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봄비가 내리면(4)
흰색
혼은 문을 등진 채 주안상 옆에 앉아 있었다. 주안상 위에 놓인 단 한 개의 촛불만이 유일하게 이 방 안을 밝히는 빛이었다.
혼은 도포 차림이었다. 그러나 갓은 쓰지 않고 있었다. 대신 그의 것으로 보이는 갓이 방의 한쪽에 걸려 있었다.
“부야.”
내가 방 안을 살피는 동안 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원군을 찾았다.
“이 방문주의 향이 그윽하니 참 좋구나. 어서 와서 잔을 받거라. 오늘은 세자가 아니라 형님이 주는 잔이니라.”
“혼아…….”
약간 취기가 오른 듯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내가 그를 걱정스럽게 불렀을 때였다.
거침없이 술잔을 들어 올리던 혼의 손이 멈칫하더니 도로 술잔을 주안상 위에 올려놓고는 뒤를 돌았다. 날 발견한 혼이 놀란 얼굴이다.
“경민아…….”
나는 곧바로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는 여전히 놀란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네가 어찌 여기에 있는 것이냐?”
그런 그를 보며 나는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다. 누가 본다면 모든 것을 다 가진 것과도 다름이 없는 조선의 세자의 자리. 그는 그 자리를 10년이나 굳건히 지켜왔다.
그는 그럴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이 가진 자질보다 앞서 부왕인 선조가 그 자신에게 가진 애정과 신뢰 덕분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새롭게 선조가 맞아들인 중전 김 씨는 공주를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몇 년 뒤 아들을 낳을 것이다.
결론만 놓고 보자면 결국 혼이 조선의 왕이 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선조가 오래 살았다면 왕위는 그가 아닌 적통대군인 영창대군의 손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는 후대의 평가도 알고 있다.
그런 부분에서 혼을 향한 선조의 냉대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는 앞으로도 수년을 싸워내야 했다.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와.
“동궁전에 갔더니 없더라? 그래서 물어물어 찾아왔지.”
나는 최대한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입가에도 자연스레 미소가 찾아왔다.
“이곳까지 말이냐? 이곳 중랑천까지?”
“중랑천이 아니라 양주까지라도 갔었을 거야.”
양주라는 단어를 꺼내놓고 실수했다 싶었다. 그가 어머니의 묘소에 가려고 했다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세자빈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추측이었다.
아니면 그 전에도 그가 힘들었을 때 어머니의 곁을 종종 찾았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지금 그는 내가 그의 어머니의 묘소를 가려고 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내 입으로 다 불고 말았으니.
내 미소를 따라 그의 입가에 번져나가던 미소가 일순간 씁쓸하게 변해버렸다.
“알고 있었느냐?”
난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당연하지. 하지만 양주는 다음에 가고 지금은 궁궐로 돌아가자. 다들 걱정하고 있어. 세자빈마마도, 정원군마마도……. 그리고 나도.”
그가 땅을 짚은 내 두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내가 많은 이들을 근심시킨 모양이구나. 하물며 너에게까지…….”
그가 지금 안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일까? 왕이 될 수 있는지? 그의 앞으로 인생이 어떻게 될지?
적어도 왕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사실을 들어서 그의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혼아, 넌 왕이 될 거야. 이 조선의 왕이 될 거라고. 그러니 슬퍼하지 마. 슬퍼하지 마, 혼아. 이깟 일에 슬퍼하지 말란 말이야.’
그가 흘릴 수 없는 눈물이 내 두 눈에서 떨어졌다. 앞으로 그에게 일어날 사실을 이야기 해 줄 수 없다는 답답함이 내 눈물의 양을 가중시켰다.
“내가 그랬잖아. 내가 약속했잖아. 네가 힘들 때 곁에 있어주겠다고. 그런데 왜 나에게 말 안했어? 말도 안 하고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속상한 마음에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고 말았다. 어쩌면 이런 나를 보며 혼은 내가 화를 낸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다시 바로 그를 보며 웃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 흘리는 눈물이라도 훔쳐내기 위해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그가 두 팔로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기게 된 나는 그의 품 안에서 눈물을 훔쳐냈다.
“미안하구나…….”
“치- 미안한 건 알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다신 그러지 마. 알았지?”
그는 대답 대신에 나를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난 그러한 그의 행동으로 충분히 답이 되었다고 생각하고는 한 손으로 그의 넓은 등을 쓸어주며 달랬다.
“자, 돌아가자. 빨리이.”
그가 내 말투에 어깨를 들썩이며 웃더니 이내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그가 웃었다는 사실에 마냥 기쁘기만 했다.
