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해의 연인-43화 (43/110)

제43화. 스무 살(1)

흰색

겨울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1603년 새해, 나는 조선에서 스무 살을 맞이했다.

“어머나?”

중궁전에 들어 인사를 올리자마자 중전이 화들짝 놀란다.

“중전마마?”

중전의 옆에 앉아 있던 변 상궁도 당황하여 중전을 돌아본다. 그녀는 한 손으로 아랫배를 짚었다.

“용종(龍種, 왕족의 의미)이 움직였다.”

중전의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네가 와서 아가도 기쁜가 보다.”

“어의를 부를까요?”

변 상궁은 중전이 걱정되는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러자 중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의를 부를 만한 일은 아닌듯싶구나.”

그러더니 멀찍이 떨어져 앉은 나를 향해 손짓한다.

“가까이 오거라. 새삼스럽게 왜 그리 멀리 떨어져 앉느냐?”

“예에……. 중전마마.”

조금씩 자리를 옮겨 중전의 가까이로 다가가 앉았다.

“왜 이리 보기 힘든 것이냐? 인빈이 요즘 앓아누워 식음을 전폐하다던데 네가 바쁘다면 다 거짓부렁이 틀림없지.”

중전의 입에서 거짓부렁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변 상궁이 나섰다.

“마마, 거짓부렁이라니요. 그런 말씀은 쓰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누가 듣는다고 그러느냐? 전하의 앞에서는 쓰지 않는 말이다.”

“하오나…….”

그러나 중전은 더 이상 변 상궁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날 보며 말한다.

“말해 보거라. 요즘 퇴선간 일은 어떠하냐?”

“중전마마 말씀대로 별일은 없어요.”

사실 중전을 피한 건 나였다. 중전도 대놓고 양화당 사람인 나를 불러올 수는 없는지 가끔씩 내 처소로 나인을 보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운지에게 내가 퇴선간 일이 바빠 찾아뵙기 어렵다고 둘러대도록 시키고 계속 피해왔던 터였다.

물론 혼이 내게 했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 역시도 중전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좋은 사람일지는 몰라도 그녀의 미래를 아는 이상 아무렇지 않게 대하기가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인빈은 꾀병이냐?”

“꾀병이라기보다는 나이가 있으시니까요.”

“지금 본궁의 앞에서 인빈을 감싸는 것이냐?”

중전의 표정이 굳기라도 했으면 윽박지르는 것이라고 오해할 만한 말이지만 중전은 웃고 있었다. 나 역시 더 이상 중전의 장난에 당할 수만은 없었다.

“제 상전이 인빈마마신데 어찌 감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분명한 건 하루에 한 끼는 반드시 드시고 그 때가 일정치 않아서 하루 종일 퇴선간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하냐?”

중전은 건방지게 들릴 수 있는 내 말투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에 한마디를 더하지 못할 건 없다.

“그런데 중전마마. 전 말씀하신 대로 양화당 퇴선간 나인이고 계속해서 중궁전을 출입하여 중전마마를 뵙는 것은 옳지 않은 듯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오해를 살 수도 있고요. 절 찾아주시고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앞으로는…….”

“중전마마. 다과상이옵니다.”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다과상이 왔다는 말이 들린다. 중전은 생글생글한 얼굴로 다과상을 들이라고 했다. 곧 푸짐한 다과상이 한 상만 차려져 내 앞에 놓였다.

“들거라. 어서.”

“중전마마는요……?”

“이상하게 요즘 다과만 먹으면 속이 좋지 않구나. 그러니 오늘 다과상은 다 네 것이다. 어서 먹거라.”

“괜찮습니다.”

“먹으래도.”

중전의 반강요가 계속되자 나는 결국 달짝지근한 매작과 하나를 집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끝내지 못한 말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중전마마. 외람된 말인 건 알지만 전 양화당 나인이고…….”

“퇴선간은 왜 빠트렸느냐? 방금 전에는 ‘양화당 퇴선간 나인’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누가 들으면 네가 인빈의 지밀나인인 줄 알겠다.”

중전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중전의 웃는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곧 웃음을 그친 중전이 내게 말한다.

“본궁도 잘 알고 있느니. 그래서 본궁도 생각해둔 것이 있다.”

“생각해둔 것이라니요?”

“본궁의 복중 아기가 태어나면 널 보모상궁으로 삼을 것이다.”

중전의 입에서 나온 말에 놀란 내가 소리쳤다.

“중전마마! 전 이제 겨우 스무 살이라고요. 스무 살이 어떻게 갓 태어난 공주님을 봐요!”

“공주라니?”

난 곧바로 실수를 깨달았다. 지금 중전의 뱃속 아기가 공주라는 사실은 이 조선에서 미래에서 온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말해버리다니…….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일어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발설한 이유로 내 몸에 고통이 올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눈을 질끈 감고 시간이 흘러도 나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심지어 작은 두통조차 없었다.

그때 중전이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공주라고? 공주라 하였느냐?”

