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첫눈이 내릴 때(2)
흰색
그의 시선을 따라 혼도 내가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날 발견한 혼이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내가 아는 아이네. 그만 가보게.”
혼이 날 보증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후원을 빠져나갔다.
나는 서 있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후원 밖으로 빠져나가는 그 남자의 뒷모습만 계속 응시했다. 그 사이 혼이 대나무 숲 사이를 빠져나와 내가 있는 길 쪽으로 나왔다.
“경민아.”
혼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쫓던 시선을 거뒀다.
“혼아.”
“어찌 네가 여기에 있는 것이냐?”
혼이 웃으며 내게 묻는다.
“중궁전에서 양화당으로 가는 길에 널 봤어.”
“중궁전?”
혼이 의아하다는 듯 되묻자, 나는 서둘러 둘러댔다.
“어제 중전마마께서 나를 인빈마마에게서 구해주셨잖아. 맞다. 의녀도 보내주셨어. 정말 고마우신 분 같아.”
“중전께서 말이냐?”
“응. 앞으로 자주 놀러 와서 말 상대를 해달래. 아무래도 나와 나이가 같아서 그런가……. 날 좋아하시는 것 같아. 좋은 일이지? 그치?”
처음 날 보고 웃었던 혼의 안색이 점점 굳어지는 것만 같아서 내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을 때였다. 혼이 내 두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경민아. 난 네가 중전의 곁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혼을 바라봤다. 그는 그런 내 눈을 보더니 잠시 뒤 입을 열었다.
“아니다.”
그러더니 내 손을 놓으며 돌아서려고 한다. 지금 바로 만났는데 가버리려는 걸까? 난 그가 내 손을 완전히 놓기 전, 그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그러자 그가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인데? 아까 그 사람과 이야기하던 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중궁전 변 상궁의 이야기도 하는 것 같던데……. 말해줘. 아까 그 이야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그러나 혼은 대답 대신 웃기만 한다. 신경 쓰지 말라는 웃음인지, 아니면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웃음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난 쉽게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방금 전 혼과 그 남자의 대화는 보기만 해도 심각해 보였으니까. 무엇보다 지금은 좋게만 보이는 중전이지만 훗날 그녀가 혼과 대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난 혼의 말을 가볍게 넘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혼아.”
또 한 번 단호하게 그에게서 대답을 요구했을 때였다. 혼의 시선이 내가 그를 붙잡은 손으로 향했다. 그제야 내가 그의 손을 세게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손을 놓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것 같았다. 혼이 내가 놓은 손을 다시 잡은 것이다.
“경민아.”
그가 타이르듯이 이름을 부르며 내 눈동자를 응시한다.
“조금 전의 말을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중전의 곁에 가지 말라는 것은 그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어떤 의미였는데?”
“중전은…….”
그는 여기까지 말한 후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중전께서는 회임 중이시다. 그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도 안정이 필요하실 테니 네가 곁에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이리 말하는 것이다. 혹여 문제라도 생겼다가는 곁에 있던 네게 그 책임이 돌아올까 근심이 되는구나.”
‘문제라니?’
나는 불안한 시선으로 혼을 바라보았다.
중전을 모시던 나인이 쓴 것으로만 추정되고 있는 궁중 문학 <계축일기>가 떠오른다. 그 내용은 오로지 중전 김 씨의 입장에서만 서술되었기 때문에 혼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으로만 기술되어 있다.
물론 그것을 소설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내용 안에는 중전 김 씨가 임신하자 대군의 탄생을 우려한 광해군과 그의 장인 유자신이 아이를 유산시키기 위해 온갖 해를 끼치는 것도 나온다.
‘아니지, 혼아. 아니지?’
미래의 일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나는 속만 끓일 뿐이다. 이것저것 아는 대로 다 말해서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을 알고 싶지만, 지금으로써는 그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일까? 아빠도 내게 말했다. 과거로 가서 그 사람들의 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볼 수는 있어도, 그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속은 시간여행자도 알 수가 없다고.
그는 내 두 눈에 서린 불안을 읽고 있다. 그래서 웃음으로 그것을 넘기려고 하는 것이다. 분명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내 눈에서 불안이 가시지 않는 것을 본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두 팔로 나를 끌어안았다. 나의 불안이 두근거림으로 바뀌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걱정 말거라. 그리되면 최 내관이 알릴 터이니.”
