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연등놀이(1)
흰색
이듬해 창덕궁의 공사가 끝났다. 혼은 초가을 새롭게 지어진 창덕궁으로 이어(移御, 왕이 거처하는 곳을 옮김)했다.
나는 그런 혼을 따라 창덕궁으로 옮겨온 뒤 후원의 교화당에 자리를 틀었다. 그 뒤 줄곧 행궁으로만 불리던 기존의 궐은 경운궁(慶運宮, 현 덕수궁)이라는 정식 이름을 받았다.
왕이 새 궐로 자리를 옮기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간 공식적으로 열리지 않았던 종학이 창덕궁의 새 전각에서 주기적으로 열린 것도 바뀐 것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해서 종친들이 종학을 열심히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학구열에 불탄 몇몇 종친 중 능양군으로 진봉(進封) 된 종이가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종이와 사이좋은 친형제로 자란 명이는 그런 종이를 따라 종종 종학에 나왔다. 나는 명이가 종이를 따라 종학에 나오는 날마다 그들을 교화당으로 초대했다.
“맛있니?”
명이가 온다는 소식에 이른 아침부터 운지와 함께 내가 만든 음식은 간장떡볶이였다.
아이라면 좋아할 것 같아서 열심히 만들었는데, 막상 기쁘게 먹어주길 바란 명이의 표정이 영 시큰둥하다.
떡볶이를 싫어하는 걸까? 아니면 음식 솜씨가 뛰어난 이들이 만든 음식만 먹다가 내가 만든 음식을 먹어서 입에 맞지 않는 걸까?
말을 하지 못하는 명이를 대신해 종이가 입을 열었다.
“맛있사옵니다.”
정좌하고 앉은 종이의 모습이 꼭 처음 조선에 와서 만났던 정원군을 떠올리게 만든다. 능양군이 된 이후 의젓함이 몸에 밴 종이는 내가 알던 예전의 어린 종이가 아니었다.
어느새 16살이 된 종이는 작년 혼례까지 치렀다. 이제 종이는 조선에서는 어엿한 성인이었다.
내 마음 같아서야 어린 시절 보모상궁으로 함께 했던 시절을 들려주고 싶지만, 종이는 더 이상 그 시절의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 종이는 그때의 나와 지금의 원빈이 된 내가 같은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명아, 명이도 맛있었니?”
난 명이와 시선을 맞추며 조심스레 물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명이는 약하지만 고개를 두 번 끄덕이며 답한다.
그제야 난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종이가 그런 명이를 돌아보고, 명이 역시 종이와 눈을 마주치며 두 형제는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종이와 명이의 사이는 너무나도 의좋은 형제였다. 특히 종이는 다른 두 동생에 비해서 막내인 명이를 유독 챙겼다. 궐내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나는 이들을 보면서 남모를 걱정이 생겨났다. 훗날 서로가 친형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종이는 변함없이 명이를 챙겨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내 걱정은 또 다른 곳에도 있었다. 명이는 이제 8살이 되었다. 몇 해 전 처음 명이를 만난 날, 구 씨는 어린 명이에게 내가 친어머니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정원군이 구 씨에게 입단속을 시켜서인지 구 씨는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명이는 줄곧 정원군과 구 씨의 막내아들로 자라왔다.
그런 명이에게 부모로 알고 있던 이들이 부모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은 나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였다.
혼은 명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안다면 놀라지만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어린 명이에게는 그 사실이 큰 상처가 될 것 같았다. 나는 명이가 상처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며칠 뒤면 세자의 친영례가 있는 날이었다.
혼의 유일한 적손으로서 그의 즉위와 함께 정식 세자로 책봉된 이지는 세자로써의 지위를 확고부동하게 지켜나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혼이 명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정원군과 내가 염려하던 일은 조금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명이가 알고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명이가 조금 더 자랄 때까지 밝히는 것을 미루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원빈마마. 능풍도정이 오늘 종학에서 스승님께 칭찬을 받았사옵니다.”
“칭찬이요?”
“예. 필체가 수려하다하여 칭찬을 받사옵니다.”
명이는 아직도 말을 하지 못한다. 그 점을 제외하고는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명이는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로 주로 자신의 마음을 글로 표현해왔다. 그러다보니 남들보다 더 많이 붓질을 해야 했고, 자연히 필체가 늘었다.
“나도 볼 수 있을까?”
다정하게 건넨 물음에 명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화당에 문방사우가 갖춰지고 명이가 붓을 들었다.
잠시 명이의 눈빛이 어른마냥 반짝이더니 슥슥 붓을 놀린다. 순식간에 교화당이라는 글자가 종이 위에 새겨졌다.
처음 보는 명이의 글씨에 나도 모르게 절로 박수가 나왔다. 8살밖에 안 된 아이의 필체치고는 선이 제법 굵게 나오고 한눈에 보더라도 반듯한 것이 스승의 칭찬이 괜히 나온 건 아닌 듯싶다.
