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눈비 내리던 날에(3)
흰색
“어째서인가 원빈?”
중전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본다.
“운 상궁이 대비께서 자네에게 보낸 상궁이라 하나, 사실은 정원군이 자네에게 보낸 이네. 그런 이를 어찌 이토록 감싸려는 것인가? 본궁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운 상궁은 분명 정원군의 사람이네.”
“중전마마의 말씀대로 운 상궁은 정원군이 보낸 사람이 맞사옵니다. 허나 소인은 운 상궁의 충심을 믿사옵니다. 운 상궁은 소인이 나인이던 시절부터 고락(苦樂)을 함께 했던 사람이기에, 소인을 향한 그녀의 충심을 믿사옵니다. 중전마마.”
내 말을 모두 들은 중전이 어이없다는 듯 짧은 웃음을 터트린다.
나는 그녀의 짧은 웃음에서 오래전 나를 향한 인빈의 앙칼진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서로 전혀 다른 분위기의 웃음임에도 말이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자네가 나인이던 시절부터라……. 반가의 양녀가 되어 빈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과거 나인이던 시절을 그리워하기라도 하는 겐가? 그렇게 일일이 나인 시절 동무들을 모두 챙겼다가는 제주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자네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궐에 모르는 이가 없겠군.”
운지를 감싸는 나를 중전이 답답하다는 듯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교화당을 떠나려는 중전에게 예를 표하기 위해 일어서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깊은 생각에 빠졌다.
운지와 미영이.
그녀들은 이 낯선 조선에서 십여 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온 나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혼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녀들은 내 가족이고 친한 친구와도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미영이를 지키지 못했다.
미영이를 잃은 것도 생각할수록 고통스러운데, 운지를 죽음으로 내몰아야 한다니. 난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는 빗속에서 보았던 미영이의 시신을 떠올리며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미영이에 이어 운지까지 위험에 처했다는 현실은 결국 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중전은 이런 나를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내 눈물이 땅에 떨어지자, 갑자기 이런 말을 중얼거린 것이다.
“진즉 운 상궁의 그러한 출신을 알았더라면, 지난날 임해군의 나인을 처리할 때, 함께 처리했어야 하는 것인데.”
중전의 말에 난 순간적으로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임해군의 나인?’
난 직감적으로 중전이 말한 ‘임해군의 나인’이 미영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난날 임해군의 옥사 때 자결한 미영이를 ‘처리’했다고 말하는 중전.
난 그런 중전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의 뜻으로 해석하자면, 마치 미영이가 자결한 것이 아니라 중전이 죽였다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조금 전 운지에게 비상을 건네며 자결하게 만들려던 중전의 행동이 방금 한 그녀의 말과 하나의 연결고리가 완성 되는 순간이었다.
‘설마…….’
난 고개를 들어 중전을 바라보았다. 믿기 힘든 사실을 접한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이를 본 중전도 무언가 실수했다고 느낀 얼굴로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난 그런 중전을 뒤따라 일어서며 그녀와 마주섰다.
“임해군의 나인이라니요? 중전마마께서 말씀하시는 이가 미영이는 아니지요?”
내가 깨달은 사실이 무엇인지 중전은 인지한 것이 분명하다. 내 시선을 피하려던 중전이 무슨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돌연 나를 똑바로 응시한 것이다.
나는 그런 그녀의 시선에서 내 물음에 대한 답을 읽었다.
“설마 중전마마께서 미영이에게 독으로 자결을?”
중전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낮은 어조로 말한다.
“본궁이 오라버니를 보내 그 나인에게 비상을 주었네. 허나 오해는 말게.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그 나인이네.”
내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믿을 수가 없었다. 미영이를 살려달라고 중전을 찾아갔던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중전은 그런 나를 돕겠다고 했지, 미영이를 죽게 하겠다고 하진 않았다.
“미영이를 자결하게 만드셨다고요? 어째서? 어째서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네. 자네도 알다시피, 당시 임해군이 죄를 자백하지 않아 옥사가 길어지고 있었지. 심지어 명에서는 선대왕의 장자인 임해군을 놔두고 전하께서 등극하신 이유를 핑계 삼아 책봉교서를 내려주지 않았네. 그러니 옥사가 길어지는 것은 전하께 득이 되지 못하였지. 하루빨리 옥사를 마무리 지어야만 했네. 그러기 위해서는 임해군의 측근 중 누군가의 자백이 절실했지. 이상하게도 임해군의 측근들은 그 누구도 그의 죄를 고하는 이가 없었지.”
