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해의 연인-58화 (58/110)

제58화. 용골자리의 눈물(1)

흰색

조선시대에 제주도는 아주 먼 곳이었다. 한성을 떠난 후 보름을 육로로, 날씨 때문에 사흘을 포구에서 기다린 끝에 우리가 탄 배는 제주도의 서쪽 어등포(魚登浦)에 닿았다.

어등포에 발을 딛고 내리자 제주는 완연한 여름이었다. 한 손에 잡힐 듯한 뭉게구름이 푸른 제주의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바닷길을 따라 난 초록 들판 위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란 꽃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성에서는 보기 드문 초록 들판에 정원군도 한동안 들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사이 한성에서부터 우리를 호송한 금부도사는 제주부사가 보낸 병사들에게 우리를 서둘러 인계하고는 제주를 나가는 배를 타고 돌아가 버렸다.

“위리안치의 명이 떨어진 줄 압니다.”

한성 출신이라는 이방은 정원군에게 공손하게 말을 걸었다.

“그렇소.”

“이곳은 제주입니다. 한성에서 관리가 파견 나오지 않는 이상, 유배 온 죄인이 어찌 지내는지는 한성에서는 결코 알 수가 없지요.”

그가 아직까지는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는 인빈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서일까? 이방의 말은 아리송하게 들렸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정원군이 곧 유배가 풀려 한성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최대한 그의 편의를 봐줄 생각이 있어 보였다.

정확히는 그가 아니라 그를 포구까지 보낸 제주목사의 뜻이 그러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정원군은 말없이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던 내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성을 출발한 뒤로 내내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다. 나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고 그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가끔 말없는 눈길을 주는 것 외에는 한마디도 걸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나는 때때로 그가 나를 위해 한 선택에 대해 후회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적어도 나를 위해 한 일을 그가 후회하더라도 형님인 혼을 위해 한 선택으로서는 그가 후회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알 수 없다 하여 국법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오.”

내게 시선을 주었던 그가 어느새 이방을 보며 단호하게 자신의 주장을 밝혔다. 이방은 무엇이 못마땅한 것인지 제주읍성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주 관아가 위치한 읍성 안에는 볼일이 있어 드나드는 제주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우리들을 향한 호기심 어린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특히 아침 일찍부터 물질하러 바다에 나갔다 온 해녀들은 병사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소란을 떨었다.

이방이 우리를 안내한 곳은 읍성내의 한 초가였다. 몸 하나 마음대로 펴고 눕기에도 퍽이나 불편해 보이는 작은 방 두 개와 그보다도 더 작은 부엌이 하나 딸린 작은 제주식 초가.

초가의 주변은 검은 현무암으로 내 어깨를 넘을 정도로 높은 담이 쌓아져 있었고 그 밖으로는 가시덤불이 쳐져 있었다.

“조석(朝夕)으로 관아의 계집종이 식사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 말을 끝으로 이방은 우리 두 사람만을 남겨둔 채 초가를 나갔다. 병사 두 명이 초가의 유일한 출입구인 좁은 문 앞을 지키고 섰다. 이제 본격적인 제주도에서의 유배가 시작된 것이다.

가재도구라고는 접어놓은 이불 한 채밖에 없는 방 안, 더구나 그 이불에서는 매캐한 냄새까지 풀풀 풍겼다.

죄인이 유배생활을 하는 곳이니 좋고 편할 리는 없다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행궁에서의 안정된 나인 생활에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쉽게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언제 한성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대로 지낼 수만은 없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나는 청소를 시작했다.

보모상궁과 수라간. 양화당 퇴선간을 거쳐 지밀나인까지 하면서 궁녀생활로 잔뼈가 단단히 굵어진 나였다. 제일 먼저 옷자락을 걷어 올린 나는 초가부터 살폈다.

초가의 뒤뜰에는 아담한 제주식 우물이 하나 있었다. 물동이 하나만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은 입구를 가진 우물 안으로 줄에 매달린 바가지를 이용해 열심히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를 들은 정원군도 내가 무엇을 하나 궁금한지 밖으로 나왔다. 그를 발견한 나는 이마에 맺힌 구슬땀을 닦아내며 환하게 웃었다.

“도와주실래요?”

그는 나의 이러한 요청에 유배를 떠난 후 처음으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왕실의 종친으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아마 내가 도움을 구하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유배가 끝나는 날까지 하루 종일 방안에서 글만 읽으며 시간을 보내려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무엇을 도우면 되겠소?”