그가 조금이나마 울적했다면 지금은 기분이 한층 나아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그와 눈을 맞췄다. 그의 짙은 잿빛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바뀌며 날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경민아.”
“응?”
“내가 세자가 아닌 광해가 되어도 나와 함께 하겠느냐?”
그는 웃고 있지만 나름 진지하게 나에게 물음을 던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물음을 듣자마자 내 입에서는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웃던 그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혔다. 내 웃음이 그를 언짢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그의 물음은 정말로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우스운 것이었다.
내가 무엇보다 걱정한 것은 지금 그가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까 봐 걱정하고 있느냐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혹시 세자가 아니게 된다면 내가 떠날 것을 걱정하다니. 그것은 내겐 웃음이 나올 정도로 너무나도 쉬운 답이었다.
“경민아…….”
미간만 찌푸려진 게 아니고 그의 마음도 찌푸려지는 모양이다.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퍽이나 불안하게 들린다.
나는 또다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은 채 그를 향해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당연하지! 너무 당연한 걸 물으니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네! 혼아, 내가 널 사모하는 건 네가 세자라서가 아니야.”
사모라는 단어가 이 조선에서는 꽤나 큰 의미일 텐데도, 그래서 쉽게 말할 수 있는 말이 아닐 텐데도 지금 내 입에서는 쉽게 나온다.
아마도 내게는 ‘사랑’이라는 단어보다는 의미가 더 멀리 느껴져서 쉽게 나오는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 그에게는 ‘사랑’이라는 단어보다는 더 빨리 그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단어가 ‘사모’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거리낌 없이 ‘사모’라는 단어로 지금의 내 마음을 표현했다.
게다가 왠지 그것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조금 덜 부끄럽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네가 세자이기 때문에 내가 널 사모했다면 넌 이미 오래전에 나에게서 ‘저하’ 소리를 들었을 걸. 혼이가 아니라. 그러니 이제 알겠어?”
걱정으로 찌푸려졌던 그의 미간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잘 들어둬. 난 네가 세자가 아니라 이런 주막의 주인이 된다고 해도 너와 함께할 거야.”
나는 그의 한 손을 들어 내 손바닥 위에 놓고는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손등을 탁탁 두드렸다.
내 마음의 답은 다 했다는 종결의 의미이기도 했지만 이제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 궁궐로 돌아가자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일어날 기색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입을 굳게 다물고 내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안 가?”
더 이상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굳은 그의 얼굴 앞으로 난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물었다. 분명 그의 기분이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아니라면 방금 전 내 대답이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비유가 잘못되었을까? 주막 주인보다는 포졸 정도는 말했어야 하는 걸까?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멀뚱히 응시하던 그때였다. 그의 그림자가 서서히 내 몸을 덮어오더니 일순간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그러자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잡다한 생각들은 모두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안도감이 찾아왔다. 내 대답이 그를 만족시킨 게 분명하기에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찾아왔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 방 안에 들어오면서 느꼈던 그윽한 술의 향기가 알싸하고 달달한 술의 맛으로 변해 내 입술에 전해졌다. 그가 술을 마셨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입맞춤으로 그 향이 전해지다니……. 독특하고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나는 그만 그를 밀어낸 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런데 나와 마찬가지로 웃음을 터트릴 줄 알았던 혼은 웃지 않았다. 혹시 입맞춤 중에 웃어버린 내게 기분이 상하기라도 한 걸까?
그때 혼이 말없이 한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쥐더니 다른 한 손의 손끝으로 내 입술을 어루만졌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시선도 내 눈이 아닌 오직 내 입술만을 향해 있었다.
나는 왠지 지금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으면 더 이상 이곳에서 벗어날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나는 두 손으로 나에게 바짝 다가선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꿈쩍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반동으로 나는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우당탕!
뒤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허공에 내저었던 내 손이 주안상을 건드리고 말았다.
주안상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엎어졌고 주안상 위에 올려져있던 촛불이 꺼지면서 방 안에는 어둠이 찾아왔다.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 그 요란한 빗소리가 빛이 사라진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혼이 넘어진 내 몸 위로 올라왔다.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혹시라도 엎어진 주안상으로 인해 불이 꺼진 것을 본 정원군 방으로 들어올까 조바심이 났다.
그가 이 상황을 본다면? 물론 그는 혼과 나의 사이를 알고 있다. 그러니 달라질 것은 없다. 단지 내가 걱정하는 건…….
“혼아……읍.”
작은 목소리로 그를 진정시키려 불렀을 때였다. 그 어떠한 주저함이 없이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다시 찾아왔다.
