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행궁의 소년(3)
흰색
전하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말을 꺼냈을 때부터, 혼이 내 말을 장난으로 받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진지한 얼굴로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할 말을 잃어버린 나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혼이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괜히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나는 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혼이 내 턱을 잡아 들어올렸다. 다시 나의 시선의 주인은 그가 되었다. 그는 나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보내고 싶으냐?”
가끔 그가 하는 말이 장난인지 진담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이미 내가 할 대답을 알면서도 이처럼 질문을 해올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는 그에게 져주는 쪽을 택했다.
“아니.”
그제야 원하는 답을 얻은 혼이 피식 웃는다. 하지만 난 웃을 수 없었다. 이런 사소한 장난까지도 너무 애타게 그리워했던 시간이 있어서였다.
난 지금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사소한 웃음으로 흘려보내기에는 너무나도 간절하게 그리워했던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혼이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더니 나를 놓아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흐트러진 의관을 고쳐 잡는 사이,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있던 그의 갓을 들어 건넸다. 갓을 받아 쓴 그가 갓끈을 매며 지나가듯 내게 말을 던졌다.
“사내아이였다지.”
“응?”
“우리 아이 말이다.”
난 어리둥절한 얼굴로 혼을 응시했다. 혼은 그런 나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정원군이 제주에서 돌아온 날, 궐로 불러 물었다. 제주에서 죽었다던 아이가 남아였는지, 여아였는지 말이다.”
“그랬어……?”
혼이 명이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정원군에게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당황하며 말끝을 흐렸다.
혼도 당황한 나를 보고는 아이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 실수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애써 그를 향해 담담하게 웃어보였다. 그러자 그런 나를 보며 혼이 말했다.
“만약 그 아이가 살아 있었더라면 이 나라의 국본으로 세웠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듣게 된 엄청난 이야기에 나는 놀란 눈으로 혼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즉위하고 아직 정식으로 세자가 결정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세자가 될 이가 누구인지는 모든 조선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바로 그의 유일한 아들인 세손 이지였다.
그런데 혼은 우리 아이가 살아 있었더라면 세자로 세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원군은 이런 혼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혼에게 명이의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정원군이 말한 ‘때’는 바로 세자의 책봉식이 끝난 후가 될 것이다. 세손 이지가 정식 세자가 된 다음 말이다.
“진심이야?”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숨을 죽이며 나를 향해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진담이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혼의 두 눈을 응시했다. 명이는 살아 있다. 만약 명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혼이 알게 된다면…….
그러나 혼에게는 명이는 이미 죽은 아이이다. 태어난 날 숨을 거둔 아이이다.
그러니 아이를 잃은 나를 순전히 위로하고자 국본으로 세웠을 것이라는 말을 꺼낸 것이 아닐까? 장난은 아니더라도 거짓으로라도 말이다.
“그만 궐로 돌아가야겠구나.”
“으응? 뭐라고?”
너무나도 놀란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난 그의 말을 놓치고 말았다. 혼은 자신의 손등으로 내 이마를 살짝 두드리며 짧게 웃었다.
“과인이 말을 하고 있는데, 생각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이냐?”
“아, 미안.”
그가 장난을 친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내 반응은 시큰둥했다.
적어도 혼이 기대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혼은 그런 나를 두고 무리하게 장난을 계속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는 날 두고 돌아섰다.
“저……. 혼아.”
내 부름에 돌아섰던 그가 다시 내 쪽으로 돌아섰다. 나는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우리 아이가 살아 있었더라면 국본으로 세웠을 거라는 그 말, 혹시 정원군마마에게도 한 거야?”
잠시 기억을 더듬듯 시선을 아래 어딘가에 두며 살짝 눈썹을 찌푸린 혼이 내게 말했다.
“그랬다. 그랬었지.”
혼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내가 왜 명이의 이야기를 혼에게 하려는 순간 통증을 느껴서 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정원군이 아직은 혼이 명이의 존재를 알아서는 안 된다고 했었는지를.
***
혼이 궐로 돌아간 그날 오후 정원군이 명이와 함께 찾아왔다. 명이는 여전히 나를 낯설어하는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오늘따라 기분은 좋은지 경계하는 눈빛은 없었다.
여종이 약과가 가득 담긴 접시를 가져오자, 나는 약과를 하나 들어 명이에게 건넸다. 명이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내게로 다가오더니 약과를 받았다.
명이가 약과를 깨작깨작 먹는 사이, 난 명이에게 꽂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원군은 한동안 그런 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먼저 말문을 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건넨 약과를 다 먹은 명이의 시선이 약과가 담긴 접시를 향했다.