그제야 나는 일단 안심하고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그가 입은 부드러운 느낌의 용포가 내 뺨을 쓰다듬듯이 간질이고 있었다.
“너를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구나. 근심시키고 싶지도 않아.”
그의 탄식이 내 가슴 깊숙한 곳으로 파고든다. 누구보다도 그의 인생의 중요한 순간, 그는 자신만을 바라보기에도 벅찰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그에게 짐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짐이 되고 싶진 않은데. 오히려 도움이 되고 싶은데……. 내가 아는 지식은 쓸 수가 없다. 말할 수도 없다. 그에게 앞으로 닥칠 일들을 알면서도 난 한마디도 할 수가 없다.
이런 내가 대체 그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저 그의 말대로 그가 하지 말라는 것만 하더라도 그에게 짐이 되는 것은 면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만 돌아가야겠구나.”
그가 나를 품에 놓아주었을 때,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동궁전으로 가는 거야?”
내 물음에 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서연(書筵)이 있다.”
“서연…….”
어색한 몇 마디가 오간다. 그러나 결론은 하나다. 두 사람 중 누구 한 명은 먼저 후원을 나서야 한다는 것. 그는 나를 먼저 내보내고 배웅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그저 선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나는 왠지 이대로 그와 헤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다…….’
혼이 같이 있기 싫다고 날 보내려는 것도 아니다보니, 가기 싫다는 말은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저 혼의 눈치만 살피고 같은 자리만 맴돌게 된다. 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보게 될지 모른다.
넘어지면 코 닿는 거리도 아니고 아예 한 집에 같이 사는 꼴인데도 말이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챘는지 가지 않고 한자리에서 맴도는 날 혼이 부른다.
“경민아.”
“응?”
“날이 추워지는 것 보니 곧 첫눈이 내릴 것 같구나.”
그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더니 다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첫눈이 내리는 날 밤. 이곳에서 널 기다리고 있으마.”
참으로 이상한 약속이었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약 없는 약속이었으니까. 조선시대에도 기상이변은 있다. 그러니 올해에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이 올 수도 있다.
물론 이건 나의 억지 가정이다. 그만큼 언제 내릴지도 모르는 첫눈을 기다리며 그를 보지 못할 생각에 마냥 속상한 감정만 들었다.
그래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다. 눈이 내릴 만큼 추워지면, 그런 날 밤에는 그 누구도 후원에 나타나지는 않겠지. 누군가와 만나기로 약속을 하지 않은 이상.
“만약 눈이 내리지 않으면?”
나의 엉뚱한 말을 들은 혼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한다. 그가 웃는 걸 보자마자 나는 내가 한 말을 후회했다. 후회해봤자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만 웃어.”
그러나 그의 웃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결국 얼굴이 새빨개진 나는 에라 모르겠다며 일을 만들고야 말았다.
나보다도 큰 키의 혼의 한쪽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고는 까치발로 그의 볼에 쪽, 입을 맞춘 것이다. 거짓말처럼 혼의 웃음이 멈췄다.
“지금 무엇을 한 것이냐?”
당황한 얼굴로 혼이 내게 묻는다. 나는 일 낸 사람이 더 성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약속의 증표야.”
“증표? 어떤 것이?”
“첫눈이 오는 날 밤. 내가 여기에 오겠다는 거라고.”
내 설명을 들은 혼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내가 서시에게 빈이 되어 달라 청한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달기에게 청을 했던 것이로구나.”
‘서시? 달기?’
그게 누군지 묻는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혼은 미소만 남긴 채 후원을 빠져나갔다.
***
“서시? 고사에 나오는 손꼽히는 미녀 아니에요?”
그날 저녁, 내 처소를 찾아온 미영이에게 난 서시와 달기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행이도 미영이가 내 잃어버린 기억 속 서시를 떠올리는데 도움을 주었다. 서시(西施).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 명이었다.
“갑자기 서시는 왜요?”
“그러는 넌, 서시를 어떻게 알고 있는데?”
“언니는 참. 미녀는 미녀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도 모르세요?”
“미녀가 미녀를 경계해? 그게 무슨 말이야?”
“네에! 죽었던 살았든 이 세상의 미녀들은 모두 제 적이라고요!”
