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계축옥사 (5)
흰색
내겐 대비가 일으킨 스캔들 따위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지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건, 지난 밤 대비가 이곳에서 내게 들려준 중전이 벌인 추악한 짓뿐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중전의 행동들.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 힘겹게 중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무슨 짓을 벌일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를 보았는지 혼이 중전을 향해 말한다.
“그만 물러가시오.”
“전하!”
“물러가라 하지 않았소!”
혼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중전은 흥분한 숨을 가다듬으며 억지로 인사를 올리고는 교화당을 떠났다. 중전이 떠나자, 혼은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으며 말했다.
“쉬거라. 뱃속 아이를 위해서라도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혼은 알고 있다. 내 생각이 얼마나 많은 고민들을 만들어내는지.
그래서 그는 늘 아무 생각도 없이 자신의 곁에서 편히 쉬라고만 한다. 자신을 나무 삼아, 그곳을 타고 오르는 나팔꽃이 되라고 내게 말한다.
하지만 난 그 나무가 언제 쓰러질지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난 나무를 타고 올라 꽃을 피웠다.
“혼아.”
난 나가려던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일어서려던 혼이 다시 앉으며 나를 본다.
“할 말이 있느냐?”
“지난 밤, 대비마마가 교화당에 오셨어.”
그러자 혼은 웃으며 길게 숨을 내쉰다.
“알고 있다. 궐에서 대비를 보았다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진대, 어찌 내가 모르겠느냐.”
“대비마마가 무슨 말을 하셨을지……. 궁금하지 않아?”
“그거야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부친과 오라비들의 구명을 청하러 오셨겠지.”
“그럼 왜 바로 너에게 가지 않고 나에게 오셨는지는?”
“바로 날 보러 오셨다며는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으셨겠느냐?”
“그럼 왜 직접 너에게 서신을 쓰지 않고 비밀리에 창덕궁에 오셨다고 생각해?”
그제야 혼은 대비가 상궁 차림을 하고 창덕궁을 찾아온 데 다른 이유가 있음을 알아차린 것 같다. 잠시의 침묵이 흘렀고, 난 그 침묵에서 그가 답을 찾아내리라 확신했다.
조금 뒤 그가 중전이 떠난 자리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중전이군.”
그가 답을 찾자, 난 붙잡은 그의 손에 힘을 주었다. 그 힘을 느낀 그가 내 얼굴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난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나를 찾아오신 대비마마께서 하신 말씀은 부친의 구명 때문만이 아니었어. 한 가지, 한 가지 더 네가 알아야 할 일이 있어.”
“이번 역모와 관련 없는 일이냐?”
“역모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매우 중요한 일이야.”
중전이 교화당까지 찾아와 지난 밤 대비가 창덕궁에 온 사실을 들춰내고 혼에게 추궁할 것을 강요했다.
그것은 대비가 가진 공빈의 옥패에 담긴 일들을 혼이 알아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김제남의 무고를 밝혀달라는 내 청을 중전이 대놓고 거절한 것이다.
중전의 입장에서는 뒤늦게 공빈의 옥패의 존재를 혼이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다는 자만심이 있는 것 같다.
공빈의 옥패와 바꾼 왕위.
보은의 대가로 받은 왕위.
이 옥패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 혼은 패륜의 낙인을 피할 수 없다. 사실 모든 일은 중전이 벌인 짓이라고 해도, 조선시대엔 가정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가장의 책임이 된다.
결국 누가 벌인 일이든 간에 혼이 한 짓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중전은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래서 혼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그 사실을 밝히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 같다.
‘이 사실을 감추는 것이 혼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이대로라면 중전은 혼을 정해진 파멸의 길로 이끌 거야. 난 그것을 막아야 해.’
난 무거운 침을 삼켰다.
“어떤 일이냐? 말해 보거라.”
“혼아. 난 그 일을, 일을 벌인 당사자가 스스로 말하게 하고 싶어. 도와줄래?”
명이가 어렸을 때 크게 앓아 소리를 잃었던 일도. 중전이 공빈의 옥패에 담긴 대비의 마음을 이용해 혼에게 억지로 안겨준 왕위에 대한 일도. 모두 혼이 알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인정전(仁政殿).
