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해의 연인-57화 (57/110)

제57화. 말할 수 없는 비밀(4)

흰색

“전하.”

정원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신은 누군가를 보호하려 나선 것이 아니옵니다. 김 나인의 회임으로 더 이상 신의 죄를 감출 수가 없어 죄를 청하고자 나온 것입니다. 어머님께서 오히려 그러한 소자를 보호하고자 전하께 거짓을…… 거짓을 아뢰었사오니, 신을 벌하시고 어머님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말을 마친 정원군이 땅에 머리를 대고 엎드렸다. 선조는 그런 정원군을 향해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정원군! 네가 감히…….”

선조의 화는 단순히 그가 나인인 나와 관련된 죄를 지어서가 아니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서청 앞. 아침 조회를 끝낸 당상관들이 몰려나오는 곳에서 아들인 그가 아버지에게 신하들 앞에서 망신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한 대신이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입고 있는 관복의 색과 흉배의 공작모양으로 보건데 삼정승 중의 한 명임이 틀림없었다.

“전하. 이 일이 사실이라면 정원군을 결단코 용서하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일은 패륜이나 다름없사옵니다. 그러니 정원군을 엄중히 벌하셔야 하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주변에 서 있던 다른 대신들도 입을 모았다.

“정원군을 벌하시옵소서!”

“정원군을 용서하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이는 종묘사직과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는 것과 다름없는 중한 죄이옵니다!”

대신들이 저마다 정원군을 벌해야 한다고 내뱉는 말에 선조는 더욱 화가 난 얼굴로 바뀌었다.

인빈의 차남이었던 신성군의 죽음 이후 선조가 누구보다도 총애했던 아들 정원군이었다. 그런 정원군이 죄인이 되어 많은 대신들의 조롱을 받고 있었다.

대신들의 아우성이 잠잠해질 때쯤 선조가 입을 열었다.

“김 나인.”

선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양화당에서 나를 중궁전으로 보낼지 아니면 동궁전으로 보낼지를 고심하며 인자한 미소로 입을 열던 선조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나를 끌어내 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아주 차갑고도 냉기가 가득 전해지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선조는 내가 그의 부름에 고개를 들지 않는 것을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과인은 네가 총명하다 하여 중궁전으로 보내려 하였지. 허나, 이제 보니 총명한 계집이 아니라 요망한 계집인 줄 과인이 진즉 몰랐구나.”

선조가 이를 갈며 말을 늘어놓았다.

“네 입으로 말하거라. 네 태중 아이의 아비가 정녕 정원군이 맞느냐?”

선조는 내게 묻고 있었다. 그러나 내 입은 열쇠를 잃어버린 자물쇠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죽기를 각오하고 입을 다물겠다고 결심했지만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묻는 것이 아니라 정원군인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답을 해야 할지 생각한 적은 없었다.

선조는 이미 인빈에게 들어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정원군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화살은 당연하게도 세자에게 돌아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정원군이 이처럼 거짓으로 석고대죄를 할 정도로 감쌀 인물이라면 세자뿐이라는 걸 선조가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정원군이 맞는다고 말한다면 나는 둘째치고 정원군은, 아무런 죄가 없는 정원군은…….

“김 나인, 전하께서 묻고 계시질 않은가.”

선조의 가까운 곳에 선 대전내관이 나를 다그쳤을 때였다.

“세자저하 납시옵니다.”

내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혼이 세자빈과 함께 서청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때까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혼을 보았다.

그는 조금 전에야 사실을 들은 것인지 창백한 얼굴로 선조의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선조는 그 인사를 받지 않았다.

평소 못마땅하게 여겨온 세자 혼이었다. 그와 반대로 총애했던 정원군이 죄인을 자청하며 석고대죄를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 선조를 기분 나쁘게 한 것이 분명했다.

“김 나인. 어서 고하시게.”

혼의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자 대전내관이 다시 한 번 다그쳤다. 하지만 내 귀에는 그런 내관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괴로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혼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는 어디까지 사실을 전해 들었을까?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나는 오래도록 혼을 바라보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마음껏 흘리고 싶은 눈물도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혹시라도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라도 나를 보고 내 눈빛을 보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본다면 당장이라도 눈치를 채고 말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혼이라고 말할 순 없다. 더욱이 아무런 죄가 없는 정원군의 이름을 댈 수도 없었다. 아이는 죽이지 않는다고 했다.

