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말할 수 없는 비밀(2)
흰색
“인빈마마께서 일찍 침수 드셨나 봐요?”
다음날 해가 지고 내 처소로 온 운지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보따리가 하나 들려 있었다.
운지는 양화당에 오자마자 인빈의 처소에 불이 평소보다 일찍 꺼져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나는 오늘밤 궁궐을 떠날 예정이었으니까.
“준비는 끝났어?”
“네.”
내 물음에 운지가 답하며 가져온 보따리를 풀었다. 그 안에는 무수리의 의복이 있었다.
“안에 입으셔요. 그 위에는 항아님 의복을 덧대어 입으시고요. 궐을 빠져나가기 전에 겉옷만 벗으실 수 있게요.”
난 운지의 말대로 무수리의 옷을 먼저 입고 그 위에 나인의 의복을 걸쳐 입었다.
적어도 양화당을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나인의 의복을 입고 있어야 설사 누군가에 발각되더라도 둘러댈 말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운지는 망을 보았다. 혹시라도 영심이 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옷을 다 갈아입을 때까지 영심은 오지 않았다.
옷을 다 갈아입고 나자 난 몇 가지 물품들을 보따리 안에 챙겨 넣었다. 만약을 대비해 돈을 대신해서 밖에서 쓸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항아님, 이제 가요.”
운지가 방 안을 밝히고 있던 기름등을 입으로 불어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운지가 먼저 처소를 나서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밖은 어두컴컴했다.
우리는 양화당의 뒷문으로 향했다. 어젯밤 혼과 내가 만났던 바로 그 장소였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잠겨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운지가 나서서 닫힌 문의 빗장을 풀었을 때였다.
“어디를 가려는 것이냐?!”
마치 내가 처소에서 나오기를 기다린 듯 정 상궁이 양화당의 나인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정 상궁이 이끌고 나타난 양화당 나인들은 순식간에 운지와 나를 에워쌌다.
그중에는 영심도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우리가 궁궐을 떠나려는 사실을 정 상궁이 미리 눈치 채고 있었다고 느꼈다. 정 상궁이 알고 있다면 인빈도 알고 있을 터였다.
“저년을 잡아라. 어서!”
정 상궁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영심을 비롯한 양화당의 나인들이 내게로 다가와 나를 양쪽에서 붙들었다.
운지는 이런 나를 보호하듯 붙들려다가 영심의 우악스러운 손에 땅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넘어지며 뒹구는 운지를 향해 소리쳤다.
“운지야!”
운지는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보따리를 놓치고 말았다. 보따리 안에 있던 내 물건들이 땅바닥에 흩어졌고 정 상궁의 시선이 그 물건들을 향했다.
그것을 본 정 상궁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야밤을 틈타 어디라도 도주하려는 행색이로구나.”
운지가 서둘러 그것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끌고 가라!”
정 상궁의 명령이 떨어지자 나를 붙들었던 나인들이 나를 끌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따라 운지가 나섰지만 다른 나인들이 운지의 앞을 막아섰다.
“항아님!”
운지의 안타까운 외침이 끌려가는 내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난 그런 운지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우악스러운 손길에 이끌려 양화당 앞뜰로 끌려갔다.
나를 끌고 간 나인들은 인빈의 처소가 있는 전각 앞뜰에 나를 내동댕이치듯 꿇어앉혔다. 나를 주변으로 모든 양화당의 나인들이 에워싸듯 둘러섰다.
그들 중 일부는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표정들이었다. 그녀들이 각각 하나씩 들고 있는 등롱은 양화당의 앞뜰을 환한 대낮보다도 더욱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낮에만 느낄 수 있는 따스함은 찾아볼 수 없는 빛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에도 침묵만이 흐르는 그곳에서 나는 몸을 떨며 전각의 마루 위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뒤 내 예상대로 인빈이 마루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전각 앞뜰로 끌려온 나를 바라보며 눈썹을 매섭게 추켜세웠다.
그런 인빈의 옆으로 정 상궁이 다가가 아뢰었다.
“마마, 김 나인이 야반도주를 하려 한 듯합니다.”
“도주? 궁궐의 나인이 도주를 하려 했단 말이냐?”
내가 도주를 하려고 했다는 정 상궁의 말에 인빈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돈다. 아주 반갑고 기쁜 소식을 들었다는 얼굴이다.
“어찌하여 이 야밤에 도주를 하려 했느냐? 내게 이 궐에 남아 있게 해달라고 그리 청하며 나인이 되길 바란 게 엊그제 일 같은데 말이다.”