왕이 어진 정치를 펼치라는 의미를 둔 이 전각은 창덕궁에서 가장 크고 높은 건물이다. 국가의 큰 행사 때 외에는 사용되지 않지만, 평상시에도 왕실의 위엄과 존엄을 상징하는 건물로서 존재해왔다.
인정전이라 쓰인 현판을 잠시 올려다보던 나는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섰다. 인정전 안의 바로 앞에는 높은 계단위에 자리한 왕의 어좌가 보였다. 어좌의 뒤로는 일월곤륜도 액자가 세워져 있었다.
임금이 천명을 받아 삼라만상을 통치하며, 하늘의 보살핌으로 자손이 만대까지 이어져 왕실과 나라가 무궁하게 되라는 의미를 담은 일월곤륜도. 난 인정전의 정 중앙에 멈춰서 한동안 일월곤륜도를 바라보았다.
인조반정의 그날.
한밤중 병사들을 이끌고 창덕궁으로 들어온 인조는 제일 먼저 이 인정전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 어좌 앞에 서서 검을 들고 병사들을 호령했다.
그는 광해군과 세자를 찾아내, 당장 자신의 앞으로 끌고 오라고 소리쳤다. 그날 밤의 일들이 마치 내 눈 앞에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펼쳐지자, 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원빈이었나?”
어처구니가 없다는 중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난 감았던 눈을 떴다.
“전하의 명을 사칭하여 본궁을 이곳까지 불러내다니. 하긴, 전하의 명을 전한다고 온 이가 최 내관도 아닌 한낱 나인인 것을 보고 자네일 거라 짐작은 하였네만.”
난 돌아서서 정중히 중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중전은 탁 트인 인정전 안에 나 홀로 서 있는 것을 보더니, 자신을 뒤따라 온 박 상궁과 나인들에게 말한다.
“자리를 물러주게. 본궁이 원빈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말이야.”
“하오나, 중전마마. 혹여 홀로 계시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오면…….”
“무슨 일이라니? 원빈이 있지 않는가? 설사 일이 있다 하여도 본궁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원빈에게나 있겠지.”
중전이 임신으로 불러온 내 배에 눈길을 주며 말한다.
박 상궁은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다. 이런 박 상궁의 태도는 아마도 인정전으로 오는 길에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지 못해서일 것이다.
인정전은 평상시 쓰이지 않는 건물이지만, 늘상 병사가 두 명씩 짝을 이뤄 보초를 서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러가라. 어서.”
“예, 중전마마.”
마지막까지 중전을 걱정하는 얼굴로 박 상궁이 나인들과 인정전의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제야 중전이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나는 긴장으로 어깨에 힘이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중전이 이런 내 긴장한 표정을 읽어서일까, 나와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나간다. 섬뜩하리만치 무서운 미소가 말이다.
지난날 인빈의 나인 시절에도 이런 비슷한 미소를 인빈에게서 많이 보았던 나였다. 하지만 적어도 인빈에게는 ‘살기’가 없었다.
그러나 중전에게는 있다. 왜 난 그녀가 세자빈이던 시절,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일까?
“전하를 사칭하여 본궁을 오라 하다니. 원빈, 겁도 없군. 엄중히 묻자면 자네는 죽음도 면치 못할걸세.”
“그것을 알기에 이곳까지 납신 것이 아니시옵니까? 두 눈으로 제가 벌인 짓을 보고, 죄를 물어야 하실 테니까요.”
중전이 짧게 웃음을 터트린다.
“자네는 전하의 총애를 얻으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가? 아니면 궐 밖 출신이라 여전히 궐의 법도가 얼마나 엄하고 무서운지를 모르는 것인가?”
“궐에 법도가 얼마나 엄한지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허나, 자식을 잃은 어미의 눈에 궐의 법도가 보일 리가 있겠사옵니까?”
한순간 중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나는 지금 회임 중이었다. 그런데 ‘자식을 잃은 어미’라는 표현을 썼다. 만약 중전이 명이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그 말을 이상하게 여겨 되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전은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죽은 명이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난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전하의 소생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지요?”
“그 아이라니?”
“명이 말이옵니다.”
명이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자 중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곧 그녀는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으며 말한다.
“자네의 소생은 이미 제주에서 죽지 않았는가? 죽은 아이가 능풍도정이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본궁보고 믿으라는 것인가?”
“소인은 명이가 제주에서 죽은 아이였다고 말씀을 올린 적이 없사옵니다.”
