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해의 연인-62화 (62/110)

제62화. 행궁의 소년(1)

흰색

선조의 승하로 중전에서 대비가 된 김 씨를 다시 만난 건 5년 만이었다.

그동안 그녀의 얼굴은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5년 전 나를 향해 반짝이던 장난기 가득하던 눈도 생기를 많이 잃은 듯 보였다.

새 중전이 된 유 씨의 밝은 얼굴을 보다가 대비전으로 와서일까? 중전과 대비의 얼굴이 한 눈에 대조가 될 정도로 판이하게 달라보였다.

“오랜만이구나, 경민아.”

대비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에 그녀의 곁에 앉아 있던 변 상궁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난 제주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랬던 날 노수눌의 양녀로 만들어 새로운 신분을 내려준 것 역시 대비였다. 그렇다면 변 상궁 역시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오 년 전, 난 선왕전하와 마찬가지로 네가 정원군의 아이를 가졌다 여기었다. 헌데 얼마 전 중전이 내가 모르던 사실을 이야기해 주더구나. 너와 정원군이 주상을 지키기 위하여 벌인 일에 대해 말이다.”

말을 천천히 풀어놓는 대비의 시선은 대비전 안을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있는 영창대군을 향해 있었다.

이를 알아챈 변 상궁이 자리에서 일어나, 영창대군의 손을 잡고 대비의 곁으로 돌아와 앉았다.

“이제 주상께서 보위에 오르시고 정원군의 유배가 풀렸으나, 너는 다시 입궐하기가 어렵다 들었다. 그래서 내 너를 노수눌의 양녀가 될 수 있도록 주상께 주청하였다. 국상이 끝나고 넌 주상의 후궁이 될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지금처럼 주상을 성심껏 모시도록 하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대비마마.”

인사를 올리는 나를 보며 대비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미소가 왠지 모르게 너무나도 슬퍼보였다.

“오 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지는 않았겠지.”

“예?”

나는 대비의 말뜻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대비가 작은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네가 많이 달라진 것 같구나. 오 년 전에는 지금보다는 더 재미있는 아이였던 것 같은데……. 나 역시 오 년 전에는 지금보다는 더 재미있는 중전이지 않았느냐?”

지쳐 보이는 얼굴로 옛 이야기를 꺼내던 대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를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구나.”

그만 물러가라는 대비의 의사에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비는 그런 나를 보며 말했다.

“정식 입궐 후에는 더욱 전과 다른 몸가짐으로 궐에서 지내야 할 것이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나를 향해 대비가 말을 이었다.

“주상께서 즉위하신 후 양화당의 나인들은 모두 인빈을 따라 정원군의 사저로 출궁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새로 입궐하게 될 후궁과 죽은 양화당의 김 나인이 닮았다는 의구심을 품을 이들이 없을 성싶으냐? 분명 그들은 너를 보고 쓸데없는 말들을 지어낼 것이다. 궐이란 그런 곳이다. 허니 말이 단지 말로 끝나려면 네가 몸가짐을 행함에 있어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다. 전과 같이 변함없는 행동거지로 말들이 끊임없이 나오게 된다면 주상께 누가 되지 않겠느냐?”

그녀의 말에서 혼과 나를 위하는 진심이 느껴졌다. 한편으로 그녀의 진심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녀가 취하는 행동과 말은 내가 알고 있는 역사와 달랐다.

그녀는 혼을 좋아하지 않아야 했다. 그를 도와주기 위해 나를 자신의 외가에 양녀가 될 수 있게 하지 말아야 했다. 내가……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

그때 내가 일어나는 것을 본 영창대군이 변 상궁의 품에서 벗어나 대비에게 가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자 영창대군의 손에 들려 있던 두 개의 작은 돌조각이 내 앞으로 굴러와 떨어졌다. 그것을 본 난 무의식적으로 몸을 숙여 그 돌들을 들어올렸다.

