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외전- 가라고 가랑비, 있으라고 이슬비(1)
흰색
1592년 겨울 평안도 대차유령(大車踰嶺).
짙은 회색빛 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운 저녁. 하늘에서는 눈이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영변에서 의주로 넘어가는 언덕바지, 인근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대차유령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이곳을 지나 대륙으로 가는 사신들을 위해 지어진 관사(館舍)에서 16세의 한 소년이 마지막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신성군 이후.
왜란이라는 큰 국난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세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소년이었다.
죽는 그날까지 떠날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한성을 떠나 하염없이 북쪽으로 향한 지 수개월, 귀한 왕자로 태어나 노숙은 물론이고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했던 나날들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그는 이런 현실을 이겨낼 힘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선조 소생의 왕자들 중 그 누구보다도 건강하고 활달했던 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이라면, 지금 그가 생사의 고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국난이라는 예상치 못한 현실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신성군의 옆에서 맥을 짚던 의관이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나자, 신성군의 곁에 앉아있던 정원군이 와락 눈물을 쏟았다.
자신보다 두 살이 많은 동복형인 신성군을 그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따랐던 정원군이었다.
이번 의주로 향하는 피난길에서 선조는 신성군에게 영변에서 병사들을 모으는 중책을 맡겼고, 인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원군은 그런 신성군을 자처해서 뒤따라 영변으로 향했었다.
그러나 전쟁의 소문을 듣고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는 일은 물론이고 병사들을 모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별다른 수확도 없이 그렇게 의주로 돌아가던 중 신성군이 앓아눕고 말았던 것이다.
“형님……. 으흐흑.”
정원군은 신성군의 손을 붙잡은 채 울먹였다. 그러나 가녀린 마지막 숨 소리만 들려올 뿐, 신성군에게는 애타는 동생의 울먹임에 응답할 작은 여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그런 정원군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그의 장인인 구사맹이었다.
선조의 명으로 영변으로 떠나는 신성군을 정원군이 함께 가겠다고 했을 때, 그의 장인으로서 구사맹은 정원군과 함께 했다.
구사맹은 지금 죽음을 목전에 둔 신성군보다도 정원군이 더 걱정이었다. 신성군이 앓아누운 뒤로 정원군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신성군의 곁을 지켰다.
이러다가 정원군마저 병에 걸릴까 조마조마 하던 구사맹이 결국 정원군의 곁으로 다가갔다.
“정원군, 신성군의 곁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정원군께서는 조금이라도 쉬시지요.”
“아니오. 형님의 곁에 있을 것이오.”
“이러다가 정원군께서 몸을 상하기라도 하시면 전하의 시름이 더 깊어지실 것을 모르십니까?”
신성군의 상태가 위중하다고 의주로 파발마를 보낸 건 며칠 전.
선조는 당장 신성군을 의주로 옮기라고 명을 내렸지만, 신성군의 상태는 며칠째 그칠 기미가 없어 보이는 눈을 뚫고 의주로 옮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눈으로 길이 막혀 말로 달리면 반나절이면 도착할 이곳 대차유령까지 올 수도 없는 선조는 죽어가는 아들의 소식을 전해들을 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때 정원군이 잡고 있던 신성군의 손이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놀란 정원군이 서둘러 신성군의 안색을 살폈다.
“형님?! 정신이 드십니까?”
“어……어머니…….”
죽어가는 신성군의 입에서 인빈을 부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의식을 되찾은 것 같지는 않았다. 정원군이 신성군의 머리맡에 고개를 파묻고 왈칵 눈물을 터트린 순간이었다.
“……여……연지야…….”
정원군의 울음이 순간 멈추며 주변은 침묵에 휩싸였다.
“연지야…….”
엎드려있던 정원군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런 정원군의 곁에서 신성군이 한 말을 함께 들었던 구사맹이 서둘러 의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하는가? 어서 다시 맥을 짚어 보게. 어서!”
“예에!”
의관이 서둘러 달려오더니 신성군의 맥을 잡기 위해 허공에 들린 신성군의 손목을 잡으려고 할 때였다.
의관이 잡기도 전에 신성군의 손목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숨이 끊어진 것이다.
신성군을 오랫동안 곁에서 모시던 내관이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하고, 주변은 나인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신성군의 운명은 바로 여기까지였다. 선조의 총애를 독식한 인빈에게서 태어나 한때는 유력한 세자의 후보였던 그였다.
그러나 그는 추운 겨울이 찾아온 북쪽의 한 관사에서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정원군은 자신의 뺨을 타고 내리는 눈물의 감각도 잊은 채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원군?”