임해군은 타고난 성품이 포악하고 호탕했을 뿐, 역모를 꾸민 적은 없었다. 그러니 주변인들을 아무리 문초해도 애초에 없던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분노에 찬 목소리를 숨기지 않고 중전에게 물었다.
“그 일에 미영이를 이용하신 것이옵니까?”
“처음부터 그 나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건 아니네. 허나 자네가 본궁을 찾아와 말했었지. 그 나인이 전하를 흠모해왔다 말일세. 그래서 본궁이 오라버니를 보내 그 나인에게 전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지를 물었네. 그리 하겠다더군. 결국 그 나인이 거짓으로 임해군의 죄를 고하였고, 옥사가 마무리 될 수 있었지. 이 모든 일이 그 나인이 전하를 흠모해왔다는 사실을 자네가 알려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네.”
“소인이 한 말 때문이라고요? 소인이 알려드린 사실 때문에……. 미영이를, 아무런 죄도 없는 미영이에게!”
그 날. 미영이를 구해달라고 중궁전을 찾아와 내가 했던 말을 들으며, 중전은 끝이 보이지 않던 임해군의 옥사를 끝낼 묘책을 찾아낸 것이다.
내 앞에서는 미영이를 구하는 데 힘쓰겠다고 약조하고서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것이 묘책이라면, 그 묘책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한 것은 바로 나였다. 내가 미영이의 마음을 중전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 말로 인해서 미영이가 죽은 거야?’
난 받아들이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어려웠다.
미영이를 구명하기 위해 나섰던 나는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미영이가 죽은 뒤에 만난 아빠의 말에 따르면, 그때 나는 조선에 온 지 9년째 되던 해였다.
그렇다면 미영이를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던 내게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내가 미영이를 살리기 위해 나서서 중전을 만나고, 그로 인해 미영이 죽는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나로 인해 미영이가 죽게 된 것이 정해진 역사였다는 말이잖아.’
정해진 역사를 거스르지 않는 한, 나는 통증을 느낄 일이 없다. 다시 말해 미영이가 나로 인해 죽는 건 정해진 역사였다는 것이다.
나와의 인연이 미영이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그럼 내가 조선으로 오지 않았다면, 그래서 미영이가 나를 알지 못했다면, 미영이는 죽지 않았다는 말일까?
“전하를 향한 미영이의 마음을 이용하여 죽음으로 내모시다니요? 중전마마께서 어찌 그리 잔인한 일을 벌이실 수 있으시단 말이옵니까?”
“잔인? 본궁이 잔인하다? 본궁이 벌인 일은 모두 전하를 위한 일이었네. 허나 자네는? 운 상궁이 자네의 사람이라 죽게 할 수 없다 하였지. 그런 운 상궁으로 인해 조정에 분란이 온다면 그것은 결코 전하를 위한 것이 아닐 걸세. 본궁의 말이 틀렸는가?”
중전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취한 방법은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그녀는 모두 혼을 위해 한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혼은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가 모르게 벌어진 이 잔인한 일들은 혼이 한 일로써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혼 역시 세자시절 자신의 장인인 유희분이 중궁전에 벌인 사악한 짓들도 자신이 한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모르는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막지 못했더라도, 자신의 사람이 한 일은 바로 자신이 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내게 말했었다.
혼이 즉위하자마자 그의 유일한 동복형제인 임해군이 역모 죄로 붙잡혔다. 그의 죄가 드러나자 혼은 임해군을 유배 보낼 수밖에 없는 자신을 탓하며 얼마나 마음 아파했을까?
그런데 임해군이 뒤집어쓴 역모 죄가 다름 아닌 중전 유 씨가 꾸민 일이었다니!
