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해의 연인-38화 (38/110)

제38화. 첫눈이 내릴 때(3)

흰색

중전 김 씨가 회임한 이후로 실질적인 내명부의 주인 역시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사실상 내명부의 주인 자리는 병약했던 의인왕후 시대부터 계속 마녀 인빈의 차지였다.

새로 들어온 중전도 거의 할머니뻘인 인빈을 쉽사리 건드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행궁의 나인들은 모두 한입으로 어린 중전이 나이 많은 인빈에게 진 것이라고 수군댔다.

그러나 어린 중전이 보통이 아닌 건지, 그녀 주변에 있는 일명 참모진 상궁들이 뛰어나기 때문인지, 중전은 마치 잠자는 호랑이처럼 조용히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나를 종종 놀려대는 데 써먹기로 작정한 정원군과의 일도, 어쩌면 인빈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조사를 하던 중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빈에게 뺨을 맞았던 나를 중전 김 씨가 구해준 날, 그녀는 자신의 회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젠 행궁 나인들은 바로 그날을 어린 중전이 진짜 내명부의 주인이 된 날이라고 말한다.

어쩌다보니 어린 중전이 처음으로 인빈을 꺾은 계기가 바로 내가 되어버린 것이다. 좋든 싫든 난 이 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날 이후 중전 김 씨를 모시는 상궁들에 대한 정보가 행궁을 떠돌아다녔다.

제일 먼저 변 상궁. 나도 아는 그녀는 중전 김 씨가 내게 말한 대로 본방나인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중전을 모셨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선조의 특별한 명으로 중궁전 상궁이 된 인물이다.

내가 중전과 함께 있을 때는 마치 벽처럼 가만히 앉아서, 몇 마디 툭툭 던지는 수준이었지만 의외로 성격이 좋아 신분에 관계없이 나인들과 사이좋게 지낸다고 한다.

이 때문에 중궁전에 덕 좀 보려는 나인들이 행궁의 온갖 소문을 끌어 모아 변 상궁에게 편하게 말을 전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중전이 말한 ‘벽’이 사람이라면, 변 상궁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변 상궁은 중전을 위해서라면 도움이 될 만한 말들은 다 끌어 모았을 것이니, 특히 인빈에 관련한 소문을 모아오다가 나와 정원군에 대한 소문을 듣고 중전에게 말을 한 것 같다.

두 번째로 문 상궁. 행궁의 나인들은 그녀를 야심가라고 생각한다.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원래 대전 지밀상궁 중 한 명으로 궁궐 최고의 상궁 자리인 제조상궁을 꿈꿨다고 한다.

그러나 중전 김 씨가 들어오면서 그녀가 궁중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뛰어난 문 상궁을 선조가 친히 중궁전으로 보냈다는 후문이다.

결국 너무 뛰어나서 ‘튀어버린’ 덕분에 제조상궁 자리를 코앞에 두고 중궁전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된 경우라고 보겠다.

중궁전으로 가게 된 문 상궁은 중전 김 씨에게 충성을 다짐하면서, 언젠간 그녀의 덕을 보고 제조상궁의 자리에 오를 목표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런 그녀에게는 나쁜 버릇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자신보다 낮은 전각 소속이라면 일단 깔아 무시한다는 것이다.

“무엄한 것.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너 같은 것이 돌아다니는 것이냐!”

날씨가 쌀쌀하고 하늘은 온통 구름이 뒤덮여 있던 어느 초겨울날. 나는 퇴선간 일을 일찍 마치고 임해군이 며칠간 사냥을 떠난 덕분에 할 일이 없어진 미영과 함께 내 처소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중궁전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 앞에서 문 상궁이 한 나인의 뺨을 치며 호통 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는 구경나온 나인들이 저마다 수군대느라고 바빴다.

“어허! 어디 눈을 그리 뜨는 것이냐? 너같이 요망한 계집은 중전께서 계신 이곳은 얼씬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야!”

문 상궁 성격이야 워낙 알아준다고는 해도, 문 상궁의 손찌검에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눈을 부릅뜨는 젊은 나인은 참 대단하다 싶었다.

