하기 직전, 당시 행궁이었던 경운궁에서는 선조의 병이 쉽사리 낫지 않는 이유가 죽은 의인왕후와 공빈의 귀신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소문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중전 김 씨의 부친 김제남이었다.

김제남은 무당을 불러 유릉(裕陵, 의인왕후 릉, 현 동구릉 내 목릉)에 무구(巫具)를 묻고 의인왕후를 저주하는 굿을 했다.

물론 이 이후에도 선조는 큰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공빈의 묘소에도 무당을 보내 저주하려 시도했다.

당시 세자였던 혼은 병환이 깊은 선조의 곁을 지키느라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도 알지 못했다.

대신 이 소문을 발 빠르게 접한 세자빈 유 씨가 급히 임해군을 공빈의 묘소로 보내 무당들이 벌이려는 해괴한 짓을 막았다고 한다.

얼마 후 선조가 죽고 혼이 즉위한 뒤, 계속해서 이어지는 옥사 속에서 이 일은 조용히 묻혀가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 김제남 역모 사건과 연루되어 끌려나온 박동량의 입을 통해서 다시금 거론되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결국 역모혐의에 의인왕후와 공빈의 무덤에 저주를 했다는 혐의까지 더해진 김제남은 빠져나갈 수 없는 사면초가에 몰리게 되었다.

“원빈마마. 보향이옵니다.”

“들어오너라.”

“예.”

무슨 소문이라도 하나 건진 것인지 보향이 주변을 살피며 교화당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보던 책을 덮고는 보향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냐?”

“마마. 전하께서 경운궁으로 가셨다 하옵니다.”

“경운궁? 그것이 참말이냐?”

“예. 방금 전 어가(御駕)가 경운궁으로 출발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사옵니다. 확실하옵니다.”

“전하께서…….”

나는 말끝을 흐리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인정전에서의 사건 이후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혼은 과거 중전이 명이에게 벌인 일에 분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고민에 잠겨 있는 얼굴이었다. 나는 아마도 그 이유가 인정전에서 중전이 고백한 다른 말 때문이라 여겼다.

중전은 스스로 인정전에서 ‘보은’의 의미를 담은 것을 알고 대비에게 공빈의 옥패를 보냈다고 말했다.

만약 대비가 중전이 보낸 옥패를 받고 ‘보은’의 의미에 따라 혼을 즉위시키는데 일조했다면, 혼은 자신이 정당하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여겼던 왕위에 정통성이 없다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그에게 큰 고민일 것이다.

‘선조가 사실 그에게 세자의 자리를 빼앗고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리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혼은 믿었다.

그의 아버지인 선조를 믿었다.

내가 제주로 유배를 간 후에도,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는 영창대군과 자신을 아버지가 비교한다는 것을 알고 힘들어했음에도, 종국에는 부친 선조의 선택이 자신이었다는 사실에 안도함을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 기뻤을지도 모른다.

선조가 그와 영창대군을 두고 ‘고민’을 했을지라도 결국 ‘자신’을 선택했다고 여겼을 테니까.

혼이 그런 상황에서 경운궁으로 갔다는 것은 분명 대비를 만나려는 것이다.

그리고 대비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느냐에 따라서 그는 진실을 또는 거짓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면초가에 빠진 부친 김제남을 살리기 위해 대비가 혼에게 할 말은 진실뿐이었다.

나는 불안한 눈길로 구름이 잔뜩 낀 창밖 하늘을 응시했다.

혼은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날 밤이 늦도록 대전에서 혼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는 그대로 대전에서 머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잠들지 않고 그를 기다린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늦은 시간에 교화당을 찾았다.

나는 그가 온다는 소식에 도착 전부터 어수당 옆 연못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어둠을 뚫고 환하게 길을 밝히는 등을 든 내관을 앞세운 채 혼이 나인들과 도착했다. 난 그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평소와 다르게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는 내게 어수당 옆 연못을 걷자고 청했다. 내가 그의 청에 응하자, 최 내관이 나인들에게 명해 연못 주변 곳곳에 등을 놓으라 지시했다.

등이 놓아지자 편안하게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연못 주변의 시아가 확 트였다.

난 혼과 함께 연못가를 걷기 시작했다. 최 내관은 우리가 편안히 대화할 수 있도록 주변을 물려주고는 멀찍이 서 있었다.