한 나라의 세자라는 자리, 왕이라는 자리는 어쩌면 미영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내가 느끼는 지금 이 아픔보다도 더욱 무겁고 큰 아픔을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뒤늦게 알게 된 미영이의 죽음에 얽힌 진실이 내게 준 충격은 엄청났다. 게다가 혼이 알게 되면 받을 충격까지도 대신 받은 내게는 쓰러질 듯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난 현기증을 떨쳐버리려 잠시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시 눈을 뜬 내 앞에는 여전히 흐트러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중전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
“중전마마의 말씀대로 조정에 분란이 오고, 그로인해 억울한 이들이 피해를 입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옵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시다니요? 소인은 그런 희생을 운 상궁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반드시 운 상궁을 지킬 것이옵니다.”
확고한 나의 답을 들은 중전이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나를 빤히 응시한다.
나는 그녀가 내 대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얼마간의 침묵이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그 사이 난 중전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중전은 대답을 끌면서 다른 한편으로 시선을 이리저리 굴려대고 있었다.
난 늦어지는 중전의 답을 기다리면서 속에서 그녀가 운지를 죽음으로 내모는 대신, 살리는 다른 방법을 찾아주기를 고대했다.
유일하게 그녀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빛만을 응시하면서 말이다.
“흠!”
문 밖에서 짧은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교화당 지밀상궁인 홍 상궁이었다. 기침 소리가 들려오자, 중전이 시선을 나에게 맞췄다.
“어찌 그리 운 상궁을 감싸려드는 겐가? 본궁은 그토록 운 상궁을 감싸는 자네의 의도가 의심스럽네.”
“운 상궁이 소인의 사람이기에 그리한다 말씀드리지 않았사옵니까?”
“아니, 자네의 말대로 운 상궁이 정원군이 보낸 사람임을 알면서도 말이네. 운 상궁이 정원군이 보낸 사람임을 알면서도 끝까지 그녀의 충심을 믿는다는 겐가? 그것이 아니라면……. 운 상궁을 자네에게 보낸 정원군 때문인가?”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임인년(壬寅年)의 일이었지.”
중전의 입에서 임인년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지금 대비인 김 씨가 선조와 국혼을 치르던 해가 떠올랐다. 그 해는 내게 잊을 수 없는 해였다.
혼과 내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그 해.
하얀 메밀꽃이 가득 피어있던 압구정. 첫 눈이 내리던 날 후원에서 맺은 혼과의 약속.
“그 해 첫 눈이 참으로 매서웠지. 그날 전하께서 이른 저녁에 동궁전을 나서신 후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으시어 매우 걱정을 하였었네. 최 내관이 전하께서 후원에 계신다는 말을 전해주었지. 나중에야 자네를 기다리고 계셨음을 알게 되었네.”
혼과 내가 후원에서 만나려고 했었다는 일이 중전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난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중전이 그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어서였다.
“헌데……. 전하께서 자네를 후원에서 기다리시던 그 시각, 자네는 정원군의 처소에 들었었지.”
중전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 날 정원군이 술에 취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가 술에 취했던 이유는 혼과 나 때문이었다. 혼이 나를 만나러 후원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원군은 나를 붙잡았다. 혼에게 가지 못하게 하도록 위해서.
난 그런 정원군의 곁에 함께 있다가 깜빡 잠에 들었었다. 그리고 불이 꺼진 깊은 밤이 되어서야 깨어났었다.
“지난날 자네를 처음 본 건 국혼 날 후원에서였지. 그 뒤, 양화당 나인이라던 자네가 전하의 곁에 있는 것에 난 전하의 안위를 걱정하였네. 그래서 자네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지. 그랬더니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네. 인빈이 자네를 미워하여 퇴선간으로 내쫓은 연유를 말일세. 그 연유가 다름 아닌 자네가 정원군의 첩실이 되는 것을 거절하였기 때문이라지?”
엄밀히 따져보자면 정원군의 첩실이 되는 사실을 거절한 것은 대비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누군가 작정하고 알아만 본다면, 이름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원군의 첩실이 되는 것을 거절한 나인의 이야기에 대해서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임시 궁궐로 쓰이던 행궁은 좁았다. 하루에도 몇 가지씩 진위를 알기 어려운 소문들이 퍼져나가던 그런 곳이었다.
“어찌 그런 자네가 저하와 함께 있었던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네. 허나 의외로 답이 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자네도 사람이니 종친의 첩실보다야, 저하의 후궁자리가 더 탐이 나지 않았겠는가? 아니 그런가?”
나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중전마마께서 잘못 알고 계신 것이옵니다!”
