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입궐하다(2)
흰색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실눈을 뜨고 천장을 응시했다. 천장에 비친 검은 그림자가 썰물처럼 내가 있는 곳을 향해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누운 상태에서 고개를 문 쪽으로 돌렸다. 잠이 덜 깬 내 눈에 흐릿한 사람의 형체가 잡혔다. 나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혼이었다. 흰색 단령을 입은 혼이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는 잠에서 깬 나를 보며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잠들었었느냐?”
“잠깐 잠들었었나봐…….”
“잠깐이었다니, 다행이로구나.”
‘다행?’
혼은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나를 두고 입고 있던 단령을 벗었다. 단령 안에 감춰진 그의 저고리와 바지가 드러나자,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혼아?”
그는 벗은 단령을 한쪽에 놓아두고는 나를 보며 물었다.
“왜 그러느냐?”
“불은…… 꺼야지.”
스스로 말해놓고도 민망해지는 말이다. 하지만 혼은 내가 느낀 이런 민망함을 전혀 모르는지 되려 나에게 묻는다.
“불을 끄라니?”
“그게…… 밖에 홍 상궁도 있을 거고…… 최 내관도 있지 않아?”
다른 사람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적어도 그들의 존재가 불을 꺼야 하는 이유는 되어줄 것 같았다. 그런데 돌아온 혼의 대답은 또다시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분명 최 내관을 보내 채비하라 일렀거늘, 피곤하여 출궁하기 싫은 것이냐?”
“출궁?”
그의 입에서 나온 출궁이라는 단어가 낯설기만 하다. 나는 오늘 출궁이라는 단어를 들은 기억이 없었다.
여전히 그가 한 말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나를 보며, 혼이 뒤늦게 사태 파악에 나섰다.
그때까지도 존재감 없이 방 한구석에 내버려져 있던 주안상이 첫 번째로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다음은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도록 준비된 이부자리.
마지막으로 혼은 그 이부자리 위에 앉아 있는 속이 비칠 정도로 얇은 적삼 차림의 나를 보았다. 그제야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혼이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오늘 밤은 궐 밖에 나가는 대신 양화당에서 머물러야겠구나.”
그의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걸렸다. 난 모든 오해의 시작이 홍 상궁이 출궁 준비를 하라고 혼이 보낸 내관의 말을 잘못 해석하면서 벌어진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모든 오해의 시작이 홍 상궁으로부터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이제 그 오해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나 혼자가 되어버렸다.
혼은 태연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며 자신이 입은 저고리의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방 안을 환히 밝힌 등잔불 아래 풀어진 그의 저고리 사이로 속적삼이 드러났다.
이를 본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난 재빨리 두 손을 뻗어 그의 옷고름을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아니야! 나갈 거야! 나 출궁할 거라고!”
잔뜩 붉어진 얼굴로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 나를 보며 혼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후로도 그의 웃음소리는 오랫동안 양화당을 떠나지 않았다.
또각또각.
우리가 나란히 앉은 말은 달리지 않고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말 위에서 잔뜩 토라진 얼굴을 한 나는 어깨에 걸친 장옷을 단단히 여미며 허리에 힘을 주었다.
최대한 혼의 가슴에 등을 기대지 않는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말 위에선 상당히 부담되는, 힘든 자세였다.
“화가 풀리지 않았느냐?”
입이 뿌루퉁하게 나와 앞만 응시하는 나를 보며 혼이 묻는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답하지 않았다.
출궁 준비를 ‘은밀히’ 하라는 혼의 전달을 ‘은밀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으로 알아들었던 홍 상궁. 그로 인해 벌어졌던 나의 오해.
혼은 그것을 알고서도 내 앞에서 옷을 벗는 장난을 쳤다. 난 그런 돌발 행동에 당황해 얼굴이 홍당무마냥 빨개졌고, 혼은 웃으며 한참 동안 나를 놀려댔다.
그 때문에 토라진 나는 지금까지도 마음을 풀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토라진 것이야?”