이날따라 혼은 말을 아끼고 있었다.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연못가를 걸었다. 나는 그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음에도 쉽사리 꺼내지 못함을 알고는 먼저 물음을 던졌다.

“오늘 경운궁에 갔었다며?”

그가 오늘 경운궁에 갔었다는 사실은 이제 조정대신들도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그 역시 자신이 경운궁에 갔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으리란 걸 알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굳이 숨기지 않고 물었다.

혼은 내 물음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로 짧게 답을 대신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난 그런 그를 향해 또 한 번 물었다.

“대비마마를 만난 거야?”

“그렇다. 오늘 낮에 경운궁에 가서 대비마마를 뵈었지.”

“이번 역모 때문에?”

사실 묻고 싶은 것은 대비가 그에게 한 말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딴 소리부터 나왔다. 만약 그가 말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묻고 싶지는 않았다.

또 대비가 오늘 혼을 만나 선조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얘기하지 않았다면, 굳이 내 입에서 먼저 그 사실을 거론할 이유도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결심한 듯 자신의 옷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그가 내민 것을 두 손으로 받았다. 그것은 바로 깨어진 공빈의 옥패였다.

마지막으로 그 옥패를 보았던 곳은 대비전이었다. 그 때 맡았던 초콜릿의 향기가 여전히 옥패에서 나고 있었다. 이처럼 옥패의 향까지 맡았음에도 나는 믿을 수가 없어 깨어진 옥을 맞춰보았다.

광해군 혼(光海君 琿).

깨어진 옥이 맞춰지자 옥에 새겨진 그의 이름 글자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 옥패는 그의 어머니 공빈의 옥패가 틀림없었다. 난 늘 내가 소중히 지니고 다니던 또 다른 옥패를 꺼내들었다.

원빈 김씨 (元嬪 金氏).

두 옥패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만난 것이 반가운지 더욱 진한 달콤한 향을 풍기기 시작했다.

그 향 때문이었을까? 내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고, 그런 내 미소를 본 그의 굳은 표정도 조금은 풀린 듯 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무언가 떠올랐는지 그가 내 손에 있는 공빈의 깨어진 옥패를 다시 가져갔다.

아무런 예고 없이 옥패를 빼앗긴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가 주저 없이 연못으로 깨어진 옥패를 던졌다.

퐁. 퐁.

깨진 옥패는 순식간에 칠흑같이 어두운 연못의 깊숙한 곳으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이었다. 나는 옥패가 사라진 연못 속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혼이 그런 나를 보며 대답했다.

“경운궁에서 날 만난 대비께서는 연흥부원군을 살려달라고 청하셨다. 그러더니 내가 물을 새도 없이, 스스로 이 옥패를 꺼내어 내게 보이시더구나. 그리고 내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아느냐?”

난 알고 있었지만 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난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가 말을 이었다.

“주상이 원하는 대로 보위를 얻을 수 있도록 힘껏 도왔으니, 이제는 연흥부원군을 살리는 데 힘껏 도와 달라 하셨다.”

‘아……!’

결국 혼이 알아버린 것이다.

난 입만 벌린 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바마마께서 승하하시기 닷새 전 대비와 연흥부원군을 대전으로 부르셨다는구나. 그 자리에서 보름 뒤 날 폐세자에 처하고, 영창에게 세자의 자리를 주시겠다 약조하셨다 한다. 혹여 영창이 보위를 물려받기 전에 승하하실 경우, 영창이 성년이 될 때까지 대비께서 수렴청정하시라는 말씀도 하셨다 한다.”

미세하지만 혼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그런 자신의 목소리를 가다듬으려는지 옥패를 떨어뜨린 연못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중전은 그 사실을 알고 아바마마께서 승하하시기 닷새 전인 그날, 내게서 어머님의 옥패를 가져간 것이겠지. 대비께 내가 보냈다 하며 보내기 위해서 말이다.”

“혼아…….”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구나. 대비께서 하신 말씀대로라면 지금 연흥부원군의 역모죄는 역모죄가 아닌 것이다. 그는 단지 아바마마의 유지를 지키고 따르려하는 충신이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그에게 죄를 묻는 내가 역적이 되는 것이겠지……!”