장인 구사맹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정원군의 귀에는 구사맹의 목소리도, 관사를 가득 채운 나인들의 통곡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정원군은 그렇게 문을 열고 눈이 내리는 밖으로 걸어 나왔다.
[ ‘연지야…….’ ]
죽어가던 신성군이 마지막으로 부른 한 소녀의 이름. 그 이름은 정원군도 그의 장인 구사맹도 알고 있는 한 소녀의 이름이었다.
구연지. 지금쯤 의주에서 정원군과 그를 호위하기 위해 함께 떠난 구사맹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원하고 있을 그 소녀는 다름 아닌 구사맹의 여식이자, 2년 전 정원군과 혼인한 그의 부인 구 씨의 이름이었다.
신성군이 앓아눕기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북쪽 지방의 눈은 그가 숨을 거둔 오늘 밤에도 여전히 그칠 기미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달조차 구름 뒤에 가려 보이지 않는 밤. 정원군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올려다보며 2년 전의 가을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가을바람에 실려 날아다니는 나뭇잎들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
1590년 가을 한성부 호현방.
“이쪽이다. 이쪽!”
화창한 가을 햇살을 뒤로하고 기대감으로 잔뜩 얼굴을 붉힌 한 소년이 앞으로 빠르게 달려 나가고 있었다. 그런 소년의 뒤를 따라 종종 걸음으로 뛰지도, 그렇다고 천천히 걷지도 못한 채 달리는 소년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두 소년의 나이 차이는 크지 않아 보인다. 앞서가는 소년은 이미 관례를 치렀는지 상투를 틀고 갓을 쓰고 있었고, 뒤따르는 소년은 관례 전인지 사규삼 차림에 복건을 쓴 도령이었다.
앞서가는 소년의 뒤를 따르는 소년은 한눈에 보더라도 계집아이마냥 예쁘장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바로 선조와 인빈 김 씨 사이의 삼남 정원군 이부였다. 정원군보다 앞서 뛰어가는 갓을 쓴 소년은 그의 동복형인 신성군 이후였다.
“형님, 대체 어디 가셔요?”
몇 달 전 혼인해 궐 밖에 나가 살기 시작한 신성군과 아직 혼례 전인 정원군이 공식적으로 매일 만나는 곳은 종학이었다.
종학이 끝나자마자 신성군은 퇴궐 길에 정원군을 데리고 나왔다. 신성군을 그 누구보다도 잘 따르는 정원군은 그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궐 밖을 나온 것이다.
부왕은 물론이고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어머니 인빈에게도 허락받지 않고 몰래 나왔다는 죄책감이 어린 정원군의 마음을 옥죄고 있었다.
나중에라도 신성군과 함께 퇴궐했다고 한다면 크게 혼날 일은 없겠지만, 엄연히 궐에는 법이 있었다.
“군소리 말거라. 다~ 이 형님이 알아서 가고 있으니. 에헴.”
인적이 드문 기와집이 늘어선 동네에서 신성군은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는 느릿하게 걷기 시작했다. 그제야 신성군을 따라잡은 정원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순간 신성군이 걸음을 멈추고는 정원군을 돌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난 단옷날에 한 여인을 보았다 했지.”
정원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신성군이 단옷날 보았다는 여인이 누구인지 바로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단지 단옷날 이후로 정원군이 글을 읽을 때마다 귀찮게 붙으며 한 소녀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았던 것은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 여인이 단옷날 신성군의 눈에 띄어 단번에 그의 마음을 훔쳐간 소녀인 듯싶었다. 여기까지 연결 지은 정원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 여우같은 귀에 사슴 같은 눈을 가졌다는 그 여인이요?”
“그래 맞다. 여기가 바로 그 여인의 집이다. 오늘 내 그 여인의 얼굴을 네게도 보여주고 싶어 이리 데려왔느니.”
마치 자랑할 만한 자신의 물건을 보여주겠다는 태도로 신성군이 말했다.
물론 그 단옷날 보았다는 여인은 신성군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신성군은 곧 그 여인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확신이라도 하는 걸까?
“흐흠! 흐흠!”
궁금한 얼굴의 정원군을 뒤로 한 신성군이 갑자기 담 안쪽으로 어른 소리를 낸다. 여전히 영문 모르는 정원군만 그런 신성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록 담 안쪽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러자 신성군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흐흠! 흐으으으흠!”
정원군은 혹 신성군이 내는 소리에 누가 오기라도 할까 좌불안석이었다.