게다가 일방적으로 맞는 나인을 향해 동정 어린 시선보다는 모두 그럴 줄 알았다는 시선들이다. 그건 미영이도 마찬가지였다.

“쟤가 누군데?”

궁금증이 생긴 나는 미영이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쟤, 동궁전 나인이에요.”

“동궁전?”

동궁전 나인이 중궁전 나인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으니, 중전의 입김이 확실히 세지긴 세진 모양이다.

“네. 개시라는 애에요. 다들 개똥이라고 부르지만요. 언니, 쟤가 누군지 못 들어봤어요?”

오히려 미영이가 놀라며 되묻는다.

“개똥이?”

“네. 원래 동궁전 나인은 세자저하의 나인이잖아요. 또 언제든지 세자저하의 여인이 될 수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왜란 직후에 높으신 분들이 전하께 세자저하께 양위하라고 아뢴 적이 있대요. 그때 화가 나신 전하께서 보란 듯이 동궁전 나인인 개똥이에게 승은을 내리신 거예요.”

“승은을?”

“네에! 그런데 그 이후에 간택령 때문인가, 본체만체하신 거예요. 뭐, 이미 잊어버리셨다는 말도 있고요. 보통 승은만 입어도 바로 특별 상궁인데 말이죠.”

말 그대로 세자에게 양위하라는 말에 화가 난 선조가 동궁전 나인을 건드려 혼을 모욕한 것이다.

그쯤 되면 아무리 아버지가 그랬다고 하더라도 혼의 입장에서는 보통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역으로 혼이 동궁전 나인이 아닌 다른 나인에게 손댔더라면 그 즉시 파렴치한으로 몰리고도 남았을 테니까.

“그 뒤에 동궁전에서 내쳤으면 차라리 저하의 체면도 더 살았을 텐데요. 뭐, 쟨 동궁전에서 쫓겨나면 더 이상 갈 곳도 없겠지만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자저하께서 계속 쟤를 동궁전에 두신 거예요. 이 일, 꽤나 유명한데. 언니, 정말 몰라요?”

아니, 난 알고 있다. 그녀가 누구인지도 말이다.

개똥이. 김개시(金介屎).

혼의 즉위 후 이이첨과 함께 광해군의 측근으로 활동했던 대단한 상궁이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중궁전 문 상궁에게 야단이나 맞고 있는 동궁전의 상궁도 아닌 일개 나인일 뿐이지만.

“뭘 보는 게야?!”

문 상궁이 몰려든 나인들에게 호통 친 후 중궁전으로 사라졌다. 문 상궁이 사라지자, 개시는 어딜 맞기라도 했는지 한쪽 다리를 절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여들었던 나인들도 흩어지고 미영이도 나를 재촉했다.

“언니, 그만 가요. 운지가 기다리겠어요.”

그렇지만 개시의 입가에 살짝 보이는 피를 본 순간, 인빈에게 맞았던 날이 떠올라 동정심이 들었다. 더욱이 지금 그녀는 동궁전의 나인이었다.

“먼저 가. 나도 금방 갈게.”

“어디 갈 데 있어요?”

“응.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운지 기다리겠다.”

“알았어요. 그럼 빨리 와요.”

아무것도 모르는 미영이가 활짝 웃으며 사라지고, 나는 그제야 개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나를 발견하자, 질질 끌던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말이다. 나는 손수건처럼 사용하는 곱게 접은 천을 그녀에게 내밀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여기에 피가 나서요.”

나는 내 입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녀의 입가에 피가 나는 부분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적개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 굳게 다문 입을 쉽사리 열려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입가에 묻은 피를 살짝 닦아주었다. 그제야 그녀가 상체를 뒤로 빼더니, 내 손에 들려있는 천을 반 강제적으로 빼앗아들며 차갑게 대꾸했다.

“됐어요.”

그러나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는 너무 심한 말이었다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말을 바꾸었다.

“내가 할 수 있으니까.”

여전히 딱딱하게 끊어지는 말투. 나는 그녀가 꽤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문 상궁에게 그리 혼나면서도 비는 소리 한 번 안 냈으니 말이다.

