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가례(3)
흰색
조현례(朝見禮, 새로 간택된 빈이 가례 다음날 시부모를 뵙는 예식)를 올리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대비전을 찾은 나는 제일 먼저 대비에게 큰 절을 올렸다.
그 사이 양화당 상궁이 된 운지가 우리의 주변을 가득 에워싼 대비전 나인들의 도움을 받아 폐백을 대비에게 받쳤다.
“지난 밤 좋은 꿈을 꾸었느냐?”
나는 귀 따갑게 들은 홍 상궁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시선을 땅에 두고 형식적인 답을 꺼냈다.
“예. 대비마마.”
내 입에서 대답이 나오자마자 대비가 큰 웃음을 터트렸다.
“변 상궁 보았는가. 이제 보니 원빈이 재치가 있군.”
나는 고개를 들어 가까운 곳에 서 있는 변 상궁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대비가 웃기 때문인지 살짝 입 꼬리를 들어 잠깐 웃었을 뿐, 곧바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에 반해 나를 처음 보는 대비전의 다른 나인들은 큭큭거리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아마도 대비가 환히 웃고 있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러나 대비전 문 상궁은 아니었다. 그녀는 변 상궁의 옆에 서서 웃음을 참는 궁녀들에게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내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알지 못했다. 이제 답을 알고 있는 것은 운지였다. 난 내 옆에 앉은 운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운지는 대비를 의식해서인지 내 눈짓에도 답을 주지 않았다. 눈짓으로 운지를 닦달하는 나를 보며 대비가 먼저 답을 내놓았다.
“원빈이 좋은 꿈을 꾸었다 하니 곧 좋은 소식이 있겠구나.”
뒤늦게 대비가 말한 좋은 꿈이 태몽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내 얼굴이 붉어졌다. 대비는 또 한 번 소리 내어 웃더니, 손을 들어 주변을 물렸다.
폐백을 위해 대비전을 가득 메우고 있던 나인들이 문 상궁과 함께 밖으로 나가고 이제 변 상궁과 운지만이 나와 대비 곁을 지키고 앉아있었다.
“자네는 양화당 상궁인가?”
여유가 생긴 대비가 운지를 향해 물었다. 운지는 대비 쪽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예, 대비마마. 운 상궁이라 하옵니다.”
“운 상궁이라……. 정원군이 천거한 이가 바로 자네였군.”
“예, 대비마마.”
“그래, 앞으로 충심을 다해 원빈을 보필하게. 알겠는가?”
대비와 운지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며 나는 어젯밤 혼이 내게 주었던 우전쌍옥을 떠올렸다. 난 오래전 우연히 대비전에서 보았던 쪼개진 옥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이 정말로 중전이 잃어버렸다는 공빈의 옥패라면 혼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비가 그것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몰라도 혼에게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운지와 대비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내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대비마마.”
“왜 그러지, 원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디 해보거라.”
“잠시 주변을 물려주시겠어요?”
대비는 의외라는 기색이다. 아마도 내가 주변을 물리고 할 대화라고는 나인이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운지는 나가도 변 상궁은 나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변 상궁은 이 대비전에서 유일하게 원빈인 내가 과거 나인 김경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부탁드릴게요.”
부탁드린다는 내 말에 대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변 상궁에게 나가라고 명했다.
변 상궁은 나와 대비를 단 둘만 남겨두는 것이 신경 쓰이는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밖으로 나갔다. 운지도 그런 변 상궁을 뒤따라 나가고, 이제 대비전에는 대비와 나만 남게 되었다.
“조현례부터 시어미에게 당돌한 요구를 하는 며느리는 아마 조선에 너 하나일 것이다.”
다행히 대비는 기분이 좋아 보인다.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을 꺼낼 상황으로써는 그리 썩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대비마마.”
“응. 그래, 말해보거라. 경민아.”
“예전에……. 제가 대비전에서 본 향옥 말입니다.”
향옥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대비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눈에 힘을 준다. 나는 대비가 내가 말하는 향옥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고 생각하고 말을 이었다.
“대군마마께서 떨어뜨리셔서 제가 주워들었던……. 쪼개진 그 옥이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예상했던 목록에 들어있었던 대비의 반응 중 하나였지만, 막상 모른다고 딱 잡아떼는 대비 앞에서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나 하자고 나를 찾아올 생각이라면 조현례를 끝으로 다시는 대비전에 발도 들이지 말거라.”
대비는 자세까지 틀어 앉으며 내게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나는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대비마마. 그 옥패는 분명 전하의 옥패가 아닙니까. 어째서 대비마마께서 가지고 계셨는지…….”