그것은 돌이 아니었다. 원래는 하나인 것으로 보이는 두 개로 쪼개어진 옥패였다. 쪼개어졌음에도 본래의 영롱한 빛을 잃지 않은 옥에서는 초콜릿 향이 났다.

조선에 온 뒤로는 맡지 못했던 달콤한 초콜릿 향에 나는 잠시 그 향에 끌렸다. 그런데 이 쪼개어진 옥,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게 어디서였지……?

“어찌 그것을 대군이 가지고 있는 것이냐?”

내가 옥을 유심히 살펴보자, 대비가 기겁하듯 변 상궁에게 소리쳤다. 대비의 외침에 변 상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내게로 다가와 옥을 빼앗듯이 가져가버렸다.

옥은 바로 대비에게 전해졌다. 대비는 옥을 받자마자, 조심스럽게 쥐어들었다. 변 상궁은 마치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대비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대군아기씨께서 모르고 꺼내신 듯하옵니다.”

“앞으로는 그 누구의 손도 닿지 않게 잘 보관하도록 하여라.”

대비전을 나오면서도 나는 한동안 초콜릿 향이 나던 쪼개진 옥에 대한 생각을 끊을 수가 없었다.

영창대군의 손에서 옥이 떨어지기 전까지 대비가 보였던 행동과 돌변한 대비의 행동이 너무 큰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 깨진 옥이 대비에게는 매우 귀중한 물건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이미 깨어져 쓸모없는 용도로 전락한 것이 분명한 옥이었음에도 아들인 영창대군이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할 정도니 말이다.

대비전을 나와 퇴궐하던 길에 나는 주인을 잃은 양화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혼의 즉위 이후 인빈은 정원군의 새 사저로 출궁했다고 들었다.

선조가 승하한 이상, 선왕의 후궁인 그녀가 궁궐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녀와 과거 혼의 어머니인 공빈의 악연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난 양화당 앞에서 내가 예전에 지냈던 감나무가 있던 처소를 떠올렸다. 그곳은 내게 아주 특별한 곳이었다. 혼과의 많은 추억이 깃든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 처소를 다른 누군가가 쓰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감나무라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5년 만에 감나무가 있는 처소로 향했다. 감나무는 그대로였다. 대신 내가 쓰던 처소는 오랫동안 쓰이지 않았는지, 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옛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그 처소 앞을 한동안 서성이던 나는 퇴궐이 늦어지는 것을 깨닫고 돌아섰다.

그런데 내 뒤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는 한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는 백설기처럼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는 아주 예쁜 아이였다.

만약 입고 있는 옷이 남자아이의 옷이 아니었다면, 난 그 아이를 여자아이로 착각했을 만큼 아주 예쁜 아이였다.

그 아이는 내가 감나무 처소 앞에서 옛 추억에 잠겨 있는 사이에 조용히 내 뒤에 다가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이는 낯선 이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궁궐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아이라면 선조의 늦둥이 왕자이거나, 손자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이 든 나는 밝은 목소리로 환하게 웃으며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

그러자 아이의 눈에 힘이 실렸다.

“이름이 뭐야?”

“…….”

아이는 앵두 같은 작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좀처럼 목소리를 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아이는 도망가거나 자리를 떠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난 아이를 보며 종이를 생각했다. 내가 종이를 처음 만났을 때 종이는 딱 이 아이 또래였다.

아이와 가깝게 선 나는 몸을 숙여 아이와 눈을 맞췄다. 아이는 그런 나를 보며 잠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점차 경계의 눈빛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우리 인사할래?”

“…….”

아이는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내가 하려는 인사는 조선식 인사와는 거리가 있었으니까.

난 이 아이를 보며 종이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며 한 손을 내밀며 방긋 웃었다.

“자.”

“…….”

내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가 자신의 작은 한 손을 천천히 꺼내더니, 내가 내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바로 그 순간, 내 가슴에 큰 돌덩이 하나가 쿵 하고 내려앉으며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갑갑한 느낌이 있었다.