“흥!”
일부러 들으라고 콧바람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는데, 혼은 그런 나를 보며 웃음을 터트린다. 그런 그가 더욱 얄미워진 나는 그의 가슴을 팔꿈치로 살짝 쳤다.
그만 웃으라는 의사였다. 이런 내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혼의 웃음이 그쳤다. 그러나 그는 웃음을 그치자마자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오랜만에 달려보자꾸나.”
“아, 안 돼!”
난 고삐를 잡아 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혼이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경민아, 너는 세월이 흘러도 어찌 이리 어린아이 같으냐?”
난 또 다시 그의 장난에 당한 것이다. 매번 그의 장난에 속을 때마다 다짐하고 다짐해도 결국은 속게 된다. 정작 속은 건 나인데 그가 얄미워졌다.
“신첩이 어린아이 같아서 퍽이나 좋으시겠사옵니다.”
여전히 나의 토라진 얼굴이 풀린 기색이 없자, 혼은 갑자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이번에도 살짝 놀랐지만, 난 애써 담담한 척 앞만 내다보았다. 그러자 날 끌어안은 혼이 내 귓가에 대고 낮고 고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경민아, 과인의 원빈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살짝 고개만 튼다면 금방이라도 내 입술에 닿을 그의 입술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나는 무거운 침을 삼켰다.
이번에는 기필코 그의 장난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각오도 했다. 난 콧방귀를 뀌며 혼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신첩은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그러니 친히 신첩에게 알려주시옵소서.”
내 말이 끝난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혼이 지나다니는 사람은 우리뿐인 길 한복판에서 말을 세웠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내가 그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쳤다. 당황한 나는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뒤로 움직였다.
그러나 혼은 이런 나의 행동을 미리 예상했는지, 자신의 단단한 팔로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든다.
내 입술에 닿은 그의 입술에 승리의 작은 미소가 그려지고, 아쉬움만 남긴 짧은 입맞춤이 끝났다.
혼은 지그시 나를 바라보며 방금 전 입술을 맞췄던 내 입술을 한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여기 있구나. 과인의 원빈이.”
그의 이 한마디를 듣는 순간, 얄미움으로 가득 찬 내 마음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이제 내 시선은 그의 입술에 꽂혔다.
달짝지근한 뒷맛을 남긴 짧은 입맞춤의 아쉬움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다. 혼도 이런 내 시선을 읽었는지 손끝으로 내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의 입술이 다시 내 입술로 가까워지는 순간, 난 살포시 두 눈을 감았다.
“전하.”
갑자기 나타난 최 내관의 목소리에 난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혼의 품에서 떨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혼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내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장옷을 내 머리끝까지 끌어올려 덮어버리더니,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난 장옷에 얼굴을 숨긴 채, 새가슴처럼 파닥파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이런 나와는 다르게 혼은 태연스럽게 최 내관과 대화를 주고받는다.
“알아본 것은 어찌 되었느냐?”
“예, 전하. 소인이 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의 정문)으로 가보니 그곳을 지키는 무예별감(武藝別監, 궁궐 문 옆에서 숙직하는 군관)의 수가 많았사옵니다. 이대로 돈화문으로 입궐하시오면 두 분 마마를 알아보는 이들이 많을 것이오니, 다른 문으로 입궐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그렇게 하라.”
조금 뒤 최 내관이 사라진 것을 알아챈 난 장옷 사이로 고개를 들었다.
“돈화문? 창덕궁으로 가는 거야?”
“그렇다.”
“이 시간에 왜?”
“낮에는 보는 이가 많지 않느냐? 그러니 편히 둘러보는 것은 어렵겠지.”
“그럼 창덕궁을 둘러보려고?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았잖아?”
“공사가 끝난 곳도 있다.”
혼이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창덕궁의 후원. 아기자기한 정자들과 크고 작은 연못들이 곳곳에 가득한 조선왕조 왕실 가족들의 쉼터.
