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사랑하면 할수록(1)
흰색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양화당 지밀나인이 내 처소를 찾아왔다. 나는 일이 없어진 퇴선간에 가지 않고 정 상궁이 던져주다시피 맡긴 바느질감과 씨름 중이었다.
“인빈마마께서 부르셔.”
평소에도 나와 별 친분이 없던 나인은 한마디를 무뚝뚝하게 던졌다가 곧 말을 바꾸어 한 가지 정보를 더 주었다.
“전하께서 양화당에 와 계셔.”
그 말에 나는 바짝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 중전인 김 씨를 맞이한 뒤로도 종종 선조는 인빈을 찾아 양화당에 왔었다.
단지 전보다는 횟수가 적었고 밤보다는 주로 낮에 잠깐 들리는 정도였다. 나인들은 그것을 전하가 인빈의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어쨌든 그렇게 선조가 양화당을 방문해도 퇴선간 나인인 나는 선조를 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가끔 궁궐을 돌아다니다가 아주 멀리에서 선조가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은 있었다. 그때도 감히 얼굴은 고개를 들고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런 선조가 온 자리에 인빈이 나를 부르다니? 양화당 나인을 뒤따라가며 궁금한 마음에 그녀에게 물었다.
“전하께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 알아?”
“그거야 나도 모르지. 너 또 무슨 사고 쳤니?”
오히려 그 나인이 내게 반문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내 얼굴에서 긴장을 읽었는지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말을 덧붙였다.
“불호령 같은 건 없을 거야. 퇴선간 나인이 뭘 혼날 일이 있다고? 아참, 전하께서 오시기 전에 빈궁마마께서 오셔서 지금은 세 분이 모두 함께 계셔.”
“빈궁마마?”
난 더더욱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하께서 양화당을 찾아오시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세자빈 유 씨는 애초에 양화당과 교류가 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그렇다. 그녀는 혼이 양화당 사람하고는 말도 섞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내게 했었다.
혼이 그렇게 지냈다면 세자빈인 그녀는 더욱 몸조심을 하며 양화당 근처에도 기웃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양화당에 있다니?
“세자저하도 계셔?”
“아니.”
그녀는 혼이 함께 오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고는 양화당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양화당에 도착하자 인빈의 처소 밖으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기가 뭐한지 내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 내관은 한동안 주춤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마마, 김 나인이 들었사옵니다.”
내관의 말에 처소 안에서 흘러나오던 웃음이 사그라졌다.
“들라하게.”
평소와는 다르게 한층 부드러워진 인빈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는 그녀의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선조와 세자빈 유 씨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들어간 나는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인사를 올렸다.
“마마, 찾으셨습니까.”
“그래그래. 거기 앉아라.”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전하가 양화당을 찾아왔다고 하더라도 인빈의 목소리는 마치 천사가 말하듯 부드럽고 따뜻하게만 들렸다.
이런 이중성은 다시 한 번 그녀가 마녀 인빈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고 분명 선조도 이런 인빈에게 속고 있을 것이다.
“예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도 나는 허락 없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때, 선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김 나인이냐?”
목소리는 꽤나 반갑게 들렸다. 그러나 내가 이 자리에 불려온 이유를 모르는 상태에서 안심할 수가 없었다.
“네에, 전하.”
“어서 고개를 들어 보거라.”
마치 어린 딸을 대하듯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평상시 인빈이 늘 앉는 자리에 오늘은 선조가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는 인빈, 인빈의 바로 옆에는 세자빈이 앉아 있었다. 선조는 웃는 얼굴이었고 인빈은 그보다도 더 신이 난 얼굴이었다.
다만 세자빈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있으나 내게는 거의 억지웃음처럼 보였다. 선조는 웃으며 나를 살펴보더니 인빈을 돌아보며 말했다.
“곱구나. 인빈이 데리고 있을 만한 아이 같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인빈이 입이 간드러지게 애교를 떠는 목소리로 답한다. 선조가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 네 나이가 어찌되는고?”
“올해 스무 세이옵니다.”
“스무 세라? 중전과 같구나.”
바로 중전이 떠올라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선조의 입에서 중전 김 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인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전하, 정혜옹주와도 나이가 같사옵니다.”