숨이 턱 밑까지 막혔다가 순식간에 풀려져버리며 나는 두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이 당혹스러운 느낌에 난 아이를 보며 웃는 것을 잠시 주춤했다.

“명이야! 이 아이가 대체 어디를 간 것인지…….”

“아마도 그 감나무가 있는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막내 아기씨께서 종종 능양군마마와 그곳에서 노시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럼 그리로 가보자.”

“예, 군부인마님.”

누군가를 찾는 여인의 목소리에 아이가 화들짝 놀라며, 내 손 위에 올려놓았던 자신의 손을 거뒀다. 그리고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을 본 나는 이 아이의 이름이 ‘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는 한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아마도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소리를 내지 말라고 의사 표현을 하는 것 같았다. 곧 아이는 감나무 뒤로 뛰어가더니, 나무 뒤로 자신의 작은 몸을 숨겼다.

“이쪽입니다.”

가까워진 사람의 목소리에 난 감나무에서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여종으로 보이는 젊은 여인과 내가 아는 익숙한 얼굴의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바로 정원군의 부인 구 씨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정원군의 부인 구 씨와 맞닥뜨리게 된 나는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구 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고는 나보다도 더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너는!”

“군부인 마님.”

“너는 분명 제주에서……!”

놀라 말을 잇지 못하던 구 씨가 함께 있던 여종에게 말했다.

“넌 다른 곳에 가서 명이 그 아이를 찾아 보거라.”

“예, 군부인 마님.”

여종이 물러가자 둘만 남게 되었다고 생각한 구 씨가 내게 말했다.

“분명 제주에서 죽었다 들었는데……. 어찌 행궁에 있는 것이냐?”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정원군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원군의 부인인 구 씨가 그 사실을 모르다니? 정원군이 말을 하지 않았던 걸까?

“정원군마마께……. 듣지 못하셨습니까?”

“듣지 못하였다니? 그럼 대감께서도 네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는 말이냐?”

그녀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알 수가 없는 일이로구나. 대감께서 널 죽은 것으로 알라 하시더니, 말이 이상하다 싶었다만 네가 죽지 않았던 것이었다니.”

“사정이 있어 죽은 것으로 되었습니다만, 그 사정은……. 정원군마마께서 알려주실 겁니다.”

나의 대답이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한 모양이다. 그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 사정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피붙이까지 버려야 할 이유라면 난 알고 싶지도 않구나. 매정한 것.”

자식까지 버리다니?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감나무 뒤에 숨어 있던 아이가 앞으로 달려 나오더니, 구 씨의 치마폭으로 파고들었다.

갑자기 튀어난 아이를 본 구 씨가 놀란 얼굴로 잠시 아이를 바라보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담담한 표정으로 아이를 자신에게서 밀어내며 말했다.

“명아, 네 친어미이다.”

구 씨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 구 씨가 누가 누구에게 친어머니라는 말을 한 것일까? 아이는 아직 어려서인지 구 씨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오로지 다시 구 씨의 치마폭으로 안기기 위해 애를 썼다. 구 씨는 그런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쌀쌀맞게 말을 이었다.

“뭘 그리 놀라느냐? 네가 제주에서 낳아 도성으로 보낸 아이가 바로 이 명이인 것을 정녕 몰랐느냐?”

“제주에서…… 제가 낳은 아이라니요?”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만덕이를 통해 이 아이를 도성으로 보내지 않았느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작고 어리던 아이를 말이다.”

“그럴 리가……. 말도 안돼요. 그 아이는 죽었어요. 제주에서 죽었다고요.”

이젠 내 목소리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죽었다? 하기는 대감께서도 명이를 보고 놀라시기는 하셨지. 그저 명이의 소식을 제주에 계신 대감께 전한 적이 없어 놀라신 줄 알았더니, 대감께서도 명이가 죽은 줄 알았다 하셨지.”

나는 구 씨의 설명을 듣고도 믿지 못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 죽었다고 정원군마마께서……!”

구 씨가 내 말을 차갑게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었다고요?”

