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스무 살(3)
흰색
“혼아…….”
다시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투로 말한다.
“허락도 없이 한밤중 동궁전에 나타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느냐? 익위사는 동궁전에 침입한 이들을 내 허락 없이 벨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걱정을 넘어서 속상함까지 묻어나는 그의 말에서, 나는 방금 전 그가 왜 화를 냈었는지를 깨달았다. 그가 나를 발견했을 때, 익위사의 칼날이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그것을 본 그때부터 안색이 좋지 않았다.
“몰랐어. 미안. 그래도 화 안 났지?”
“화났느니라.”
그가 눈에 잔뜩 힘을 주며 강조한다. 그러나 나는 방금 전 그가 나에게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는 것을 기억했다.
“에이~ 거짓말. 화 안 났지? 화났어도 이제 화 풀렸지?”
“아니라 하지 않느냐.”
단호하게 부정하지만, 방금 전까지 내 등을 쓸어주던 손길은 부드러웠다. 만약 화가 났다고 해도 그는 모두 나를 걱정해서 화를 냈던 것이다. 걱정할 것이 사라진 지금은 화를 낼 이유가 없겠지.
“화내지 마아~.”
나는 두 손으로 그의 한 손을 잡아 이리저리 흔들며 애교 있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몇 번 피식거리는 소리가 나오더니 곧바로 시원스런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걸 본 나도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웃잖아. 거봐, 화 풀렸네.”
혼이 내가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을 살짝 주먹 쥐더니 내 이마를 살짝 쳤다. 이에 놀란 내가 붙잡았던 그의 손을 놓자, 그가 웃음을 그치더니 말한다.
“무엄하다.”
나는 엄하게 나오는 그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의 입가를 가득 채운 미소를 보고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곧 그의 장난임을 알고는 당당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예, 세자저하. 소인은 아주아주 무엄한 계집입니다. 이런 소인에게 어떤 벌을 주시련지요?”
혼의 입에서 또다시 피식거리며 웃음이 터진다. 나도 그런 그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이나 웃었다. 웃음을 그친 뒤 그가 내 한 손을 끌어당겨 소중하게 쥐더니 말했다.
“무슨 일로 이 늦은 시각에 동궁전까지 온 것이냐?”
“그건…….”
웃으며 말하려던 나는 이곳에 오려고 했던 이유를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표정이 굳어지기라도 했는지, 혼이 궁금한 듯 나를 보며 다시 묻는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그게 말이야…….”
방금 전까지 분위기가 너무 좋았기 때문인지, 갑자기 어두운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려워진다.
“말해보거라. 무슨 일이냐?”
혼은 그런 나를 보며 더욱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나는 잠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중궁전에서 있었다는 일들을 들었어.”
그제야 혼도 내가 하려는 말을 알아차렸는지, 잡았던 내 손을 조용히 놓아주었다.
“혼아, 너 아니지?”
대답은 바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건 소문이다. 난 아니다. 아마 인빈일 것 같다. 이런 말들이 나온다면, 나는 진짜 인빈이 그랬는지 확인해보겠다고 말할 것 같다. 그럼 혼은 위험하다고 막으려고 하겠지.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다.
그런데 혼은 내 시선을 피한다. 최 내관이 이미 지밀나인들을 모두 물려 한적하기 그지없는 담 너머의 동궁전을 한번 바라본다.
나는 아주 잠깐이지만 그가 내 시선을 피하는 것이 무섭다. 다시 혼이 나를 바라보며 웃음기 하나 없는 눈동자로 내게 말했다.
“내가 그랬다면 경민아, 너는 어찌할 것이냐.”
철렁하며 심장이 내려앉는다. 동시에 내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역사에 기록된 공식적인 사실들이 거론되고, 혼을 만난 뒤로 쓸데없는 내용들로 가득 찼다고 생각해왔던 <계축일기>의 내용들이 진실이 되어 머릿속에 펼쳐지기까지 한다.
난 부정했다.
“아니야. 네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어. 넌 그러지 않을 거야. 그렇지?”
“내가 그리하였다면, 너는 어찌할 것인지를 물었다.”
