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외전- 가라고 가랑비, 있으라고 이슬비(3)
흰색
1592년 겨울 의주 행재소.
깊은 밤이었다. 피난 중인 상황이라지만 쓰이지 않던 초가에 마련된 신성군의 빈소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두 사람이 겨우 앉을 만큼 좁은 곳에 마련된 빈소에는 법도대로 자리를 지켜야 하는 내관과 상궁들도 자리하지 못한 채 오로지 정원군만이 지키고 있었다.
신성군의 위패를 올려다보며 정원군의 흐느끼는 소리가 문 밖으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정원군에게 있어서 신성군의 존재는 특별했다.
일찍이 중종대왕의 서자 복성군의 양자가 되어 출궁한 뒤 왕래가 없던 첫째 형인 의안군과는 다르게 신성군은 혼인 후 궐 밖으로 나가서도 정원군을 챙겨주던 이였다.
특히 부왕 선조의 총애를 독차지한 신성군은 언제나 활기차고 당당했다. 정원군은 그런 신성군을 늘 닮고 싶어 했다.
그랬던 신성군의 죽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정원군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러던 신성군이 어느 날부터인가 의젓하다는 칭찬을 많이 듣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정원군과 구연지의 혼인이 있은 다음부터였다. 그때도 어렸고 지금도 어린 정원군은 그런 신성군의 눈에 띄는 변화에 대한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신성군이 세자의 자리에 어울리도록 의젓해졌다고만 믿어왔다.
[ ‘연지야…….’ ]
그러나 신성군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 마음속에 담아왔지만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이렇게 그의 입에서 그가 2년간이나 숨겨왔던 마음이 드러나는 순간, 어린 정원군 안에는 어린 나이로 감당하기 힘든 죄책감이 자리 잡았다.
이 죄책감은 신성군의 죽음으로 영원히 갚을 수도 풀 수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흐으윽……. 형님…….”
끼이이익.
낡은 초가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원군은 서둘러 눈물을 훔쳐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다홍색 철릭을 입은 세자 광해군이 서 있었다.
분명 분조를 이끌고 의주를 떠난 것으로 알고 있던 이복형 광해군의 등장에 정원군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렸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런 정원군의 예를 중지시키고는 신성군의 위패 앞에 섰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신성군의 위패에 적힌 신위를 한참이나 살피더니 정원군을 돌아보았다.
“네가 끝까지 신성군의 곁을 함께 했다고 들었다. 네 상심이 크겠구나.”
“아닙니다. 세자저하.”
“둘만 있을 때는 편히 부르거라.”
“황공하옵니다. 저하.”
평소 정원군의 예의바른 성품을 알고 있는지 광해군은 애써 섭섭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는지, 그대로 좁은 빈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 광해군의 행동에 정원군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광해군은 한 손을 들어 정원군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정원군이 천천히 광해군과 좁은 빈소 안에서 마주앉았다. 그러자 광해군은 긴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믿지 않을 것 같아……. 아직까지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뜬금없는 광해군의 말에 정원군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왠지 너라면 믿어줄 것 같구나. 들어주련?”
차가운 냉기를 머금은 조선의 서쪽 최북단, 의주에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정원군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어떤 나라의 이야기와 바람과 함께 사라진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머니 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악연으로 서로 연을 맺기가 어려웠던 두 형제가 하나의 연결고리를 갖게 되었던 것은, 바로 이날 광해군으로부터 처음 듣게 된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날은 정원군도 모르는 사이 만난 적도 없었던 경민이라는 한 여인이 처음으로 그의 마음 안에 새겨지기 시작한 순간이기도 했다.
***
1596년 봄 황해도 해주.
아직 왜란이 끝나지 않아 모든 왕자와 그 식솔들은 황해도 해주 관사를 주변으로 모여 지내고 있었다. 정원군과 그의 부인 연지 역시 이 해주에 있었다. 몇 달 전 연지는 아들을 낳았다.
“으아아앙.”
태어난 뒤로 한 번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본 적이 없는 어린 아이는 유모의 품에서 칭얼대기를 그치지 않았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유모의 품에 안긴 아이를 신경질적인 시선으로 노려보던 연지가 입을 열었다.