인빈이 코웃음을 치며 내게 말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평소보다도 조용한 게 이상하다는 운지의 말이 떠올렸다.
일찍 잠든 것처럼 행세한 인빈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운지가 나를 궐 밖으로 나가게 도와주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인빈은 운지의 뒤를 쫓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운지와 내가 하는 대화를 영심이나 다른 나인이 몰래 엿듣고 인빈에게 고해바쳤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자 인빈이 정 상궁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의원 의녀는 어디 있느냐?”
“곧 양화당에 당도할 것이옵니다.”
정 상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화당 안으로 의녀 한 명이 재빨리 들어왔다. 정 상궁은 그녀에게 손짓하여 인빈의 전각 쪽으로 불렀다.
의녀는 정 상궁의 손짓에 서둘러 인빈의 전각 앞으로 다가가 마루위의 인빈에게 인사를 올렸다.
“네가 정빈과 온빈의 태맥(胎脈, 임신 맥)을 짚었던 의녀이냐.”
“예, 그러하옵니다. 인빈마마.”
“그래, 지금 저 아이의 맥을 짚어 보거라. 태맥이 잡히는지 내 알고 싶구나.”
나는 놀란 눈으로 인빈을 응시했다.
‘인빈이 눈치 챘어!’
물론 나도 임신 사실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그랬기에 난 궐을 떠나려고 결심했었던 것이니까.
그렇지만 양화당의 나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임신한 것이 사실로 판명난다면 일은 걷잡을 수가 없게 된다.
뒤늦게 내가 인빈 앞으로 끌려온 이유를 알게 된 양화당의 나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정 상궁은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곧 인빈의 명을 받은 의녀가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그녀에게 맥을 잡히지 않으려 쓸모없는 반항을 했다. 뒤로 몸을 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영심을 비롯한 양화당의 나인들이 그런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달려들어 양쪽에서 내 어깨를 누르며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인빈에게 애원했다.
“인빈마마! 제게 왜 이러세요?”
“근심 말거라. 내 생각이 틀렸다면, 네게 사과하마.”
인빈이 간교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한다. 내 간담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의녀가 내 손의 맥을 짚었다.
나는 맥을 잡힌 손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영심이 그런 내 팔을 단단한 손으로 움켜잡아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의녀가 영심에게 말했다.
“그리 잡으시면 맥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영심이 잡았던 내 팔을 놓고는 대신 팔꿈치를 붙잡았다. 이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는 나는 손에 힘을 풀었다.
제발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그것뿐이었다. 조금 뒤 내 맥을 짚었던 의녀가 자리에서 일어서 인빈에게로 돌아섰다. 인빈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
“태맥이 잡히느냐?”
‘제발…….’
의녀가 잠시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저했다. 그러자 인빈이 답답한지 의녀를 다그쳤다.
“어서 말하지 못하겠느냐?!”
“그것이……. 초기에는 맥이 불안정하여 잘 잡히지 않사옵니다.”
“내가 묻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회임인지 아닌지, 맞는지, 그것만 말하거라.”
인빈의 목소리가 차갑게 굳어가자 의녀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대답했다.
“회임인 듯하옵니다.”
의녀가 대답했다. 그러자 나를 붙들고 있던 나인들이 동시에 내 몸에서 손을 뗐다. 난 인빈의 전각 앞으로 엎어졌다. 인빈은 그런 나를 보며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낮처럼 밝은 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들리는 소리는 오직 인빈 한 사람의 웃음소리뿐이었다. 한참을 소리 내어 웃던 인빈이 명을 내렸다.
“저 아이를 광에 가두어라.”
그때 정 상궁이 나섰다. 인빈과는 달리 그녀도 내 임신사실에 꽤나 놀란 눈치였다.
“죄를 지은 궁녀는 의녀로 하여금 잡아들여 우선 내명부 옥에 하옥하고 사안의 크고 작음에 따라 중전마마께 고해 그 일을 처리하게 되어 있사옵니다.”
“그래?”
정 상궁의 말에 되묻는 인빈은 여전히 얼굴에 웃음기가 한 가득이었다.
“마마. 사안이 크옵니다. 그러니 적법한 절차를 따르시는 것이 옳을 듯하옵니다.”
“사안이 크긴 크지. 그래서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내가 직접 전하께 고할 것이다.”
인빈의 말에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정 상궁도 마찬가지였다.
