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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의 연인-53화 (53/110)

제53화. 사랑하면 할수록(4)

흰색

인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그녀의 처소를 나왔다.

엄청난 불안감이 엄습해오며 속이 울렁거렸다. 도무지 그곳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서 정 상궁에게 핑계를 댄 후 급히 내 처소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내 처소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끼며 털썩 주저앉았다.

‘인빈이 알았어!’

대략 인빈은 혼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까지만 눈치 챈 듯싶었다. 그것만으로도 혼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인빈의 말에 나는 섬뜩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 존재가 혼에게 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나는 며칠 전 혼이 내가 있는 전각을 찾아왔던 걸 떠올렸다. 다음날 아침, 내가 깨어났을 때 혼은 없었다. 마치 그와 보낸 밤이 한낱 꿈인 것처럼 그는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해가 뜨기 전에 내 처소를 떠난 것이 분명하겠지만 그는 언제든지 나를 만나러 또 찾아올 수 있었다.

인빈이 눈치 챈 이상 혼이 나를 만나러 내 처소에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세자빈도 그것을 알고 내게 주의의 말을 한 것이 아닐까? 어쨌든 그를 위험에 빠트리게 만들 순 없었다. 더욱이 나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빈이 했던 말을 그에게 전해야 할까? 혼을 직접 만날 수는 없으니 세자빈을 찾아가서라도 말이다.

난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인빈이 눈치 챈 상황에서 동궁전을 찾아가거나 세자빈을 만나거나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혼에게 해를 끼칠 거리를 인빈에게 제공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니 당분간 어떤 식으로든 혼을 만나서는 안 되었다.

“어머? 일찍 돌아오셨네요?”

운지가 아무런 기척 없이 닫혀 있던 방문을 열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난 그녀를 보고 웃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걱정스럽게 물으며 방 안으로 들어온 운지를 보며 난 말했다.

“처소를 옮겨야겠어.”

“네?”

“난 더 이상 수라간 궁녀도 아니잖아. 그리고 여기는 양화당과 멀고.”

“그래서 오히려 편하다고 하셨잖아요.”

“이제 나는 인빈마마의 지밀나인이잖아. 그래서 양화당 내에 지밀나인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옮겨가려고.”

“저야 상관은 없지만 그렇게 되면 항아님이 불편하실 텐데요? 아마도 양화당에서는 다른 지밀나인과 한 방을 쓰셔야 하실지도 몰라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응.”

“양화당으로 옮기시면 미영항아님이 찾아오시기도 불편하실 텐데…….”

“그럼 내가 미영이를 찾아가면 되지.”

그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운지를 향해서 억지웃음을 지었을 때였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것을 본 운지가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항아님…….”

나는 서둘러 눈물을 훔쳐내려고 했다. 그러나 한번 쏟아진 눈물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혼이 나를 찾아왔을 때 이 처소가 비어 있는 것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그를 피하려고 한다고 오해할까? 제발 그가 싫어서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가 필요하든 필요하지 않든 언제나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런 내 마음을 전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같은 궁궐 안에서 지내는데도 그에게 이러한 마음을 전하러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거리는 보이는 것보다도 멀다. 앞으로 5년, 5년만 지나면 혼은 왕이 된다. 5년만 기다리면 그를 보고 싶을 때마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위안 삼자.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 보지만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

기존에 머물던 처소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나는 바로 그날 행동에 옮겼다. 그러나 바로 양화당으로 갈 수는 없었다.

배정에는 적어도 십여 일이 걸린다고 했다. 난 급한 대로 수사간(水賜間, 무수리 숙소)에서 스무 일 정도를 보낸 다음에야 양화당에 처소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로는 영심이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또한 가까운 곳에 정 상궁의 처소가 있어 틈만 나면 정 상궁이 일을 시키려 내 처소로 와서 나를 찾았다.