혼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물어온다. 나는 한쪽 손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것을 느끼고는 반대쪽 손으로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떨림은 멈추기는커녕, 맞잡은 손으로까지 옮겨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는 혼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난 그를 믿었다. 그는 절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 뱃속에 든 죄 없는 생명을 해치려 시도 하다니. 내가 아는 혼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야. 내가 아는 혼이 너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야.”
“나를 믿느냐?”
“물론이야. 아니, 만약 네가 그랬다고 하더라도……. 난 널 믿을 거야. 끝까지.”
내 말을 가만히 듣던 혼이 입을 연다.
“내가 그리하였다.”
“뭐라고?!”
“중궁전에서 일어난 사악한 짓들은 모두 내가 한 것이다.”
“그럴 리가…….”
놀란 나를 응시하며 혼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내 사람이 그랬다. 그러니 이를 막지 못한 나 역시,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겠지.”
바로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유자신(柳自新). 바로 세자빈 유 씨의 아버지이다.
그를 바로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계축일기>에서 그 누구보다도 대군의 탄생을 원하지 않아서, 광해군과 함께 중전의 유산을 도모한 이로 나오기 때문이었다.
“빈궁마마의 아버지가?”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
혼이 놀라 되묻는다. 나는 곧바로 입을 닫았다.
당연했다.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하겠지만, 바로 집어낼 수 있는 건 내가 어디까지나 <계축일기>를 읽어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계축일기>는 지금 시점에서는 쓰이지도 않은 글이다.
“충분히 추측이 가능하잖아. 누구보다도 대군아기씨의 탄생을 바라지 않은 사람은, 널 위하는 사람일 테니까.”
“그런가…….”
그가 씁쓸하게 웃는다.
“왜 막지 못했어? 아니, 왜 막지 않은 거야?”
“하지 말라는 내 명을 어기고 그가 먼저 일을 벌인 것이다. 그 이후에 기별을 보내 막아보려 했지만, 기별을 보낸 것이 알려지면 이 일에 내가 직접적으로 관여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더구나.”
“누가?”
“빈궁이 그리 말했다.”
세자빈의 속내는 무엇일까? 자신의 친아버지가 중전을 해하려고 한 이상, 혼이 관련이 되었든 되지 않았든 나중에라도 그 책임을 혼이 면할 수는 없다. 그래서 혼이 자신이 한 것과 다름없다고 내게 말한 거야.
그런 걸 다 알면서도 관여를 막기 위한 명분으로 혼이 자신의 아버지와 연락을 취하려는 것을 반대하다니?
“중전께도 해괴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렸다.”
“중전마마에게 말했다고? 빈궁마마의 아버지가 그랬다는 걸?”
“누가 그러한 짓을 벌인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만 전해드렸을 뿐이다.”
혼이 역시 그 나름대로 행궁 안에서 일을 수습하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혼의 말은 중전과 연합전선이라도 만들었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고 보니 혼이 나에게 중전의 곁에 가지 말라고 말을 했던 때는 이미 중전이 회임한 뒤였다. 유자신은 그때부터 일을 꾸미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아마 혼에게도 이를 말해서 협조를 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혼은 반대했다. 그리고 그 시기 우연히 만난 내게 중전과 어울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유자신이 일을 벌인 것이 괜히 중궁전을 출입하는 양화당 나인인 나에게 영향이 올까 봐 걱정한 것이다.
그제야 나는 그때 혼이 중전의 곁에 가지 말라고 했던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나를 걱정한 것이다. 어쨌든 기분은 좋아졌다. 혼은 중전에게 해코지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막으려고 했고, 그 와중에 나를 지키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중전마마의 곁에 가지 말라고 한 거야?”
혼이 미소로 긍정의 답을 보낸다.
“나는 네가 중전마마를 싫어하는 줄 알았어.”
“내가 말이냐? 어찌하여 그리 생각한 것이냐?”
“아, 아니. 그건 내가 잘못 생각했었나봐.”
‘역사가 그렇다고 했거든. 그 나쁜 역사가!’