“전하의 여인이 다른 사내와 간통하여 회임을 하였으니 응당 전하께서도 이 일을 아셔야 하지 않겠느냐?”
“마마…….”
“뭣들 하느냐. 어서 저 아이를 가두라는데도!”
인빈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이번에도 영심이 앞장서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때 인빈이 나를 보며 말했다.
“혹시 아느냐, 네 뱃속 씨의 아비가 제 발로 나타난다면 죽음만은 면할 수 있을지 말이다.”
인빈은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정원군이라는 예외를 두지 않는 것은 나와 정원군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가 진작 나서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것을 인빈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정원군이 제외된다면 지금으로써 인빈의 머릿속에 남는 인물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세자.’
나는 두려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인빈을 바라보았다. 인빈은 그런 내 눈빛을 즐기듯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지금이라도 네 입으로 고하겠느냐?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 말이다.”
양화당 앞뜰에 모인 모든 나인들 앞에서 말하라는 것. 내가 말하게 되면 무엇이 달라질까? 인빈이 그의 오라버니와 나누었던 대화를 엿들었기에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추문에 휩싸인 혼은 세자의 자리에서 폐위될 것이다. 그는 그저 광해군이 될 것이고 나 역시 죽지 않는 선에서 일이 마무리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일은 내가 아는 역사에서는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인빈을 보며 깨달았다. 절대 혼의 이름을 꺼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어서 들어가거라.”
정 상궁은 거의 나를 밀어 넘어뜨리듯이 광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문을 닫았다.
-끼이이익.
문이 닫힌 광 안은 온통 암흑천지였다. 이 안에는 창문이라고는 없었다.
손톱만큼 작은 공간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지만 광 안을 모두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앞으로 손을 헤집으며 걷다가 그만 가마니에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갑자기 놀라 넘어진 나는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한 팔로 내 아랫배를 감싸 안았다.
‘내가 혼의 아이를 가졌어.’
여전히 믿기지 않는 현실. 몸에 달라진 변화라고는 구역감이 들었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나는 홀몸이 아니었다.
어두컴컴한 광 안에서 나는 또 다른 누군가와 함께였다. 그것이 어둠에 대해 반사적으로 나타나는 공포에서 조그마한 해방감을 주었다.
나는 광의 기둥 아래 놓인 가마니 위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앞으로 일어날 일에 겁에 질려 몸이 떨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며 침착하게 상황을 되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인빈은 혼을 세자의 자리에서 끌어내기 위해 내일 임금님께 이 사실을 고할 거야.’
나의 아이는, 내 뱃속에 있은 아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아버지의 자리를 위태롭게 만드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이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나의 잘못이었다.
애초부터 내가 혼의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를 다시 만나고, 그를 사랑하게 된 것. 그의 곁에 함께 있어주겠다고 약속한 것. 이 모든 것들이 오늘의 사태를 낳고 말았다.
아빠에게 듣고 배운 대로라면 역사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혼은 분명 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역사에 있지 않았던 일이 일어난 것일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광해군에 관한 것. 조선에 오기 몇 년 전부터 아빠에게 들어왔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가 양화당의 나인 하나 때문에 이런 곤경에 처했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인빈은 내 뱃속의 아이가 혼의 아이라는 걸 증명하려고 할 것이다. 혼을 세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인빈이 그런 나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어떤 고문을 가할지도 모른다.
내게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말이다. 그러나 내가 끝까지 말을 하지 않는다면……. 나와 아이는 죽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섬뜩한 일이었다.
나 혼자 고문을 받고 죽는다고 생각해도 겁이 나는데, 또 다른 생명이 억울하게 죽게 될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그것만큼은 절대 막고 싶었다.
그러나 인빈이라면 아주 잔인하게 나와 아이를 해칠 때까지 고문을 할 것 같았다. 그 전에 혼이 나서게 된다면? 그것 역시 싫었다.
설사 나와 관련된 일에 혼이 얽히고도 세자의 자리를 유지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운지야, 여기냐?”
갑자기 굳게 닫힌 광 밖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난 귀를 세웠다.
“예, 정원군마마님.”
“열어라.”
“아,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정원군마마님!”
“내가 열라고 하였다.”
평소처럼 안정감을 지니고 있지만 분명 흥분이 실려 격앙된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정원군임을 깨닫자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일어섬과 거의 동시에 닫혀 있던 광의 문이 열리며 등롱을 든 운지가 다급한 걸음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녀는 광 한쪽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등롱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나에게로 달려와 내 양손을 붙잡았다.
“항아님!”
