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해의 연인-95화 (95/110)

제95화. 외전 - 운지이야기 (2)

흰색

2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탁!

운영의 어깨에 메어져 있던 끈이 풀리며, 그녀가 메고 있던 두 개의 물동이가 바닥으로 엎어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더니 바닥으로 내던졌다.

뼈에 가죽만 남은 운영의 몸이 힘없이 쓰러지자, 무자비한 발길질이 시작되었다. 발은 그녀의 머리와 얼굴을 사정없이 밟고 차기를 반복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녀에게 발길질을 하는 여인은 그녀와 같은 노비였다.

기축년에 온 가족을 잃고 노비가 된 운영은 한 반가의 사노비가 되었다.

사노비로 전략한 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도 역적 집안 출신의 노비라는 꼬리표가 운영을 따라다녔다.

그것은 ‘재산’으로 분류된 노비들 중에서도 가장 최하층이나 다름없는 신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역모와 관련 있는 노비는 재산을 모으거나 공을 세워 면천을 받을 수 있는 일반 노비들과 달랐다. 어떤 식으로든 절대로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이런 역적 집안과 관련된 노비에게 온정을 베푸는 주인은 언제든지 역모와 연관되었다는 혐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노비로 부리되, 그들이 죽든 살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방치 속에서 운영은 하루에 한 끼 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며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퉷. 재수 없는 계집.”

더 이상 쓰러져 미동도 안 하는 운영을 향해 침을 뱉은 여종이 사라지자, 운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드러나는 곳이든 드러나지 않는 곳이든 그녀의 모든 피부는 멍투성이였다. 운영은 새롭게 생긴 멍 자국을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이불 대신 짚을 엮은 거적들만 가득한 버려진 창고 같은 곳이 운영의 처소였다. 안으로 들어온 운영은 태연스러운 표정으로 문을 닫았다.

그러나 문을 닫고 나서도 그녀의 손은 문고리를 떠나지 않았다. 문고리를 붙잡은 채로 힘없이 흐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님……. 오라버니……. 흐으흑.”

그녀의 부친이 알려준 대로 하늘이 공정하다면, 운영은 곧 자신의 숨이 끊어져 가족들과 재회하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바라던 그 날이 어쩌면 찾아온 것인지도 모를 사건이 벌어졌다.

그녀의 나이 16세.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단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다.

그녀의 주인은 재산을 가진 채 도망가느라 바빴고, 노비들도 주인이 버리고 간 물건들을 챙겨 도망치느라 바빴다.

왜군이 물밀 듯이 밀고 올라온다는 소식만 매일 같이 들려올 뿐, 아직까지 왜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운영은 왜군이 쳐들어왔다는 사실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저 하늘이 그녀에게 죽을 기회를 주기 위해 마지막 자유를 허락한 것으로만 느껴진 것이다.

왜란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자유를 얻은 그녀는 곧장 인근 산으로 올랐다.

곧 왜군이 온다는 소식에 개 한 마리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이 비워진 마을을 쳐다보며, 운영은 어린 시절 자란 전주고을의 마을을 상상했다.

마지막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조금이라도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죽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내 운영은 마을이 잘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섰다.

‘아버님. 오라버니. 운영이가 갑니다. 이제라도 다시 뵐 수 있겠지요?’

두 눈을 감은 운영이 절벽 위로 몸을 내던졌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절벽 아래로 추락하지 않았다. 누군가 떨어지는 순간 그녀의 한 손을 붙잡은 것이다.

운영은 그 누군가에게 한 손을 붙잡힌 채로 절벽에 매달려 고개를 들었다. 갓을 쓴 한 젊은 사내가 필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은 채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놓아요!”

운영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운영의 말을 듣고서도 그저 그런 운영을 어떻게든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애를 쓸 뿐이었다.

다행이 상당히 마른 운영은 무겁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한 손을 붙잡은 채로 버틸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운영은 살 의지가 없었다. 그녀의 마지막 남은 힘은 그녀의 몸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놓아달라고요!”