제주에서 죽은 아이와 명이의 연결고리를 단번에 찾아낸 중전의 정곡을 내가 찌르자, 중전은 꿀 먹은 벙어리인 양 목소리를 잃었다.
“소인은 한성으로 돌아온 뒤에야 그 아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헌데 중전마마께서는 그런 소인보다도 더 일찍이 그 아이의 존재를 알고 계셨지요?”
“몰랐네.”
당연하게도 중전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나는 말을 바꾸었다.
“아니요. 아셨사옵니다. 아셨기에 어린 명이에게 독이 든 율무죽을 내리시지 않았사옵니까? 그 일로 그 아이가 죽을 만큼 큰 병을 앓다 살아나 목소리를 잃게 되었지요. 아니 그렇사옵니까?”
“본궁은 모른다 하지 않았는가.”
“증좌가 있사옵니다.”
“증좌?”
중전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는다.
“당시 명이와 율무죽을 나눠먹고 죽은 보모이지요.”
“지금 오래전 죽은 이를 내세워 본궁에게 없는 죄를 덮어씌우기라도 할 참인가? 지켜볼수록 원빈의 말과 행동이 도가 지나치군.”
중전은 더 이상 나와 할 말이 없다는 듯 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 그런 그녀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명이의 존재가 세자의 보위라도 빼앗아갈까 염려하신 것이옵니까?”
중전의 걸음이 멈췄다.
“자네가 무엇을 알지? 어느 날 갑자기 궐 밖에서 들어와 전하의 총애를 얻고, 그 총애로 없던 신분까지 얻어 아무런 어려움 없이 빈의 자리에 오른 자네가!”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말한다.
“본궁은 전하와의 혼인이 결정된 순간부터 정쟁의 한복판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네. 당시 선대왕의 정비께서는 소생이 없으시고, 선대왕의 비빈들이 낳은 소생들은 저마다 세자의 자리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였지. 그래, 지난번 자네가 말한 대로 애초에 전하께서는 세자의 자리 따위는 관심조차 없으셨네. 본궁 역시 그러했네. 본궁의 부친께서는 다르셨어도 말일세. 허나, 왜란이 일어나고 전하께서 세자에 책봉되신 이후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지. 그 세자의 자리를 지켜야만, 지키고 지켜서 마지막에 보위에 오르셔야만 모두 살 수 있었네. 모두 살고 본궁의 가문의 부귀영화도 지켜질 수 있었지. 허나 전하께서는? 언제라도 세자의 자리를 버리고 이현궁으로 돌아가시기만을 바라셨지. 그런 전하의 마음을 붙잡고 보위에 오르시게 하시기 위해서라면 본궁이 무슨 짓이라도 못할까?”
“선대왕마마께서 승하하시기 전, 공빈마마의 옥패를 대비전에 보내신 것도 그러한 연유였사옵니까?”
“그러하네. 그 옥패에 담긴 의미가 ‘보은’임을 알고 그리했지. 허나, 그 옥패에 얽힌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오래전 이야기이네. 대비께서 받고도 모른 체하셨다면 그리 되었을 일이지. 그것이 이제 와서 중하게 다뤄질 이야기인가?”
“그 옥패를 보내시고 전위교서를 받으셨다면 이야기는 중한 이야기가 되겠지요.”
“전위교서? 전위교서 따위는 애초에 없었네.”
“없었다고요?”
“다시 말하지만 없었네. 그 당시 자네는 제주에 있어 모르겠지만, 선대왕께서는 승하하시기 며칠 전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보위는 세자가 물려받아야 한다, 영창이 물려받아야 한다 하시며 말을 수도 없이 바꾸셨네. 병이 위중하시여 올곧은 말씀을 하시기에 어려우신 상태이셨지.”
중전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비가 내게 한 말들을 보면, 대비는 ‘보은’을 지킨 게 분명하다.
전위교서는 없었어도 유지는 있었다. 그리고 대비는 그 유지를 무시하고 혼을 즉위시킨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대로라면 중전은 아무런 사실도 스스로 밝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말을 돌렸다.
“그렇다면 명이는요? 전하께서 보위를 물려받으시는 데 그 어린 명이가 무슨 방해라도 되었나요?”
공빈의 옥패 이야기에서 명이의 이야기로 바뀌자, 중전은 한결 마음이 편해진 얼굴로 입을 연다.
