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슬픔과 아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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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며 대비 김씨가 안으로 들어섰다. 방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녀의 등장에 놀라 몸을 납작 엎드렸다.
방 안으로 들어선 대비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다가 잠시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러더니 누워 있는 명이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허준에게 말했다.
“허 의관. 내가 허락하겠소.”
대비의 명에 허준이 고개를 들었다. 대비는 다시 한 번 허준에게 명했다.
“내가 허락하겠으니, 어서 능풍도정을 살려보시오.”
대비의 명확한 뜻을 전달받은 허준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예를 표하고는 침의 허임(許任)을 가까이로 불렀다.
“지금부터 자네는 내 지시에 따라 능풍도정의 각 혈에 침을 놓아야 할 것이네.”
“예.”
허임이 명이의 곁으로 다가가 침통에 든 침을 꺼내 들었다.
그사이 대비가 자신과 함께 온 문 상궁을 향해 명을 내렸다.
“자네는 속히 편전으로 가 군부인을 이곳으로 데려오게. 아들이 위독한데도 고집을 부린다면 내 엄명이라 이르게.”
“예, 대비마마.”
명을 받은 문 상궁이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그 뒤로 운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운지는 서둘러 내 곁으로 다가와 앉으며 속삭였다.
“대비마마께서 상궁을 보내시는 것보다는 직접 납시는 것이 더 빠르실 것이라 하셨어요.”
나는 내 명을 받고 경운궁으로 간 운지가 대비와 함께 돌아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대비는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는 허임이 명이에게 침을 놓는 것을 신중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허준의 지시를 따르며 침착하게 침을 놓기 시작하는 허임의 손길에 방 안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그 때문에 허임이 침을 놓는 동안 방안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잠시 뒤 숨이 넘어갈 듯 가쁘게 숨을 내쉬던 명이의 숨이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이를 본 허준이 허임을 뒤로 물리고는 다시 명이의 맥을 짚었다.
“능풍도정은 어떠하오?”
대비의 물음에 허준이 공손한 어조로 답했다.
“기혈을 눌러 잠시 풍질을 막았사옵니다. 이제부터는 약을 써야 하온데 약재가 올바로 듣는다면 가망이 있을 것이옵니다.”
“능풍도정이 나을 수 있겠소?”
“장담은 드리지 못하오나, 오늘이 고비인 것은 분명하옵니다.”
“알겠소. 수고하시오.”
대비는 허준에게 모든 것을 맡긴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여전히 명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두고 옆에 있는 운지를 향해 말했다.
“운 상궁은 원빈을 교화당으로 뫼시거라.”
그 말을 듣자마자 난 대비에게 말했다.
“신첩은 이곳에 있겠사옵니다. 능풍도정 곁에 있겠사옵니다.”
“원빈. 이곳은 내의원이오. 후궁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임을 잘 알지 않소.”
“허나 명이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사온데…….”
명이가 깨어나지 않았다는 말을 하던 나는 주변의 시선들이 모두 나를 향하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들의 시선에 담긴 의아함을 읽었다. 명이는 정원군과 구씨의 아들이었다.
그들과 내가 친족 간이라고 하더라도 사실상 아무런 관계도 없는 명이를 위한 나의 이런 적극적인 태도는 그들이 보기에 충분히 의심스러울 수 있었다.
더욱이 의관과 의녀들은 나는 물론이고 왕실 최고 어른인 대비가 내의원에 있다는 사실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니 명이를 치료해야 하는 그들 틈에 내가 있는 것은 명이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원빈.”
대비가 또 한 번 나를 불렀다.
나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명이를 위해서라도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그때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마…….”
순간적으로 그 소리가 누구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알아차린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명이가 두 눈을 힘겹게 뜨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또한 내가 방금 전 들은 목소리는 다름 아닌 명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마……. 마…….”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이 명이가 소리를 내는 사실에 놀랐지만, 그 누구보다도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나는 일어서려던 것을 그만 두고 명이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앉았다. 명이는 그런 나를 향해서 가녀린 한 손을 들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주저 없이 그 손을 잡아주었다.
“명아?”