정혜옹주(貞惠翁主)는 인빈 소생의 다섯 명의 옹주들 중 둘째 옹주다. 몇 해 전 윤신지(尹新之)와 혼인해 궁궐 밖에 나가서 살고 있었다.
인빈의 지적에 머쓱해지기라도 했는지 선조가 급히 말을 돌린다.
“하하, 정혜는 잘 지내고 있소?”
“예. 전하. 잘 지내고 있다 하옵니다.”
선조의 짧은 관심에 인빈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찾아왔다. 인빈의 얼굴에 미소를 본 선조가 다시 나에게 말했다.
“네 양화당 퇴선간 나인이라 들었는데, 어찌 중전을 안 게냐?”
“네?”
예상치 못한 선조의 발언에 난 놀란 눈을 떴다. 선조는 그런 나를 보고는 수염을 쓸며 웃음을 터트렸다.
“중전이 말하기를 널 공주의 보모상궁으로 삼고 싶으니 양화당에서 데려오고 싶다 하는구나.”
인빈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한다. 이번에는 선조의 말이 불만인 건지 아니면 날 데려가고 싶다고 말한 중전이 마음에 안든 것인지 얼굴이 굳어버렸다.
다행히 선조는 나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변한 인빈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중전마마께서는…….”
중전을 처음으로 본 건 가례 날. 이후 직접적으로 그녀를 만난 건 인빈에게 뺨을 맞는 벌을 당하던 그날이었다.
물론 그 이야기를 선조가 알 수도 있지만 마녀 인빈을 앞에 두고 그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자비로우신 분이라 내명부의 나인들을 세세하게 챙겨주십니다.”
“그러하냐?”
오늘따라 유독 변화무쌍한 인빈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피어오르고 선조도 또다시 소리 내어 웃는다.
“인빈.”
“예, 전하.”
“과인이 보기에 중전이 말한 대로 저 아이는 총명한 것 같구나. 그래서 중궁전으로 보내면 어떨까 싶은데…….”
선조가 말끝을 흐리더니 인빈의 옆에 앉아있는 세자빈을 돌아본다. 세자빈은 선조의 시선이 향하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동궁전에서도 저 아이를 데려가고 싶다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세자빈을 쳐다보았다.
“이를 어찌한다……. 인빈. 자네가 결정하게나. 저 아이를 중궁전으로 보낼지, 아니면 동궁전으로 보낼지 말이야.”
선조의 말에 인빈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는 듯 보이지만 분명 속내는 그것이 다가 아닐 터였다.
아마도 중궁전은 물론이고 동궁전에서까지 날 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할 것이다.
물론 중전이야 날 구해준 이후로도 종종 불렀기 때문에 오가는 사이라는 것은 인빈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궁전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궁전에서 날 달라는 말을 그녀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까? 그래서 오히려 중궁전으로 날 보내려고 한다면?
나는 긴장된 얼굴로 인빈의 답을 기다렸다. 인빈은 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채를 슬그머니 건드리며 모양을 잡았다.
그것이 그녀가 시간을 끌 때 종종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나는 양화당 나인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인빈?”
인빈의 대답이 늦어지자 선조가 나섰다. 그제야 인빈이 웃음을 터트리며 선조에게 말했다.
“전하.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사옵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니?”
“중궁전으로 보내면 빈궁께서 섭섭해하실 것이고 동궁전으로 보내면 중전마마께서 섭섭해하실 것이니. 신첩, 어찌해야 할지…….”
“그럼 과인이 결정하는 건 어떻소?”
그러자 인빈이 한쪽 눈을 치켜뜬다. 상대방이 보면 불쾌하게도 보일 수 있는 이러한 눈짓을 그녀는 순식간에 웃음으로 연결시키며 교태스런 표정으로 바꾸어버렸다.
이를 본 선조는 뭐가 좋은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건 싫사옵니다.”
“싫다니?”
“전하께서야 당연히 중전마마를 위하시겠지요. 아니 그렇사옵니까?”
선조가 헛기침을 한다. 아마도 인빈의 말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인빈도 분위기상으로라도 중궁전에 나를 보내는 것이 낫지만 여자의 자존심상 중궁전에 쉽게 나를 내놓기도 싫은 모양이었다.
이래저래 인빈이 고민 끝에 어떤 답을 내놓았는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신첩은 오늘 일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사옵니다.”
“무엇을 말이오?”