운지의 눈에는 글썽하게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운지야, 여긴 어떻게…….”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광 안으로 천천히 들어선 이를 보았다.
그는 정원군이었다. 정원군의 뒤로 광을 지키고 있었던 듯 보이는 영심이 광 안쪽의 우리를 한번 들여다보더니 재빨리 어디론가 뛰어가 버렸다.
아마도 정 상궁이나 인빈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난 운지의 손을 잡은 채로 정원군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오신 거예요? 운지에게 들으셨어요?”
“그렇소.”
정원군은 화가 난 듯 눈살을 찌푸린 채 대답하고 있었지만 난 그의 표정 안에 숨겨진 안타까움을 읽었다.
“그럼 다 아신 거예요?”
내 조심스러운 물음에 정원군은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운지와 눈을 맞췄다.
그러자 운지는 가지고 들어온 장옷을 내 어깨 위에 걸쳐 덮어주고는 조용히 광의 문을 닫고 그곳을 나갔다.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정원군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찌 그런 위험한 일을 벌인 것이오?”
“위험한 일이라니요?”
“궁궐을 나가려 했다고 들었소.”
“그건…….”
“저하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오?”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답을 주지 못했다. 사실 처음부터 그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적어도 조언이라고 구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당연하게도 정원군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에 기대어 답을 구하려 했을 것이다.
나에 대한 그의 마음만 몰랐더라도…….
“어머님께서는 분명 전하께 고하실 것이오.”
“그럴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원군의 두 눈이 무겁게 아래위를 한번 훑고 나서야 입이 다시 열렸다.
“당장 저하께 말씀을 올려야 하오.”
“저하께 말씀을 올리다니요?”
“지금으로써는 그 방법뿐이오.”
정원군은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혼에게 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인빈이 바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혼이 직접 나서면 일이 커질 테니까.
“그럴 순 없어요.”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정원군이 놀란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럴 수가 없다니? 지금 제정신인 게요?”
정원군이 나를 다그쳤다. 그러나 아직 나는 할 말이 있었다.
“그게 인빈마마가 바라는 거예요. 저하를 세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요. 제가 거기에 이용당할 순 없어요.”
“그대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잖소. 그대의 뱃속 아이의 생사도 달린 문제가 아니오?”
정원군의 말은 옳았다. 난 혼자가 아니었다.
“제가 입을 열지 않으면요?”
“저하께서 이 일을 듣게 되시고도 나서지 않으리라 보시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저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하오. 내가 가서 알리겠소.”
어쩌면 정원군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이 일은 진작부터 혼에게 알렸어야 했다.
혼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더라면 어쩌면 일이 이 지경에 이르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은 대책을 내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밀려왔다. 혹시라도 내가 임신한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혼에게 해가 되어 그에게…… 외면 받지 않을까 하는 작고 작은 두려움.
그래서 난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그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궁궐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원군은 왜 이렇게 다급하게 혼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일까? 정원군이 급히 나가려는 듯 돌아서자 난 그를 붙들었다.
“말씀해주세요. 나인이 전하가 아닌 다른 이의 아이를 가지게 되는 경우는 어찌되는지.”
정원군이 입을 다문 채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나인이 전하가 아닌 다른 이와 사통할 경우 그 사통한 이는 장 300대를 친 후에 삭탈관직 되오. 또한 나인은……. 즉시 참수형에 처해지오.”
“아이를 가진 경우에는요?”
정원군은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그가 운지에게 사실을 듣자마자 급히 나에게로 달려온 이유가 바로 지금 그에게서 나올 답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랬기에 나는 그에게로 한걸음 다가서서 다시 한 번 물었다.
“말씀해주세요. 어찌되는지.”
그러자 정원군이 내게서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내는 즉시 참수형에 처해지고 여인은 해산 후 백 일이 지난 다음 참수형에 처해지오.”
나는 그제야 정원군이 왜 날 다그쳤는지 깨달았다. 인빈이 바라는 대로 혼이 세자의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혼은 그저 세자의 자리를 잃는 선에서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인으로서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된 나는?
“저하께 알리겠소.”
그는 한시가 급하다는 듯 내게서 돌아섰다. 그때였다. 닫혀 있던 광의 문이 열리더니 인빈이 정 상궁과 함께 광 안으로 들어섰다.
인빈의 등장에 정원군은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어머님.”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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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난 가끔 인빈이 좋아. 답답한 경민이보다는 시원시원한 타이밍의 대가인 마녀인 인빈이. 씨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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