두 주먹 불끈 쥐는 미영을 보며 잠자코 바느질만 하던 운지가 소리 내어 웃는다. 미영이는 그런 운지를 획하니 흘겨보며 묻는다.
“왜? 내가 무슨 틀린 말했니?”
“아니요, 전혀요.”
부정하면서도 계속 웃는 운지. 그래서인지 미영이도 흘긴 눈을 전혀 풀 기미가 없다. 결국 싸움으로 번질까 우려한 내가 급히 말을 돌렸다.
“그럼 달기는?”
“달기요?”
예상대로 미영이가 운지에게서 눈을 돌리며 내게 반문했다.
“응. 달기 말이야.”
“글쎄요. 저도 그게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운지가 끼어들었다.
“달기는 요부(妖婦)에요.”
“요부라니?”
나보다도 먼저 미영이 운지에게 물었다.
“다른 말로는 요녀라고도 하죠. 민가에서는 ‘달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종종 이 말 저 말에 빗대어서 말하곤 해요. 아마 미영 항아님은 궁궐에서만 고이 자라셔서 그런 말은 배우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인데?”
미영이가 더 궁금한지 운지를 졸라댄다. 운지는 기침으로 목소리를 다듬더니, 점잖게 대답한다.
“사내들을 홀리는 계집을 뜻하는 말이죠.”
“사내들을 홀리는? 그럼 나쁜 뜻이야?”
“나쁜 뜻인 거죠.”
“사내들을 어떻게 홀리는데? 나도 그 방법 좀 알자고!”
“왜요? 그런 걸 배워서 어디에 쓰시게요?”
“그야 물론…….”
미영이 잔뜩 들뜬 얼굴로 말끝을 흐린다. 운지와 나는 서로의 눈치만 살피다가 킥킥거렸다. 그러자 미영이 그런 우리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소리쳤다.
“왜? 그 방법 좀 배워서 내 오랜 염원을 이뤄보겠다는데?”
그러자 운지가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지 입을 가리며 어렵게 대답했다.
“사내를 홀리는 방법이야 많지요. 그러나 사내들도 여인들과 마찬가지랍니다. 마음에 둔 여인이 홀릴 때만 넘어오게 되어 있어요. 혹 마음에 두지 않은 여인이 홀려도 잠시만 그 여인 주변을 기웃거릴 뿐, 결국 자신의 정인을 찾아가게 되어 있답니다.”
“그럼 운지는 내가 세자저하의 마음을 얻는 게 불가능하다는 거야?”
“불가능하다기보단, 일단 그나마 쉬워 보이는 걸 먼저 하시는 게 어떨까요?”
“쉬워 보이는 것이라니?”
“임해군마마의 마음부터 사로잡아보시는 거예요. 임해군마마께서 전각 나인을 첩으로 들이신 적도 있다면서요?”
“뭐어?! 운지!”
미영이가 운지에게 달려들더니 간지럼을 피우기 시작했다. 티격태격하며 장난치는 그녀들을 보며 나는 계속 소리 내어 웃었다. 한참을 웃다보니, 낮에 혼이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미녀 서시와 요녀 달기. 그럼 혼이 한 말의 의미는, 내가 서시라는 걸까? 달기라는 걸까? 뭐, 간단하게 생각하면 이렇다. 내가 서시가 되면 일단은 좋은 거고. 달기라고 하면…… 내가 그를 홀렸다는 말일까? 내가? 언제?
그때 지나가는 찬바람에 닫힌 방문이 덜컹거렸다. 잠시 그 쪽을 돌아본 나는 나도 모르게 닫힌 문 밖 너머를 멍하니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빨리 눈이 왔으면 좋겠다.”
유오디아 작가의 말
작가 블로그
눈은 무싱... 요즘은 더워죽갔구만.
광해의 연인 관련상품
eBook
광해의 연인
다음화 미리보기
종이책
광해의 연인 1 책
구매하기
별점
9.9
3,260 명의 회차별점입니다.
별점주기
좋아요 39
관심등록SNS 보내기
이전화
다음화
목록
댓글 756 새로고침
0 / 500미투데이 동시 등록하기페이스북 동시 등록하기트위터 동시 등록하기SNS 설정
최신순등록순
꿈의나라 (jjan****) 2013-08-11 22:51 |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