아직 공사가 덜 끝난 창덕궁의 전각들과 다르게 후원의 공사는 모두 마무리가 되어 있었다. 혼은 창덕궁 후원에서도 유일하게 전각이 세워진 곳으로 나를 데려왔다.
어수당(魚水堂).
어수당은 달빛을 받아 흡사 용궁을 보는 듯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 이 별당의 오른편으로는 큰 연못이, 왼편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나는 어수당의 주변을 둘러보며 오래전 아빠와 왔던 추억을 떠올렸다. 추억 속의 후원과 지금 내가 있는 1609년의 후원은 두 개의 연못만 그대로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크게 달랐다.
먼저 내 기억 속에 어수당 오른편에 있는 큰 연못의 이름은 애련지(愛蓮池). 연꽃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지닌 이 연못의 이름을 지은 것은 숙종이라고 했다.
이 애련지에 꼭 어울리는 정자인 애련정(愛蓮亭)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애련정이 숙종 때 지어진 건물이었던 것일까?
숙종은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뒤의 왕이다. 그걸 감안하고 본다 하더라도 내가 미래에서 본 애련지와 지금의 애련지는 차이가 많이 난다.
지금 내가 보는 애련지의 한가운데에는 자그마한 섬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섬에는 아주 작은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미래에서 보았던 애련지에는 섬도, 그 위에 정자도 본 기억이 없었다. 혼이 먼저 말 위에서 내리고 다음으로 내 손을 잡아 말 위에서 내려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제 우리는 어수당 앞에 섰다. 나는 후원에서도 꽤 큰 규모인 어수당의 현판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 기억 속 미래에서는 이 어수당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몇 그루의 나무를 제외하고는 건물이 있었다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무엇을 그리 생각하느냐?”
혼이 그런 나를 보고 물었다. 난 고개를 저으며 혼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아니, 아무것도. 그런데 여기는 왜 온 거야?”
내 물음에 혼이 다짜고짜 내 손부터 잡는다. 그리고 어수당 쪽으로 이끌며 말한다.
“따라오면 알게 되느니.”
혼의 얼굴에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웃음이 가득하다. 그는 내가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 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아직 나는 그가 내게 보여주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따라 어수당의 계단석을 올랐다. 어수당 앞에서 혼은 날 잡았던 손을 놓고는 두 손으로 굳게 닫혀 있던 어수당의 문을 힘껏 잡아당겨 열었다.
열린 문 안으로 달빛이 빗살무늬를 그리며 쏟아졌다. 나는 그 빛을 통해 어수당의 내부를 살폈다.
하지만 어수당의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에, 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만으로는 컴컴한 건물의 안을 모두 살피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여기에 뭐가 있어?”
혼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어수당 안으로 성큼 발 하나를 옮긴다. 나도 그런 그를 따라 어수당의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혼이 단순 내게 보여주려는 것은 어수당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그는 익숙한 걸음으로 쭉쭉 걸어 들어가더니 어딘가에서 걸음을 잠시 멈췄다.
그가 서 있는 곳 앞에는 혼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병풍이 서 있었다. 혼은 그 병풍 앞에서 뒤따르는 날 잠시 돌아보더니, 병풍을 돌아 그 뒤로 들어갔다.
그 뒤에는 또 다른 문이 하나 숨겨져 있었다. 문의 위쪽에는 자그마한 현판이 하나 달려 있었다. 병풍에 가려져 틈새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달빛을 의지해 난 그 현판에 쓰인 글자를 읽었다.
교화당(蕎花堂).
나는 그 의미를 곱씹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혼이 교화당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겨우 지나갈 정도의 복도가 기역자 모양으로 나 있었다. 다행히도 복도의 왼편의 창문은 모두 열려 있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좁은 복도를 푸른빛의 비단으로 뒤덮고 있었다. 나는 그 비단이 구겨지기라도 할까 발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이처럼 내가 망설이며 걸음을 내딛길 주저하는 사이, 혼은 복도 끝에 있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의 뒤를 따르려던 나는 열린 창문 밖으로 보이는 작은 연못에 시선을 빼앗기고 멈춰서고 말았다.