오늘 같은 날도 그랬다. 일이 없는 때라 처소에서 쉬고 있는데 정 상궁이 불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생과방에서 곧 차를 올릴 것이다. 준비하거라.”

“누가 오셨나요?”

“무슨 잔말이 그리 많으냐?”

정 상궁을 따라 서둘러 밖으로 나가니 생과방에서 차를 끓일 차구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받아들고 인빈의 처소로 가자, 문 앞에서 지키고 있던 나인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던 나는 인빈과 어떤 누군가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그 나인이 세자의 눈에 들었단 말입니까?”

“예, 오라버니. 그렇다니까요. 살다보니 이런 기회도 오는가 봅니다. 전하께서 달라 하셨을 때 내놓지 않은 게 어찌나 다행이던지.”

“그럼 어찌하시려는 겁니까?”

“어찌하긴요. 그 계집을 이용해서 광해를 세자의 자리에서 쫓아야지요.”

난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내딛는다면 바로 인빈이 나를 볼 수 있는 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법이 있겠습니까? 십 년이나 세자의 자리를 지킨 광해입니다. 쉽사리 물러나려 하지 않을 겁니다. 하물며 나인 하나에…….”

“오라버니. 어미를 잃은 광해를 이십여 년간 옆에서 지켜본 게 접니다. 오라버니가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광해는 왜란 이후 십 년이나 세자 자리를 지켰지요. 우리 신성군을 대신하여 전하께서 임시로 맡겼던 세자직을 말입니다. 그 정도로 광해는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게 몸에 밴 위인입니다. 그런 광해가 세자빈을 내세워 그 아이를 달라고 했으니, 그 아이에게 보통 달아오른 게 아닐 겁니다.”

“허나, 전하께서 묻는다 하셔도 광해가 아니라 한다면…….”

“전하께서 물으시게 하다니요? 아무런 증거도 없이 함부로 그럴 수는 없지요.”

“그럼 마마의 생각은 어찌하시려는 것입니까?”

“전하께서는 지금 광해를 세자 자리에서 쫓아낼 명분을 찾고 계시지요. 그 명분을 위한 구실을 그 계집이 줄 겁니다. 동궁전 나인도 아닌 양화당의 나인과 사통(私通)했다는 증거만 만들어도 충분합니다.”

“그렇군요! 양화당의 나인은 전하의 여인이기도 하니 세자가 부왕의 여인에게 손을 댔다는 말이 퍼지기만 해도 삼사(三司, 사헌부, 홍문관, 사간원)와 성균관 유생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모두 세자폐위를 주청하겠지요. 그리되면 정원군이 세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예. 그리 되면 신성군이 세자가 되지 못하고 죽어 가지게 된 내 한을 정원군이 풀어 주게 될 겁니다.”

“하온데 마마. 세자 문제야 그렇게 해결한다 하더라도 혹여 중전이 대군이라도 생산하게 된다면 일이 좀 틀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럴 일이 없게 하면 되지요.”

“없게 하다니요?”

“중전이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게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마마.”

“오라버니. 죽은 의인왕후가 왜 석녀(石女,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을까요? 나 인빈입니다. 내겐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의인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한 게……. 설마 마마께서?”

지금 인빈의 말은 말만으로도 충분한 대역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대체 인빈은 중전 김 씨에게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 것일까? 찻잔이 담긴 반상을 든 내 손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인빈이 입을 열었다.

“공빈이 정녕 광해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었다 여기십니까?”

“마마!”

“오라버니. 궁궐은 그런 곳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이 죽어야지요. 그것이 바로 이 궁궐의 생리입니다.”

인빈이 웃음을 터트렸다. 혼의 어머니 공빈이 죽은 이유가 인빈 때문이었다니! 엄청난 사실에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문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였다. 긴장으로 인해 속이 울렁거린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구역감이 몰려왔다.

“웁.”

인빈의 웃음소리가 멈췄다.

“거기 누구냐?”

인빈이 앙칼진 목소리로 문 쪽을 향해 소리쳤을 때였다.