난 그렇게 끝까지 입을 다물 결심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혼이 선조에게로 돌아서며 비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소자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선조는 혼을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모두의 시선이 혼을 향했다. 불안감이 현실이 되어 찾아오는 순간 혼의 입이 열렸다.

“아바마마, 김 나인의 복중 아이의 아비는 바로……”

“전하!”

내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온 외침에 혼을 향했던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한 번 열린 나의 입은 마치 다른 이가 조종하듯이 거짓을 이야기한다.

“소, 소인의…… 복중 아이의 아비는……. 정원군마마이옵니다…….”

내 대답에 주변의 웅성거림이 커져만 간다. 나의 동공은 풀린 듯 앞을 가만히 내다보고 있고, 머릿속은 새하얀 백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의 가슴은 누군가의 손으로 쥐어짜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서청은 침묵에 휩싸였다. 나의 실토 아닌 실토로 정원군과 내가 저지른 죄는 모두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이제 서청에 있는 모든 이들은 선조의 하려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조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보란 듯이 긴 한숨을 내셨다. 잠시 뒤, 선조가 정원군에게서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도승지는 들으라.”

도승지가 재빨리 선조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선조의 명이 떨어졌다.

“죄인 정원군과 나인 김 씨를 제주로 유배를 보내 위리안치에 처하라.”

***

선조의 명이 떨어진 직후, 정원군은 의금부 옥으로 나는 내수사 옥으로 끌려왔다. 같은 형이 내려졌음에도 내가 아직 나인의 신분이기 때문에 내수사로 끌려온 것이다.

밤이 찾아온 내수사 옥사에는 화로 속 나무가 타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또한 이곳에 갇혀있는 이는 오로지 나뿐이었다.

나는 옥사 안에서 머리를 힘없이 벽에 기댄 채 낮에 있었던 일들을 되새겼다. 내가 한 말들, 그리고 내가 저지른 일들. 사실 이러한 결과를 낳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내 입으로 정원군의 죄를 덧씌우는 거짓말을 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혼을 위해서였다. 애초부터 나에게 역사를 지키기 위한 의지 따위는 없었다.

내 의지는 오로지 그를 위해서 움직였고 거짓을 말하게 했다. 이것이 옳은 행동이었는지는 지금의 나는 판단할 수 없다.

그저 다행이라면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 유배형으로 끝났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비록 이런 일로 위안을 받는 내 마음이 이기적이라도 해도 말이다.

-쏴아!

“누구냐?”

내수사 옥 주변을 밝히고 있던 화롯불들이 일시에 꺼지며 당황한 내관의 목소리가 옥 안까지 들려왔다. 나는 옥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는 옥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볼 수는 없었다.

“윽-!”

내관의 짧은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에 내 몸은 두려움으로 잔뜩 움츠러들었다. 조금 뒤, 옥문 안으로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그는 내금위 옷에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복면에 가려지지 않은 그의 두 눈을 보는 순간,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혼아!”

“경민아.”

그는 다름 아닌 혼이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갇혀있는 옥으로 재빠르게 다가오더니 묶여있던 쇠사슬을 들고 있던 칼로 단번에 잘라냈다.

탕!

그리고는 거침없이 옥문을 열고 옥사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곧바로 두 팔 벌려 그에게로 달려가 안겼다.

그는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몸을 굽혀 나를 두 팔로 안아주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기자마자 참고 있던 눈물부터 쏟아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혼아…….”

“괜찮은 것이냐?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것이냐?”

그가 나를 어렵사리 자신의 품에서 떼어놓으며 물음을 쏟아냈다. 나는 눈물을 훔쳐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은 그런 나를 애처로운 눈으로 응시하며 그의 두 손으로 내 양 볼을 감싸며 말했다.

“경민아, 간밤에 내게 말하려 하려던 것이 이 일이었느냐?”

지난 밤. 궁궐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나는 그의 앞에서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더불어 아이를 가진 사실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혼자서 일을 해결해 보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리고 말았지만.

“어찌하여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냐?”

나를 향한 안타까움으로 가득 찬 그의 눈빛이 내 가슴을 저미도록 시리게 만들었다.