달빛이 반사되는 연못은 마치 물의 요정이 톡톡 튀어나올 듯 아기자기 느낌을 주고 있었다.
‘예쁘다.’
밤의 창덕궁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밤에 보는 궁궐이 이런 색다른 느낌을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선조와 의인왕후가 승하하고 혼이 즉위식을 치른 행궁. 그곳은 왜란 후 모든 궁궐이 불타버렸기에 어쩔 수 없이 종친의 집을 빌려 행궁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그 행궁에도 후원은 있었다. 그러나 창덕궁의 후원과는 결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이곳 창덕궁 후원은 진짜 궁궐의 후원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오로지 왕을 위해 지어진 그런 공간이었다.
한참 동안 연못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던 나는 문득 ‘교화당’의 의미를 되새겼다. 교화를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그냥 의미만 차용해서 이름을 지은 건물인 걸까? 나는 그 답을 찾기 위해서라도 혼이 지나간 복도의 끝으로 향했다.
“혼아, 여기 이름이 왜 교화당인 거야?”
난 혼이 열고 들어간 문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그러나 교화당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또 다른 어둠 속에 봉착했다. 그곳에서 혼의 존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혼아, 어디 있어?”
난 혼을 찾았다. 그때, 닫혀 있던 오른편 창문이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리며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곳에 혼이 있었다. 혼이 창문을 열었던 것이다. 혼은 열린 창문 밖을 잠시 내다보더니 내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너를 이리로 데려온 이유이다.”
그는 내게 한 손을 내밀었다. 내게 가까이 오라는 의사표현이었다. 나는 달빛이 그와 나 사이에 수놓은 은빛 은하수 길을 따라 혼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열어둔 창밖을 내다보고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달빛이 비추는 야트막한 언덕. 그 언덕은 새하얀 꽃, 아니다. 달빛을 받아 신비로운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메밀꽃들이 한 가득 피어 있었다.
“왜 이곳이 교화당이라 불리는지 알겠느냐?”
교화(蕎花). 메밀꽃을 뜻하는 글자다.
“응. 알 것 같아…….”
마법 같은 풍경에 나는 넋을 잃어버렸다. 혼은 그런 나를 향해 말했다.
“이 교화당은 네게 주는 나의 선물이니라.”
그 말에 난 메밀꽃에서 눈을 떼고 혼을 바라보았다. 혼의 까만 두 눈동자는 달빛을 머금고 은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은빛 눈동자는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졌다. 그 이유는 이어진 그의 말에서 알 수 있었다.
“네가 제주로 유배를 떠난 후, 난 네게 했던 약조를 지키지 못하였었지. 매년 메밀꽃이 필 무렵이 오면 너를 향한 그리움과 지키지 못한 약조가 나를 끝없이 괴롭게 하였다.”
그가 내게 했던 약조를 나 역시 기억한다. 첫눈이 내리던 행궁의 후원에서, 그는 매년 내게 메밀꽃을 보러 압구정에 데려다 준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 다음해 메밀꽃이 피는 계절이 돌아오기도 전에 나는 제주로 유배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 약속은 5년이 지나도록 지켜질 수 없었다.
“허나, 이제라도 내 반드시 약조를 지킬 것이다. 앞으로 매년 이곳에서 너와 함께 메밀꽃을 보도록 하마. 이곳 교화당은 그런 약조의 의미로 지었느니라.”
혼은 두 팔로 나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넓은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가을바람이 불어와 창밖 언덕에 핀 메밀꽃의 향을 가득 실어 교화당으로 전해주었다.
나는 그 향을 맡으며 압구정에서 혼과 함께 맡았던 메밀꽃의 향을 생생히 기억해냈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때 맡았던 메밀꽃의 향과 지금 맡은 메밀꽃의 향은 결코 다르지 않았다.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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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한국에도 메밀꽃이 피는 시기가 오겠네요. 메밀묵 먹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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