“아이가 그리 울면 대감의 귀에도 들리지 않겠는가? 어서 조용히 시키게.”
“하오나 군부인 마님. 어린 아기씨께서 우시는 것은 당연하지라…….”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는 것인가?”
“아, 아니옵니다. 어휴, 아기씨. 어서 울음을 그치셔야지요…….”
유모는 어린 아이를 품에 안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결국 참다못한 연지는 자리를 박차고 내당을 나왔다. 왕자들에게 배정된 해주의 관사는 매우 작았다.
외당으로 쓰이는 바깥채와 내당으로 쓰이는 안채를 제외하고는 하인들이 묶는 숙소 역시 관사 밖에 마련될 정도였다. 힘들고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식량도 충분하지 않았고, 역병이 도는 일도 빈번했다. 이런 가운데 그녀가 건강한 아이를 낳은 것은 다들 기적이라고 말했다. 선조의 첫 손자.
그러나 연지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바란 것은 딸이었다. 어디에 내놓아도 쓸모가 없다는 딸이, 그녀는 그토록 낳고 싶었다. 내당을 나선 그녀의 시선이 불이 켜진 정원군이 머무는 외당을 향했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의주에서 선조와 함께 머무는 인빈이 자신의 지밀상궁인 정 상궁을 해주로 보내왔다. 이유는 하나였다. 혼인 이후 단 한 번도 치러진 적이 없던 정원군과 연지의 합방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였다.
인빈이 이처럼 정원군과 연지의 합방을 신경 쓰기 시작한 것은 의주로 들려온 한 소식 때문이었다.
분조를 이끄느라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던 세자 광해군이 해주에 머물고 있던 부인 유 씨를 찾아가 며칠을 머물렀다는 소식이었다.
신성군의 죽음으로 몇 년간 큰 상심에 빠져 있던 인빈의 머리가 비상하게 움직였다. 그녀에게는 아직 정원군이 남아 있었다.
오래전 신성군을 차기 세자 후보로서 차근차근 준비시켜오던 그녀는 이제 정원군을 세자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 선조의 첫 손자가 세자 광해군의 소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인빈은 서둘러 정원군과 연지의 합방을 추진했다.
그렇게 마련된 첫 합방 날.
두근거림을 가득 안고 정원군과 마주한 연지는 아무 말 없이 계속해서 못하는 술만 들이키는 정원군을 향해 의문을 품었다.
이윽고 술에 잔뜩 취한 정원군의 입에서는 그가 오래도록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은 이유가 흘러나왔다.
“나의 형님이신 신성군께서는……. 그대를 아주 오래도록 마음에 품으셨소. 난 그런 형님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대를 내자로 맞이하라는 아바마마와 어머님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였지.”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신성군이 오래도록 자신을 마음에 품었다는 사실은 연지에겐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놀라운 일보다도 더 큰 충격은 바로 그 사실을 자신의 지아비인 정원군의 입에서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연지는 오래도록 정원군이 자신을 피하고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신성군은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써 모든 것은 끝이 난 것이 아니라 답을 얻을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버린 것이다.
“미안하오. 난…… 형님이 세상을 떠나신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대를 나의 내자로 여긴 적이 없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이 연지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혼인 이후 정원군의 곁을 지키며 그의 성품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연지였다.
그가 자신을 단 한 번도 아내로써 여기지 않고 있었다면, 그것은 평생토록 그리 마음먹을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허나 소첩의 마음은 대감을 처음 뵈온 그날부터 오로지 대감만을 담고 있었단 말입니다.’
술을 끊임없이 들이켜는 정원군을 앞에 두고 연지는 이 말을 수도 없이 내뱉으려 곱씹고 곱씹었다.
“미안하오.”
끊임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던 정원군이 결국 연지를 놔둔 채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연지는 자신의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반복하던 말을 꼭꼭 눌러댄 채 이렇게 말했다.
“대를 잇는 것은 효의 근본입니다. 또한…….”
연지는 눈물을 참는 것이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그러나 절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정원군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그에게 보일 바에야,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두 눈을 파내버리고 싶을 만큼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다.