“너와 나에 대해서…… 인빈마마가 알아버렸어. 이제 궐에서의 내 존재가 너에게 해가 될 것 같았어. 그래서 나만 떠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아서…….”

“어리석기는!”

혼이 다시 한 번 나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품안에서 내가 있는 곳이 옥사라는 것도 잊은 채 안도감에 빠져들었다. 혼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궐을 떠나자꾸나.”

나는 그의 품 안에서 그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되물었다.

“궐을 떠나다니?”

“네가 머물 곳을 마련해 놓았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서둘러 궐을 떠나자꾸나.”

궐을 떠나는 것,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내가 실행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혼의 옷차림을 보아하니 그는 처음부터 나를 데리고 궐을 빠져나가기 위한 준비를 모두 마치고 온 듯 보였다.

“내가 가면 정원군 마마는?”

“부아는 걱정하지 말거라. 시일이 지나면 아바마마께서도 부아를 풀어주실 것이다.”

이 일을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든 것은 바로 나 때문이었다. 그런데 옥을 탈출해서 도망까지 친다면? 일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런데도 시일이 지나면 정원군이 유배에서 풀리게 될까?

“난 갈 수 없어.”

“경민아.”

그는 내 말에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이름을 불렀다.

“너와 궐을 나간다면 난 기약 없이 숨어 지내야 할 거야. 하지만 네 말대로 시일이 지나서 유배가 풀린다면 당당하게 돌아올 수 있잖아?”

“제주가 어떤 곳인지 아느냐? 제주 유배길은 천 리가 넘는다. 홀몸이 아닌 네가 어찌 그 먼 제주로 유배를 가겠다는 말이냐? 나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혼이 화난 목소리로 반대하며 나섰다.

그의 이런 우려 섞인 걱정과는 달리 제주는 내게 좋은 추억이 있던 곳이었다. 아빠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여행지. 강한 제주의 바람조차도 하나의 풍경거리로 다가올 만큼 좋았던 곳.

물론 지금은 조선시대다. 조선시대의 제주는 내가 알던 제주와는 약간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추억이 가득한 제주를 떠올리면 조선시대의 제주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은 없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여행가는 셈 치지 뭐. 걱정 마. 나, 제주에 가본 적이 있어. 멀긴 하지만 좋은 곳인걸. 오히려 한성에 숨어 있는 것보다는 그곳이 안전할 거야.”

“경민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진난만하게 말을 늘어놓는 나를 보며 혼은 화를 냈다.

나는 알고 있다. 그가 화를 내는 이유는 오로지 나를 걱정해서라는 걸. 그렇다면 나는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잘 설득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게 잘된 일인지도 몰라. 아무도 다치지 않고 유배로 끝났잖아? 그러니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고. 그리고 혼이 네가 말했잖아, 시일이 지나면 유배가 풀리게 될 수도 있다고 말이야. 유배가 풀리게 되면 궐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숨어 지내지는 않아도 될 거야. 그렇지?”

나는 한 손을 그의 뺨 위에 올려놓으며 그가 웃고 있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 궐이 우리 모두에게 안전해질 때까지 떠나 있는 거라고.”

어느새 붉게 충혈된 혼의 두 눈에 물기가 아른거렸다. 나는 내가 방금 그에게 한 말들이 얼마나 그에게 잔인한 말인지를 알고 있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세자라는 위치. 그러나 그는 그 위치에서 나를 구할 수 없다. 함께 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는 나를 보내야 한다. 그것이 그를 얼마나 힘들게 만드는지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만큼 힘들기 때문에.

“나를 위하여 이러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가 안타까움으로 무겁게 메인다. 그 때문인지 다시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내며 나는 더욱 밝게 웃었다.

그리곤 그의 한 손을 잡아끌어 내 아랫배 위에 살포시 올려놓으며 말했다.

“아니, 우리 모두를 위해서.”

내 말에 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에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의 눈동자에 오래도록 시선을 맞춘다면 나의 결심이 금방이라도 흔들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곤 속삭였다.

“우리는 빠른 시일 안에 재회하게 될 거야.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혼아.”

유오디아 작가의 말

작가 블로그

전 이 소설이 비극으로 끝난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요? 새드엔딩설 최초 유포자 누구시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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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 (geni****) 2013-08-11 03:01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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