내 머릿속을 채웠던 걱정거리들을 더 이상 생각할 틈을 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입맞춤이었다.
“혼아…….”
가까워진 거리 안에서 어둠에 익숙해진 내 눈이 그의 눈동자를 찾아냈다. 오로지 검은색만을 띠고 있는 그의 두 눈동자를.
이젠 빗소리가 멀게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진 그의 숨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혼아. 나 무서워…….”
그때 그가 코웃음 소리를 냈다. 그런 그가 살짝 미워졌다. 나는 전혀 웃을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물론 무섭다고 해서 그를 밀어내려는 건 아니었다. 단지 지금 내가 안고 있는 마음.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이 가져다준 두근거림과 동시에 함께 찾아온 두려움을 그가 알기 바랐다.
내가 그에게 허락한 것이 결코 마음만을 담은 고백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알기를 바란 것이었다. 그래서 용기 내어 한 말이었는데…….
미움이 아쉬움으로 변하려는 그때였다. 혼이 한 팔로 나를 끌어안았다.
내 얼굴이 그의 맨 가슴에 닿았고, 나는 나만큼이나 두근거리고 있는 그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었다. 미움은 모두 사라졌다.
지금 그와 함께 있는 순간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것은 행복감이었다. 그 외에 다른 감정은 더 이상 내게 필요하지 않았다.
***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깰 듯 말듯 눈을 살짝 들었다 감았다를 반복하던 나는 내 옆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는 혼의 숨소리를 깨닫자마자 번쩍 눈을 떴다.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의 한 팔이 내 목과 어깨를 감싸고 다른 한 손은 허리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행복한 포박이었다.
나는 한동안 혼의 품 안에서 잠든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내겐 모든 게 신기했다.
단지 그가 잠든 모습을 바로 옆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랑을 받았고 그의 여자가 되었다.
내게는 이 모든 것이 놀라웠다. 여기까지 생각을 했을 때 나는 비가 그쳤다는 걸 깨달았다. 더군다나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고 있었다.
몇 시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잠깐 잠든 것이 맞는다면 새벽 5시는 넘지 않았을까? 해가 밝으면 그는 하례식에 참석해야 했다.
그를 깨워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지속하고 싶다는 두 가지 마음이 내 안에서 치열하게 다투기 시작했다.
이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바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소인 최 내관이옵니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최 내관의 목소리에 잠들어 있던 혼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난 그것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두 눈을 감았다.
조금 뒤 최 내관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저하, 기침하셨사옵니까.”
두 번째 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혼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는 소리가 바로 내 옆에서 들렸다. 그가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내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부스럭거리는 듯하더니 혼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눈을 감은 채 잠이 든 척을 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지, 아니면 다른 곳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곧 그가 내 얼굴 쪽으로 몸을 숙이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경민아.”
동시에 몸이 움찔하며 짜릿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방금 전 움찔한 것을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여전히 자는 것처럼 웅얼대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불이 꺼졌다는 것. 그리고 날이 아직 어슴푸레하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화끈거리며 붉게 물들었을 내 뺨을 그가 보았을 테니까. 그럼 그는 내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자 혼이 웃음 섞인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벽에 걸려 있던 갓을 챙겨드는 것 같은 소리도 들렸다. 그러더니 잠시 뒤 묵직한 솜이불이 내 몸 위로 덮어졌다. 혼이 한 것이 틀림없었다.
혼은 이불을 내 어깨까지 덮도록 끌어올려주고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늦게라도 눈을 뜨고 어색하게 깨어난 척이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생각만으로도 마냥 민망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자는 척만 할 수 없다는 것도 내 판단이었다.
“저하. 소인 최 내관이옵니다.”
또다시 최 내관의 소리가 들려오자 혼이 기침소리를 냈다. 그러자 최 내관에게서 바로 말이 돌아왔다.
“저하, 서둘러 환궁하셔야 하옵니다.”
“알았다.”
이윽고 혼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나는 혼자 있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 생생하게 느꼈던 혼의 체향이 여전히 그 방 안에 맴돌고 있었다.
“저하, 김 나인은?”
문 밖에서 최 내관이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최 내관은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일까? 그럼 그것은 누가 말해준 것일까? 생각해보니 정원군도 있었다.
그는 박 상궁에게 최 내관에게 오라는 말을 전하게 했다. 정원군은 최 내관이 온 이후에 궁궐로 돌아간 것일까?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놔두어라.”