그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내게 물어왔다.

“음……. 먼저, 물 좀 많이 길어 주세요.”

“무엇을 하려 그러오?”

“빨래요. 아마 마마님의 이불도 냄새가 장난 아닐 텐데요? 이불부터 빨아야겠어요.”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정원군이 시원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가 웃음을 터트린 영문을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그가 웃음을 어렵사리 그치며 내게 말했다.

“그대 덕분에 내 잠시 먼 제주로 유배를 왔다는 사실을 잊었소.”

“제…… 덕분에요?”

“그렇소. 헌데 그대는 유배를 와서도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하는군.”

정원군의 웃음에 나는 가슴 속 깊은 곳에 쌓인 그를 향한 미안함이 조금은 가시는 느낌이었다.

“유배를 온 죄인이라도 여전히 전 나인이니까요.”

나인이라는 사실이 무슨 자랑인 것도 아닌데 괜스레 목소리가 밝아졌다. 정원군은 나의 이런 밝은 모습이 싫지 않은 모양인지 웃음을 되찾았다.

이방의 말대로 하루에 두 번 식사가 제공되었다. 제주 관비인 어린 여자아이가 대나무로 만든 납작한 소쿠리 안에 식사를 넣어왔는데 밥은 주로 보리밥이거나 잡곡밥이었다.

아마도 제주에서는 쌀이 거의 나지 않아서인 듯했다. 반찬은 단 한 가지, 주로 나물 무침이었다. 어떨 때는 나물이 그릇 대신에 밥 위에 얹혀 오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 식사를 받아든 정원군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궁궐에서 귀하게 자랐을 그는 불만은커녕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다.

건강에는 좋다며 이 시대에서는 전혀 먹히지 않을 이유를 대며 맛있게 먹는 나를 보며 정원군도 곧 이런 식단에 익숙해져가는 것 같았다.

우리가 제주에 도착한 지 열흘 정도 지나자 구 씨가 보낸 사내종 만덕이가 제주에 도착했다. 만덕이는 구 씨에게서 어떤 명이라도 받은 것인지 제주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제주목사를 만났다.

그 뒤로 제주목사는 틈틈이 이방을 통해 정원군에게 많은 서적과 문방사우를 보내주면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는 서신까지 직접 써서 보냈다.

또 이 이후부터는 반찬의 가짓수도 늘었다. 명절에는 특별히 제주목사가 간식을 보내오기도 했다. 가을이 되자 위리안치의 명이 풀렸다.

그러나 쌀쌀한 날씨와 문만 나섰다 하면 쏟아지는 많은 제주 사람들의 관심에 나는 문 밖 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제 눈에 띄게 불러오기 시작한 배도 문 밖 출입을 막는 대표적인 이유 중의 하나였다.

겨울의 어느 날 밤. 나는 한밤중에 눈물을 쏟고 말았다. 가을에 위리안치가 풀리면서 곧 한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하루하루 긍정적으로 버텨왔던 나였다.

그러나 유배가 풀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주기적으로 만덕이를 통해 구 씨 부인이 정원군에게 안부 서신을 보내오는 것과는 달리 혼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좋았다. 그에게서 짧은 안부를 묻는 서신이라도 온다면 내 마음은 편안해질 것 같았다. 그런데 연락은 오지 않았다.

정원군도 이런 내 속마음을 알아서인지, 혼에게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조금의 위로도 되지 못했다.

“으흐흑……흐흑…….”

가끔 정원군이 작게 내뱉는 기침소리마저도 생생하게 들려올 정도로 벽이 얇다는 것은 알았지만 흐느낌마저 참는 것은 어려웠다.

“으흐흑……혼아…….”

뒤늦은 후회도 했다. 그때 혼의 말대로 유배에서 도망쳐 그와 함께 궐을 떠나 숨어 지낼걸 하는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 몇 달간의 유배생활을 생각하면 내가 도망가고 홀로 이 유배를 왔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정원군을 향한 미안한 마음에서 자유로워지기도 했다.

이런 복잡한 감정 속에서 혼을 향한 그리운 마음만 애달프게 깊어져 눈물을 쏟은 것이다.

