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봄비가 내리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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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고 유독 비가 잦아졌다. 인빈의 꾀병은 이제 진짜 병이 되어버렸다. 혈기를 부리며 나인들을 괴롭히는 것도 몸이 아프니 다 귀찮아졌는지 양화당은 조용해졌다.
인빈의 수라는 아예 고정적으로 하루에 한 번으로 줄었고, 퇴선간의 일도 대부분 수라를 가져오는 수라간 나인들이 도맡아 해준 덕분에 나는 제법 한가해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수라간 나인들이 인빈이 남긴 수라상을 차지하기 위해서 날 퇴선간에서 몰아낸 것이지만, 덕분에 나는 처소에서 머물며 지내는 시간이 많아져 편해졌다.
비가 내리던 어느 봄날. 난 내 처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세어진 빗줄기에 밖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누군가 빗속을 뚫고 우리 처소 쪽으로 바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영이었다. 미영이는 신도 벗지 않은 채 마루로 올라와 나를 불렀다.
“언니! 아니, 운지도 있었네!”
짚으로 엮어 만든 비옷을 걸치고 있었음에도 얼마나 빨리 뛰어왔던지 미영이의 옷은 거의 다 젖어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렇게 비에 젖고?”
“언니! 큰일 났어요! 큰일이요!”
“큰일이라니? 무슨 일인데?”
“중전마마께 일이 생겼어요!”
나와 운지는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미영이가 숨도 제대로 못 돌리며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서청에 도착하셔서 계단석에 오르시는데 갑자기 계단석이 흔들리며 미끄러져 넘어지셨대요!”
“중전마마께서?”
“네! 그런데 그때 서청을 나오시던 세자저하께서 넘어지시는 중전마마를 붙잡으시려다가 함께 계단 아래로 떨어지셨대요.”
미영은 얼굴을 찡그리며 울상을 짓는다. 나는 중전과 함께 혼도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나를 대신해서 운지가 미영에게 물었다.
“그래서 두 분 모두 어찌되셨는데요?!”
“세자저하께서는 동궁전에서 치료를 받으신다고 들었는데……. 문제는 중전마마야. 중전마마께서 산통이 시작되셨대.”
“아직 산달이 보름 정도 남지 않으셨나요?”
운지의 말에 미영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마 그럴걸.”
“벌써 산통이라니, 이거 큰일이네요. 이러다가 중전마마와 아기씨까지 잘못되신다면…….”
“그런 말 어디 가서 절대 하지 마! 지금 전하께서 난리도 아니셔. 서청까지 중전마마를 뫼신 가마꾼들부터 시작해서 중궁전 나인들까지 줄줄이 의금부로 끌려갔어.”
“일이 커지려는 모양이에요.”
이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온통 혼의 생각뿐이었다. 모두들 중전에게로 정신이 쏠려있을 지금, 나에겐 무엇보다도 혼의 상태가 중요했다.
안절부절못하며 혼을 걱정하던 나는 결국 비옷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니, 어디에 가려고요?”
미영이 그런 나를 보며 묻는다. 운지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난 그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궁궐 상황 좀 살펴보고 오려고.”
“저도 같이 갈까요?”
미영이 나를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중전마마의 일로 궐이 어수선할 테니, 넌 어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언니 말이 맞아요. 그럴게요.”
미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운지에게 인사하더니 빗속을 뚫고 사라졌다. 나는 그런 미영과는 반대 방향인 동쪽, 동궁전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빗속을 뚫고 쉴 새 없이 동궁전 담벼락 앞까지 걸어온 나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담벼락 너머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동궁전 지밀나인들을 보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빗속에서도 동분서주하는 동궁전 나인들의 모습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혼이는 괜찮은 걸까?’
내가 양화당의 나인만 아니었다면, 적어도 중궁전의 나인이었다면 조금은 당당하게 동궁전으로 들어가 그의 상태를 물어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그럴 권한도 권리도 없다. 난 그저 양화당 퇴선간 나인일 뿐이다.
감히 세자저하를 뵈러 갈 수도 없고 세자저하의 안부도 물을 수가 없는. 그래서 이렇게 멀리서나마 그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
그는 왜 세자인 걸까, 그는 왜 광해군인 걸까……. 우리 둘만 있을 때는 그저 그는 ‘이혼’일 뿐이다.