“물론 아니네. 허나, 세자의 보위를 위협할 수는 있었겠지. 본궁은 그리 판단했네.”
지난날 정원군이 내게 해 준 말과 비슷했다. 중전은 명이를 세자의 보위를 위협할 존재로 여긴 것이다.
“능풍도정이 처음으로 입궐한 날, 도성에 한 차례 전염병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이었지. 그 일로 세손이 전염병을 앓아 많이 아팠었네. 병이 나은 뒤에도 계속해서 잔병치례를 했었지. 세손이 갑자기 죽더라도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헌데, 입궐한 그 아이는 매우 건강하고 영특하기까지 하더군.”
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명이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중전의 말대로 건강하고 눈이 반짝이던 아이를 말이다.
그리고 그런 명이를 향해서 중전은 살기를 띈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혹여라도 세손이 잘못된다면, 전하의 장손은 바로 능풍도정이 될 수도 있었지. 그래서 살려둘 수가 없었네.”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내게 말하는 중전의 얼굴은 태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지금 중전이 살려둘 수 없었다고 말하는 아이는 바로 내 아이였다.
중전은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 남의 아이를 살려둘 수 없는 사실이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무리 자신의 아이라고 하더라도 세손도 명이도 한 아버지를 둔 형제였다.
“고작 그 연유 때문에 명이에게 독이 든 율무죽을 먹이셨사옵니까? 어찌 그리 잔인하시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그 어린 아이에게!”
“원빈. 자네의 입장에서는 본궁이 한 일이 잔인하다 여길 수 있네. 자네의 소생이니 그리 생각되겠지. 허나 자네도 알다시피, 명이는 그때 죽지 않았네. 명이를 죽인 것은 연주군부인이 고집을 부리며 아픈 아이를 데리고 편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일 때문이네. 이젠 그 탓도 내게 하려는가?”
나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명이를 죽이려고 했던 중전이었다. 그런데 명이가 죽지 않고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할 말은 잃은 나를 두고는 중전은 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의 총애가 언제까지고 자네에게 머물지는 본궁도 모르겠네만, 지금부터라도 조심하게. 훗날 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자네가 살아서 이 궐을 나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네.”
난 그런 중전을 쏘아보며 울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명이를 죽이려 한 것처럼 소인 역시 죽이려 하시는 것이옵니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순간 중전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난 그것을 보고 그녀가 더 이상 명이의 죽음에 대해서 자신에게 죄를 묻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중전이 이를 갈며 내게 말한다.
“본궁이 능풍도정만 죽이고 싶었는지 아느냐? 전하께서 제주로 간 너를 진즉 잊었으면, 너 역시 살아서 제주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중전!”
인정전을 울리는 혼의 목소리에 놀란 중전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일월곤륜도 앞 어좌의 뒤였다. 높은 어좌의 뒤에 숨어 있던 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혼이 어좌 앞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중전은 놀라서 계속 뒷걸음쳤다.
“능풍도정이 과인의 소생임을 알고도 죽이려 독을 먹였단 말이요?”
“저, 저……. 전하!”
“어찌 그리 잔인하실 수 있소? 중전은 중전의 아비를 쏙 빼닮은 것도 모자라 더 악독하시구려!”
뒷걸음치던 중전은 결국 닫힌 문 앞에서 주저앉았다.
“저, 전하! 오해이시옵니다! 신첩은……. 신첩은 그저 세자를 위하여 그리하였을 뿐이옵니다!”
“세자를 위하여 과인의 소생인 능풍도정을 죽이려 하였던 말이오? 그것이 지금 오해라 말하는 것이오? 중전. 인빈께서도 지난날 과인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세자의 보위에서 내쫓으려 하였어도 죽이려 하시진 않으셨소. 심지어 대비께서도 자신의 소생인 영창을 두고도 과인이 보위에 오르는 데 적극 나서주시었소. 헌데 중전이 그리 악독한 여인일 줄이야. 과인은 이제 다시는 중전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소. 중전도 그리 알고 일평생 과인의 눈에 띄지 마시오.”
“전하!”
혼은 자신을 향해 울부짖는 중전을 지나쳐 닫혀 있는 인정전의 문을 직접 열었다. 열린 문으로 나가려던 혼이 중전을 돌아보며 마지막 말 한마디를 던졌다.
“악독한 모친을 둔 세자를 국본으로 두는 것 또한 다시 고려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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