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외전 - 운지이야기 (4)
흰색
“대체 이 전쟁은 끝난 거야, 안 끝난 거야?”
추향이 자신의 주변을 날아다니는 파리들을 눈으로 쫓으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 소리에 넋을 놓고 창밖을 내다보던 운영은 추향을 돌아보았다. 추향은 빠르게 부채를 휘둘렀고, 운영은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떼었다.
사웅과 헤어지진 지 일 년여의 시간이 또 흘렀다.
명나라가 개입하면서 전쟁은 임시적 휴전 상태에 들어갔지만, 운영은 사웅을 만나지 못했다. 운영은 그가 아직 한성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는 여전히 경상우수영에서 부친 원균과 함께 있을 것이다.
사웅과 헤어진 뒤 운영은 매일 같이 그를 생각했다. 일 년 전 그와 재회한 날, 문득문득 그녀가 떠올랐다던 사웅의 말을 듣고 난 뒤였다. 운영은 이런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기생이 되었다. 기생의 신분으로 그를 만난다는 건, 사웅과 자신 둘 다에게 이롭지 못했다. 기생이 사내를 만난다는 것은 손님을 대할 때뿐이다. 그렇기에 운영은 자신의 이런 감정을 가지고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네 손님인 듯싶구나.”
창밖을 내다보며 추향이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운영도 그런 추향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서는 정문으로 막 들어오는 갓을 쓴 한 남자가 보였다. 이항복이었다.
낮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술상이 차려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술을 입에 대는 이가 없었다.
더욱이 기생으로서 손님을 맞아야 하는 운영 역시, 올려 세운 한쪽 무릎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갠 채, 손님을 대접할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오랜 침묵이 흐르자, 이항복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잘 지내었느냐.”
두 눈을 곱게 내리깔고 있던 운영이 고개를 들었다.
“달포 만의 안부도 안부라고 물으십니까?”
“날을 세었느냐?”
“때만 되면 찾아오시니, 어찌 날을 기억하지 못하겠습니까.”
손님 맞는 기생답지 않은 태도였다.
이항복은 쓴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술이라도 따르라면 따르겠느냐?”
“왜놈들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그놈들이 완전히 물러간 것은 아니라 들었습니다. 난 중에, 그것도 대낮부터 여흥이라니요?”
“기생이 할 말은 아닌 듯싶구나.”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운영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 운영을 이항복은 물끄러미 응시하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운영아.”
“애운입니다.”
딱딱하게 돌아오는 말투에 이항복은 이번에는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한다.
“그래, 애운아. 네 말대로 아직 난중이라 관비(官婢, 관아의 계집종) 신분으로 추향이의 밑에 있다는 걸 잘 안다. 허나, 난이 종식되면 기적에 정식으로 네 이름이 올라 평생 기생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곳에 있겠느냐?”
“오래전에 죽었어야 할 몸이 아닙니까. 기생 년은 관비처럼 잡일이라도 안하니, 죽지 않을 바에 차라리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 사는 것이 낫지요.”
“애운아!”
탄식 섞인 이항복의 외침을 듣던 운영은 자신의 한 손을 저고리 고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사내가 계집을 위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라지요. 어찌하올까요? 대감의 앞에서 역도의 여식이 옷고름이라도 풀까요?”
이항복이 그런 운영을 보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운영은 그런 그의 뒤에 대고 차분하게 말했다.
“이년의 옷고름이라도 직접 푸실 생각이 아니라면 다시는 이곳에 걸음하지 마십시오.”
일말의 따스함도 느낄 수 없는 운영의 말투에, 참다못한 이항복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매섭게 말했다.
“그 옷고름을 풀 이는 따로 있는 듯싶구나. 허나 어쩌랴? 반 불구가 되어 돌아왔다 하니, 그 옷고름을 풀 힘이라도 있을까!”
말을 마친 이항복이 문을 박차고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겨진 운영은 그의 마지막 말을 되새기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두 눈을 크게 뜨며 항복이 나간 문 쪽을 쳐다보았다.
