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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의 연인-51화 (51/110)

제51화. 사랑하면 할수록(2)

흰색

그날 밤 나는 밤이 깊도록 잠이 오지 않아 마루로 나왔다. 무릎을 세운 채 쭈그리고 앉은 나는 밝은 달을 올려다보며 끊임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낮에 양화당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난 이제 지밀나인이 되었다. 하루에도 기분이 몇 번씩이나 바뀌는 마녀 인빈의 곁에서 비위나 맞춰야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혼을 더 보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는 것, 그만큼 괴로운 일은 없었다.

나도 안다. 세자빈의 말이 옳다는 것을 말이다. 혼이 아직 왕이 되지 않은 이상, 그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다.

‘차라리 중궁전으로 가는 게 더 나았을까?’

이 생각에 나는 곧바로 도리질했다. 여전히 중전은 정원군과 나에 대해서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사실은 정원군이 아니라 세자인 혼을 좋아한다고 속 시원하게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나에게 관심을 가지든 결국 그녀는 중전이고 나는 나인이었다.

설사 내가 정원군을 좋아했다고 하더라도 중전에게 덜컥 도와달라고 말할 처지에 놓인 게 아니었다. 그러니 혼의 경우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만 자야겠다.”

내일부터는 지밀나인이었다. 괜히 오늘 일로 심통이 나 있을지도 모르는 인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는 일찍 일어나서 양화당에 가 있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내가 자리를 털고 처소로 들어가기 위해 일어섰을 때였다.

“경민아.”

조용한 밤을 가르는 목소리에 놀란 내가 서둘러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야장의를 입은 혼이 서 있었다.

“혼아!”

내가 너무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던 걸까. 그가 내게로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눈치를 못 채다니…….

그는 날 보자마자 반갑게 웃으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마루 위에 서 있는 내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어떻게 여기에 온 거야?”

“네가 내게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힘들면 언제든지 네가 곁에 있어주겠다고. 그래서 온 것이다.”

“힘들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놀라며 묻는 나를 보며 혼은 태연스럽게 말한다.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고?”

“네가 곁에 없으니, 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그것이 참으로 괴롭다. 괴롭고 힘들다.”

그제야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루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혼이 놀란 얼굴로 그런 나를 바라본다.

“왜 그러느냐?”

“걱정했잖아! 제발 나 좀 놀래키지 마.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그가 진지한 얼굴로 날 놀렸다는 것을 깨닫자 얄미운 마음까지 들어, 그가 잡은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내가 뿌리친 손을 혼이 다시 잡았다.

“진심이다. 진심으로 네가 곁에 없으니 잠이 오지 않는구나.”

그가 날 잡은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그 온기가 얄미운 마음으로 얼어붙은 나를 순식간에 녹여버린다.

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웃는 나를 보며 덩달아 혼의 얼굴도 밝아진다. 그도 내심 내가 그의 손을 뿌리치자 조금은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오늘 양화당에서 빈궁마마를 뵈었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혼은 아는 걸까? 그는 내 말에 물끄러미 날 쳐다보았다.

“동궁전 나인으로 가는 건……. 당분간 어렵겠지?”

이 말을 꺼내는 내 속이 밖으로 나오지 못한 한숨으로 가득 찬다.

“혹시 들었어? 내가 인빈마마의 지밀나인이 되었거든. 그래서 당분간 바쁠 것 같고……. 그러니 이렇게라도 나 찾아오지 마. 다른 사람의 눈에 띄면…… 안 되니까.”

그를 위한 말이지만 내가 하고 싶지 않은 말이기도 했다.

분명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여기까지 오는 것은 혼에게도 어려운 일일 텐데 그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오지 말라고 할 수밖에 없는 내 상황이 서글퍼진다.

그러나 이건 그를 위한 거였다. 그에게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해를 끼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서 돌아가. 여긴 외져도 밤에 가끔 수라간 나인들이 지나다닌단 말이야.”