“잘못 알고 있다? 그럼 어찌 그날 후원에서 밤늦도록 자네를 기다리시던 전하를 뵈러 가는 대신, 정원군의 처소에서 그와 함께 있었던 것인가?”
“그건…….”
나는 무슨 말로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오래전 이야기였지만, 내게는 생생했던 그날의 이야기. 첫눈이 내리고 난 혼을 만나러 후원으로 가려고 했었다. 그런 나를 붙잡았던 건 운지의 간청이었다.
중전의 회임으로 궐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선조와 인빈의 사이에 거리가 생긴 것도 바로 그즈음의 일.
이런 가운데 흐트러짐 없는 정원군의 행동이 중전의 회임에 대한 반감으로 비춰질 수 있는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날 밤 정원군에 처소에 들었던 자네는 불이 꺼진 뒤, 밤이 깊어지도록 처소에서 나오지 않았지. 본궁이 알고 있는 이 일이 모두 사실인가?”
중전이 그날 밤의 일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모든 정황은 내게 불리했다. 난 일단 인정하고 중전을 설득하기로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중전마마의 말씀대로 그날 밤 소인이 정원군의 처소에 들었던 것은 사실이옵니다. 그 날 정원군께서 술을 많이 드셨기에…….”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중전이 나의 말을 갈랐다.
“원빈은 그날 밤 정원군과 함께 있던 사실조차 부정하지 않는군. 정녕 정원군과의 옛정을 잊지 못하여 정원군이 보낸 운 상궁을 이리도 감싸는…….”
탁!
중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닫혀있던 교화당의 큰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다름 아닌 중전이었다.
문 쪽을 바라보며 앉아있던 중전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하.”
‘전하?’
중전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난 일어나는 것도 잊은 채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혼이 서 있었다. 닫혀있던 교화당의 문을 직접 열고 들어선 사람이 다름 아닌 혼이었던 것이다.
“전하. 어인일로 기별도 없이 교화당에 납시셨사옵니까?”
정작 교화당의 주인인 나를 대신하여 중전이 일어서 혼을 맞이한다.
그러나 혼은 중전의 존재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은 듯, 변함없이 자신의 시선을 나를 향해 두고 있다.
혼의 눈빛은 세상의 모든 충격을 담고 있다.
나는 그런 그의 눈빛을 바라보며 온 몸이 경직 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은 나를 향해 묻고 있었다.
그 물음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는 없어도 분명 조금 전 나와 정원군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한 중전의 말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 무거운 침을 삼켰다.
지금 우리 사이에 있는 중전의 존재가 아니라면, 난 당장 혼에게 달려가 지금까지 그에게 말하지 못했던 정원군과의 일들을 늦게나마 솔직하게 털어놓게 될까?
‘아니.’
난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지금껏 정원군과 나 사이의 일을 감춰왔던 건, 혼이 그 누구보다 아끼는 아우가 정원군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십 년이 넘는 동안 내가 위기에 빠지는 순간마다 나를 도왔던 정원군이었다.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해서 그의 마음을 가볍게 꺼낼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까지 정원군의 마음이 내게서 떠나기만을 기다려왔다. 그 때가 찾아오면 혼에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으니까.
그러나 내가 미처 알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 전에 이 사실을 알게 될 혼의 마음을.
“전하…….”
뒤늦게 일어선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 나는 놀란 눈을 떴다. 실망과 분노. 배신감이 뒤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혼의 눈빛과 마주한 것이다.
“앉으시지요.”
중전이 혼을 향해 말했다. 그제야 혼은 중전을 돌아보며 냉기 서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과인이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소.”
이 말을 끝으로 혼은 돌아서서 교화당을 떠났다. 당황한 중전도 그런 혼의 뒤를 따라 교화당을 떠나자 난 홀로 남겨졌다.
“원빈마마?”
중전이 나간 후 열려있던 문으로 운지가 들어왔다.
나는 운지를 보며 무언가 입을 열어 말하려다가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나를 운지가 서둘러 부축했다. 그러나 내겐 일어설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알았어. 알아버린 거야…….”
난 중얼거리며 운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졸리지도 않은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계속 혼자 중얼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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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혼이 등장했다고 해서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중전이 미영이를 죽였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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