***
동촌(東村).
예로부터 무인들이 많이 거주했다고 알려진 한성의 동쪽 지역이다.
생전 이곳을 밟아본 적이 없는 운영은 용기를 내어 동촌을 찾았다. 동촌에서도 원균의 사가라 하면 모르는 이가 없어서, 물어 찾아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난관은 따로 있었다. 바로 굳게 닫혀 있는 저택의 대문이었다.
한참을 굳게 닫힌 대문 앞에서 서성이던 운영은 돌아갈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까지 걸음을 하기까지도 많은 고민을 했던 그녀였다.
지금 그녀가 바라는 것은 원사웅의 생사였다. 이항복이 말한 이가 원사웅이 맞는다면, 그의 건강 상태를 알고 싶었다.
끼이이익.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열렸다.
운영은 재빨리 장옷을 정수리까지 뒤집어쓰고는 문 옆으로 물러섰다.
열린 문 사이로 나온 것은 가마였다. 두 명의 가마꾼들이 각각 한 명씩 앞뒤로 가마를 메고 있었다.
대문의 문지방을 넘기 위해 가마꾼들이 걸음을 잠시 늦췄을 때였다. 닫혀 있던 가마의 창문이 비스듬히 열리더니, 그 사이로 한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운영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서둘러 장옷 사이로 얼굴을 숨겼다. 그러나 그 여인은 운영의 얼굴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멈추어라.”
가마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고, 막 문지방을 넘은 가마가 땅 아래로 내려왔다.
가마 뒤를 따르던 여종이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 가마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중년의 한 부인이 가마 안에서 내렸다. 그녀는 운영을 향해 말을 걸어왔다.
“거기. 자네는 누군가? 이 댁에 볼일이라도 있는가?”
운영은 자신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고 장옷 사이로 얼굴을 내보이며 입을 열었다.
“소인은…….”
잠시 망설이던 운영이 결심한 듯 그 부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애운이라 합니다. 한성부 관기이온데, 오래전 이 댁 도령이신 나으리께 은혜를 입은 일이 있습니다. 헌데 얼마 전 나으리께서 크게 다치셨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이 되어 찾아왔습니다. 나으리께서는 무탈하신지요?”
그러자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운영인가 보군.”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오자 운영이 놀라며 되물었다.
“소인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지금 자네를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네.”
운영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운영을 알아본 이는 원사웅의 모친인 윤 씨였다.
그녀는 운영을 집 안으로 들이더니, 그녀를 뒷마당 쪽으로 이끌며 함께 걸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 금이야 옥이야 길렀더니, 종종 웃어른께 버릇없이 굴기도 하지. 헌데 이번에는 더 큰 사고를 치고 말았네.”
운영은 그 ‘사고’가 이항복이 말한 크게 다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여기고는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어찌 그리 안색이 나쁜가? 어디 아픈 것인가?”
“아닙니다. 마님, 나으리께서는 무탈하시옵니까?”
“직접 확인하게. 직접 보면 알 것이니.”
윤 씨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에도 운영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사웅이 지금 이 집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은 확신할 수 있지만, 혹시라도 크게 아파 앓아누운 모습을 보게 될까 봐 불안함으로 가슴이 요동쳤다.
“이곳이네.”
그녀가 뒷마당 끝에 세워진 외딴 건물을 가리키며 운영에게 말했다.
“이곳이 어디입니까?”
운영이 윤 씨에게 묻는 사이, 윤 씨가 조심스레 닫힌 건물의 문을 열었다. 운영은 열린 문 안으로 건물 안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은 사당이었다. 어지간한 사대부의 집에는 하나쯤 있다는 사당이었지만, 다른 의미로는 그 가문의 죽은 사람들의 위패를 모셔둔 곳이었다.
운영은 그곳에 사웅의 위패라도 놓였을까 싶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부터 쏟았다. 그러자 부인이 당황하며 운영에게 물었다.
“어찌 우는가?”