그에게 강제적으로 손이 붙잡힌 운영이 또 한 번 소리쳤다. 그러자 그의 입이 열렸다.

“놓을 수 없소! 또한 절대 놓지 않을 것이오!”

그의 두 눈에는 반드시 그녀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그가 바로 훗날 운영의 정인이 되는 원균의 독자 원사웅이었다.

***

산속에 버려진 초가에서 갓 잡은 비둘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맡는 고기 냄새에 운영의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절로 났다.

타닥타닥 불이 타는 소리 외에는 적막감만이 흐르는 산속에서 운영의 뱃속 소리는 곧바로 원사웅의 귀에 전달되었다.

비둘기를 굽던 원사웅이 운영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고, 운영은 얼굴을 붉히며 인상을 썼다.

“고운 얼굴에 환갑노파의 주름이 지겠소. 자. 이거 받고 좀 웃으시오.”

그가 익은 비둘기 고기를 운영에게 내밀었다.

운영은 배고픔에 당장이라도 고기를 받아들고 싶었지만, 해맑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니 망설여졌다.

나잇대는 엇비슷해 보이나 갓을 썼으니 양반이었다. 게다가 입고 있는 푸른 도포는 관직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또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도 묘하게 운영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가 죽으려던 자신을 억지로 구해낸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먹지 않을 것이오? 그럼 버려야겠군.”

그가 비둘기 고기를 던지려는 시늉을 하자, 운영이 급히 손을 내저으며 고기를 받아들었다.

운영이 고기를 먹기 시작하자, 그제야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피워놓은 모닥불을 검집으로 헤집어 껐다. 놀란 운영이 몸을 뒤로 빼자, 그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왜군이 북상하고 있소. 산속에서 북상하는 왜군의 눈에 띄지 않으려면 밤새 연기를 피워둘 순 없소.”

때는 봄이지만 밤은 초겨울처럼 춥다.

운영은 벌써부터 추위가 느껴지는 것 같아 손으로 어깨를 쓸다가 그에게 말했다.

“마을이 비워져 있어요. 그곳에 가서 불을 피운다면…….”

“왜군은 마을과 마을로 진격하고 있소. 그런 부분에서 산이 가장 안전하지.”

“왜……. 모두 떠난 마을에 홀로 오신 거죠?”

그가 어둠 속에서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분조를 맡고 계신 세자저하의 명으로 각 지방의 향교에 의병을 일으키라는 명을 전하러 가는 길이었소.”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멀지 않은 곳에 고삐를 묶어둔 말에게로 다가가 무언가를 꺼내어 가져왔다.

그는 그것을 운영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담비의 가죽으로 만든 겉옷이었다.

“이 귀한 걸…….”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알다마다요. 종친 분들이나 가질 수 있다는 담비 아닌가요?”

“맞소.”

순간 운영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아니요. 난 종친이 아니오.”

“그럼 고관의 자제이신가요?”

고관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젊어서 한 추측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부정했다.

“고관은 아니지만, 대를 이어 무인 집안이기는 하오. 그 담비는 세자저하께서 내려주신 것이오.”

“세자저하께서요?”

“그렇소.”

“그런 걸 저 같은 사람이 함부로 덮어서야…….”

“저하께서도 추울 때 덮으라 주신 것이오. 나는 지금 춥지 않으니 그대에게 준 것이고.”

세자가 중한 임무를 맡고 떠나는 이에게 추울 때 덮으라고 귀한 담비를 건네주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운영도 아는데 그가 모를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추위를 타는 운영에게 온정을 베푸는 것일까? 적어도 이 사내는 호탕한 성품을 가진 것임에는 틀림없다고 여겼다.

그는 대신 얇은 모포를 덮고 드러누웠다. 그리고 여전히 꺼진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앉은 운지를 보며 말을 건넸다.