그를 걱정하며 불안해지는 마음을 달래려 담벼락 밖에 초조하게 서 있는 내 처지를 깨달을 때면 그와 나의 신분적인 거리감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나를 아주 많이 슬프게 만든다.
‘돌아가자. 괜찮을 거야. 그는 괜찮을 거니까…….’
스스로를 위로하며 애써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던 그때였다. 동궁전에서 나오는 의녀 한 명이 보였다.
급히 전각을 내려오는 걸로 보아서는 마치 동궁전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의녀에게 혼의 소식을 물어보겠다고 결심했다.
다행히 동궁전 출입문에서 나오는 그녀와 마주칠 수 있었다.
“동궁전에서 나오는 길인가요?”
“예, 그렇습니다만.”
의녀는 내가 나인임을 알고는 정중하게 답을 했다. 난 그런 그녀의 태도에 안심하며 주저 없이 혼의 안부를 물었다.
“세자저하께서는 어떠신가요?”
그때였다.
“여기서 뭘 꾸물거리고 있느냐? 분명 전 의원께서 서둘러 내의원에 가서 약재를 가져오라 하지 않았느냐?”
“예, 상궁마마님.”
의녀는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답을 주지 않고는 바삐 가버렸다. 가버린 의녀의 뒤로 모습을 드러낸 동궁전 지밀상궁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알아보는 눈치다.
“넌 혹시…….”
내가 동궁전에 왔었던 날 밤, 나를 보았던 동궁전 지밀나인들 중의 한 명인 걸까?
동궁전 지밀상궁이 나에게 할 말이 있는지 무언가 말을 더 꺼내려던 바로 그때였다. 동궁전 전각 마루 위에서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 상궁. 의녀는 갔는가?”
“예, 빈궁마마.”
박 상궁이라 불린 동궁전 지밀상궁이 돌아서서 동궁전 전각 쪽을 향해 몸을 숙인다. 그때 나와 마루 위에 서 있던 세자빈 유 씨와 눈이 마주쳤다.
뒤늦게 고개를 숙였지만 이미 그녀는 내 얼굴을 본 뒤였다.
“너는 누구냐? 보아하니 동궁전 나인은 아닌 듯한데…….”
세자빈이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안색을 바꾸며 내게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세자빈의 말에도 내가 주저하자 옆에 서 있던 박 상궁이 대신 나를 재촉했다. 박 상궁의 재촉에 난 천천히 세자빈이 있는 동궁전 전각 아래로 다가갔다.
그러자 세자빈이 다시 한 번 내게 말했다.
“이리로 올라오너라.”
생각지 못했던 세자빈의 말에 나는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때 전각의 양옆으로 서 있던 지밀나인 중 한 명이 내게 다가오더니 두 손을 내밀었다. 내가 입고 있는 비옷을 달라는 것 같았다.
세자빈이 나에게 올라오라고 하는 곳은 다름 아닌 동궁전. 나는 세자빈의 명이 떨어졌음에도 쉽사리 그 위로 발을 올릴 수가 없었다.
내가 주저하는 사이, 세자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러자 내 옆으로 다가온 지밀나인이 말했다.
“어서 오르시게. 빈궁마마께서 부르지 않으셨는가?”
지밀나인이 재촉하고 나서야 나는 비옷을 벗어 그녀에게 건네고는 전각 위로 올라섰다. 내가 올라온 것을 본 세자빈이 혼의 처소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나인 두 명이 서둘러 문을 열어 길을 내어주었다. 세자빈은 그곳 문지방을 넘기 전에 나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며 말했다.
“따라오너라.”
만약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가례 날 후원에서 보았던 바로 그때일 것이다. 혼과 함께 있던 나는 그녀에게 내가 양화당 나인이라는 것을 말했었다.
그녀가 당시의 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왜 지금 혼의 처소로 들어오라고 말하고 있는 걸까?
두 개의 문을 더 지나고 나서야 가장 안쪽에 있는 마지막 문 앞에 도착했다.
세자빈이 그곳에 서자, 문 앞에 서 있던 최 내관이 나를 알아보고는 놀란 눈으로 세자빈과 내 안색을 번갈아 살폈다.