“돌아가신 것입니까? 나으리께서 돌아가신 것입니까?”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마님, 이곳은 사당이 아닙니까? 산 사람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으니, 나으리께서는……!”
“내가 죽길 바라였소?”
갑자기 등장한 사웅의 모습에 놀란 운영이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윤 씨 부인이 고개를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운영에게 말했다.
“내가 말한 큰 ‘사고’가 바로 이것이네. 한성으로 돌아온 뒤에 다 죽어간다고 소문을 내라 하니, 그 소문이 경상우수영에 계신 대감께도 전해졌네. 대감께서 이를 듣고 놀라 생사를 알아보라며 파발까지 띄우시지 않았는가? 그러니 큰 사고이지. 헌데 이 모든 것이 바로 자네 때문이었네.”
“어머님.”
사웅이 부끄러운 듯 얼굴이 붉어지자, 윤 씨 부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그만 자리를 비켜주마. 하인들 눈에 띄지 않게 하려 사당으로 데려왔더니……. 네가 죽은 줄 알고 이리 울다니, 이 아이가 널 어지간히 위하는 모양이구나.”
윤 씨 부인이 자리를 비켜주자, 사웅은 손을 뻗어 주저앉은 운영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어찌 우는 것이오?”
사웅은 죽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주 건강해 보였다.
그는 일 년 전 행궁 앞에서 운영과 헤어질 때보다도 키가 한 뼘은 더 자란 듯, 그녀를 더욱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운영은 쏟아지는 그의 시선에 얼굴을 붉히며 남은 눈물을 훔쳐냈다.
“운영.”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그쳐버린 눈물인데, 그가 자신을 부르자 운영은 또다시 왈칵 눈물을 쏟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쏟아지다니.
운영은 이토록 자신이 그의 목소리를 듣길 간절히 원했다는 사실에 코끝이 아려오고 숨을 제대로 쉬는 것이 어려웠다.
“그만 우시오. 난 죽지 않았소.”
“그럼 어찌 스스로가 죽어간다는 소문을 내셨답니까?”
“그래야 그대가 날 보러 올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오.”
“그게 무슨…….”
“지난번 그대가 말하지 않았소? 관기가 되었으니, 내 평판을 위해서라도 나를 만나지 않겠다 말이오.”
운영은 마지막으로 사웅을 만났을 때 자신이 한 말을 떠올렸다.
[ ‘전 이제 관기가 되었는걸요. 제가 다시 나으리를 만나는 건, 나으리의 평판을 떨어뜨릴 거예요.’ ]
그렇다면 이 모든 건, 자신의 걸음을 움직이기 위한 사웅의 계획이었단 말인가? 단지 자신을 보기 위해서 그가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일까?
운영은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을 받으며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부르시면 왔을 것입니다.”
“허나 그것은 그대가 원해서 오는 걸음이 아니었겠지.”
“찾아오시면 뵈었을 것입니다.”
“난 손님으로 그대를 만나러 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소.”
운영이 답답한 듯 사웅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거짓 소문을 내어 제 걸음을 꾀어내신 것입니까? 어째서요?”
사웅이 목멘 소리로 천천히 소리를 냈다.
“그대가 보고 싶어서였소. 단 한 번만이라도 더. 단지 그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가서 그대를 만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소. 허나 오늘 그대가 이곳으로 걸음을 하고 내가 죽었다는 소식에 눈물을 쏟는 것을 보고 알았소, 운영. 그대도 나를 그리워하였소?”
솔직한 사웅의 고백에 운영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뒤 놀란 운영의 두 눈은 엎어진 초승달처럼 둥그런 곡선을 그렸다.
“무척이나……. 무척이나 나으리를 그리워하였답니다. 매일 하루하루를 나으리께서 무탈하시기만을 바라였답니다. 살아만 계신다면, 첫 연을 맺었던 그날처럼 다시 뵐 수 있을 것이라 여기면서도, 나으리를 뵈러 가지 못하는 걸음을 달래고 달래느라 하루가 어찌 가는지를 모르고 살아왔답니다.”