한참 동안이나 혼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끼던 내 귀에, 깊은 밤중이라 잠들었다고 생각한 정원군의 처소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나는 잠시 숨을 죽이며 울음을 삭혔다. 이미 울음소리를 감추기에는 늦어버린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정원군은 처소를 나서고 있었다. 그의 걸음이 초가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낀 나는 참고 있던 울음을 다시 쏟아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눈물을 그친 나는 마음 속에 가득 찼던 불안감으로 뭉친 응어리들이 조금은 줄어든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물기로 눅눅해진 얼굴을 시원한 물로 씻어내고픈 마음에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그러다 나는 초가의 앞마당에 서 있는 정원군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그는 잠옷차림으로 은하수가 펼쳐진 제주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겨울이었다. 그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하얀 입김이 한숨과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분명 제주의 바닷바람과 맞물려 몰려오는 겨울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자리에 서서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얼핏 그의 눈은 어떤 별을 찾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제주의 하늘에서만 보인다는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을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혼이를 사랑했기에 고난에 처하게 된 나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섰던 정원군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제주는 그에게도 낯선 장소일 것이다.

새삼스럽게 동질감을 느껴서일까? 나는 셀 수도 없이 수많은 별들이 수놓아진 제주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를 지켜보며 슬픔을 잊을 수 있었다.

봄이 찾아올 무렵, 해산이 한 달 앞으로 가까워졌다.

이상하게 매일 밤 꿈을 꾸었다. 대부분의 꿈은 깨어나면서 바로 잊어버렸지만 깨어나고서도 늘 오래도록 기억되는 꿈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성으로 돌아가는 꿈이었다.

한성에 도착해서 혼을 찾아 아무도 없는 행궁 안을 돌아다니는 꿈을 꾸기도 하고, 바로 앞에서 혼이 사라져서 놓치는 꿈도 꾸었다.

꿈을 자주 꾼다는 말은 다시 말해 깊은 잠을 잘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때문인지 해산날을 앞둔 임산부답지 않게 내 몸은 점점 말라갔다.

이를 제일 먼저 눈치 챈 것은 바로 정원군이었다. 내가 점점 야위어가는 것을 보다 못한 그는 이방에게 부탁해 의원을 불러달라고 청했다.

정원군의 부탁으로 며칠 뒤 노인 의원이 찾아왔다. 그는 나를 진맥하고 나서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음식을 되도록 잘 챙겨먹으라는 말 외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나는 또다시 꿈을 꾸며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꿈에서 깨어났는데 깨어나자마자 배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느끼는 통증은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진통이라고 여기기에는 아직 해산일까지 시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의원을 불러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순간 어지럼증으로 인해 주저앉으며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의식이 돌아온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 것 같다.

그러나 차라리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 배가 아픈 것은 물론이고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통증도 있었다.

숨이 막히도록 호흡이 어려워 살기 위해 손을 뻗었는데 내가 간신히 잡은 것은 정원군의 옷자락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 옆에 있는 정원군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정신 차리시오! 정신을 잃어서는 아니 되오, 경민!”

눈을 뜬 나를 알아보고 정원군이 외치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강한 울림으로 내 귓구멍을 아프게 자극해왔다.

나는 그에게 소리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당장 숨을 쉬기도 힘든 상황에서 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찌된 것이냐고 묻지 않았느냐! 해산달이 아직 달포나 남았거늘, 어찌 이런단 말이냐!”

정원군의 뒤로 당황한 얼굴의 의원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익숙한 얼굴의 이방도 있었다. 의원이 격분한 정원군을 보고 어쩔 줄 모르며 이방을 향해 제주어로 속삭이듯 말하자 이방이 입을 열었다.

“의원의 말로는 자간(子癎, 임신중독증)이라 합니다.”

“자간? 병명을 알고 있다면 어서 낫게 하게!”

정원군의 말을 들은 의원이 고개를 저으며 이방의 뒤로 물러선다. 그런 의원의 태도만으로도 충분히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방의 뒤로 물러선 의원이 이번에도 이방의 귀에 무언가 속닥거렸다. 이방이 입을 열었다.

“산달이라면 아이를 해산하여 산모의 명이라도 부지할 수 있을지 모르나, 달이 차지 않았으니……. 이대로라면 산모도 아이도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유오디아 작가의 말

작가 블로그

고지식한 샌님 정원군! 경민이를 살려봐! 어서!

광해의 연인 관련상품

eBook

광해의 연인

다음화 미리보기

종이책

광해의 연인 3 책

구매하기

별점

9.9

2,629 명의 회차별점입니다.

별점주기

좋아요 34

관심등록SNS 보내기

이전화

다음화

목록

댓글 917 새로고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