나는 다시 약과를 하나 더 집어 명이에게 주었고, 이번에 아이는 내 곁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앉아 약과를 먹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내게 가까이 다가와준 명이에게 너무나도 고마웠다.
“때가 아니라고 하셨지요? 이제 그 말뜻을 이해할 것 같아요.”
나는 명이에게서 잠시 눈을 떼고 정원군을 보았다.
“전하께 말씀하셨어요. 제주에서 죽은 줄 아시는 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 국본으로 세우셨을 거라고요.”
명이를 제외하고는 우리 두 사람만이 있는 별당 안이었다. 바깥에서 누가 엿듣고 있을 리도 없는데 ‘국본’을 말하는 내 목소리가 저절로 작아졌다.
“경민…….”
“하지만 명이는 아픈 아이잖아요? 그러니 전하께서 명이의 존재를 아시더라도 이 아이가 그 자리에 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내가 아는 역사에서 명이의 이름은 없다. 내 이름 역시 없다.
내가 그림자처럼 혼의 곁에서 살아야 할 존재로 역사에 남았다면, 명이 역시 그렇게 된다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혼의 그림자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아도 그의 곁에만 있을 수 있으면 족했으니까. 그러나 명이는 다르다.
명이에 관해서 만큼은 내 생각조차도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내가 바라는 건, 단지 혼이 명이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뿐인데. 그것뿐인데.
“과연 그렇게 생각하시오?”
되묻는 정원군의 말이 쌀쌀맞다.
“그렇게 생각하다니요?”
“그대의 말을 듣고 보니, 아직 전하께 명이의 존재를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오?”
“네.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아니, 말하려고 했었다. 시간여행자로서 느껴야 하는 ‘통증’이 아니었다면 나는 혼에게 모든 사실을 다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원군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통증’이 일어나는 이유, 그것은 시간여행자의 말 또는 어떠한 행위로 정해진 역사가 뒤바뀌는 경우 일어난다.
정확히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시간여행자가 시간에게서 ‘경고’를 받는 것이다. 명이의 존재를 혼이 알게 되는 순간 바뀌게 될 역사는…….
“그대가 명이의 존재를 전하께 말씀드리지 못했다는 것은, 전하께서 명이의 존재를 알고 반드시 뜻을 이루려 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니요?”
정곡을 찌르는 정원군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정원군의 말은 옳았다. 혼은 진심도 아닌 진담이라고 내게 말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그의 눈은 그 어떠한 작은 흔들림도 없었다. 결코 나를 위로하기 위해 꺼낸 말이 아니었다. 나는 내 생각을 접기 위해 말을 돌렸다.
“엄연히 세자가 되셔야 할 세손께서 계세요.”
“그러나 단 한 명뿐이시오. 전하께서는 세손 외에는 아직 다른 소생이 없으시오.”
“명이는 아픈 아이잖아요.”
“허 의관의 말로는 못 나을 병도 아니라 했소. 무엇보다도 경민. 그대는 그대가 입궐한 뒤의 일은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오?”
“제가 입궐한 뒤의 일이요?”
질문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나의 반문에 정원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대가 전하의 후궁이 된 이후의 일말이오. 그대의 소생이 오직이 오직 명이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명이의 존재를 혼에게 알리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아이를 생각하다니. 정원군이 나를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경민. 세손께서는 몸이 약하시오.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심하셨소. 만약 세손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하신다면.”
그는 자신의 말이 지나쳤음을 깨닫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덧붙였다.
“세자의 자리는 영창대군의 것이 될 수도 있소.”
“그런 일은……!”
영창대군은 유배 후 죽는다. 역사를 알고 있는 나는 세자의 자리가 결코 영창대군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정원군에게 털어놓을 순 없었다. 또 털어놓는다고 해서 정원군이 믿을지도 미지수다.
설사 그가 믿는다고 하더라도 역사가 바뀔 만큼의 일이 되진 않는 이상, 내게 해를 끼치는 건 없을 테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나는 단호하게 부정하는 것으로 말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정원군의 염려는 이 시대 관점에서는 절대 무리가 아니었다. 실제 몇 년 뒤 영창대군을 비롯 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가 대북파에 의해 숙청된다.
그 이유는 지금 정원군이 말하는 염려와 같았다. 모두 알다시피 혼에게는 세손 이지 외에는 다른 소생이 없다.
이 상황에서 정원군의 말대로 세손이 잘못 된다면? 그렇다면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에게는 하늘이 준 기회나 다름이 없게 된다.