내가 명이를 부르자 명이는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였지만, 난 그 미소가 교화당을 찾을 때마다 날 보며 명이가 짓던 환한 미소와 같은 미소라는 걸 알았다.
창백함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미소 짓는 명이를 보며, 내 두 눈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의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언젠간 명이가 말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런 순간에 말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허임의 침술이 명이의 목소리를 고친 것일까? 아니면 풍질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아이에게 소리를 되찾아준 것일까?
어찌되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는다.
난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기쁨을 나눌 한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 사람은 바로 혼이었다.
난 혼에게 명이가 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힐 때가 왔음을 확신했다.
“능풍도정 곁에 있어줘. 곧바로 소식이 있으면 나에게 알려주고.”
난 운지에게 명이의 곁에 남아주기를 부탁하고는 잡고 있던 명이의 손을 조심스레 놓았다.
명이는 자신의 손을 놓아버린 나를 당황한 기색으로 쳐다본다. 난 그런 명이를 향해 안도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돌아섰다.
이대로 방을 나가려던 나는 다시 한 번 명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누워 있는 명이는 내가 왜 나가려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얼굴로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편전으로 돌아온 나는 구씨와 두 아들이 없는 것을 보고는 일단 안심했다. 분명 대비의 명을 받은 문 상궁이 그들을 데리고 내의원으로 갔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불안함도 없지 않아 있었다. 구씨가 대비의 명 이외에 편전 앞을 떠날 이유가 있었다면 정원군과 관련된 좋지 않은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난 나를 보자마자 굳은 표정으로 다가온 개시를 향해 물었다.
“대비전 문 상궁이 다녀갔는가?”
“그러하옵니다. 문 상궁께서 대비마마의 명을 받들어 군부인과 두 아드님을 뫼시고 갔사옵니다.”
정원군에게 나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난 편전을 응시했다. 편전의 동온돌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난 혼이 있는 것을 알고는 개시에게 말했다.
“전하를 뵈어야겠네.”
개시는 당연하다는 듯 반대하며 나선다.
“불가하다 말씀을 올리지 않았사옵니까.”
그러나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혼을 만날 생각이었다.
명이가 다시 말을 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풍질로 인해 몸이 좋지 않았다.
난 혼이 진실을 알고 명이를 만나야 할 때가 왔다고 여겼다.
“비켜라.”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전하의 명이…….”
개시가 내 뒤쪽을 바라보더니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문다.
난 고개를 돌려 개시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최 내관이 편전 쪽으로 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최 내관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 앞으로 곧장 다가와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원빈마마.”
난 평소와 다름없는 최 내관의 공손한 태도에 그가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전하를 뵈어야겠네.”
내 말에 최 내관은 난처한 기색으로 개시와 눈을 맞춘다.
그 역시 혼이 그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말한 명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개시와 눈을 맞췄던 최 내관이 편전의 불 켜진 동온돌을 향한다. 그는 깊은 탄식을 내뱉더니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드시지요.”
“상선영감!”
개시가 반발하며 나섰지만 그녀보다 직위가 높은 최 내관은 짧은 고갯짓으로 그녀를 제지했다.
어둠과 침묵만이 있는 편전 복도를 따라 걷던 나는 동온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동온돌 방 앞에 서 있던 내관이 닫힌 문 너머를 향해 소리를 냈다.
“전하. 원빈마마 드셨사옵니다.”
안에서는 아무런 답변도 돌아오지 않았다.
문을 열기 위해 고리를 잡고 서 있던 두 명의 지밀나인도 당황한 듯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그 사이 내관의 입이 또 한 번 열렸다.
“전하. 원빈마마 드셨사옵니다.”
두 번째 소리에도 답변은 없었다.
이제 내관도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문고리를 붙잡은 나인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열어라.”
마주선 두 나인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조용히 동온돌방의 문을 열었다.
내가 문지방을 넘자마자 나인들은 다시 문을 닫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 외에는 사람의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은 적막감이 가득한 안에서 나는 혼을 찾아냈다.