명이는 자신이 쓴 교화당이라는 글자가 적힌 종이를 두 손으로 내 앞에 자랑스레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 잘 쓰는구나!”
내 칭찬에 명이의 뺨이 불그스레해졌다. 명이는 종이쪽을 한 번 쳐다보며 눈짓으로 무언가 신호를 보냈다. 종이는 그런 명이의 속마음을 바로 읽어냈는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능풍도정이 그 글을 원빈마마께 드리고 싶다하옵니다.”
“정말요? 고마워, 명아.”
명이가 입을 헤벌쭉 벌리며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런 명이의 미소를 보면서 명이에게 무언가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마구 솟았다.
명이가 이처럼 기뻐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아직까지 명이와 같이 궐에서 살지 못하고, 친어머니라고 나설 수도 없는 나였다.
그런 내게 작은 바람이 있다면, 명이와 정식 모자간으로 재회할 그 날까지 이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모든지 해주고픈 마음이었다.
“능양군. 능풍도정이 좋아하는 게 있나요? 보답으로 좋아하는 걸 선물해주고 싶은데.”
내 물음에 종이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능풍도정은 유등(流燈, 물 위에 띄우는 등)을 좋아하옵니다.”
“유등이요?”
“예. 어린 시절 종종 유등을 강에 띄워 놀곤 했었습니다. 허나 유등이 불가의 의례 중 하나로 쓰인다 하여 근래에는 아버님이 하지 못하게 하시옵니다.”
조선은 유교국가다. 정원군이라면 종친의 신분으로 유등놀이를 즐기는 것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난 종이의 말을 이해하고는 명이에게 물었다.
“명아, 유등을 좋아하니?”
내 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명이의 입에 다시 미소가 퍼진다. 그 미소가 충분히 답이 되어주었음에도 명이는 세차게 고개까지 끄덕이며 확인 도장을 찍어준다.
이런 명이의 모습에 나는 유등을 직접 만들어 선물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
혼의 명으로 세자의 혼례를 정원군이 주관하게 되었다. 임해군 사후 정원군이 종친의 최고 어른이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혼은 정원군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심지어 종종 그를 궐로 불러 정사를 논의했다. 이런 혼의 행동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과거 인빈과 혼의 관계를 들춰본다면, 혼이 즉위한 이상 정원군은 그와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것이 마땅했다.
그럼에도 정원군을 향한 혼의 신뢰는 영창대군과 그 무리를 지지하는 소북을 견제하는 대북의 예의 주시를 받게 만들었다.
나 역시 혼과 정원군의 관계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가 보는 시선은 대북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대북은 정원군을 영창대군과는 또 다른 혼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 존재로서 주시했지만, 난 내가 알고 있는 역사 속의 정원군을 그와 대입해 바라본 것이다.
정원군은 훗날 인조가 되는 종이의 부친이었다. 광해군 시대에 그는 옥사로 셋째 아들 능창군을 잃게 된다.
그 슬픔이 화병이 되어 그를 죽게 만들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역사 속에서는 그런 미래가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하기 힘들다.
몇 년 사이에 혼은 역사가 말한 대로 변하게 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알고 있던 역사가 바뀌고 있는 것일까?
만약 내가 알던 역사가 바뀌고 있는 것이라면 좋은 쪽으로 바뀌고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그들의 역사를 알고 있는 나는 현재로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역사가 좋은 쪽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다리(가체)가 불편하다 하실 땐 언제이시라고 벌써 번듯한 빈마마가 되셨네요.”
교화당에서 풍등(風登, 하늘로 띄우는 등)과 씨름하는 내게 식혜를 들이던 운지가 웃으며 말했다.
어느새 가체는 내 머리에 익숙하게 자리 잡았다. 한창 다른 일에 집중 할 때는 그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나는 운지의 말에 가체에 한 손을 슬쩍 올리며 물었다.
“비뚤어졌어?”
“아뇨.”
나는 운지가 건네는 식혜를 시원스레 들이키고는 말했다.
“오늘 안으로는 끝내야 해.”
운지는 내 말에 교화당을 가득 채운 각각 종류가 다른 등들을 둘러보며 한숨지었다.
“그렇다고 무리하진 마세요.”
“안 돼. 기회는 오늘뿐인 걸.”
오늘 세자의 친영이 끝나고 연회가 밤늦게까지 열린다. 그 연회에 명이가 참석한다.
물론 어린 종친들은 해가 지기 전에 여인들과 함께 퇴궐한다지만, 나는 정원군에게 부탁해서 명이를 교화당으로 부를 생각이었다.
“능양군께선 어린 시절 마마와 인연이 있으시지만, 능풍도정은 아니시잖아요? 왜 그리 능풍도정께 애정을 쏟으셔요?”