“마마. 정원군마마께서 오셨사옵니다.”

“정원군이? 어서 드시라 해라.”

“예. 마마.”

때마침 정원군이 양화당에 왔는지 인빈 처소의 문이 열리며 왕자의 관복을 입은 정원군이 들어섰다. 그는 문가에 가깝게 서 있던 나를 발견하고는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 손에 들려있는 차구를 보고는 일을 하던 중이라고 여겼는지 그대로 나를 지나쳐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메스꺼움으로 인한 구역질이 그의 걸음을 붙잡고 날 돌아보게 만들었다.

“웁. 으웁.”

나는 더 이상 그곳에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정원군이 들어오며 열렸던 문 밖으로 서둘러 걸어 나왔다.

밖에 서 있던 지밀나인들이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로 나온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계속되는 구역감에 그곳에 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바로 옆에 서 있던 지밀나인에게 차구가 든 반상을 건네주고는 서둘러 양화당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내 새 처소가 양화당에 딸린 전각이기 때문에 급한 대로 방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운지가 떠다놓은 물을 연거푸 마셨지만 울렁거리는 속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 상궁의 처소에서 짐을 빼기 위해 서두른다고 아침을 걸러서 그런지 속은 빈속이었다.

너무나도 놀란 일을 엿들어서 경기라도 일으켰다고 생각한 나는 한 손으로 쇄골 아래를 두드렸다. 속은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운지가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이미 깨끗이 비워버린 물그릇을 운지에게 내밀며 말했다.

“물 좀 더 갖다 줄래.”

“어디 안 좋으세요?”

“모르겠어.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웁.”

내가 다시 구역질을 시작하자 운지가 서둘러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물그릇으로 사용하는 그릇을 내 앞에 내밀며 말했다.

“등이라도 두드려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단지 토할 것 같지는 않은데……. 웁. 우웁. 왜 이런지 모르겠어.”

“의녀라도 불러 올까요?”

“아니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누가 보면 회임하신 줄 알겠어요. 전 그럼 물을 좀 더 가져올게요.”

운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던진 말에 난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회임?’

운지가 나간 후 처소에 홀로 남은 나는 혼란스러움에 빠졌다.

혼이를 마지막으로 만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만약 지금 구역질을 하는 것이 입덧이라면……. 내가 임신을 했다는 것일까?

언젠간 자라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면 아이를 가지는 것. 보통 소녀들이라면 한 번쯤 해본 생각을 나 역시 했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은 그런 이상적이고도 일반적인 상황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욱이 지금 난 인빈의 지밀나인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를 가졌다는 건……. 인빈은 나를 이용해서 세자인 혼을 위협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인빈이 내가 혼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된다면?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인빈의 손에 혼의 어머니인 공빈마저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난 혼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 양화당으로 처소를 옮겼다. 내가 인빈의 발치에 있는 이상 혼도 나를 만나러 오고 싶은 마음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혼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양화당은 다름 아닌 그에게는 호랑이굴이나 마찬가지인 장소였던 것이다.

“항아님. 항아님, 안에 계십니까?”

문 밖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닫혀 있는 문 밖을 향해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내의원 의녀 보은입니다.”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의원 의녀라는 말에 내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무엇보다 이 시간에 의녀가 내 처소를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내 물음에 문 밖에서 보은 의녀는 공손하게 답했다.

“정원군마마께서 보내셨습니다. 이 처소에서 머무르시는 항아님께서 몸이 좋지 않으신 듯하다 하시여…….”

정원군이 보냈다는 의녀의 말에 나는 조금 전 인빈의 처소에서 정원군과 스쳐지나갔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급히 나가는 나를 보고 내가 아프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일단 갑자기 의녀가 찾아온 이유를 알게 된 나는 일단 안심하며 의녀에게 말했다.

“나는 괜찮아요. 그러니 돌아가세요.”

“맥이라도 짚을 수 있게 해 주시지요.”