“신첩은 고작 저 아이가 퇴선간이나 지킬 만한 그릇이라고 보았사옵니다. 그런데 중전께서도 빈궁께서도 저 아이의 총명함을 신첩보다 먼저 알지 않으셨사옵니까? 그러니 전하, 신첩에게도 기회를 주시옵소서.”
“기회라니, 인빈?”
“저 아이의 총명함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기회 말이옵니다.”
“어떻게 기회를 주려 하오?”
“저 아이를…….”
인빈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킨다.
“신첩의 지밀나인으로 삼아 이제라도 곁에 두고 그 총명함을 보고자 하옵니다.”
“흐흠.”
선조가 원한 답변은 아닌 것 같았다. 왕이 직접 양화당까지 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중전을 대신해서 날 데려가려고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그러나 인빈은 내놓지 않겠다고 말했고 선조는 나름 인빈의 논리 있는 설명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전하. 그리해도 되겠사옵니까?”
“인빈의 나인이 아니오. 인빈의 뜻대로 하시오.”
선조의 확답을 끝으로 나는 양화당 지밀나인이 되어버렸다.
선조와 인빈이 양화당에 머무는 동안 나는 세자빈과 함께 인빈의 처소를 나왔다. 양화당 밖까지 배웅 나온 나를 보며 세자빈은 제일 먼저 긴 한숨부터 내셨다.
“결국 일이 이리 되었구나.”
세자빈이 나에게 말을 꺼내자 동궁전 박 상궁이 서둘러 주변을 물려주었다. 박 상궁은 주변을 물린 다음에도 여전히 세자빈의 곁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나는 그녀가 세자빈의 본방나인인 것을 상기하며 조심스럽게 혼의 안부를 물었다.
“저하께서는 잘 지내세요?”
며칠이지만 몇 년처럼 느껴진 시간이다. 내 물음에 세자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례식도 잘 마치셨네.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군.”
난 고개를 저었다.
“고맙다니요. 저하께서 잘 마치셨다니 다행이에요.”
세자빈이 그런 나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또다시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그나저나 저하께서는 자네 근심 걱정이 많으시네. 하루라도 빨리 자네에게 명분을 주려 하시는데 직접 나서실 수가 없으시니 더 그러시겠지. 그래서 내가 양화당으로 온 것이네. 그런데 중전께서도 자네를 원하실 줄이야…….”
어떻게 보면 중전이 약간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인빈에게서 날 구해줬고 친절하게 대해줬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내게 고마운 사람이었다.
비록 중전의 과한 친절과 애정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중전을 생각하며 답답한 마음이 드는데 이런 내 마음이 얼굴에 나타난 모양이다.
세자빈이 물었다.
“저하께서 직접 나서시지 못하여 아쉬운 것인가?”
“아, 아니에요! 그런 것은 아니에요!”
난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세자빈이 짧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도 양화당에 그대로 남게 되었으니 기회가 또 오겠지.”
그녀는 양화당 쪽을 한번 돌아보더니 나를 두고 그 자리를 떠나려는 듯 내게서 돌아섰다. 그러나 한 발짝을 내딛기도 전에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행궁에는 보는 눈이 많네. 이제 전하께서도 자네의 존재를 아셨으니 당분간은 몸을 사리고 있게.”
“몸을 사리다니요?”
“자네가 세자저하와 함께 있는 모습이 다른 누군가의 눈에 띄면 안 된다는 것이네. 그리 되면 자네는 물론이고 저하께서도 위험에 처하실 것이야. 내 말을 알아듣겠는가?”
세자빈의 말은 당분간 혼을 만나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혼이 나를 찾아오지 않는 이상은 내가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더욱이 저번처럼 동궁전으로 찾아가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혼이 너무나도 보고 싶다. 사랑하는데. 그도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하는데…….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마음대로 만날 수도 없는 것일까?
이곳은 조선이다.
나는 새삼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그리워하는 만큼 혼도 나를 그리워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만날 수 없는 시간을 이겨내 보자는 마음을 가져보려 했다.
보지 못하는 날들이 있다면 볼 수 있는 날들도 반드시 올 거라고 믿으니까.
“네, 빈궁마마.”
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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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화당 퇴선간 나인 -> 양화당 지밀나인. 승진을 축하드립니다. ] - 내명부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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