물론 인빈에게 맞으면서 입을 다물고 있던 나도 만만치 않겠지만, 나야 거의 포기하려는 순간에 혼이 나타났었으니까.

어쨌든 내가 건넨 천을 받아준 그녀를 향해 웃어주었다. 난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이미지만큼은 제대로 주고 싶어서였다.

반대로 그녀가 동정심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인다면 지금 내 웃음을 기분 나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내게서 천을 받아든 그녀가 다시 다리를 질질 끌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난 그녀가 그대로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혹시나 해서 부축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그때,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당신, 정월초하루날 밤. 세자저하와 후원에 있었던 그 나인이지요?”

나는 놀란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혼과 내가 만나던 그날 밤, 최 내관이 망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기에 예상치 못한 개시의 말에 놀라 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개시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날 향해 고개를 한 번 숙이더니, 다시 돌아서서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선조가 사실상 승은을 내리고 나서 챙겨주지 않았던 개시. 그 결과 그녀는 공중에 붕 뜬 신세가 되어버렸다.

만약 혼이 그런 식으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그녀를 챙겨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갈 곳 없는 궁녀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그녀는 혼이 왕이 된 이후에 그의 수족으로서, 상궁들 중에서는 꽤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다시 말해 오늘의 일을 개시가 잊지 않는다면 중전과 운명을 함께하고 있는 문 상궁의 최후가 어떠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특히, 자신을 훈계하던 문 상궁을 바라보던 개시의 눈빛. 아마 개시는 오늘 일을 절대 잊지 않을 거다.

문 상궁을 걱정하던 내 자신에게 우스워질 때쯤 개시의 모습도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추위를 느끼며 두 손을 모아 쥔 채 입가로 가져가 입김을 불어넣었다.

바로 그때였다. 코끝이 찌릿해지며 차가운 느낌이 든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혼이 후원에서 내게 그 약속을 하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첫눈을 보며 추위도 잊은 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첫눈을 맞으며 나는 발 빠르게 내 처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운지와 미영이를 일찌감치 보내고 후원으로 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처소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운지가 초조한 기색으로 전각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지야, 거기서 뭐해?”

날 발견한 운지가 급히 내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항아님! 이제 오셨군요!”

“미영이는?”

“조금 전 임해군마마께서 궐로 돌아오셨다는 소식에 급히 가셨어요.”

“그래? 그런데 왜 넌 밖에 나와 있어? 안 추워?”

“저…… 항아님.”

운지가 말끝을 흐리더니 주변을 한번 돌아보며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원군마마 처소에 일이 생겼어요.”

운지에게서 듣는 정원군의 이름은 늘 나를 불편하게 했다. 사연이야 어쨌든 그녀는 정원군이 보낸 사람이었다.

이젠 운지가 내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그녀의 입에서 정원군의 이름이 나올 때면 어쩔 수 없이 불편해진다.

“정원군마마의 이야기라면 듣지 않겠어.”

난 운지를 지나쳐 처소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운지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내게 간청했다.

“항아님, 제발요. 이번 한 번만 정원군마마를 뵈러 가주세요. 제발요! 간청 드려요! 항아님도 아시잖아요? 중전마마께서 회임하신 뒤로는 전하와 인빈마마의 사이가 멀어지신 것을요. 혹시라도 전하께 지금 이 일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정원군마마까지 전하의 눈 밖에 나고 말거예요!”

운지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정말 정원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다.

애써 내가 정원군의 일에 무덤덤해지려 해도, 그는 죽어가는 나를 위해 달려와 줬던 사람이었다. 그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운지는 내 물음에 눈물만 뚝뚝 흘렸다. 나는 문득 지금 운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정원군을 향한 충심에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를 마음에 두어서인지 혼란스러웠다.

만약 충심이라면 운지가 이렇게까지 간청하게 만든 정원군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도, 생각해보려고 한 적도 없었다.