떼어내고 싶지 않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으며 내가 물러섰다. 그는 여전히 말없이 마루 위에 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가.”

그를 위해서라도 내가 먼저 단호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대로 그를 보내고 만다면 나는 방에 들어가서 울 것 같았다.

사실 내 마음은……. 사실 내 마음은 그에게 기대고 싶다. 물론 난 세자이면서도 아직은 위태로운 그의 상황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그에게 바라는 건 그와 단지 같이 있는 것뿐이다. 그는 이런 내 마음을 알까?

돌아선 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혼이 신을 벗더니 마루 위로 잽싸게 뛰어올라오며 내게 말했다.

“누군가 이리로 오는구나.”

“누군가 온다고?”

당황한 나는 혼과 함께 내 처소로 들어가 서둘러 문을 닫았다.

심장이 콩닥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나는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작은 문 앞에 혼과 함께 나란히 얼굴을 대고는 밖에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혼도 나도 서로 숨을 고르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지나가는 사람의 소리는커녕 흔히 들리는 부엉이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결국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그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바람소리조차 없었다. 혼이 보았다는 사람들은 이리로 오다가 다른 곳으로 지나간 것일까?

그때 혼이 벗어놓았던 그의 신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의 신을 가지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자 혼이 내 손목을 잡아당기며 나를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혼을 돌아보며 말했다.

“흑석(黑舃, 검은 신)이 밖에 있잖아.”

그런데 혼의 표정이 이상하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 온다며 다급하게 내 처소로 숨어든 모습 치고는 얼굴에 장난기 짙은 웃음만 한가득이다.

그의 장난에 속는 건 매번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또 그에게 속아 가슴 졸인 것을 생각하니 분통이 터지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내게 입맞춤을 해 왔다.

짧은 첫 번째 입맞춤으로 나의 흥분을 가라앉히던 그는 잡았던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의 장난에 속아 화를 내려던 내 마음은 애초부터 그런 적이 없다는 듯이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도 내 분이 가라앉은 것을 보았는지 두 번째 입맞춤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열정적으로 입술을 물었다.

며칠 전 날밤의 일을 떠올리게 만들 만큼 그의 강한 입맞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며칠 전날 밤을 떠올린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때 느꼈던 것 중에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았던 절대 못 잊을 아픔도 있었으니까. 애석하게도 당분간은 그 아픔을 다시 느끼는 건 내게 매우 겁이 나는 일이었다.

혼이 나를 자연스럽게 운지가 깔아놓은 이부자리 쪽으로 넘어뜨리려는 바로 그때였다. 나는 그대로 두 팔로 그를 밀어버렸다.

이런 나의 행동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불러왔다. 그가 뒤로 넘어지며 내가 누웠어야 할 이불 위에 그가 누워버리고 그런 그의 몸 위로 내가 올라탄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혼은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 나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놀란 숨을 몰아 내쉬고 있었다.

“경민아. 너…….”

혼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왠지 그는 이런 나의 실수로 벌어진 행동이 싫진 않은 모양이다.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마땅한 숨을 곳을 찾으려면 그의 몸 위에서 내려와야 했다.

서둘러 혼의 몸 위에서 내려오려는데, 그가 내 양쪽 팔꿈치를 강하게 잡으며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놔줘.”

“싫다면 어찌하겠느냐?”

“치! 소리 지를 거야.”

그가 내 말에 웃음을 터트렸고 그 틈을 빌어 나는 그의 몸 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나를 따라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한참을 웃어댔다.

“웃지 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앞뒤 안 가리고 동궁전으로 찾아왔던 그 용기는 어디가고 그러느냐?”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잖아. 알면서 그래?”

‘널 위해서니까, 당장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도 참는 건데…….’

내 목소리에 내내 참고 있던 울먹임이 섞여 들어갔다. 그것을 눈치 챈 것인지 혼이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한참을 날 바라보다가 그대로 누웠던 자리에 도로 누워 버리는 게 아닌가?