그는 흔들림 없이 타고 있는 촛불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얼핏 깊은 생각에 잠겨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내가 왔다는 것을 의식한 듯 여러 번 눈을 깜빡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차라리 분노 서린 감정이라도 보았다면 나는 겁에 질린 표정이라도 지어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담담하리만치 무표정한 그의 시선과 마주하며 나는 한동안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다시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시선을 내게서 거두었다. 어떻게 보면 평상시에 보던 그의 모습과도 매우 비슷해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만으로는 왜 편전 앞에서 비를 맞던 군부인을 외면했는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내가 무슨 말로 말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에게로 한 걸음씩 걸음을 떼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너도…….”
혼의 입이 열렸다.
“정원군의 억울함을 고하고자 내게 찾아온 것이더냐?”
“혼아…….”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그의 두 눈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그의 두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가 어젯밤에 그가 정원군과 나눈 대화 때문이든 아니면 나와 관련된 무엇 때문이든 간에 지금 그는 내게 화가 나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운 상궁을 보내 경운궁에서 대비를 모셔왔다지. 그것이 정원군을 구명하기 위해서라면 아무 말도 듣지 않을 것이다.”
“그게 아니야. 내가 대비마마를 모셔온 건 명이 때문이었어. 정원군이 의금부로 끌려간 일로 군부인이 편전 앞에서…….”
“정원군!”
혼이 자신의 앞에 놓인 상을 주먹으로 치며 외쳤다.
“정원군은 십삼 년간이나 너를 마음에 품어왔다 말하였다. 십삼 년간이나 나를 속여 왔다 말한 것이지. 너는, 너를 향한 정원군의 연심(戀心)을 알고 있었느냐?”
혼이 내게 묻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답을 줄 수가 없었다.
물론 알고 있었다. 또 그 마음에 기대어 도움을 구한 적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혼이 세자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그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내 짐을 정원군에게 안긴 적이 있었다.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을 모른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마음 한편에는 늘 정원군을 향한 미안함이 있었다.
‘내가 그동안 혼에게 정원군의 마음을 말하지 못한 건, 단지 그들의 우애를 지켜주기 위한 것이었을까?’
나 스스로에게도 답을 쉽게 얻을 수 없는 질문을 지금 혼이 내게 하고 있다.
“그 마음을 알면서 나를 떠나 정원군과 제주로 떠났던 것이냐?”
그 당시 나는 나만 사라지면 된다고 여겼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대로 혼이 왕위에 오르는 그날까지만.
그가 왕이 되고 다시 재회할 때쯤에는 우리에겐 더 이상 위기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정원군이 널 첩으로 들이려 한 일도, 능양군의 보모상궁으로 있으면서 입었던 그 상흔까지도 넌 모두 내게 속였다! 그 모든 것들이 정원군을 위해서였느냐?”
“혼아…….”
혼이 말대로 나를 향한 마음으로 인해 정원군은 너무나도 많은 희생을 치렀다.
“정원군의 마음은 알고 있었어.”
분노만으로 가득 차 있던 혼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걸 네게 말하지 못했던 건, 그 마음 때문에 그가 치른 희생이 많았기 때문이야.”
혼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한다.
“희생? 희생이라 말하였느냐? 혹 너와 제주로 유배를 간 일을 희생이라 말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지난 밤 정원군이 내게 말하였다. 그때의 일은 오직 너를 위하여 나섰던 일이었다 말이다.”
“맞아. 그때 정원군이 나섰던 건 나를 위해서였어. 하지만 그 이후로 정원군이 한 일은 모두 우리를 위한 일들이었어.”
“너와 나를 위한 일이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혼이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묻는다.
나는 잠시 깊게 숨을 가다듬고는 명이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주에서 죽은 우리 아이, 기억해?”
예상지 못한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혼이 조금은 놀란 얼굴로 나를 본다.
“제주에서 한성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난 그 아이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오 년 동안 죽었다고 생각한 그 아이가.”
“지금 그 아이가 정녕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이냐?”
나를 바라보던 혼의 두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내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아이……. 아이가……. 그 아이는 어디에 있느냐? 어디에 있느냐, 경민아!”
“능풍도정. 정원군의 막내아들 명이가……. 바로 우리의 아들이야.”
유오디아 작가의 말
작가 블로그
내 생각에… 너무 늦게 사실을 밝힌 것 같은데? 아니 그런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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