“운영…….”
운영의 솔직한 고백을 듣던 사웅이 두 손을 뻗어 그녀의 두 손을 붙잡았다.
“나으리. 살아계셔서 고마워요. 진심으로요.”
운영은 생에 처음으로 누군가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에 큰 기쁨을 느꼈다.
자신의 가족, 부모를 떠나 다른 누군가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이처럼 큰 기쁨을 느낀 것은 처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느낀 순간 운영은 깨달았다. 자신에게 살 길을 열어주고 죽은 아버지의 마음을 말이다.
처음 사웅을 만났을 때, 그가 자신에게 한 말은 옳았다.
자신이 죽어 부모의 뒤를 따른다고 해서, 부모는 결코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건강하게 살아있기만을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을 사웅을 통해 느끼게 되면서, 운영은 부친 정여립의 마지막 순간 자신을 향한 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부디 살아만 다오…….’
그날 이후 운영은 동촌의 원균의 사저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윤 씨 부인이 내어준 처소에서 지냈다.
일주일 뒤 사웅은 다시 원균이 있는 경상우수영으로 돌아갔다.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어서 사웅은 자주 한성으로 돌아올 순 없었다.
열 달 뒤 운영은 첫 아들인 종현을 한성에서 낳았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597년 봄. 운영은 둘째 아들인 종민을 낳았다.
같은 시기 왜란을 종결시키기 위한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교섭이 결렬되고 일본군이 부산을 재침하면서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상륙하는 일본군을 거제도 칠천량에서 막던 원사웅의 부친 원균이 해전 도중 전사한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의 일이었다.
1599년 봄, 한성 동촌.
“부친의 전사가 자네에게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거늘, 삼년상도 끝난 마당에 어찌 재야에만 머무르려 하려는가? 전하께서 자네를 잊으시기 전에 조정으로 나가 입신양명함이 옳지 않겠는가?”
오랜 지기인 이이첨의 말에 사웅은 피식 웃음부터 터트렸다.
그런 사웅이 답답한지 이이첨이 목소리를 높였다.
“자네!”
“여전히 한성 동촌에 살거늘, 어찌 재야에서 지낸다 말하는가? 이곳이 재야면 한성 밖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어허, 참!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 난도 끝난 데다, 자네의 부친은 전하의 성은으로 선무공신에 녹훈되지 않았는가? 그런 공신의 유일한 자제인 자네가 은거하다니? 난을 수습하는 이 시기에 조정에서 큰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이첨의 말에 사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공신으로 녹훈되신 것은 아버님이시지, 추잡하게 살아 돌아온 내가 아닐세. 또한 전쟁이 끝난 세상에서 무관이 무슨 입신양명을 꿈꾸겠는가?”
“어허. 대기(大器, 사웅의 자) 자네!”
이이첨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신 앞에 놓인 술잔만 연거푸 들이켰다. 그도 사웅의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부친 원균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숨을 거두는 것을 본 뒤로, 사웅은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동촌에 처박혀 지냈다. 부친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아버니임.”
올해 세 살이 된 종민이 아장아장 걸어 나오며 누각에 앉아 있는 사웅을 불렀다. 종민을 발견한 사웅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사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버선발로 누각 아래로 내려가 어린 종민을 번쩍 들어 안았다.
“어미 곁에 있다 나오는 길이냐?”
“예.”
종민은 방실방실 웃으며 대답을 곧잘 했다. 그런 아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사웅이 종민을 안은 채로 누각 위로 올라왔다. 사웅은 종민을 이이첨에게 인사시켰다.
이이첨은 작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인사하는 어린 종민을 보며 싸늘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 역도의 여식이 낳은 아이인가?”
자신의 인사에 무뚝뚝하게 돌아오는 이이첨의 태도에 어린 종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 뒤에 있던 사웅은 종민을 하인을 불러 종민을 누각 아래로 내려 보내며 차갑게 대꾸했다.