뭐가 그리 신났는지 중전은 계속 웃는다. 웃음소리가 커지자 곁에 있던 변 상궁이 나섰다.

“마마. 그리 큰 웃음소리는 복중 아기씨께 해가 되옵니다.”

“알았다. 알았으니. 그런데 재미있지 않느냐? 이 아이는 정말 재미있다. 다들 아부라도 떨어보고자 본궁에게 반드시 왕자아기씨를 낳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아이는 본궁이 공주를 낳을 거라고 말하는구나.”

일단 분위기를 보아하니 중전은 내 말을 믿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왕자를 낳을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을 텐데 내가 공주라고 말했으니 그저 재미있다고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믿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프지 않은 걸까? 그게 아니라면 지금 내가 한 말이 역사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내 말을 누가 믿을까? 조선시대에서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 아이가 남아인지 여아인지 알 방법이 전혀 없으니 말이다.

한참 만에 웃음을 그친 중전이 말한다.

“본궁도 사실 공주를 낳고 싶다.”

“네?”

“너도 인빈이 앓아누운 이유를 잘 알겠지. 본궁이 가례를 올리기 전, 누구보다도 세자가 쫓겨나기를 바랐던 자가 인빈이 아니더냐? 그러나 본궁이 가례를 올리고 이 궁궐에 들어와 이젠 회임까지 하였으니 인빈의 속이 편하지 않겠지. 헌데 지금 본궁이 대군을 낳으면 인빈보다도 더 근심할 이가 누구겠느냐?”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세자를 지지하는 세력들. 또는 당사자인 세자 혼일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전이 대군을 낳는다면, 그들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가지게 될 것들을 모두 잃게 된다.

“본궁도 이제 궐이 어찌 돌아가는지 안다. 그래서 본궁은 대군이 아닌 공주를 낳고 싶은 것이다. 공주가 태어나면 궐 안의 모든 이들이 그 아이를 진심으로 대하며 예뻐하겠지. 그러나 대군이면 아닐 것이다. 겉으로는 예뻐하고 웃는다 해도 그 속으로는 그 아이를 멀리하고 미워하는 이들도 생길 것이다.”

“마마.”

변 상궁이 중전을 위로하듯 불렀다. 그러나 중전은 한 손을 들어 변 상궁의 말을 막고는 내게 다시 입을 열었다.

“본궁은 이 아기가 공주로 태어나 많은 이들에게 예쁨을 받다 인품이 좋은 지아비를 만나 백년해로하길 바란다. 본궁은 이루지 못한 것을 이 아이는 이뤘으면 좋겠구나.”

“중전마마…….”

왕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결코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뼈있는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를 향한 동정심이 일었다. 조선의 여성으로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그녀에게 말이다.

어쩌면 내 앞에서 거리낌 없이 소리 내어 웃으며 즐거워하는 것이 그 내면 안에 깊숙이 숨어 있는 슬픔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경민아. 본궁도 스무 살이다. 우린 갑이지 않느냐? 그런데 어찌 스무 살이라 하여 보모상궁이 될 수 없다 말하는 것이냐? 스무 살이면 민가의 여인네들은 벌써 아이를 셋씩이나 두었을 나이다.”

“그건…….”

“더는 아무 말 말거라. 더욱이 너는 정원군 장남 이종의 보모상궁 출신이 아니더냐? 본궁은 결정했다. 이 아기가 공주로 태어나든 대군으로 태어나든 널 보모상궁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면 인빈의 퇴선간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얼마나 좋으냐?”

“제가 종이의 보모상궁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종이는 젖도 다 뗀 어린아이였다고요. 갓난아기를 어떻게 돌봐요. 전 못해요.”

“좋다. 그러면 젖을 뗀 이후에 네가 맡기마.”

“중전마마!”

그러나 중전은 이번에도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네 말대로 이 아이가 공주라면 너보다도 더 훌륭한 보모상궁은 구하지 못할 것이다. 내 이종에게 들으니 넌 나인이면서 사서삼경은 물론이고 내훈까지 익혔다고 하더구나.”

“종이가 말했다고요?”

“가끔 정원군이 이종을 데리고 중궁전에 온다. 몰랐느냐?”

“그게 아니라, 종이가 제 이야기를 해요?”

종이를 안 본 지는 벌써 1년. 종이는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이다. 이종이 네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 옆에 앉은 정원군의 얼굴을 네가 봐야 하는데.”

중전이 작게 소리 내어 웃는다.

“종이가 저를 잊고 있는 줄 알았어요.”

“잊어버리기는. 헌데 그 아이 참 시끄럽더구나. 참새가 따로 없더라. 대부분 네 이야기를 많이 했다. 너를 아주 많이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인빈은 네가 정원군은 물론이고 이종도 만나는 것을 원치 않겠지. 그러나 근심하지 말거라. 너를 중궁전으로 데려오면 원 없이 만나게 해주마. 너도 이종 그 아이가 많이 그립겠지?”