“네가……. 그것이 주상의 옥패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
내가 혼의 옥패라는 사실을 지적하자 대비가 놀란 얼굴로 다시 나를 돌아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또한 그것이 공빈마마께서 전하께 내려주신 옥패이기에, 전하께서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공빈의 옥패…….”
대비는 그 옥패의 원래 주인이 공빈이었다는 사실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걸 어디서 구하신거예요?”
그러자 대비가 말했다.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주상의 옥패라고. 그러니 주상께 받았다.”
“예?”
“주상께 받았다. 헌데 네가 그것에 대하여 왜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냐?”
대비의 말을 듣고 보니 의문만 깊어졌다. 혼은 분명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정확히 그 옥패를 잃어버린 건 고쳐보겠다며 가져갔던 중전이었지만 말이다.
“그 옥패의 반쪽을 아주 오랫동안 지니고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주상께 들었단 말이냐?”
“예.”
“맞다. 왜란이 일어났던 해에 함경도 회령에서였지. 당시 세자이시던 주상께서 아비와 헤어져 길을 잃었던 나를 구해주신 일이 있었다.”
“전하께서요?”
그것은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 왜적이 어린 나에게 달려드는 것을 검을 들고 나서 구하셨지. 그때 주상의 허리춤에 매달린 옥이 깨어지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상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나시고 쪼개진 옥패의 반쪽만 남아 있더구나. 그래서 그것을 소중히 지녀오다 돌려드린 일이 있었지.”
여기까지 대비의 설명을 듣던 나는 오래전 혼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 ‘…… 어떤 계집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그래, 계집아이가 하나 길거리에 앉아 울고 있었다. 그런데 말을 탄 왜놈 하나가 그 계집아이를 발견하고는 칼을 빼어들고 달려왔지. 나는 그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검을 뽑아들고 말을 타고 달려드는 왜적 앞으로 나섰지.’ ]
혼이 내가 있던 2013년으로 건너오기 직전, 바로 아빠와 함께 하던 그 순간에 있었다던 그 계집아이.
나도 물론 1592년에 가서 보았다. 아빠가 목숨을 걸고 구했던 그 여자아이. 어린 시절 잃어버린 내가 떠올라, 아빠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는 그 여자아이의 이름은…….
[ ‘인아야!’ ]
“외람되지만 혹시 대비마마의 함자가……. 인아……세요?”
그러자 대비가 날 보며 반문했다.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나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국혼 날. 딱 한 번뿐이었지만 대비의 부친 김제남을 본 일이 있었다.
1592년에 보았던 김제남은 그저 평범한 양반의 옷차림이었지만, 그때의 김제남은 달랐다. 그는 왕후의 자리에 오른 딸을 둔 아버지로서 붉은 조복을 차려입고 들뜬 얼굴이었다.
그때 보았던 김제남의 얼굴과 왜란 당시 딸을 찾아 헤매던 김제남의 얼굴이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대비마마가……. 제 아버지가 구했던 그…….”
“아버지라니? 넌 조실부모하였다 들었다만.”
나는 충격으로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며 대비에게 말했다.
“그 옥패가 깨어지던 날을 기억하세요?”
“물론이다. 똑똑히 기억한다.”
“그 날, 전하 외에도 대비마마를 구하기 위해 나섰던 한 사람이 더 있지 않았나요? 왜인을 닮았지만 왜인이 아니었던…….”
나의 목소리가 떨려오기 시작했다.
“네가 그것까지 어찌 아는 것이냐?”
놀란 대비의 얼굴을 보며 나는 어깨의 힘이 쫙 빠지는 느낌이었다. 서 있는 상태였다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을지도 모를 충격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분이 제 아버지세요. 대비마마.”
“세상에…….”
나에게서 사실을 들은 대비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그런 대비의 얼굴을 보면서 확신했다. 분명 아빠가 죽던 그 날 아빠가 구한 여자아이는 대비가 분명했다.
내 눈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를 본 대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랬었구나. 나를 구하다 죽은 이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었다만, 네가 그 이의 여식이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알았더라면 내 진작……. 아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네게 고마움을 표해야 하겠구나. 그 날로 넌 아비를 잃지 않았느냐.”
아버지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그 날로 나의 인생이 바뀌었다. 아빠의 죽음으로 선택한 건, 바로 이 조선으로 오는 것이었으니까.
그날, 아빠는 절체절명의 순간 두 사람을 모두 구하고 자신이 희생 되는 길을 선택하셨다. 혼을 미래로 보내고, 어린 대비도 구한 것이다.
만약 그때 어린 대비가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아빠는 혼만 구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혼이 어린 소녀를 구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는 일조차도 생기지 않았었겠지.