누군가의 눈에 띈다는 것은 신분이 드러날 수도 있다는 것이고, 그 말은 다시 말해 몰래 경복궁을 나온 것이 들통 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정원군이 신성군을 말리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또 오셨군요.”
낭랑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담 안쪽에서 들려옴과 동시에 신성군이 재빨리 정원군의 옷깃을 잡아끌어 담벼락 아래로 바짝 몸을 붙였다.
이유도 모른 채 신성군의 손에 이끌려 담 아래로 몸을 숙인 정원군은 예쁘장한 눈만 연신 깜빡여댔다.
“무탈하시었소, 연지 낭자.”
“풋.”
돌아오는 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짧은 웃음소리. 얼핏 듣자니 비웃는 웃음 같기도 한데, 신성군은 그런 웃음소리에 마냥 신이 난 얼굴로 히죽거리기까지 한다.
정원군은 도통 그런 신성군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저런 웃음소리에는 기분이 나쁜 게 당연한 것 같아서였다.
“내가 올 줄 알았소? 그래서 기다린 것이오?”
“곳간의 쌀알을 훔치러 온 쥐 마냥 소리 없이 오시는데 소녀가 어찌 알겠어요?”
영특하게 재잘대는 소녀의 목소리에 신성군의 얼굴이 점점 진한 붉은색으로 바뀌어간다. 정원군은 그런 신성군의 변화를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
보아하니 신성군의 기분은 상당히 좋아보였다. 대체 신성군은 이 소녀의 이름을 어떻게 알아낸 것일까? 게다가 듣자하니 이 두 사람은 한두 번 말을 섞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담을 사이에 두고 여인과 말을 섞는 것은 옳지 않은 일 같은데, 존경하고 따르는 형이 벌이는 일이니 정원군은 그저 혼란스러웠다.
“내 오늘은 낭자에게 줄 것이 있소이다.”
신성군이 도포자락 사이로 소중히 가져온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을 본 정원군은 놀란 나머지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왕이 며칠 전 어머니 인빈에게 내린 명에서 온 노리개였다. 명나라 황제가 보내온 패물 들 중 하나인 이 노리개는 원래 명 황제가 중전 박 씨에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부왕은 중전은 화려한 패물을 좋아하지 않으니, 주인은 인빈인 것 같다면서 내린 것이었다. 정원군이 신성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정원군이 알기로 인빈은 그 노리개를 신성군에게 준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신성군은 이 노리개를 양화당에서 몰래 훔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신성군은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정원군의 손을 귀찮다는 듯 털어낸 뒤, 방실방실 웃으며 노리개를 작은 비단 주머니에 담아 담 안쪽으로 집어 던졌다.
툭.
담 안쪽에 노리개가 떨어진 소리가 들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노리개를 담은 주머니가 담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신성군이 당황하는 사이 정원군은 재빨리 노리개가 담긴 주머니를 주워들기 위해 몸을 숙였다.
“뉘댁 도령이신지는 모르오나, 여염집 규수로서 함부로 받을 수 없음을 알아주셔요.”
“이런 담 높은 집에 살면서 어찌 스스로를 여염집 규수로 낮추는 것이오.”
“도령께서는 소녀가 누구인지 아시겠지요? 그러니 소녀의 이름도 아시는 것이겠지요. 허나 소녀는 도령이 뉘신지, 또 함자가 어찌 되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주시는 것을 어찌 덥석 받겠습니까.”
“내 함자를 알고 싶소? 그런 것이오?”
소녀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 소녀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러면서도 늘 자신의 주변을 맴돌던 신성군의 존재가 궁금해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궁금한 마음을 살짝 들킨 것에 당황한 듯싶다. 이런 두 소년 소녀를 제쳐두고 정원군은 땅에 떨어진 주머니에서 조심스레 노리개를 꺼내어 살폈다.
혹시라도 노리개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어머니 인빈이 크게 상심할까 걱정된 것이다.
“내 오늘 패물을 주어 규수에게 약조하려 한 것은, 반드시 규수를 내 여인으로 맞아들이고자 하는 뜻을 전하려 한 것이기도 하오.”
노리개를 살피던 정원군이 고개를 들어 신성군을 보았다. 정원군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성군은 몇 달 전 혼례를 치렀다.
그런데 저 담 안의 여인을 맞아들이겠다니?
그때 담벼락 끝에 자리한 작은 문에서 머슴 하나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담벼락에 붙어선 신성군과 정원군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거기 뉘시오?”
“이키! 가자.”
머슴의 등장에 놀란 신성군이 냅다 뛰어가기 시작하고, 정원군 역시 그런 신성군의 뒤를 따라 그곳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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