“내일 아침 이 마을을 떠날 것이오. 그대도 함께 데려갈 것이니, 그리 알고 일찍 쉬시오.”

그러더니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영은 잠들 수 없었다. 죽기 위해 나선 산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손에는 먹다 남은 비둘기 고기가 들려 있었다.

운영은 죽어야 하는 자신이 살아서 음식을 먹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싫었다.

무엇보다 죽음으로써 그리워하는 가족들과의 재회를 놓쳤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며 그녀는 다시 한 번 죽음을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면서.

날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운영은 회색빛으로 뒤덮여가는 산속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녀는 여전히 깊은 잠에 들어있는 듯 보이는 사웅의 몸 위로 자신이 걸치고 있던 담비를 덮어주었다.

담비에 묻어간 그녀의 온기 때문인지 잠든 그 사웅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도 상당히 노곤했던 탓인지 깨어나지는 않았다.

운영은 조용히 그곳을 벗어나와 어제 목숨을 끊으려 했던 절벽 위에 다시 섰다.

그런데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이 어제와는 달랐다. 연기로 가득 차 있었고, 연기 사이사이로 불꽃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또 어제는 전혀 보이지 않던 사람들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돌아온 건가?’

그렇다면 그녀의 주인도 돌아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였다. 마을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모두 한곳으로 모이더니, 그녀가 있는 절벽 위를 응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무언가, 셀 수도 없이 많은 무언가가 그들로부터 날아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운영의 뒤에서 강한 힘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함께 땅에 뒹굴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이이이잉!

운영의 허리를 감싸 안은 것은 다름 아닌 원사웅이었다!

그들이 바닥으로 넘어지자마자 수많은 화살들이 주변으로 꽂히기 시작했다. 사웅은 운영을 끌어안은 채로 화살 비를 피해 산속 아래로 계속해서 몸을 굴렸다.

한참 뒤, 화살 비가 그친 뒤에야 사웅은 굴러가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운영의 몸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무서운 얼굴로 호통 쳤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인지 알고 있소!”

또 다시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운영도 분노하며 그에게 소리쳤다.

“알아요! 왜군인가요? 왜군이겠죠! 왜 절 또 구했어요? 죽게 내버려두지!”

“그렇게 죽고 싶소?”

“예. 그래요!”

“그렇게 소원이라면 내가 죽여주겠소.”

사웅이 주저 없이 두 손으로 운영의 목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갑자기 숨이 턱하니 막히며 운영의 동공이 커졌다.

그녀의 두 눈 앞에 친절을 베풀던 목숨을 구해준 은인 따위는 없었다.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무섭고 차가운 사내의 두 눈만 있을 뿐이었다.

“커……. 커억…….”

운영은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잡은 그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정말로 죽이기로 작정한 듯 더욱 더 세게 그녀의 목을 죄었다.

점점 숨이 막혀오며 고통스러운 순간이 이어지자, 운영의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 의금부에 묶여 고문을 받던 순간이 떠올랐다.

운영은 생각했다. 자신은 그때 죽었어야 했다고. 그때 예조정랑은 자신을 정여립의 딸이 맞는다고 말했어야 했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운영의 마음은 편해졌다. 운영은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듯, 자신의 목을 조르던 그의 손을 떼어 내기 위해 붙잡았던 자신의 손을 놓고는 온몸의 힘을 풀었다.

그녀가 죽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자, 그는 목을 조르던 자신의 손을 거둬들였다.

“컥!”

뒤늦게 많은 숨이 그녀의 코와 입으로 빨려 들어가며 운영은 고통스런 기침을 내뱉었다. 사웅은 그런 그녀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운영은 거친 숨을 내쉬며 그의 등 뒤에 대고 물었다.

“왜 안 죽이는 거예요?”

그러자 사웅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곧 왜군이 이곳으로 올 것이오. 그러면 왜군이 그대의 바람을 들어주겠지. 허나 또 한 번 능욕을 당하고 죽느니, 차라리 지금 절벽에서 스스로 뛰어내리는 것이 나을 것이오.”