“지난날의 일로 나만 운명이 바뀌었던 것은 아니었나 보구나.”
대비는 지금 내가 흘리는 눈물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녀는 앉아있는 자리에서 손이 닿는 거리에 놓인 작은 자개함을 가져다 내 앞에 놓았다.
그리고는 자개함을 열어 그 안에서 비단주머니를 꺼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주머니가 안에 쪼개진 옥이 들어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생각은 맞았다.
대비는 그 비단주머니 안에서 쪼개진 두 개의 옥을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어 하나로 맞추었다.
그 곳에는 혼이 말한 대로 ‘광해군 혼(光海君 琿)’이라는 그의 작호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분명 이 쪼개진 옥은 공빈의 옥패였다.
대비는 내 손에 들린 옥패를 보며 중얼대듯 말했다.
“그 날 이후, 그 쪼개진 옥패의 반쪽을 손에 넣었던 나는 가슴에 품고 마음에 품었다. 헛된 욕심으로 반드시 보은을 하겠다 했었지. 죽은 네 부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 그리 잊었다 하더라도 주상께는 아니었다. 주상께는……. 반드시 보은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었지. 그 마음이 보은의 마음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이제 중요치 않은 것이 되었다만, 난 주상이 보위에 오르신 것만으로도 내 보은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옥은 내게 있어……. 그 보은을 이루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그만큼 내게 있어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경민아.”
대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너와 나의 인연이 처음부터 우연은 아니었던 것 같구나. 네가 나의 외가의 성을 달고 주상의 후궁이 된 것 역시 필연이라고만 볼 수는 없겠지. 이미 잃은 부친에 대한 슬픔을 갚아주기에는 부족할 것이라 생각된다만, 나와 가족의 연을 맺은 것으로, 그로 인해 주상께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으로 보은을 한 것으로 해주지 않겠느냐?”
나는 눈물을 닦았다. 분명 그 날 아빠는 돌아가신 것이 맞지만 아니기도 했다. 바로 그 아니라는 가능성이 날 조선으로 오게 했고, 날 지금의 자리에 있게 했다.
그리고 난 아빠와 다시 만날 것이다. 그러니 아빠는 죽은 것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보은이라니요. 망극하옵니다. 대비마마.”
“나를 원망치 않는 것이냐?”
“전혀요. 대비마마께서는 위험한 상황에 놓인 어린아이셨고 전하와 저희 아버지께서는 그런 대비마마를 구하신거예요. 그건 당연한 거예요.”
“네가 그리 말해주니 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구나. 고맙다. 고마워.”
“망극하옵니다. 하온데 대비마마. 그 옥패를 전하께서 주신 것이 맞나요?”
“그렇다. 전하께서 주셨다.”
“제가 듣기로는 전하께서 그 옥패의 반쪽을 잃으셨던 날부터 쭉 대비마마께서 지니시다가 돌려주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랬다. 돌려드렸었지. 헌데 전하께서 다시 내게 주신 것이다.”
대비의 말에서 의문을 느낀 나는 물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언제 전하께서 대비마마께 주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대비가 잠시 망설였다. 서로 모든 것을 털어놓은 상황에서 대비가 굳이 혼이 언제 주었는지 알려주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다.
그런데도 대비는 망설이고 있었다. 무엇이 대비를 이처럼 망설이고 고민하게 만든 것일까? 고작 언제 받았는지를 묻는 내 말에 말이다.
한참만에야 대비가 내게 답을 주었다.
“선대왕전하께서 승하하시던 날 밤이다.”
“선대왕전하께서요……?”
“그렇다. 그날 밤 개시를 통해 대비전으로 보내셨다.”
개시라면 개똥이다. 선조가 승하하던 날 밤, 혼이 개시를 통해서 쪼개진 옥패를 대비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대비의 말대로라면 혼과 대비, 둘 중에서 누군가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둘 다 내게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혼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어머니인 공빈이 직접 그의 작호와 이름을 새겨 내린 소중한 옥패였다.
다시는 찾지 못할 것이라 여기던 그것을 돌려받았는데, 반쪽도 아니고 쪼개진 두 옥을 모두 대비에게 주다니? 그럼 대비가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일까?
대비에게 이 옥은 보은을 상징한다. 자신을 구해주었던 혼에 대한 보은을 갚기 위해 지녀왔던 그런 옥이었다.
그 보은을 갚았는지는 몰라도, 그 옥을 혼에게 돌려준 그 순간부터 그녀가 이 옥을 지녀왔던 책임감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었다.
그러니 굳이 혼이 주었다고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만약 거짓말이라면 내가 이 사실을 혼에게 말하게 되고, 잃어버린 옥을 찾으러 혼이 대비를 찾아 올 테니 말이다.