나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명이를 바라보았다. 명이는 구 씨의 치마폭에 매달려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아아, 돌이켜보니 오 년 전 만덕이가 말하기를, 제주에서 배를 타고 육지로 나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이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육지에 오르고 보니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숨을 쉬고 있었다 하더구나. 당시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었다만.”

“그럴 리가요! 그 아이는……. 그 아이는 분명히…….”

“어찌 이 아이가 죽었었다고 말하는지는 내 모르겠다만, 명이는 네 아이가 맞다. 한 살 무렵 큰 병을 앓아 그 뒤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만, 네 아이가 맞다. 헌데 어찌 이 아이를 버려두고 행궁에 있는 것이냐? 대감의 아이까지 낳은 몸으로 어찌 궐에서 지내는 것이야?”

그러나 내게는 구 씨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있는 작은 명이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명이가 내가 제주에서 낳았던 혼과 나의 아이였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분명 죽었다고 생각하고 마음 속 깊숙한 곳으로 묻었던 아이였다.

내가 그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고 얼마나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했는데……. 그 아이가 살아 있다니.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아이가 바로 그 아이라니!

도무지 머리로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달랐다. 저 작은 아이의 손을 잡는 순간 나는 느꼈던 것이다.

그 느낌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저 아이의 손을 잡는 순간 느꼈었다.

그 느낌이 바로 명이라는 저 아이가, 내 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을까?

“정말 이 아이가 정말로……. 제가 제주에서 낳은…….”

“그래. 네 아이다. 네가 제주에서 낳은 대감의 아이이다.”

“부인!”

갑자기 나타난 정원군이 급히 우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다짜고짜 구 씨를 향해 화를 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지금!”

“무슨 말을 하다니요? 대감? 어찌 제주에서 죽었다 하신 이가 살아서 행궁에 있는 것입니까? 어찌 소첩에게는 단 한마디의 언질도 없으시고.”

“그만하시오! 이 일은 부인이 관여할 일이 아니오.”

구 씨는 이런 정원군의 태도에 마음이 상한 모양이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에게 매달리려는 명이를 완강하게 밀어내고는 돌아서 그 자리를 떠났다.

바로 구 씨의 뒤를 따르려던 명이는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이를 보고 놀란 내가 서둘러 다가가려는 순간, 정원군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정원군은 넘어진 명이를 일으켜 세워준 것이다. 명이는 그런 정원군 품에 안겨 소리 없는 눈물만 뚝뚝 흘려댔다.

나는 그런 명이가 실존하는지조차 믿겨지지가 않았다. 뱃속에 열 달 가까이 품었어도 얼굴 한 번 마주하지 못한 채 떠나보냈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살아서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정말인가요? 정말 명이, 이 아이가 제가 낳은 아이인가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정원군은 그런 나를 보며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아이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내 아이, 내 아이가 살아 있었음에도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5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이제라도 알게 된 지금, 내게 엄청난 충격이 되어 돌아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또한 그 누구보다도 믿었던 정원군이 이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내게 감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바로 내게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난 참았던 울분을 한데 모아 정원군을 향해 터트렸다.

“왜! 왜였어요? 왜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어요, 왜!”

내 외침에 놀란 명이가 정원군의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그것을 본 나는 정원군에게 화를 내던 것을 멈춘 채, 그의 품 안에 있던 명이를 강제로 끌어안아 눈물을 쏟아냈다. 정원군은 이런 나를 막지 않았다.

그러나 강제로 내 품으로 끌려온 명이는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여리고도 작은 힘이었다. 나는 그 작은 힘을 강제로 억압하면서까지 아이를 내 품에서 놓지 않기 위해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러나 명이는 오로지 내 품 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짓을 그치려 하지 않았다. 명이에게는 난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사람일 테니까.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내 품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명이로 인해 마음이 깨질 듯이 아팠다.

난 결국 명이를 내 품에서 놓아주었다. 명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원군에게로 다가가 그의 뒤로 숨었다.