“그건…….”
운지에게라면 내가 제주에서 낳은 아이가 명이라는 사실을 밝혀도 될 것 같았다. 나는 길게 눈초리를 늘이며 웃는 운지를 보며 하려던 말을 그만 두었다.
명이가 혼과 나의 아이라는 사실은 아직 정원군과 나만 알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될 사람은 혼이길 바랐다.
아직 혼이 모르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먼저 알려주고 싶진 않았다.
“아픈 아이니까.”
나는 중얼거리며 마무리하던 풍등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프시긴요? 말을 못하시는 것만 빼시면 활달하시고 건강하시던데요. 제 생각에는 그 연유 때문이 아닌 듯한데요?”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운지를 보았다.
“마마께서 이제 어머님이 되셔야 할 차례이신 거죠. 남의 아이만 예뻐하실 수 있나요? 마마께서 전하의 아기씨를 생산하시면 자연히 그 아기씨에게 애정을 쏟으시느라 능풍도정과도 멀어지시겠지요.”
나는 운지의 추측을 한숨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 한숨을 운지가 궁금해 할까, 서둘러 마무리한 풍등 하나를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어때?”
“잘 날아가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렇지? 게다가 이 교화당에서 날리면 연회장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거야. 보여도 별이라고 생각할걸?”
“성공하시길 바라요.”
운지가 웃음을 날리며 성공을 기원했다.
“정원군께서는 어디 계시니?”
“희정당(熙政堂, 창덕궁 편전)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 중이세요.”
“내가 말한 대로 가서 전해.”
“예. 해가 지면 능풍도정 아기씨를 잠시 교화당으로 보내 달라 청해드리면 되는 거죠?”
운지가 내 명을 재차 확인했을 때였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직접 갈게. 직접 가서 정원군을 뵙고 부탁할래.”
“하지만 마마님. 희정당에 전하께서도 계시는데, 전하께서 이 일을 아시면…….”
“그건 걱정 마. 아신다 해도 전하께선 내가 명이를 아끼는 걸 아시니까.”
난 걱정하는 운지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
창덕궁에 진노랑빛 석양이 잔뜩 내려앉았다. 혼이 참석한 종친 연회가 열리는 편전 희정당과 담을 하나 사이에 두고 위치한 성정각(誠正閣).
이곳은 평상시 세자가 학문을 익히는 곳으로 친영이 있는 오늘은 비워져 쓸쓸하게 석양을 맞이하고 있었다.
“원빈마마.”
성정각의 앞뜰에서 만난 정원군이 내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자, 그를 여기까지 안내한 운지가 조심스럽게 뒤로 사라졌다. 정원군과 단 둘이 마주선 나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이리 모시게 되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능풍…… 아니, 명이를 해가 진 뒤에 교화당으로 보내주실 수 있나요?”
정원군은 잠시 고민하더니 내게 무뚝뚝한 어투로 답을 준다.
“내자(內子, 아내)에게 나인을 보내 그리하라 이르겠습니다.”
나는 그의 이러한 태도에 자그마한 섭섭함이 일었다. 그는 이제 나와 한 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워진 것일까? 다르게 생각한다면 나는 왕의 후궁이 되었다.
그를 이렇게 불러서 만나는 것은 분명 궐의 법도와는 맞지 않는 일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서 그는 가까운 친구와도 같은 존재였다. 힘들었던 제주 유배 생활을 함께 동고동락한 사람이었다.
“저……. 군부인께서는…….”
“중궁전에 있을 겁니다.”
형식적인 안부 인사라도 꺼내어 그를 붙잡으려던 나의 의도는 그가 내 말을 끊어버리며 금세 깨져버렸다. 그의 시선은 내 어깨 너머에서 마지막 빛을 내는 석양에 꽂혀 있었다.
“……잘 지내시나요?”
그제야 자신이 내놓은 답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 정원군이 나와 시선을 맞췄다.
“예.”
이 역시 짧은 대답이었다. 나는 풀이 죽은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나와 대화를 지속하고 싶지 않아하는 태도에 자연히 할 말을 잃은 것이다. 나는 그가 이대로 나를 두고 희정당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내 두 눈앞에 보이는 그의 발은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미안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세자저하의 가례가 모두 끝나면, 전하께 능풍도정에 대해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내 마음부터 읽어내는 사람이었다. 내가 무언가 부탁하기도 전에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내게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를 배려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일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아는 그는 뿌리부터 차가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무슨…… 뜻입니까?”
내가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고 답할 줄 알았는지, 정원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친다.
“명이의 존재를 하루라도 빨리 전하께 알려야 한다는 욕심이 앞섰던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요. 명이가 더 클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요. 그 전에 전하와 명이가 가까워졌으면 싶고요. 자연스럽게요. 그 사이에 명이가 다시 말을 하게 된다면 더 좋겠죠.”