“뭐해? 안 가?”

그러나 혼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두 눈을 감아버린다.

“혼아.”

내가 걱정스럽게 그를 부르자 그가 한쪽 눈을 실눈처럼 슬쩍 뜨고는 날 보며 말한다.

“조금만 쉬다 가마. 해가 뜨기 전에만 가면 될 게 아니냐?”

“그렇지만…….”

마음과 다른 소리는 입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맴돌 뿐이다. 나도 그를 보내기 싫었다. 그를 걱정하는 마음보다 더 큰 마음이 그가 여기에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너무 타박하지 말거라. 네 곁이 아니면 잠이 올 것 같지 않단 말이다.”

내가 자꾸 그를 밀어내려는 것이 기분 나빴던 것일까? 혼이 투정부리는 듯한 말투로 대꾸한다. 그러더니 절대 이곳에서 안 나가겠다는 각오라도 보이려는 건지 내 이불까지 끌어올려 덮는다.

나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그저 내 이부자리의 원래 주인처럼 행세하며 누워버린 이 남자를 멀뚱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잠이 안 와? 동궁전은 여기보다 크고 넓잖아.”

자꾸 그를 내보내려고만 한 내 말투에 혹시라도 그가 기분이 상했을까 봐 걱정인 내 목소리가 조금은 부드러워진다.

그러나 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는 두 눈을 감아버렸다.

‘삐친 걸까?’

어쨌든 그는 오늘 밤은 정말 여기에서 자려는 모양이다. 우리 두 사람만 누우면 더 이상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내 처소에서 말이다.

생각해보니 잠이 오지 않는다는 건 걱정거리가 많다는 뜻이다.

지금껏 혼을 짝사랑하는 미영이가 매일 같이 그를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거의 매일 밤 동궁전 앞뜰에 나와 생각하는데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그의 잠을 방해할 만큼의 고민거리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설마, 나 역시도 그의 고민거리 중에 하나가 되어서 그를 잠 못 이루게 만든 것일까?

그러니 나는 조금이라도 내 옆에서 쉬고 싶다는 그를 뿌리칠 수 없다……. 나는 그의 잠에 방해되지 않게 조금의 거리를 두고 그의 옆에 살포시 누웠다.

그런데 눈을 감고 잠에 든 줄 알았던 혼이 내가 옆에 눕자마자 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그의 크고 단단한 손에 손을 붙잡힌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혼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그를 쳐다보는 걸 아는 모양이다.

“너도 어서 자거라.”

그는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삐친 건 아닌 것 같다. 나는 그가 삐치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대로 머리를 이부자리에 대고 누우려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서 그를 보며 말했다.

“내가 자장가 불러줄까?”

“자장가?”

그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본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어렸을 때 잠이 안 오면 아빠가 불러 주시던 거야.”

“잘 때 창(唱, 노래)을 듣는단 말이냐? 나는 되었다.”

혼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거절한다. 그런데 막상 마음먹고 불러주겠다고 말을 꺼냈는데 거절당하니 이대로 물러날 내가 아니었다.

“씁!”

그리고 주저 없이 나온 혓소리. ‘그 입을 다물라’는 뜻을 가진 나의 특허품이다. 오랜만에 들어서 기억을 못 하는 건지 마치 처음 본 행동이라는 듯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혼.

“그냥 잠자코 들어. 효과 직빵이야. 바로 잠이 올걸?”

혼은 잠시 뒤 큭큭거리며 웃더니 두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럼 어디 한 번 불러 보아라.”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 아빠가 내게 해주었던 것처럼 한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올려놓고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하듯 천천히 두드리며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잘~자~라~ 우리 혼이. 앞뜰과 뒷동산에~ 새들도 아가 양도~ 다들 자는데~.”

달님은 영창으로,

은구슬 금구슬로,

보내는 이 한밤.

잘 자라 우리 혼이,

“잘 자거라…….”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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