만약 그에 대해 더 자세히 따지고 들자면 그는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인정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그의 마음을 거절한 일로 그에 대한 미안함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내가 이 조선에 와서 혼을 다시 만나기까지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애초에 혼과의 재회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내게 고마운 사람이었다.

“알았어. 하지만 이번 한 번만이야.”

정원군에게 받아야 할 약속을 운지에게서 받아낸 나는 정원군의 전각으로 향했다.

정원군의 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유 상궁이 주변의 지밀나인들을 모두 물린 뒤였다.

“왜 자네가 여기에 있는지 알 수가 없군.”

여전히 쌀쌀맞은 유 상궁은 나를 불만스런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드는지 한동안 나를 노려보기만 할 뿐, 전각 안으로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그 사이, 전각 안에서 정원군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 상궁은 물론이고 나 역시 예상치 못한 그의 외침에 움찔하고 말았다.

정원군은 이 행궁에서 살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좀처럼 자신을 낮추고 큰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전각 밖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를 낸 것이다.

“술을 못 드시는 분이네. 그만 드시게만 해주게.”

유 상궁이 착잡한 표정으로 자기 술병 두 개가 놓인 쟁반을 내게 주며 길을 내주었다. 그제야 나는 지금 정원군이 술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들었을 뿐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격앙된 듯했다. 중전의 회임으로 잔뜩 기분이 좋은 선조의 귀에 이런 일이 들어가면 위험하다.

술을 마시지 않던 정원군의 이러한 행동은 중전을 둘러싼 당파의 표적이 되기에도 좋았고, 그 전에 선조의 비위를 거스를 가능성도 높았다.

나는 전각의 마루 위로 올라가려다가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은 이제 행궁의 기와를 덮기 시작했다.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서는 분명 그 뒤로 지고 있을 해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시각은 밤이 찾아오기 직전의 모호한 경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순식간에 어둠이 찾아올 거란 걸. 그리고 내가 그 무엇보다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 밤을 뚫고 행궁 후원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거란 사실도.

밖에 눈이 내려서인지 처소 안은 벌써 어두웠다. 그 때문에 처소 안에는 기름등 두 개가 환히 그 안을 밝히고 있었다.

그 사이에 주안상을 하나 놓고 앉아있는 정원군의 주변에는 이미 다 마신 듯 보이는 술병 세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리 가져오너라.”

내가 입고 있는 나인의 옷 때문인지, 아니면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서인지, 정원군은 나를 지밀나인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천천히 쟁반을 든 채로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늘 그렇듯 의관을 모두 갖춰 입은 채 앉아 있었다. 딱히 격앙되어 보이던 큰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술에 취한 듯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그의 옆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앉고는 술병이 든 쟁반을 그 옆에 내려놓았다.

그는 술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인지,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은 채 다른 손으로는 내가 가져온 쟁반에서 술병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주안상 위에 놓인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르더니 내게 말했다.

“그만 물러가거라.”

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리를 지킨 채 꼼짝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를 고심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잔뜩 취했다면, 그만 마시라는 말은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행궁에서 사는 동안 그가 술을 마신다는 이야기는커녕 그가 술을 마셨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가 술을 마셨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그만 물러가라 하지 않았느…….”

뒤늦게 꼼짝 않는 나를 돌아보며 물러가라고 말하려던 정원군의 말이 끊어졌다. 그는 내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하던 말을 그만둔 채 웃음부터 터트렸다.

처음 작게 조소하듯 시작된 그의 웃음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처소 안을 울릴 정도로 커졌다.

나는 이처럼 그가 자신의 체면조차 잊은 채 소리 내어 웃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당황했다.

“정원군마마. 왜 안 드시던 술을 이렇게 많이 드셨어요?”

그러자 그가 웃음을 그치더니 나를 노려보듯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쯤 후원에서 세자저하와 함께 있어야 할 그대가……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이오?”

나는 그가 나와 혼의 약속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되묻고 말았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는 놀란 내 얼굴을 보더니 주안상으로 고개를 돌려 따라놓은 술잔을 단번에 비워냈다.

“술이란 게 이리 좋은 것인지 몰랐군. 취하니 그대가 보이고 말이야.”