‘혼과 대비가 서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걸까?’
이들이 오해하도록 상황을 만든 다른 누군가인 제3자를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밤 혼은 중전이 옥패를 지니고 있다가 잃어버렸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혼과 대비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의 그 이면에는 중전이 있다고 확신했다.
선조가 승하하던 날 밤, 중전은 개시를 통해 혼이 보냈다며 대비에게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리고 하필 옥패를 보낸 사람이 대비였으며, 선조가 승하하던 날 밤이었을까?
선조가 승하하던 날은 역사적으로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후대에는 그날 밤에 대한 많은 야사들이 전해진다.
아빠는 그중 한 야사를 주목하고 계셨다. 그것은 바로 선조가 죽기 전 인목왕후에게 유지를 남겼다는 것이다.
그 유지의 내용은 세자인 혼을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물려주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영창대군이 장성할 때까지 인목왕후가 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게 되고, 자연히 외척인 김제남 일가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가 정권을 잡게 되는 상황이 마련된다.
그러나 그 유지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선조가 마지막 숨을 힘겹게 내쉬며 인목왕후에게 내렸다는 그 유지, 그 유지는 정말로 존재했던 것일까?
‘설마!’
그 유지가 정말로 존재했다고 가정한다면 마땅히 영창대군이 보위에 올라야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인목왕후는 선조가 승하하자마자 그 다음날로 광해군을 즉위시켰다. 그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조금 전 대비가 했던 말이 또렷이 떠올랐다.
[ ‘…… 난 주상이 보위에 오르신 것만으로도 내 보은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
선조의 유지가 존재했다면, 그리고 그 내용을 혼이 알게 되었다면……. 혼은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는 그는 분명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내놓고 스스로 물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중전은 다르다. 가문의 부귀영화를 위해 혼이 보위에 오르길 바라는 중전에게는 절대 그 유지는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보은의 의미를 담은 공빈의 옥패. 중전이 옥패를 대비에게 보내 그 유지를 막았던 것이라면?
선조가 승하한 다음날 즉시 혼을 즉위시킨 인목대비의 행보는 역사적으로 많은 의문을 낳았다. 그 이면에 이 옥패가 존재했던 것이라면?
나는 상상 속의 선조의 유지를 떠올리며 대비와 눈을 맞췄다. 그때, 대비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 두 눈에 꽂혔다.
대비는 인상을 찡그린 채 시선으로 내게 묻고 있었다. 옥패에 대해 캐묻는 내 물음 뒤에 숨겨진 진짜 이유를 말이다.
그리고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그녀는 분명 궁금해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나는 존재여부조차 불확실한 유지를 대비에게 물을 마음은 없었다.
나 스스로도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선조의 유지에 대해 묻는다고 해서 대비가 쉽사리 알려줄 것 같지도 않을뿐더러, 그 진위 여부를 내가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비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선조의 유지의 존재의 여부를 떠나 대비는 영창대군에게 왕위가 돌아가도록 충분히 노력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신하들의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전에 혼을 즉위시켰다. 그러한 대비의 행동에 공빈의 옥패가 영향을 끼쳤다면…… 그것을 보낸 중전의 의도는 명확하다.
‘혼의 즉위를 도울 것.’
나는 무거운 침을 삼켰다. 지금으로서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대비는 더 이상 그 날의 일에 대해 나에게 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 날의 일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대비에게 묻는 것보다는 그 옥패를 대비전으로 가져온 개시에게 묻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비전을 나온 나는 복잡한 생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눈부신 아침햇살이 곧바로 나를 맞았다.
나는 햇살에 이마를 찡그리며 잠시 휘청거렸다. 곁에 서 있던 운지가 재빨리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나는 운지의 부축을 거절하며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린 채 눈부신 햇살로 다시 눈을 들었다.
공빈의 옥패가 대비에게 있다는 사실을 혼에게 말해줘야 할까? 그 사실을 듣게 된다면 혼은 옥패를 찾으러 대비를 찾아올까?
그럼 대비는 혼에게 그 날 밤의 일을 털어놓게 될까? 그렇다면 중전이 벌인 일이었든 아니든 무언가 밝혀지게 될지도 모르는데……!
혼은 왕이 되었다. 그것은 내가 알던 역사 그대로였다. 그가 왕이 되기까지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은 일들이 숨어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건 정해진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괜히 내가 이 일을 파고들었다가 행여나 역사가 바뀌는 일이라도 생길까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제 결론은 하나였다. 나만 입을 다문다면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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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설마 중전이... 착하고 예쁘신 중전이...에이~ 아닐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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