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계축옥사 (3)
흰색
혼이 힘들다.
그가 힘들어한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을 아는 나는 더욱 힘들다.
내가 아는 단편적인 역사에서는 그는 아주 차갑고 매몰차게 역모 사건을 친국으로 다스린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친국장에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한 적은 없다.
그러나 조금 전 내가 본 그의 미소는 내게 많은 걸 시사한다.
‘그는 지쳤어.’
그가 지쳤다는 생각이 들자 난 중전에게 화가 났다. 위로를 가장한 채 혼에게 압박을 한 그녀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혼은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대화 중에 영창대군의 이름을 직접 거론함으로써 그녀의 속내를 들춰냈다. 그 결과 중전도 그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만 드러났지만 말이다.
차라리 혼의 마음을 모른다면 모를까, 그녀는 혼의 속내를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것을 이용하고 자극하려고만 할 뿐, 사실상 진정 그의 편이 되어줄려고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중전이 긴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혼이 떠난 편전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인 듯싶다.
난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나가기 위해 돌아선 중전과 마주서며 매몰차게 물었다.
“전하를 이리 몰아붙이셔서 얻으시려는 것이 무엇이옵니까? 김제남의 죽음이옵니까? 영창대군을 대비마마와 떨어뜨리려는 것이옵니까?”
조금 전 혼과의 날카로운 대화 때문이었는지 중전은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혼이 나간 후 닫혀있는 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니네.”
그녀가 혼과 대화할 때와는 달리 조금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내 물음을 받았다.
“조금 전 전하께 말씀드렸다시피, 전하의 안위와 후에 보위에 오를 세자의 앞날을 위하여서지.”
이 말을 끝으로 그대로 나를 지나치려던 중전을 내가 단호한 말투로 붙잡았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억울한 이를 만드는 것은 옳지 않사옵니다.”
그제야 중전이 눈을 치켜뜨고는 나를 바로 보았다.
“지금 원빈의 말은 김제남이 억울하기라도 하단 말인가?”
김제남이 억울하다고 말해야 할까?
만약 선조의 유지가 지켜지고 영창대군이 왕이 되었다면, 지금은 중전 유 씨와 그녀의 가문 사람들의 세상이 아닌 김제남 가문의 사람들의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김제남과 영창대군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이 아닌, 혼에게 위기가 찾아왔을 것이다. 선조가 살아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위기가.
“소인의 말은 전하의 말씀대로 억울한 이가 없도록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씀을 올리는 것이옵니다.”
“원빈.”
중전은 이런 나의 태도가 심히 불편한 모양이다.
“만사를 다 제쳐두고라도 이번일이 일어난 근원에 대해서 되새길 필요가 있네. 전하께서는 합당하게, 아니. 천운에 따라 보위에 오르신 분이네.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시고 말이야. 자네 역시 그 누구보다도 잘 알겠지.”
천운(天運).
다시 말해 혼이 보위에 오른 건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다.
지난 날 정원군은 인빈에게 세자의 자리는 하늘이 주는 것이라며 혼을 변호했다.
그러나 인빈은 그런 정원군에게 선조도 인정하지 않은 그리고 명나라도 인정하지 않은 것이야 말로 하늘의 뜻도 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왕위에 오른 건 혼이었다. 인빈의 생각과 뜻, 현실과는 맞지 않게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혼이 왕이 된 것이다.
승자의 역사가 바로 하늘이 정한 역사가 되는 시대. 훗날 혼이 반정으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모든 이들이 천운은 혼에게 있다고 말하겠지.
‘하지만 혼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단 한 번도 묻진 않았다.
그는 천운이 자신에게 있기에 보위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할까? 내가 보는 그는 왕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왜란으로 인해 세자가 되고, 자신에게 그 세자라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오직 ‘잊혀진 왕자’였던 자신이 아버지인 선조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는 희망에 기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가 선조에게 더욱 사랑받기 위해 노력한 것들은 영창대군의 존재와는 애초부터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때 그는 자신이 폐세자가 되고 영창대군이 세자가 된다고 해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편안한 얼굴로 자신의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이현궁으로 돌아가 생을 마치길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그에게 ‘왕’이라는 자리를 중전은 강제로 안겨주었다. 오직 자신의 가문의 부귀영화와 아들인 세자 이지를 위해서.
‘그녀에게 혼은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일까?’
“많은 어려움을 겪어내시고 이겨내신 것은 소인도 아옵니다. 허나, 과연 왕의 자리 역시 원하여 받으신 것일까요?”