여기에 혼의 존재가 사라진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영창대군이 보위를 물려받게 될 테니까.
그러니 미래의 일을 알 수 없는 정원군과 같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영창대군의 존재가 혼에게 위협이 된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알고 있는 내게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내가 아는 역사에는 없는 혼의 또 다른 아들, 명이의 존재다.
나는 말을 덧붙였다.
“세손께서 세자가 되실 거예요. 반드시 그렇게 되실 거예요.”
내 말에 무언가 말하려던 정원군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마 내게 무언가 말하려 한다면, 몇 번이고 고민한 뒤에야 그 말을 꺼낼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그가 말을 꺼내기만을 가만히 기다렸다. 내 예상대로 그는 조금 뒤, 고민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경민. 그대가 왜 하필 대비의 외숙부인 노수눌의 양녀가 된 이유를 알고 있으시오?”
“간택 후궁으로 입궐하기 위해 대비마마께서 도우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닌가요?”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러니까 왜 하필 노수눌의 양녀가 되었는지를 말이오.”
“전하께 들었어요. 대비마마께서 모든 사정을 들으시고 도와주셨다고요. 대비마마도 뵈었는데, 같은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렇다면 노수눌을 천거한 이가 다름 아닌 중전이시라는 것도 대비께서 말씀하셨소?”
“중전께서요?”
“그렇소. 일전에 대비마마를 뵙고 알게 되었소. 그대의 양부가 될 이를 노수눌로 삼으라 천거한 것이 다름 아닌 중전이시라 하오.”
“그게 뭐가 잘못된 건가요?”
“경민. 노수눌은 본디 대비의 외숙부가 되는 이나, 양자로 이 집안에 들어왔기에 대비와 교류가 없었소. 또한 불혹이 넘어 진사가 되었기에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이곳에 은거하다시피 지내온 이요. 대비께서도 노수눌을 직접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시더군. 그런데 그런 노수눌을 왜 그대의 양부로 중전께서 천거하셨다 생각하시오?”
“전 잘 모르겠어요.”
정원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의 세손은 병약하시고, 중전마마의 소생은 세손이 유일하오. 만약 그대가 주상전하의 후궁이 되어 왕자를 생산하고 든든한 외척까지 지니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소? 그대의 외척이 된 이들은 병약한 세자를 물리고 그대의 소생 왕자를 세자로 세우라 전하께 주청을 드릴 것이오. 전하께서도 그대를 총애하시는 만큼, 그들의 주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으시겠지.”
“말도 안 돼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에요.”
“그러나 그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염려한 것이 다름 아닌 중전이시오. 그러기에 대비께 그대와 훗날 그대의 소생이 될 이들에게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할 노수눌이 양부가 될 수 있게 천거한 것이오.”
나는 중전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아는 그녀는 혼이 세자이던 시절, 혼나 동궁전 나인으로 데려가기 위해 양화당까지 찾아왔던 사람이었다.
혼이 나를 마음에 둔 것을 알고 우리를 도와주려 한 사람이었다.
평상시에는 세자였던 혼보다도 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그녀가 자신의 속을 내게 꺼내보였던 것은 단 한 번, 정명공주가 태어나던 날 밤이었다.
사라진 혼을 찾아와 달라고 내게 부탁했던 그날. 그때 그녀는 자신의 가문의 부귀영화를 위해 혼이 보위에 올라야 한다고 말했다.
혼이 보위에 오른 지금,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아들인 세손 이지가 무탈하게 보위에 오르기를 바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가문의 부귀영화를 위해 사는 여인이었으니까. 그러니 정원군의 말이 맞는다면 그 뜻이 말하는 바는 한 가지뿐이다.
‘혼의 후궁으로서 다른 그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고, 일평생을 조용히 지낼 것.’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중전이 자신의 가문의 부귀영화를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치밀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그녀의 뜻이 옳다고 여겼다. 적어도 우리는 서로 원하는 바가 달랐다. 그런 이상 우린 적이 될 사람들이 아니었다.
더욱이 내가 아는 역사가 그대로 이뤄진다면, 지금의 세손은 곧 세자가 될 것이고 혼이 폐위된 후에는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17년 뒤의 일이다.
난 명이가, 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아이가 그런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자리에 앉기를 바라지 않았다.
혼 역시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오랜 영욕의 세월을 보냈던가. 세자의 자리는, 이 조선의 왕이라는 자리는 결코 쉽게 얻어 쉽게 지킬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지금 정원군이 내게 하는 말들은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난 혼이 폐위된 이후에도 그와 함께할 생각만 했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명이의 존재. 명이가 지금처럼 정원군의 아들로 살아간다면, 훗날 종이가 왕이 되어도 안전할 것이다.