“또 한 번 능욕을 당하고 죽다니요?”

운영이 사웅의 말뜻을 몰라 되묻자, 사웅이 그런 그녀를 돌아보았다.

“지금껏 죽으려는 이유가 왜군에게 능욕을 당해 죽으려던 것이 아니었소?”

“뭐라고요?”

“아니오?”

“아니에요! 조금 전 화살을 쏜 이들이 왜군이었나요? 전 왜군을 오늘 처음 봤는걸요.”

“그럼 왜 죽으려 한 거요!”

사웅이 운영에게 화를 냈다. 운영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사웅에게 소리쳤다.

“나으리는 모르세요! 전 역모로 가족을 잃고 노비가 되었다고요. 죽어서 가족을 뒤따르려고 한 것이었는데!”

“하! 고작 그러한 이유로 죽으려 했단 말이오?”

어처구니가 없다는 사웅의 태도에 운영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고작 그런 이유라니요? 나으리는 가족을 잃어 보신 적이 없으니 그런 말을 하시겠죠. 전……!”

운영의 해명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사웅이 그녀의 앞으로 빠르게 다가오더니, 그녀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는 큰 눈을 부릅뜨더니 운지에게 겁을 주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내가 이곳으로 오면서 무엇을 보았는지 아시오? 능욕을 당해 자결한 여인들과, 절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절벽에 뛰어내리는 여인들을 보았소.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이 그 여인들이 숨을 끊는 것을 지켜보더군. 허나 내가 이 위험한 일에 자원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오? 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구하는 데 일조하기 위함이오. 먼저 조선을 구해야, 백성들도 살 수 있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소. 가는 곳마다 목숨을 끊는 백성들을 지켜보기 위함이 아니란 말이오!”

운영은 그제야 그는 단순한 오해로 자신을 구하게 된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과거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직 스무 살도 갓 넘지 않은 청년의 입을 통해서 듣는 말로, 죽은 아버지가 마치 되살아 온 듯한 착각마저 든 것이다.

정치가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던 그녀의 아버지.

어린 나이의 그녀는 그런 아버지의 뜻을 잘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낙향한 아버지가 한 일은 오로지 백성들을 위한 일들이었다.

천반산 동굴에서 목숨을 끊은 아버지, 그녀의 아버지가 평소 천반산에 올라 고심하고 고민했던 것은 모두 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안녕과 백성들의 안위였다.

운영의 눈이 눈물로 그렁그렁해지더니 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물을 본 사웅도 당황한 듯 잡았던 멱살을 놓더니, 매정한 태도로 고개를 돌렸다.

“죽으시오. 이제는 더 이상 그대가 죽는 것을 막지 않을 것이니. 허나, 이것 하나만큼은 명심하시오. 오늘 그대가 죽어 저승에서 그대의 가족들과 재회한다고 하더라도, 그들 중 누구 하나도 그대를 반기진 않을 것이오.”

돌아선 그가 말을 묶어둔 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운영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 천반산을 오르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의 말은 지금 운영의 마음을 쳤다. 그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죽는 순간에도 자신을 하인의 등에 업혀 도망을 보낸 아버지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순간에도 자신을 살리려 했다는 것은, 자신만큼은 어떻게든 살기를 바라서였을 것이다.

물론 아버지는 자신이 살아서 겪어야 했던 험난한 일들까지 모두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을 모두 잃고 살아남을 나에 대해서는 분명 한 번쯤 생각했을 것이다.

어린 소녀가 가족을 잃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는 것. 그런 아버지가 어렸던 내게 하지 못했던 마지막 말을, 왠지 이 사내라면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운영은 곧장 사웅을 향해서 뛰어갔다.

막 말에 오른 사웅이 자신을 향해 뛰어온 운영을 싸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게 할 말이 더 남아 있소?”