그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탄식한다. 연못 곳곳에 놓인 등의 빛 때문일까? 그런 그의 얼굴이 내 눈엔 점점 창백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무서워졌다. 지금 그의 머릿속의 생각도, 그가 받은 충격도 상처도 모든 것이 무섭고 두려워졌다. 그가 상처를 받았다면 그 크기가 내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혼아. 넌 폐세자가 되지 않았어. 그건 다시 말해서 네가 보위에 오르는 건 하늘의 뜻이었다는 거야.”

급하게 꺼낸 말에 스스로가 한심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금 내가 한 말은 바로 지난 날 인빈과 오늘 날 중전이 자신들이 하는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했던 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아서였다.

하지만 이 말들이 지금 큰 상처를 받았을 그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난 몇 번이고 다시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의 이런 말은 그의 상처에 닿지도 못한 것이 분명했다.

혼이 버럭 소리쳤다.

“허나 아바마마의 뜻은 아니었다!”

나는 그의 외침에 놀라 움찔했다.

하지만 난 이 외침에 그가 자신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그는 지금까지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부친인 선조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선조의 애정이 다른 아들들 중에서도 자신에게 가장 많이 할애되었다고 그는 굳건히 믿어왔던 것이다. 또한 자신이 대통을 이어받는 순간, 그것이 확증되었다고 믿고 자랑스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것이었다.

난 그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은 네가 아니라 중전마마께서 한 일이라고 대비마마께 말했어?”

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내가 짐작한 대로였다. 그는 중전이 자신의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자신의 책임으로 끌어안기로 결심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그를 더욱 고통스럽고 힘들게 만들 뿐이겠지만.

“중전이 한 행동은 옳은 일은 아니었으나, 그 행동이 나와 세자. 그리고 자신의 가문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겠지.”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그럼 대비마마께 연흥부원군을 살려주겠다고 한 거야?”

내 물음에 혼이 다시 나를 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서 난 답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답을 아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의 침묵이 이미 답을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겁이 났다. 그 침묵의 뜻은 이미 알아냈기 때문에.

“연흥부원군을……. 살려줄 거야?”

연흥부원군이 죽고, 영창대군이 유배를 가서 죽게 되면 대비와 혼은 철천지원수가 된다. 그리고 몇 년 뒤 대비가 경운궁에 유폐되면 인조반정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을 혼에게 말한다 해서, 과거의 사람인 그는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설사 믿어준다고 하더라도 역사는 그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막지 못할 일이라면, 그도 막지 못할 것이다.

혼이 입을 열었다.

“연흥부원군을 사사하라는 명을 내릴 것이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앞에서 내가 알고 있는 역사가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반정과 혼의 폐위라는 일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일어나게 될 일들이 쓰나미처럼 나를 덮는 느낌이 찾아왔다.

난 다시 눈을 떠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연흥부원군이 죽어야 하지?”

난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혼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며 답한다.

“그가 아바마마의 유지를 들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의 결정은 그가 경운궁에서 대비를 만나고 나오는 순간 결심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연흥부원군은 오랫동안 조용히 지내왔어. 애초에 선대왕마마의 유지를 밝힐 생각이었다면, 선대왕마마께서 돌아가시던 그때 밝혔을 거야.”

“아니면 영창이 자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혼아!”

“경민아.”

그가 나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내겐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연흥부원군의 역모죄가 더 이상 역모죄가 아니게 된다면, 난 가진 모든 것을 잃어야 한다. 어쩌면 너까지도……. 그리고 난 절대로 너를 잃을 수 없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 눈물을 삼켰다.

그가 이제부터 하려는 행동은 비단 자신의 즉위에 얽힌 비밀을 숨기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지난날 그는 나와 함께 하기 위해 세자의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그러나 함께 하게 된 지금, 그는 나를 지키기 위해 왕의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또한 이것은 무고한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무고한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만 하는 그의 결심이 얼마나 큰 고통으로 그에게 되돌아올지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나를 더 슬프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되어버린 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에 처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울먹이며 묻는 내게 혼은 아무런 대답을 주지 못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일이 꼬여 버린 걸까.’

하지만 난 이미 알고 있다.

이것은 내가 아는 역사 그대로 옳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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