“그게 무슨 말인가?”
“처음부터……. 전하의 것은 아니었지요. 전하께서도 그 사실을 아시는지요?”
“어찌 그런 대역무도한 말을 하는 것인가, 원빈?”
싸늘하게 식을 줄만 알았던 중전의 얼굴이 당황으로 붉게 물들여진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유지(諭旨). 아니지요. 공빈마마의 깨어진 옥패를 대비마마께 내어주고 받으신 전위교서. 그 전위교서는 지금 어디에 있사옵니까?”
중전의 눈이 크게 떠진다. 그녀는 내가 한 말이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나의 두 눈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렇게 마주본 그녀의 두 눈이 너무 무섭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내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녀는 16년간 세자빈으로 있었다.
그 사이 왜란이라는 큰 국난을 이겨냈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십여 년을 행궁에서 숨죽여 지내며 혼을 왕으로 만들었다.
그런 여인과 맞서서 내가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있는 싸움이기나 할까?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중전은 의외의 상황을 만든 나를 어느 정도 파악한 듯 조소를 내뱉으며 말했다.
“원빈이 궐 생활을 오래 하였음이야.”
그러더니 곧바로 얼굴에서 웃음기를 감추며 말을 이었다.
“자네만 아는 일인가?”
인정하는 말투로 되돌아오는 중전의 물음을 듣는 순간, 난 온몸의 진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선조가 남긴 전위교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그 존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적지 않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였다.
나는 답을 길게 끌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중전에게 내 나약함이 하나라도 더 드러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것이 중요하옵니까? 허나 전하께서는 아직 모르시겠지요. 전하의 성품을 중전마마께서도 잘 아실 것이옵니다. 아신다면, 세자의 보위를…….”
여기서는 내 목소리가 자동적으로 줄어들었다.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려 하실지도 모르시지요.”
중전의 표정이 더욱 싸늘하게 변했다. 현재로서는 세자가 중전의 가장 큰 약점인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못하는 하룻강아지인 줄 알았더니……. 좋네. 다시 보게 되는군, 원빈. 그래서 지금 본궁에게 그것을 말하는 연유가 무엇인가?”
중전과 내가 어느 정도 평행을 이룬 느낌이 든 첫 순간이었다. 나는 막힘없이 중전에게 내가 요구하는 것을 꺼냈다.
“김제남의 무고를 밝혀주십시오. 자백서가 중전마마께서 만드신 것이라면, 그 자백서를 없는 일로 되돌리실 수도 있으시겠지요.”
자백서가 거론되자 중전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것처럼 잠시 시선을 내게서 돌렸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중전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김제남을 살려주면 후일이 두려울걸세.”
‘아니요. 후일 일어날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 하나가 사라지는 계기가 될 거예요. 김제남이 무사하면 영창대군도 무사할 것이고, 대비도 무사할 테니까.’
“전하께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시던 공빈마마의 옥패가 지금 누구의 손에 있는지를 알길 원하신다면 언제든지요.”
전혀 굽히지 않는 나의 태도에 중전은 그대로 나를 두고 편전을 나가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내 옆에서 멈춰서더니 고개를 살짝 돌리며 흘끗 나를 본다.
“공빈의 당호였던 자미당. 그리고 자네의 궁호 자미궁. 그래, 자네의 궁호를 친히 지으신 것도 다름 아닌 전하이시지. 원빈, 자네는 전하의 마음을 얻고 그리 오만하게 굴 수 있는 것이겠지. 허나 언젠간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날이 올걸세.”
나는 중전 쪽으로 돌아서 두 손을 모아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소인은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중전은 고개를 숙인 내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자리를 떠났다.
그날 밤이 깊도록 혼이 교화당으로 오지 않았다.
혼은 최 내관을 보내 늦어질 것이니 일찍 쉬라는 말을 전해왔다. 최 내관은 이러한 혼의 말을 전하면서, 아직까지 퇴궐하지 않은 신하들이 편전에 있음을 귀띔을 해 주었다.
최 내관이 나간 후 나는 보향과 교화당을 나와 연못가를 걸었다.
낮에 내가 편전에서 중전에게 한 말들은 모두 그녀를 자극하는 말들이었다. 특히 응당 세자가 물려받아야 할 왕위에 대해서 민감한 중전의 속마음을 드러내게 함으로써 그녀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중전을 겁박한 것이 옳은 일일까? 중전이 순순히 김제남을 구명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꿀까?