혼이 말을 탔는지 고삐가 죄인 말이 우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그가 궁궐로 돌아가기 위해 말을 탄 것이라고 여기고는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아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누운 채로 고개만 들어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내 예상대로 혼은 말에 올라타 있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말의 고삐를 잡은 채 서 있는 최 내관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정원군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면 소인이 이곳에 남아 있겠사옵니다. 저하께서는 서둘러 환궁하시옵소서.”
그때였다.
“아니, 내가 이곳에 있겠네. 최 내관은 저하를 모시고 환궁하도록 하게. 저하 홀로 환궁하시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정원군이었다! 좁은 문틈으로 볼 수 없는 방향에서 정원군이 모습을 불쑥 드러냈다. 먼저 궁궐로 돌아갔다고 생각한 정원군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오나, 정원군마마.”
최 내관이 나인 하나 때문에 종친인 정원군을 남겨둘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럴 수 없다며 나섰을 때였다. 정원군이 말 위의 혼을 향해 말했다.
“세자저하, 김 나인은 아직 양화당의 나인입니다. 그러니 소신과 함께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게 부탁하마.”
진심이 담긴 한마디를 남긴 채 혼이 말의 고삐를 당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있는 방을 한 번 돌아보더니 곧바로 말을 몰아 그곳을 떠났다.
그런 혼의 뒤를 따라 최 내관도 말에 올라타고는 사라지고 이제 정원군 홀로 주막에 남았다. 혼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동안 응시하던 정원군이 초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동시에 나는 문에서 떨어져 고개를 숙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것도 아닌데 마치 마주친 듯한 느낌에 기분이 이상했다.
혼도 이곳을 떠난 상황에서 더 이상 내가 꾸물거릴 이유는 없었다. 난 서둘러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옷을 챙겨 입었다.
입으면서 몸 곳곳이 쿡쿡 쑤시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몇 시간 전까지 내 온몸을 채우던 긴장감이 사라지고 남은 흔적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이 상태에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궁궐로 돌아가야만 하는 혼과 동행하는 건 무리인 듯싶었다.
이런 몸 상태로 말을 타는 것도 힘들 것 같았고 빨리 걸어가는 것조차도 어려울 것 같았다. 혼도 그것을 알았던 것일까? 그래서 날 깨우지 않고 먼저 돌아간 것일까?
그나저나 이곳에 남은 사람이 다름 아닌 정원군이라는 것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그러다보니 옷을 다 갖춰 입고도 오랫동안 문밖을 나서는 것을 주저했다.
그 사이 해는 어느새 중천을 향해서 내달리고 있었다. 어슴푸레하던 밖은 이제 낮이 되었고 초가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도 점점 늘어났다.
결국 더 이상 안에만 있을 수는 없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정원군은 내가 있던 방의 문 옆에 서 있었다.
그는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온 나를 보고도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내게서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함께 궁궐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잠자코 뒤를 따랐다.
그를 따라 주막의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모로 보이는 이가 정원군에게 다가왔다. 이미 그 두 사람은 안면이 있는 것인지 서로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대신 정원군은 잠시 고민하더니 자신의 오른손에 끼고 있던 큼지막한 옥가락지를 주저 없이 빼내어 주모에게 건넸다.
주모는 화색이 띠며 돌아서서 주막으로 들어가 버렸고 잠시 정원군이 나를 보며 말했다.
“박달재를 넘기 전에 가마꾼들이 있을 거요.”
박달재에서 가마를 타고 궁궐로 돌아가자는 말이었다. 나는 정원군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은 무뚝뚝했지만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나 이런 어색한 분위기는 싫었다. 나는 적당한 말을 찾아서 전전긍긍했지만 결국 답을 찾아내진 못했다.
내게서 아무런 말이 돌아오지 않자 정원군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장옷 하나 걸치지 않고 걷는 나는 또다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요깃거리가 되어버렸다.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걸음을 걷기 불편할 정도로 등 아래쪽이 아파왔다.
그러나 그 이유로 쉬었다 가자든지 난 여기서 기다릴 테니 가마꾼을 이리로 보내달라든지 같은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단지 내가 바라는 건 조금이라도 빨리 궁궐로 돌아가서 두 다리 뻗고 잠을 자는 것이었다. 앞서서 걷던 정원군이 걸음을 멈추고는 뒤따르던 나를 슬그머니 돌아보았다.
내 걸음이 평소보다 뒤처지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가 멈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겨우 그의 걸음을 다시 따라잡았을 때 그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 그의 걸음은 매우 느려졌다. 내가 어렵지 않게 그의 뒤를 바짝 쫓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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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본달린양이 (whoa****) 2013-08-11 01:12 |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