마치 쓸쓸히 푸념이라도 하듯이 들려오는 정원군의 중얼거림에, 나는 일단 그가 혼과 나의 약속을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궁금증을 접기로 했다.

일단은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을 그만두게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마마는 취하지 않으셨어요. 취하지 않았으니 진짜 저를 보고 계신 거죠. 하지만 진짜 더 취하시기 전에 그만 드시는 게 몸에도 좋을 거예요.”

“아니요. 난 취한 게 맞소.”

취한 그가 막무가내로 우기며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대가 형님의 곁이 아닌, 내 곁에 와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나는 접어두었던 질문을 다시 꺼냈다.

“제가 후원에 있을 거란 걸 어떻게 아세요?”

정원군이 시선이 내 눈을 향했다. 살짝 풀린 듯 부드럽게 곡선을 지고 있는 그의 눈만 아니라면 딱히 그는 취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저하와 있었소. 그런데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후원에 가야겠다고 하시더군. 내가 곧 밤이 되면 날씨가 추울 거라 말씀 올렸더니 웃으면서 누군가를 만날 것이라고 하셨소. 난 그 누군가가 그대라는 걸 확신했소.”

후원에서 혼을 만나기 전까지는 지니고 있었을 내 마음안의 불안감이, 정원군의 증언에 눈 녹듯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지금 당장 후원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 정원군의 한마디가 나를 붙잡았다.

“어째서 형님이오? 형님이 세자저하이기 때문이오?”

“그건 아니에요.”

술기운에 어렵사리 정원군이 꺼낸 속마음에 나는 너무나도 쉽게 답을 주고 말았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혼이 세자라서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딱 꼬집어서 어떤 이유가 있어서라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지금 그를 좋아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것이 행복했다.

내 대답을 들은 정원군이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에게 하는 비웃음같이 느껴졌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내가 혼을 향한 마음을 깨닫기 전부터 그는 나를 향한 마음을 피력해왔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를 거절했던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었다.

만약 나와 같은 시대에 혼이 살지 않았더라면 난 정원군에게 그만큼 의지하게 되었을 것이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어디까지나 만약일 뿐이었다.

“유 상궁마마님을 모셔오겠어요.”

그를 향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으로 불편해진 마음을 억누른 채, 난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바로 그때, 그가 일어서려는 내 한쪽 손목을 낚아채듯 잡으며 강제적으로 다시 자리에 앉혔다.

“가지 마시오.”

그가 단호하게 말한다. 난 그의 말에 좋다 싫다 대답을 주기보단 그의 손에 잡힌 내 손목을 빼기 위해 힘을 주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날 잡은 손목에 힘을 주어 더욱 옥죄었다. 이런 그의 모습은 정말 처음이라서, 나는 점점 그가 두려워졌다.

“보내주세요.”

“가지 마시오.”

두 번째 그의 말은 앞선 말보다 단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절절하고도 간곡하게 들렸다.

“이만 가야 해요.”

“그대를 보내고 싶지 않소. 내 눈에서나 마음에서나. 형님께서 그대를 마음에 품은 것도 알고, 그대 역시 형님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소. 그럼에도. 그럼에도……난 그대를 보낼 수 없단 말이오.”

내 손목을 붙잡고 있는 정원군의 손을 통해서 그의 마음이 전해져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런 정원군의 마음이 내 몸 곳곳으로 완전히 퍼져나가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보내주세요. 제발…….”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호소했다. 그러나 이런 내 눈빛을 본 그가 다시 한 번 완강함을 되찾으며 내게 말했다.

“오늘만큼은 아니 되오. 내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구차하게 그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일은 없을 것이오. 그러니 가지 마시오. 가지 마시오. 경민.”

정원군의 등 너머로 굳게 닫힌 한지 창문 앞에는 기름등이 놓여 있었다. 그 기름등의 불빛 때문이었을까?

창문 밖에서 목화 솜 같은 눈덩이가 끊임없이 내리는 모습이 내 시야를 어둡게 할 정도로 큰 그림자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의 두 눈을 가득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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