그렇게 되면 내가 아는 계축옥사가 일어나지 않을까? 일어나지 않는다면 난 어떻게 될까?
많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늘 그렇듯 답은 없었다. 역사란 그 시대에 족적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 나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난 나의 미래를 알 수 없다. 나의 미래이자, 내가 태어난 곳에서는 과거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홍 상궁은 어디 있느냐?”
문득 요즘 따라 홍 상궁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보향에게 물었다. 보향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마 처소에 계실 듯하옵니다만. 찾아 모셔올까요?”
홍 상궁 역시 갓 궐에 입궐한 내게 중전이 보내준 사람이었다. 그녀도 분명 중전의 사람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고 그녀를 내 곁에 둘 수는 없었다.
“어디 있는지만 알아오너라. 이곳으로 데려올 필요는 없다.”
“예, 원빈마마.”
보향이 사라지고 나는 한동안 연못가에 홀로 서 있었다. 달은 밝았지만, 밝은 달만큼 내 마음도 밝지는 못했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다가, 피로함을 느꼈다.
오늘 혼을 기다리는 건 무리일 것 같다. 난 한 손으로 배를 살며시 쓰다듬다가, 늘 혼이 교화당으로 오기 위해 지나오는 길 쪽을 쳐다보았다.
그 길은 어두웠다. 조금의 빛도 없는 그 길에서 다시 교화당 쪽으로 몸을 돌리려고 하는 그때였다.
“원빈마마.”
장옷을 정수리까지 뒤집어쓴 한 여인이 불쑥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달빛 덕에 장옷 안에 입은 옷차림이 상궁의 옷임을 알아본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넌 누구냐?”
날 원빈이라고 부른 이상,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밝힐 차례였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말하기를 주저하는 얼굴이다.
장옷 사이로 보이지 않는 눈이 주변을 탐색하기라도 하는지 머리가 이리저리 움직인다.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 같은데 무언가 어설픈 느낌이 강하다.
그녀는 나 이외에 누군가 이곳에 나타나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누구냐고 묻질 않느냐?”
내 다그침에 그녀가 장옷을 천천히 어깨까지 내리며 입을 연다.
“경민아. 나를 알아보겠느냐?”
그제야 난 상궁 차림을 하고 있는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고는 놀라 외쳤다.
“대, 대비마마!”
그녀는 바로 경운궁에 있어야 할 대비 김 씨였다.
“쉿! 조용히 하거라.”
“어찌, 어찌 여기에!”
명이가 죽은 뒤로 처음 보는 대비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피며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뒤늦게 몸을 굽혀 인사를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나를 대비가 두 손으로 붙들며 막는다.
“시간이 없다. 난 바로 경운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인 일로 이 늦은 시각에 창덕궁에 오셨사옵니까? 날이 밝을 때 오시지 않고요?”
“경민아. 정녕 모르고 내게 묻는 것이냐?”
“모르다니요? 무엇을 말이옵니까?”
대비가 속상한 듯 금방이라도 눈물지을 듯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 아버님과 세 오라버니들이 모두 의금부에 끌려간 사실은 너도 알지 않느냐?”
“그건…….”
“역모였지. 역모라는 누명을 억울하게 당하였다.”
“억울함이 곧 풀릴 것이옵니다.”
“아니다! 절대 쉽사리 풀리시지 못할 것이다.”
대비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하지만 곧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다른 이가 들었을까,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다행이도 교화당 주변은 조용했다.
“아니옵니다. 전하께서도 억울함을 아시기에 친국을 하지 않고 계시옵니다.”
“친국? 친국이라니?”
대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김제남을 친국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친다는 사실을 처음 듣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곧 내 팔을 붙잡으며 간청했다.
“내 청을 들어다오. 부디, 내 청을 들어다오, 경민아!”
“청이라니요? 하명하시옵소서.”
“주상께 꼭 한 번만 나를 만나 달라 전해다오. 주상께서 나를 만나실 수 있게 도와다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대비마마께서 전하를 뵙는 것이 무엇이 어렵다고요?”
중전이 날 잡은 팔을 힘없이 놓으며 말한다.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구나.”
“불가능하다고요?”
“그래. 처음에는 아버님께서 역모에 연루되셨다는 말을 듣고 창덕궁으로 급히 사람을 보내었다. 주상을 뵙기 위해서였지. 헌데 내가 보낸 나인도, 상궁도 모두 주상을 뵙지 못하고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이상한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하였지. 그래서 난 서신을 써서 최 내관을 통해 주상께 전하라고 하였다만, 그것도 하지 못하였다.”