그러나 세자빈은 그런 최 내관의 얼굴을 보았음에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에게 말했다.
“아뢰게.”
“예에, 빈궁마마. 세자저하, 빈궁마마 드시옵니다.”
“드시라 하게.”
안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도 평정심을 겨우 유지하고 있던 내 가슴이 혼의 목소리에 콩닥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혼의 명에 닫혀있던 마지막 문이 열리고 세자빈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뒤를 따라 세자의 처소 안으로 들어섰다.
처음으로 발을 디딘 동궁전 세자의 처소 안은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이곳이 혼의 처소이며 지금 그가 나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의녀가 내의원에서 약재를 가져오면 그것을 사흘 동안 하루에 한 번씩 복용하시면 되옵니다.”
“나는 괜찮다 하지 않았는가. 굳이 몸을 보호해야 하는 약재라면 이미 다른 약재를 복용하고 있네.”
“하오나 세자저하. 다행히 아무런 해를 입지 않으셨사옵니다만, 비 오는 날에는 사람의 기가 허해져 없던 병도 생기옵니다. 그러니 며칠간이라도 내의원에서 올리는 탕제를 복용하시옵소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귀에 내의원 의관으로 보이는 사람과 혼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나보다 앞서 안으로 들어간 세자빈이 먼저 자리에 앉았고 나는 그런 그녀 뒤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강 의관. 수고가 많소.”
“황공하옵니다. 빈궁마마. 저하께서 다치지 않으셔서 천만 다행일 따름이옵니다.”
세자빈이 의관과 간단한 대화를 끝마친 그때였다. 혼이 세자빈에게 물었다.
“중궁전에서 기별이 있었소?”
“아직 없사옵니다. 기별이 없는 것을 보니, 아직 산통 중이신가 보옵니다.”
무언가 말을 더 하려던 세자빈이 옆에 있는 의관을 의식했는지 말을 멈추자 혼이 의관을 향해 말했다.
“그만 물러가게.”
“예, 세자저하.”
의관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 동안 의관의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한 어린아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대여섯 살로 보이는 그 아이는 의관이 일어서는 것을 바라보다가 세자빈의 뒤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아이는 낯선 사람이라 그런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씨익 웃어보였다.
“지야, 왜 그리 웃느냐?”
혼이 그 아이의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그 아이가 세손 이지(李祗)라는 걸 알게 되었다.
“새 나인이 왔어요.”
또랑또랑한 눈으로 이지는 날 가리켰다. 나는 어린 이지의 시선을 쫓아 혼이 날 바라볼 것이라 여기고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내 예상대로 혼은 날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놀란 것일까? 아니면 고개를 숙인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
“지야. 그만 나가자꾸나.”
세자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하자 이지는 순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세자빈의 손을 잡고는 혼의 처소를 나갔다.
이제 우리 두 사람만 남게 되었고 혼이 날 불렀다.
“경민아.”
그가 부르는 내 이름에 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혼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제일 먼저 그의 겉모습부터 살폈다.
의관은 그가 다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혹시라도 다친 곳이 있을까 봐 걱정이 된 것이다. 다행히도 외관상으로는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빈궁이 너를 동궁전으로 불렀느냐?”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네가 중전마마와 함께 다쳤다는 말을 듣고 여기로 왔는데……. 빈궁마마가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지만……. 미안해. 오면 안 되는 거였는데…….”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새삼스럽지만 다짜고짜 여기까지 와버린 것을 후회한 것이다.
혼은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벌인 일은 무모했다.
지금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큰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그가 너무나도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그런 일이 벌어지진 않았지만 만약 그가 누워 있는 모습이라도 보았다면 난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곳이 동궁전이고 감히 내가 이곳에 발을 들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혼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바로 내 앞에 와 앉았다. 그는 한 손으로 우는 나를 위로하듯 내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내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려 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만 갈게. 괜찮은 거 봤으니까.”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혼의 손이 내 손을 붙잡았을 때였다. 밖에서 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자저하, 정원군마마 드셨사옵니다.”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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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빈도 나온 마당에 세손보고 놀라신 분은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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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쫑이 (sos2****) 2013-08-12 22:08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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