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메밀꽃 필 무렵(4)
흰색
“너무 좋아서…….”
거짓말.
“답답한 궁궐에만 있다가……. 이런 데 오니까 너무 좋아. 고마워 혼아.”
나를 붙잡은 그의 손을 밀어내고 돌아서서 다시 눈물을 닦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을 밀어내려 하자, 내 손목을 붙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거짓을 말하고 있구나.”
“혼아?”
“오늘…….”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잠시 주저한다. 뭔가 말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말하려는 듯 주저한 것이다. 나는 흐르기 시작한 눈물도 닦지 못한 채 그의 시선을 쫓았다.
“오늘 양화당에서의 일이…… 너를 이리도 힘들게 만들었던 것이겠지?”
걱정 끼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눈물이 멈추지 않아.
“아니야. 절대 그건 아니야! 인빈마마가 요즘 기분이 안 좋아 종종 나인들을 잡아. 아무나 잡는데 하필 오늘 내가 딱 걸린 거야! 내가 양화당 생활 벌써 한 해가 다 가는데! 설마 그것 갖고 내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혼의 자신의 품 안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이상했다. 말에 탔을 때도 그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지금은 마치, 그와 하나가 된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그만큼 혼은 나를 힘주어 끌어안고 있었다.
“너를 지켜주겠다고 마음먹었던 내 자신이 이토록 미울 수가 없구나.”
“혼아?”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궐에서……. 어찌 너를 지켜주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것인지!”
울고 있는 건 나인데, 분명 눈물이 흐르고 있는 건 나인데…….
나는 내 아버지 묘소에서 내려오던 길에 혼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궐을 숨조차 쉬기 어려운 곳이라고 내게 말했었다. 늦게나마 나는 그 의미를 깨달았다.
역사에서는 고작 16년이라고 말해진다. 광해군은 16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었다고. 그러나 그는 그 16년 동안 명나라에서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공연히 아버지 선조의 비난을 받아야 했고, 7살이나 어린 새어머니의 등장과 적통대군인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세자의 자리를 위협받았다.
책에서는 고작 한 줄로 끝날 이 이야기들이, 그에게는 자그마치 16년이었다. 1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이겨내 왔던, 그리고 앞으로도 이겨내야만 하는 세월을 생각하면 내가 겪는 어려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결심했다. 정말로 친구가 필요한 그에게 친구가 되어주자고. 시간이 흐르면 그를 좋아하는 내 마음도 자연히 사라질 테니, 그때는 정말 마음까지도 친구의 마음이 되어서 그의 곁에 있어주자고.
나는 그의 품 안에서 한 걸음 물러서며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네가 날 왜 지켜.”
어쩌면 나보다도 눈물을 흘리고 싶어 했을 그를 위로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앞으로도 친구로서 그의 힘이 되어주기 위해.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눈에 남아있는 눈물을 훔쳐내며, 혼을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나도 고작 나인이라 널 지켜줄 순 없겠지만, 대신 네가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언제나 네 옆에 있어줄게. 너의 친구…….”
‘……로서.’
나는 말을 다 끝마치지 못했다. 혼의 얼굴이 가까워진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깜빡거리던 내 두 눈 앞에 있는 건, 내 시야를 덮어버린 그의 갓이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아 있었다. 내가 그 감촉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혼의 얼굴은 다시 내게서 멀어졌다. 나는 정말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지금 내 입술에 닿았던 것이 혼의 입술이 맞기나 한 것일까?
“지금 무어라 말했느냐?”
혼이 묻는다. 완전히 경직되어버린 나를 태평하게 바라보는 혼은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는 얼굴이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를 바라보는 두 눈만 깜빡거리며 방금 전했던 말을 자동적으로 다시 꺼냈다.
“너의 친구로서…….”
그 다음 말을 생각해내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혼의 입술이 다시 한 번 내 입술을 찾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믿기지가 않았던 짧은 첫 번째 입맞춤과는 달랐다. 달콤함을 넘어 짜릿함이 느껴질 정도로 긴 입맞춤이었다.
두 번째로 그의 입술이 내게서 떨어졌을 때, 얼굴이 화끈거림을 넘어서 데일 듯 뜨겁게 느껴졌다. 혼도 이런 내 얼굴을 보고는 그 스스로도 부끄러운지 한 손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 헛기침을 하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디 다시 한 번 그 친구라는 소리를 해 보거라. 다시는 그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해 줄 터이니.”
그가 지금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설마…… 그날 밤 후원에서 혼이 말했던 친구가 아닌 다른 관계라는 건…….
“하지만 우린 친…….”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혼이 장난스레 되묻는다.
“무어라?”
나는 그의 입술이 다시 또 내게 입을 맞출까, 서둘러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혼은 그런 나를 보더니 큭큭거리며 웃었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 새침스럽게 돌아서려고 했다. 그러나 혼이 더 빨랐다. 내가 돌아서기 전에 내 손을 잡은 것이다. 내 손은 마치 어른의 손에 잡힌 어린아이의 손처럼 그의 손에 부드럽게 감싸 쥐어졌다.
“경민아.”
혼이 날 불렀다. 나는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시선만 겨우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혼은 미소 짓고 있었다.
“내가 왕이 된 후에 너를 내 빈으로 맞을 것이다.”
빈(嬪). 후궁 최고의 품계인 정1품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거절의 말도 그와 비슷한 그 어떠한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의 일방적인 고백이 내 마음을 사정없이 방망이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더 이상 친구가 아닌 사이. 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서도 남몰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여자로서의 자리를…….