“소인은 이해하지 못하겠사옵니다. 전하께서……. 만나지 않아주시겠다고 하신 것이옵니까?”
대비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러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를 깨물고 말한다.
“중전이었다.”
“예?”
“중전이……. 그리 한 것이었다.”
“중전마마께서요? 중전마마께서 대비마마가 전하께 보낸 사람을 막았단 말씀이옵니까?”
난 믿지 못하겠다는 말투로 대비에게 되물었지만,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혼이 즉위한 이후로 혼과 대비가 단둘만 자리를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중전이 그 자리에 함께 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불 보듯 뻔했다. 혹시라도 대비의 입에서 공빈이 옥패 이야기가 나온다면 중전이 벌인 엄청난 일들을 혼이 알게 될 테니까.
“그래. 그래서 네게 부탁하는 것이다. 주상을 만나 뵙고 내가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도와다오.”
“대비마마. 전하께서도 연흥부원군의 억울함을 아시옵니다. 그러니 조사가 끝나는 대로 무고로 풀려나실…….”
“아니다. 아니다, 경민아!”
대비가 울먹이며 나를 설득한다.
“내가 경운궁에만 있다 하여, 조정이 어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리라 여기느냐? 조정은 이미 대북 신하들의 것이고, 중전의 가문 사람들은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입고 오래전부터 내 아버님을 노려왔다. 뿐만 아니라 영창까지도……. 난 주상께서 영창을 살려주시리라 믿어 의심치는 않는다. 그러나 아버님은 아닐 것이다. 과거 아버님이 저지르신 악행들도 나는 안다. 뿐만 아니라, 영창이 보위에 오를 것이라 믿고 아버님이 벌이신 일들도 안다. 설사 주상께서 이를 모두 용서하시더라도, 다른 이들은 결코 아버님을 용서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부탁한다. 주상을 뵐 수 있게 해다오. 주상께서 약조를 기억하신다면……. 내 아버님과 오라버니들을 끝까지 지켜주실 것이다!”
‘약조.’
대비가 말하는 약조는 목숨을 구해준 혼에게 보은한 일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중전이 보내온 공빈의 옥패를 받고, 그가 보은을 갚으라 한 것인 줄 알고 전위교서를 보낸 일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중전이 꾸민 일이었다. 그리고 난 그런 중전을 겁박했다. 김제남을 구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대비와 혼이 만나게 되고, 공빈의 옥패 이야기가 나온다면 일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대비와 혼을 만나게 할 순 없다. 중전이 내게 어떤 답을 줄지 기다려야 했다. 혹시라도 그 전에 대비와 혼이 만난다면, 내가 중전에게 김제남의 구명을 요청한 일이 무산될 수도 있었다.
‘또 혼이 곧 교화당으로 올 텐데…….’
“도와드리겠사옵니다. 허나 지금 당장은 어렵사옵니다. 일단 다른 이들의 눈에 띄기 전에 어서 경운궁으로 돌아가시지요.”
“그럴 수 없다! 한시가 급한 일이다. 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너도 말하지 않았느냐? 아버님을 친국하라 말하는 이들이 있다 말이다. 아버님과 오라버니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오늘 주상을 뵙기 전엔 창덕궁을 떠날 수 없다.”
“대비마마!”
“경민아! 중전이 나를 주상과 만나지 못하게 하는 연유를 정녕 모르겠느냐? 중전은 세자가 보위를 물려받는 데 있어 방해하는 이들은 모두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내 아버님이 해를 입으시면 그 다음은 영창을 없애려 들 것이다.”
지나친 억측이라고 반박하기에는 대비가 말하는 것은 모두 내가 알고 있는 역사다.
그녀의 가문은 곧 풍비박산 날 것이고, 아버지와 세 오라버니들은 모두 죽는다. 또한 하나뿐인 아들 영창대군 역시 유배지에서 죽는다.
홀로 딸과 함께 남은 그녀는 평생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이것이 내가 아는 그녀의 이야기의 결말이다.
“여기 더 머무시다가는 다른 이들의 눈에 띌 것이옵니다. 허니 어서 경운궁으로 돌아가시지요.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하며 대비에게서 돌아섰다. 아직 중전에게서 답을 듣기 전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매몰차도 대비를 위하는 길이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서였다.
그때 돌아선 내 등 뒤에 대고 대비가 말했다.
“능풍도정 이명. 그 아이, 너와 주상의 아이가 아니었더냐?”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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