연지는 자신의 목소리가 울음소리로 변하려는 것을 힘들게 참아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들이 하나만 있다면……. 대감께서 더 이상 죄스럽게 소첩의 얼굴을 마주하실 일도……. 없으시겠지요…….”
연지의 말이 끝나자 곧바로 침묵이 찾아왔다. 그 침묵 속에서 연지는 생각했다. 이대로 정원군이 자리를 떠난다면 그대로 그와의 부부의 연은 끝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자신에게는 아직 기회가 남아있다고,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한 가닥의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나가려던 정원군이 무언가 결심한 듯 돌아서 앉았다. 그는 방 안을 훤히 밝히고 있던 촛불의 불을 껐다. 그렇게 둘만 있는 내당에 어둠이 찾아왔다.
그렇게 연지는 오래도록 자신이 마음에 품어왔던 사내의 여인이 되었다. 부부의 연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연지였다.
그러나 그녀의 지아비에게는 아니었다. 하늘이 맺어주어 그녀의 지아비가 되어준 정원군에게는 그녀와의 부부의 인연은 끔찍하리만치 괴로운 일일 뿐이었다.
마음에 품은 이에게서 외면 받는 것도 모자라 고통을 주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던 연지의 몸속에 소중한 생명이 자리 잡았다.
열 달이라는 시간 속에서 연지는 여자아이가 태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는 그녀의 기대를 처참히 무너뜨린 사내아이였다. 연지는 자신의 몸속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비집고 나온 그 아이에게 어미로서의 따스한 눈길을 주는 것이 어려웠다.
정원군의 따스한 눈길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 어린 아들은 마찬가지로 따스한 눈길을 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처럼 생각되었다.
지아비에게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원망이…… 어리고 죄 없는 아이에게 표출되고 말았던 것일까?
아이가 태어나고 수개월이 흐른 어느 날 밤, 연지는 처음으로 외당을 찾았다.
여전히 자신에게 따스한 눈길은 고사하고 차가운 눈길조차 보내지 않는 정원군과 마주한 채, 연지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천윤이……. 대감의 대를 이을 겁니다. 허나 먼저 세상을 뜨신 의안군과 신성군……. 두 분 마마의 대를 이으려면 대감의 소생이 둘은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나가 보시오.”
예상했음에도 싸늘하게 돌아오는 정원군의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며 박혀들었다. 그러나 연지는 이대로 굽히지 않았다.
이미 정원군과 그녀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은 건넌 뒤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지아비의 마음을 돌리고만 싶었다.
“소첩 역시 몸이 풀린 듯하니 상궁에게 말하여 다음 합방일자를…….”
“나가라 하지 않았소.”
정원군은 연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언제나 그를 바라보고 있는 건 오직 구연지, 그녀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눈길을 주고 있지 않았다.
연지는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정원군과의 침묵 속에서 묵묵히 제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소첩은 그리 알고 물러가겠습니다.”
정원군에게서는 아무런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대화로만 결정짓자면 그녀가 주도권을 잡은 듯한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승리의 기쁨 따위는 그녀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잠시나마 봄을 잊어버린 밤의 냉한 바람이 그녀를 맞았다. 그 바람은 결코 정원군처럼 그녀를 회피하지 않았다.
바람은 자신이 가진 차가운 바람으로 그녀를 맞이하며 안아주고 있었다. 그녀는 그 바람이 준 선물에 쏟아지려는 눈물을 흘려보내려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이 실타래가 복잡하게 엉켜버리고 말았던 것일까? 연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만 가득했다. 그녀는 그 별들을 올려다보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속으로 되뇌었다.
‘소첩은 죽어도 대감의 부인입니다. 하늘이 정하고 하늘이 맺어준 대감의 조강지처란 말입니다.’
그러나 이 다짐은 정원군과의 첫 합방 날에도 끝내 입 안에만 맴돈 채 내뱉지 못했던 고백처럼 그렇게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 묻히고 말았다.
정원군과 구 씨 사이의 차남인 능원군 이보가 태어난 것은 능양군 이종이 태어난 후 2년 뒤인 1596년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 능창군 이전이 태어났다.
후에 능원군 이보는 정원군의 큰형이었던 의안군의 양자로 보내졌으며, 능창군 이전은 신성군 이후의 양자가 되어 그의 가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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