“마음이 변하신 겁니까?”
“변했다기보다는……. 사실 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조급하게 밝히고 싶던 일인데……. 이젠 명이가 알고 난 뒤에 받을 상처가 걱정돼요. 명이는 아직 어리잖아요? 전하께서는 명이가 친아들이라는 사실을 아시면 놀라지만 기뻐하시겠지요. 하지만 명이는……. 가족으로 알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또 헤어져야 할 테니까요. 그래서 아직 어린 명이가 받을 상처가 겁이나요.”
나는 내 가슴속에 홀로 묵혀온 심정을 정원군에게 털어놓았다. 정원군은 가만히 서서 그런 내 말들을 다 들어주었다. 그 뒤 그는 내게 짤막한 한마디를 건넸다.
“그것은 어머님의 마음일 겁니다.”
그는 내 심경의 변화에 대한 답도 알고 있었다.
“그럼 명이의 일은 원빈마마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는 이 말을 끝으로 돌아서려고 했다. 나는 그를 붙잡았다.
“군부인께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오늘날까지 명이를 키워주셔서요.”
내 말에 정원군은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말했다.
“내자는 그 인사를 받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네?”
“그녀는 지금껏 명이가 저와 마마의 소생이라 믿기에 오늘날까지 그 아이를 키워온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인사를 받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원군의 말대로라면 구 씨는 아직도 정원군과 나의 사이를 오해하고 있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정원군도 굳이 그 오해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들 부부의 사이는 여전히 냉랭한 듯싶다. 나는 구 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정원군을 향한 구 씨의 앙칼진 태도가 모두 애증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군부인께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주세요. 겉으로 보기엔 매정하신 분이시지만, 오늘 날까지 명이를 키워주신 것을 보면 다 정원군마마를 위하는 마음에서…….”
“원빈마마.”
정원군이 또 한 번 내 말을 끊었다.
“저 역시 내자가 그리 매정한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썩 훌륭하진 못해도 좋은 품성을 지닌 여인입니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정원군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내 눈을 향해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시선을 보낸다.
“허나 마마와 제가 처음부터 인연이 아니었듯, 내자와 저 역시 인연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가 나와 자신의 인연이 있어서는 안 되었던 인연이라고 말한다.
그는 어느새 자신의 마음 안에서 나를 그릇된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몰아낸 것일까? 친구의 인연조차도 남겨두지 않은 채, 그렇게 나를 밀어낸 것일까?
그의 말에 섭섭함이 그대로 드러난 내 두 눈과 마주하며, 정원군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후회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잠시 깨물더니 시선을 먼 곳으로 두며 말했다.
“저의 내자는 제 친형님이신 신성군께서 마음에 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저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허나 아바마마의 뜻으로 그녀는 저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지요. 그때까지도 저는 부부의 연이란 하늘이 맺어주는 것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란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정원군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왜란이 일어나고 의주로 가는 피난길에 형님께선 중병을 알아 사경을 헤매셨지요. 그때 형님께서는 숨을 거두시기 직전, 내자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때 저는 알게 되었지요. 형님께선 그녀가 저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하여 잊으신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모르게 가슴 깊숙이 자신의 마음을 숨겨 오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때 저는 그런 형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돌아가신 형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신성군과 구 씨의 얽힌 이야기 속에서 나는 정원군의 마음을 보았다. 그는 내가 혼과 맺어진 것을 보면서 과거 그의 친형 신성군이 자신과 구 씨를 바라보던 시선을 느낀 것이다.
그러기에 스스로 나와 그가 인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나고 12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가 나를 향한 마음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나는 지금 변치 않고 굳건하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과 마주한 것이다.
‘우린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을 거야. 친구가 되고 싶다는 건 내 마음의 욕심일 뿐이니까.’
석양을 머금고 야릇하면서도 미묘하게 변한 그의 눈빛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눈빛에 내 시선을 얽매였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눈빛에 실려 여지없이 드러난 그의 마음으로부터 나는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미안함일까? 그를 보며 고개를 돌릴 수 없는 내 감정이 단순히 미안함이길 바랐다. 그렇다면 그 감정은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죄책감이 쌓여 나타난 것일 테니까.
그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면서 잠시나마 그의 마음을 받아들여줄 수 있다면 나는…….
“대전 김 상궁이 아닌가?”
갑자기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기둥에 몸을 숨긴 채 얼굴만 빠끔 내밀어 나와 정원군을 바라보던 상궁 김개시가 있었다. 그런 개시를 발견하고 부른 것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신 숙원이었다.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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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광해군은 창덕궁의 공사가 끝나고 딱 두달 머물다가 다시 행궁으로 돌아갔다지요. 그러니... 이 시기에 창덕궁에 계속 머물렀다는 것 역시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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