내가 너무 앞서 생각하는 걸까? 내가 바라는 건 우리 세 사람이 함께하는 것뿐인데.
“그렇다면 중전마마의 뜻대로 전 노 진사의 양녀가 되었으니, 더 이상 제가 걱정할 것은 없겠네요.”
“아니오.”
“아니라니요?”
“대비께서는 그대가 양화당 나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소? 혹여 대비께서 마음이 바뀌어 그 사실을 밝혀 전하를 곤궁에 빠트리게 되실지도 모르는 일이오. 허나 대비의 외가가 그대와 관여된다면, 마음이 바뀐다 하시더라도 그 사실을 밝히기는 어려우시겠지.”
정원군의 말대로라면 나를 노수눌의 양녀로 삼게 천거한 중전의 계획에는 여러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전하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내가 알기로는 대비께서 직접 노수눌을 천거한 것으로 아시오. 중전께서 관여한 사실은 아직 모르시는 것 같소.”
내가 귀양에서 풀리기도 전에, 후궁으로 입궐하기도 전에 중전 유 씨는 모든 것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럼 전하께서는 평생 명이의 존재를 모르셔야 하나요?”
나는 속상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애꿎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원군이 그런 나를 보며 대답했다.
“그것은 아니오. 명이의 존재가 세손께 위해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말씀드리는 것이 옳다고 여기오.”
“그게 언제일까요?”
“세손께서 정식 세자로 책봉되시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가 되지 않을까 싶소.”
정원군도 확답을 주진 못한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 이 상황에서 명이의 신분이 밝혀진다면, 난 세자의 자리를 놓고 중전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일이 대해 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혼이 왕이 되기 전까지는 중전과 난 한 배를 탔던 사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그렇지 않더라도 세자빈과 일개 나인이라는 신분을 의식하며 ‘감히’ 훗날의 이런 상황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혼의 후궁이 된다면, 과거 의인왕후와 인빈이 혼과 신성군을 두고 대립했던 것과 같은 일이 펼쳐지게 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명이가 두 번째 약과를 다 먹었을 때, 정원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명이도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정원군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이제 그만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원한다면 명이를 오늘 하루 이곳에 두고 가겠소.”
“……!”
정원군의 말을 알아들은 명이가 고개를 들어 정원군을 본다. 아이는 자신을 두고 간다는 말을 알아듣고 겁을 집어 먹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런 명이의 마음을 읽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직은 때가 아니겠죠.”
스스로에게 위안하듯 말을 하며, 난 궁금하던 어떤 일을 뒤늦게 떠올렸다.
“군부인께서도 다 아시나요?”
명이가 혼의 아이라는 것. 지난번에 만난 그녀는 명이가 정원군과 나의 아이라고 알고 있었다.
“모르오.”
정원군이 짧은 대답을 먼저 주고는 덧붙였다.
“오직 그대와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오.”
“그렇군요.”
나는 한숨 섞인 대답을 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원군이 명이에게 말했다.
“명아, 인사 드리거라.”
“…….”
정원군의 말을 들은 명이가 잡았던 정원군의 손을 놓고는 두 손을 가지런히 배 위에 포갰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올리고는 다시 정원군의 손을 잡았다.
그런 명이와 눈을 마주치며 나는 억지로라도 환한 미소를 보여주려 애썼다. 아이와 친해지고 싶었다. 진심으로.
“명이의 병세에 대해서 의원이 다른 말을 하진 않던가요?”
“인후에는 문제가 없어 말하는데 지장이 없다 하였소. 단지 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는……. 허나 걱정 마시오. 명이는 건강해질 것이오. 말도 하게 될 것이고.”
위로 섞인 정원군의 이 말을 혼에게서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혼은 명이에 대해 모른다. 그저 혼에게 명이는 정원군의 막내아들일 뿐이다.
“그렇게 되겠죠. 꼭 그렇게 될 거예요.”
정원군이 명이의 손을 잡고 별당을 나섰다. 나는 마루에 서서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오래전 지금 명이 또래의 종이와 헤어지던 날이 떠올랐다.
군부인의 손에 이끌려 퇴궐하던 종이가 애처롭게 날 불렀을 때 마음이 아팠었다.
그러나 지금 명이가 정원군의 손을 잡고 나에게서 멀어질 때는 그때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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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디 (doh7****) 2013-08-22 10:31 |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