“그런데 혼아. 만약 중전마마께서 대군이라도 낳으시면 말이야. 그 대군이 널 위협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겠지?”
아주 예민한 질문이었다. 다시 말해, 적통대군의 탄생으로 그의 세자 자리가 위협될 수 있다는 내 말. 혼의 장인인 유자신이 그러한 일을 벌인 것도 다 이 맥락에서 시작된 것일 것이다. 혼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
혼이 잠시 주변을 살핀다.
동궁전은 행궁에서도 서쪽 가장 끝에 위치하고 있어서 평소에도 한적하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 편히 말을 꺼낼 수 있는 곳은 아닐 것이다. 나는 방금 내가 내뱉은 말을 실수라고 단정 지었다.
“미안, 내가 또 괜한 소리를…….”
내가 사과하며 말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혼의 입이 열렸다.
“나는 아바마마를 믿는다. 비록 나의 어머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나와 나의 형님보다는 다른 후궁소생의 왕자들을 더 각별히 여기셨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나를 세자로 책봉하신 아바마마를 믿는다.”
‘선조를 믿는다고?’
왜란 이후로 선조는 자신보다 유능하고 뛰어난 혼을 시기하고 미워했다. 명나라뿐만 아니라 주변 신하들까지 아들인 혼과 그를 왕위와 권력을 두고 경쟁상대로 만들었다.
이것이 후대의 역사가 말하는 선조에 대한 평가이다. 후대의 학자들 대다수가 만약 선조가 몇 년이라도 더 살았더라면, 혼이 조선의 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내 아빠조차도 그렇게 말했다.
‘아빠가 틀렸던 걸까?’
아니, 아빠는 옳았다. 분명히 아빠가 그랬다. 시간여행자들조차도 그 시대로 가서 두 눈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볼 수 있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의 마음속까지는 들여다볼 수 없다고.
그런데 나는 지금 혼의 마음을,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있다. 역사가 기록하지 못했던 그의 속마음을 지금 그가 나에게 들려주고 있다.
혼은 자신의 아버지인 선조를 믿고 있다. 혼은 선조를 믿고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잘못되었다. 선조는 절대 혼의 세자 자리를 지켜줄 마음이 없다. 영창대군이 태어난 뒤부터는 그를 왜란 중에 임시로 정한 세자였다면서 그를 모욕한다.
선조가 혼의 문안인사조차 받지 않은 일로 혼이 석어당 앞에 엎드려 각혈까지 했다는 건, 역사가 남긴 사실이다. 그런데도 혼은 그런 부친인 선조를 믿고 있다고 내게 말하고 있다.
혼의 모친인 공빈은 그를 낳고 얻은 병으로 죽었다. 그를 정치권력의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양자로 맞아들인 의인왕후도 죽었다. 이제 그가 왕실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믿고 있는 아버지 선조.
하지만 선조는 영창대군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에게 어떤 애정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혼이 깨닫게 된다면?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사실에 마음이 너무나도 아프다.
난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경민아?”
예상치 못한 행동에 혼이 당황한다. 나는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애써 참으며 그의 품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혼아. 난 널 믿어. 네가 무얼 하든 난 널 믿을 거야. 그리고 언제나 네 편이 되어줄게.”
지금의 혼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싫지는 않은지 두 팔로 나를 끌어안는다.
“대체 어디서 그런 말들을 배운 것이냐?”
“치- 몰라. 여기서 배운 말이야. 그러니 다 네가 가르친 거야.”
새침하게 말을 내뱉는 내 이런 말투가 싫지 않은지, 혼이 큭큭대며 웃었다. 그러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인다.
“나의 마음 역시 너와 같다. 그러니 내가 왕이 된 후에는 결단코 너를 나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구구구. 구구구구.
멀지 않은 곳에서 또 부엉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혼과 나를 위한 노랫소리처럼 느껴졌다.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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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이 네가 진짜 부엉이 소릴 못 들어봤구나. 한여름에 무덤가에서 들어봐라, 그게 노랫소리인지 비명 지를 소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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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쫑이 (sos2****) 2013-08-12 22:02 |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