“살아 있다고……. 왜 말씀을 안 하신 거예요?”

울며 묻는 나를 향해 정원군이 한숨 섞인 변명을 했다.

“나 역시 죽은 줄 알았소. 도성에 돌아와서야 이 아이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

“그럼 알게 된 뒤에 왜 제게 알려주시지 않으셨나요? 왜요!”

“그것은…….”

정원군이 난처한 기색으로 주저하던 그때였다. 열 살 남짓의 소년이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명이는 그 소년을 보자마자 달려가 안겼다. 정원군이 그 소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종아, 명이를 데려가거라.”

“예, 아버님.”

그 소년은 바로 종이였다. 어린 시절 나와 헤어진 종이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저 자신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앞에서 눈물을 쏟고 있는 한 여인에 대해 궁금증을 가득 품은 얼굴로 명이의 작은 손을 잡고는 돌아섰다.

나는 종이와 함께 가버리려는 명이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나의 마음을 읽은 정원군이 내 팔을 붙잡았다.

“경민.”

“놓아주세요!”

“지금 명이를 쫓아가 어찌하려는 것이오?”

“명이를 데려갈 거예요. 그리고 전하께 말씀드릴 거예요. 아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요.”

“경민!”

정원군이 소리쳤다. 그 사이 명이는 종이의 손을 잡은 채 가버렸다. 정원군의 외침에 나는 잠시 주춤하며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정원군의 눈빛은 분명한 금기,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절대로 명이의 존재를 혼이 알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오. 그래서 그대에게 미안한 일이 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하지 않은 것이오.”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의 완벽한 단호함에 나는 애원했다.

“제발요……. 제발요. 정원군마마. 명이는 전하의 아이에요. 그러니 알려드려야 해요. 아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요.”

내 눈에서 멈출 줄 모르고 흐르는 눈물을 본 정원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차마 그런 내 얼굴을 계속 바라보지 못했다. 내게서 고개를 돌린 그가 어렵게 말을 이어나갔다.

“때가 되면 내 직접 전하께 말씀드릴 것이오. 그러나 지금은 아니오. 지금은……. 모두에게 명이는 나의 소생으로 알려져야 하오.”

“제가 말하는 건 명이에게 당장 명분을 주자는 것이 아니에요. 전하의 소생이라는 것을 밝히자는 것도 아니고요. 적어도 살아 있다는 것만이라도 전하께 알려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경민.”

정원군의 시선이 다시 내 눈을 향했다.

“나 역시 전하께 알려드리고 싶소. 허나 지금은 때가 아니오.”

“그럼 그때가 언제인가요?”

내 물음에 정원군은 답을 주지 못했다. 단지 난처한 기색만 가득 드러냈을 뿐이다.

“경민. 모든 이들이 알게 되어도, 전하께서는 절대 명이가 전하의 소생이라는 것을 아셔서는 아니 되오.”

끝까지 명이에 대해 혼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정원군의 태도에 화가 난 나는 그를 밀어내며 물었다.

“그 연유가 무엇인데요? 말씀해 보세요, 정원군마마.”

정원군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곧 그대도 알게 될 것이오. 그러나 내 입으로 그 연유를 말해줄 순 없소.”

나는 정원군을 향한 분노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신중한 태도의 소유자라는 것은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게는 그런 그의 신중한 모습은 강한 분노를 일으켰다. 오히려 답답하고 고지식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애써 화를 삼키며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전하를 뵈러 가진 않겠어요. 제 신분으로는 당장 임금이 되신 그분을 마음대로 뵙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전하를 뵐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반드시 명이에 대해서 말씀드릴 거예요.”

정원군과 헤어진 후 돌아오는 가마 안에서 나는 평생 쏟을 눈물의 절반을 쏟았다.

제주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가 살아 있었다. 비록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아이는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아이는 나를 밀어냈다. 정원군의 아이로 자란 아이에게는 나는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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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 (gksm****) 2013-08-15 10:39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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