운영은 그런 사웅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굳은 의지가 담긴 대답을 주었다.

“같이 가요. 살래요.”

사웅의 얼굴에 잠시 당황하는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사웅은 곧 운영에게로 한 손을 내밀었다. 운영은 그가 내민 손을 잡고는 말 위로 올라탔다.

왜군이 점령한 마을을 빠져나올 때까지 쉬지 않고 말을 달리던 사웅은 어느 순간 안전하다고 판단되자 말의 속도를 줄였다. 운영은 그의 뒤에 앉아 물었다.

“처음 절 보았을 때부터 제가 노비라는 걸 아셨지요?”

사웅은 운영의 말을 듣고도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운영은 그 대답을 이미 알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절 대하시는 것이 깍듯하셨어요. 마치 반가의 규수를 대하듯요. 왜 그러셨죠?”

“오해는 마시오. 처음 절개를 지키려는 여인으로 알고 그리했으니. 노비가 절개를 지키려 죽으려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럼 그 생각은 틀리셨네요. 전 노비가 맞으니까요.”

“허나 그대가 말하길 역모로 인해 노비가 되었다 하지 않았소? 그 전에는 분명 어느 반가의 여식이었겠지.”

“맞아요. 그랬죠.”

“그럼 역모도 없었고, 왜란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대와 내가 만날 일은 일평생 없었겠군.”

“예?”

운영은 자신이 사웅의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는 되물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대답을 주지 않더니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사웅은 한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북쪽으로 가는 피난민이오. 저곳까지 데려다주겠소. 저들을 따라 북쪽으로 가다보면 왜군을 피할 수 있을 거요.”

“나으리는요?”

사웅이 운영을 돌아보며 처음 그녀에게 지었던 미소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자저하의 명을 아직 다 시행하지 못하였소. 그러니…….”

“남쪽으로 가시나요? 그곳엔 왜군이 북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위험하겠지. 허나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오.”

사웅은 그녀가 말 위에서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말 위에서 내려온 운영은 사웅과 마주섰다. 사웅은 자신과 마주선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의 아버지가 그대를 살리고 죽은 것은, 분명 그대가 살아남기를 바라서였을 것이오. 그러니 그 목숨을 소중히 여기며 지키고 사시오. 혼자 사는 것이 분명 쉽지는 않을 것이오. 허나, 살다보면 기쁜 날이 올 것이오. 물론 슬픈 날도 올 것이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목숨을 끊으려 한다면 그리 죽은 사람들로 조선천지가 무덤이 되었을 것이오.”

진지한 말에서 끝에 우스갯소리를 하는 그를 보며 운영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운영이 웃자 사웅이 말했다.

“계속 그렇게 웃으시오. 웃으니 훨씬 보기가 좋구려.”

하지만 언제까지도 웃을 수는 없었다.

“죽지 마시오. 살아서 다시 만납시다.”

사웅이 다시 말 위에 올라탔다.

그는 바로 말 머리를 돌리지 못했다. 지금 여기서 헤어지면 운영과 기약 없는 이별을 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이는 운영도 마찬가지였다.

함께한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그들의 인연은 왜란이라는 상황 속에서 독특하게 이뤄졌다. 운영도 그와의 헤어짐에 아쉬움을 느끼고는 말했다.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함이 어찌 되시나요?”

“원사웅이오. 그대는?”

운영이 잠시 망설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운영이에요. 정운영.”

유오디아 작가의 말

작가 블로그

.

광해의 연인 관련상품

eBook

광해의 연인

다음화 미리보기

종이책

광해의 연인 3 책

구매하기

별점

9.9

1,538 명의 회차별점입니다.

별점주기

좋아요 26

관심등록SNS 보내기

이전화

다음화

목록

댓글 176 새로고침

0 / 500미투데이 동시 등록하기페이스북 동시 등록하기트위터 동시 등록하기SNS 설정

최신순등록순

Runa (ysp1****) 2013-12-07 10:32 | 신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