“어린 아이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겐가?”
“틀린 말이 아니지 않는가? 손바닥으로 아무리 하늘을 가려본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그 사실이 숨겨지리라 여기는가?”
“자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네.”
“상관할 일이 아니라니? 한때는 모든 신분의 이들을 차별 없이 대하는 자네의 그런 면도 풍운아적인 기질이라 여기었지. 허나 역도의 여식을 첩으로 들인 것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도가 지나친 행동이었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역도의 여식을 살릴 생각이 있다면, 아이들과 함께 멀리 떠나보내게.”
사웅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입 다물게.”
“대기!”
“어찌하여 역도의 여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는 죽거나, 아니면 살아도 일평생을 죽은 듯이 숨어 살아야만 하는가? 역모를 벌인 것은 그녀가 아니었네. 또한 정여립은 모함을 받은 거야. 그가 역모 죄로 몰린 것은 단지 전하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라 생각하네. 그는…….”
이이첨이 기겁하며 주변을 살피며 소리쳤다.
“그만하게! 정여립은 역도로 살다, 역도로 죽었네. 이 사실은 변치 않아. 그러니 정여립의 여식을 이대로 계속 자네의 곁에 두었다가는 훗날 해가 되어 돌아올걸세!”
결국 참다못한 사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더 이상 그녀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듣지 않을 것이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려고 나를 찾아올 생각이라면, 다시는 찾아오지 말게.”
사웅이 자리를 떠나자 이이첨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어린 종민을 일찍 재운 운영은 해가 지기 전부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사웅의 눈치를 보았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웅이 생각에 깊게 잠긴 모습은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운영은 그의 이런 행동이 낮에 찾아온 지기 이이첨 때문일 것이라 여겼다.
“나으리.”
운영의 부름에 사웅이 시선을 들어 운영을 쳐다보았다.
“말해보시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일이라니?”
“그리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계시니 걱정이 되어 올리는 말씀입니다.”
“아무 일도 없소. 종민은?”
“벌써 잠들었습니다.”
종민이 잠들었다는 말에 사웅은 멋쩍은 듯 웃었다.
분명 그의 마지막 기억 속에 종민은 운영을 향해 작은 입을 놀리며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런 종민이 어느새 잠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으리.”
운영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사웅을 바라보았다.
사웅은 그런 그녀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려는 모양인지,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한다.
“나의 오랜 지기인 득여(得與, 이이첨의 자)는 그대가 정여립의 여식임을 안 뒤로 끊임없이 자네를 멀리 떠나보내라고 종용하고 있소.”
“오늘도 그분께서 저를 멀리 떠나보내는 것이 나으리께 이로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로군요.”
운영이 바로 알아채서일까, 사웅의 미소가 씁쓸하게 변했다. 그런 사웅을 보며 운영이 말을 이었다.
“나으리께서 원하신다면 전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사웅이 운영의 말을 끊었다.
“운영. 내 곰곰이 생각해 보았소.”
“무엇을 말입니까?”
“진위(振威)에 내 본가가 있는 것을 알 것이오. 빠른 시일 내에 진위의 본가로 낙향하려하오.”
“어찌 갑작스레 그리 결심하셨습니까?”
“아버님이 관직에 있으시면서 오랫동안 이곳 동촌에서 거주하였소. 허나 나는 더 이상 관직에 있지 않으니 한성에 머물 연유가 없지 않소. 그러니 본가로 낙향했으면 하오.”
“그분의 말씀 때문입니까?”
운영이 이이첨을 지적했다. 그러나 사웅은 고개를 저었다.
“단지 그뿐이었다면 굳이 진위로 낙향할 연유가 되진 않았을 거요.”
사웅은 무언가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운영은 그 점을 알아차렸지만 굳이 그것을 캐물으려 하지 않았다.
“그럼 그리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고맙소.”
사웅은 자신의 뜻을 따라주는 운영을 향해 고마움을 표했고, 그녀는 미소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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