정원군이 직접 명을 내려 보냈기 때문인지 보은 의녀는 그냥 돌아갈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나는 단호한 어조로 문 밖에 선 보은 의녀에게 말했다.

“고뿔에 걸렸을 뿐이에요. 그러니 돌아가세요.”

날이 따뜻해지며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 고뿔이라니. 이 거짓말이 제대로 먹힐 리는 없겠지만, 보은 의녀에게는 날 만나지 못한 핑계거리는 얻은 셈이었다.

내 말을 들은 후 보은 의녀는 감기에 좋은 탕약을 올리겠다는 말을 한마디 남긴 채 가버렸다. 난 또다시 구역감이 몰려올까 겁이 나서는 몸을 웅크렸다.

얼마 뒤 문이 열리며 운지가 물그릇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난 웅크렸던 몸을 들어 운지를 보며 말했다.

“운지야. 너에게 말할 게 있어.”

당장 믿고 의지할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그녀가 물그릇을 들고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주저했다. 이 사실을 털어놓는다면 그녀는 분명 놀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어디에 가서 함부로 말을 퍼트리고 다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믿고 있었다.

“내가 만약 회임을 했다면 말이야. 그래서 지금 내가 입덧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멈출 방법이 없을까?”

내 말을 들은 운지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축복받아야 할 소식에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 속에 빠진 사람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본 운지는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고심하던 운지는 생강과 삽주를 갈아서 달여 즙을 내어왔다. 그 즙은 혀에 닿자마자 표정이 일그러질 정도로 썼다. 그러나 그것을 마시자 거짓말처럼 입덧이 가라앉았다.

“얼마나 효험이 있을지는 저도 몰라요. 대신 심하실 때 드시면 지금처럼 조금은 나아지실 거예요.”

운지도 장담은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입덧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일 따름이었다.

“오는 길에 영심 항아님께는 항아님이 심한 고뿔에 드신 것 같다고 말씀드렸어요. 옷가지를 제게 내어달라 부탁하신 것을 보니 당분간은 다른 처소에서 지내실 것 같아요. 허나 언제까지고 숨기실 수는 없으실 거예요.”

나는 웅크린 채 이불에 누워 그녀의 보고를 들었다. 운지는 누워 있는 나의 손을 주물러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하이시죠?”

그녀의 말에 대답보다도 눈물이 먼저 흘렀다. 난 그녀가 주무르던 내 손을 거둬들여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눈물이 흐르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당장 아무런 대안도 없이 위험에 노출된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서였다.

“알고 있었어?”

“동궁전 최 내관 나으리가 직접 오셔서 항아님을 모셔가는 걸 보았는데요.”

운지는 진작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웃음에 눈물이 그치지 않은 눈으로 잠시나마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어서 그분께 알리세요. 그러면 양화당에서도 바로 나가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럴 순 없어.”

내가 단호하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운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내게 되물었다.

“인빈마마 때문에 그러셔요? 그러면 정원군마마께 부탁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두 분은 우애가 좋으시니 분명 항아님을 도와주실 거예요.”

“그것도 안 돼. 왜냐하면 인빈마마가 어느 정도 눈치를 채신 것 같아. 인빈마마는 그걸 이용해서 세자저하를 위험에 빠트리려고 해.”

내가 담고 있는 고민을 알아차린 운지가 나를 대신해서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회임하신 것이 맞는다면 이대로 양화당에서 머무시는 건 위험해요. 인빈마마께서도 곧 알아차리실 거라고요.”

“알아. 하지만 회임이 아니더라도 인빈마마는 나를 이용해서 저하께 해를 끼치려 할 거야.”

“그럼 다른 방도를 생각하신 것이 있으세요?”

나는 궁궐에 들어온 이 후로 절대 바라지 않았던 단 한 가지를 떠올리며 말했다.

“나…… 궐을 떠나야 할 것 같아.”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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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정원군 너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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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 (pig5****) 2013-08-13 09:38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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