그립다. 종이가 아주 많이 보고 싶다. 아이들은 금방 크던데, 종이는 얼마나 컸을까?

“네. 그리워요…….”

처음 이 조선으로 왔을 때 누구보다도 나를 따르고 의지해주던 아이. 외동딸로 자란 탓에 동생이 있는 아이들이 많이 부러웠다. 그래서 그런지 종이는 내게 친동생과도 같았다.

“이종 그 아이도 어서 어린 숙부가 태어나길 기다린다더구나. 본궁이 고모일지도 모른다 하였더니 얼굴이 빨개져서 좋아 웃더라.”

‘종이가 웃고 잘 지내나보네. 다행이다.’

“그러니 잔말 말고 보모상궁이 되거라.”

“시간을 주세요. 생각해볼 시간이요.”

“생각해볼 시간이라니? 좋다. 허나, 올 봄에 아이가 태어나고 한 해 정도 지나면 젖을 떼지 않겠느냐? 그 시간이면 충분히 결정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너 또한 양화당 퇴선간에서 일생을 마치고 싶진 않겠지.”

“그거야 그렇지만…….”

중전이 빙그레 미소 짓는다.

“보모상궁을 몇 해 하면 출궁시켜주마. 그땐 네가 혼인을 할 수 있도록 전하께 주청드릴 생각이다. 어떠냐? 그때도 정원군의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정원군의 첩실로 가는 게?”

“중전마마!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분명한 오해……!”

“알았다. 알았다.”

여전히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중전에게 제대로 해명해 보려는 찰나였다. 밖에서 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중전마마. 세자저하께서 드셨사옵니다.”

“세자가?”

중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는 그것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은 중전의 존재를 반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알고 있는 나는 그 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3년 뒤 중전이 낳게 될 영창대군은 혼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이 때문에 혼이 왕으로 즉위한 후에 영창대군은 물론이고 중전까지 없애려고 한다는 것이 인조시대에 남겨진 기록이니까.

물론 지금의 나는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혼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전은? 조금 전 그녀가 내게 말한 대로 그녀가 아들을 낳으면 누구보다도 위협이 될 사람은 세자인 혼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일 것이다. 그렇다면 피하다 못해 방문 자체를 꺼려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도 중전은 매우 반가운 기색이다.

아직 그녀가 젊어서일까?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역사가 거짓을 기록한 걸까?

나이차이로 인해 혼과 그녀는 아직 서먹한 사이였지만 생각보다 화목한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미래를 알고 있는 내가 너무 앞선 시각으로 그 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또 보자꾸나.”

일어선 나는 몇 발자국 뒷걸음쳐 중전의 처소를 나왔다.

중전의 처소의 문이 닫히고, 전각을 나가기 위해 돌아선 나는 혼과 마주쳤다. 혼은 날 발견하고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나 곧 그는 놀란 기색을 감추고는 헛기침으로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러나 주변에 서 있는 중궁전 나인들 때문인지 드러내놓고 아는 척을 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너는 양화당 나인이 아니냐.”

“예, 그러하옵니다.”

평상시 둘만 있다면 결코 쓰지 않을 말투.

혼은 내게 말하는 중간 중간 헛기침만 계속 한다. 누가 보면 감기라도 들었다고 오해할 정도였다.

“왜 네가 중궁전에서 나오는 것이냐?”

난 혼이 중전의 곁에는 가지 말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런데 중궁전 앞에서 나와 마주치자 그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때 중궁전 지밀상궁인 문 상궁이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다가 조용히 나섰다.

“중전마마께서 김 나인을 부르셨사옵니다.”

문 상궁은 혼이 괜한 오해를 할까 봐 나선 모양이지만 혼은 그런 문 상궁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내게 말했다.

“양화당 나인이 중궁전을 출입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의심스러울 수 있는 일이다. 중전마마를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출입을 자제하도록 하여라.”

“예에, 세자저하…….”

중전의 곁에 가지 말라고 했던 혼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중궁전 나인들 앞에서 나에게 중궁전에 출입하지 말라고 할 정도면 그가 화난 게 분명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는 말하는 중간 중간 계속 헛기침을 한다. 정원군은 어색한 분위기에서 주로 헛기침을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혼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와 마주치자 당황해서 헛기침을 하는 걸까? 아니면 감기에라도 걸린 걸까?

마음속으로 그를 걱정하며 인사를 올린 내가 그를 지나쳤을 때였다. 내 뒤로 혼이 피식 짧은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똑똑히 들려왔다.

“저하?”

정작 혼의 웃음에 당황한 건 중궁전 지밀나인들.

“아무것도 아니다. 흠흠. 중전마마께 아뢰어라.”

나는 깨달았다. 그는 내가 그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이 웃겼던 거다.

그런데 차마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웃지는 못하고 웃음을 참느라 계속해서 쓸데없는 헛기침 소리만 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그가 문득 얄미워져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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