“그리고 이것이 내가 말했던 너와 나의 새로운 관계이다.”
그는 요구했다. 그리고 통보했다. 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음으로써 암묵적으로 그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혹시라도 내가 거절이라도 할까, 조금은 불안한 기색을 보이던 혼도 시간이 지날수록 내 입에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자, 점점 그의 얼굴 곳곳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나는 여전히 그가 나에게 한 행동과 말들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건 우리 두 사람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메밀꽃의 향뿐이었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메밀꽃 향이…….
나루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말을 타지 않고 나란히 걸었다.
“이 옷은 쓸모가 없어졌구나.”
상당히 시간이 흘렀음에도 강에 빠졌던 장옷은 마르지 않았다. 혼은 말 등을 건조대 삼아 올려놓은 장옷을 한번 보더니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경민아. 네 입에서 나던 그 고약한 향은 무엇이었느냐?”
“향?”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손가락으로 서둘러 내 입술을 훑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세하지만 분명 약이 남아 있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그와 입을 맞추는 동안 난 그걸 느끼지 못했다.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나는 혼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 나와 입을 맞췄을 때, 약맛을 느낀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두 번씩이나!
“아프니까 당연히 약을 발랐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하는 날 돌아보며 혼이 소리 내어 웃는다. 대체 그는 내가 뭘 말하기만 하면 웃는 것 같다.
“웃지 마. 민망하니까.”
거짓말처럼 시원스럽게 웃던 그의 웃음이 뚝 그친다. 그에게 또다시 놀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번엔 심통난 내가 그를 공격했다.
“정월 초하루에 ‘초심’을 되찾기 전까지 나를 만나지 않겠다는 의미는 뭐였어? 그 ‘초심’은 되찾은 거야?”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은 우습다. 그때 나는 깨닫지 못했지만 혼을 좋아하고 있었고, 혼은 분명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그때 말했던 ‘초심’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지만, 아까의 일을 떠올리면 그는 그 ‘초심’을 어딘가에 던져놓고 온 게 틀림없다.
“그건 말이다.”
그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가 생각한 반응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그가 당황해하거나 그 말을 한 것을 미안해하길 바랐다. 아니면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그 말을 농담으로 돌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지금의 우리는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날 네게 말했듯, 처음에는 널 다시 만나면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네 아버지 묘소를 회령에서 경기로 옮긴 이유도 그것이었지. 널 다시 만나 내가 품었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앞을 보며 걷다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었는데, 나는 왠지 그 미소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려서, 결국 시선을 땅바닥으로 돌리고 말았다.
“널 다시 만난 후 네가 없는 곳에서도 널 떠올리면 웃음이 나더구나. 처음이었다. 한 여인이 계속해서 내 생각과 마음속에 머무르는 일은 말이다.”
혼의 말을 듣는 순간 세자빈 유 씨의 존재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정략결혼으로 혼과 맺어졌지만, 미영이가 전해온 궁궐의 소문에 의하면 사이가 좋다. 생각은 이런데 나오는 말은 전혀 딴 소리다.
“그때부터였어?”
‘나를 좋아한 건?’
그는 쑥스러운지, 아니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내가 안다고 생각했는지 미소로 답을 대신하더니 말을 이었다.
“정월초하루날, 넌 내가 널 그리워하는 것만큼이나 날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같더구나. 그래서 내 마음을 접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그러지 못한 것이다.
그때 나란히 걷던 나와 그의 손등이 살짝 맞닿았다. 그 순간 내 시선이 그의 손으로 쏠렸다. 내 손은 그의 손에 비해서 작은 느낌이었다. 1592년의 혼이 미래에 왔을 때는 그의 손이 이렇게 크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게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때 혼은 나와 동갑이던 17살이었다. 그 이후로 그에겐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너무 당연한데…….
그때의 그와 지금의 그는 다르다. 이제 혼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난 맞닿은 그의 손가락 하나를 장난스럽게 잡아당겼다. 그 장난에 그가 날 돌아보며 내 손을 잡는다. 갑자기 잠잠하던 가슴이 두근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본다니까.”
나루가 가까워지는 것은 틀림없었지만, 아직까지 길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만치 앞에 보이는 사람을 가리키며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다. 그런데 혼은 도무지 잡은 내 손을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하는 나를 보며 여유로운 미소까지 보인다. 장난치려다가 또다시 내가 당하고 만 것이다.
“놓으라니까.”
“네가 먼저 잡지 않았느냐? 내 손을 잡아보는 것이 그리 소원이라면, 내 원 없이 잡아보게 해주마.”
“안 잡았다니까.”
그때 어린아이들 여럿이 서로 장난을 치면서 우리의 곁을 뛰어서 지나갔다. 아이들의 등장에 혼도 찔끔했는지 그제야 잡았던 내 손을 놓아주었다.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춰 섰다.
“경민아.”
방금 전까지 장난을 치던 혼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린다. 그제야 난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궁궐로 돌아가면 너를 만나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것이 어려워지겠지.”
아쉬움이 가득담긴 그의 목소리가 내 가슴을 파고든다.
“네가 보고 싶어질 때마다, 나는 어찌해야 하겠느냐?”
나 역시 어떠한 대답도 줄 수 없는 질문을 그가 물어왔다. 나 역시 그의 마음과 같다. 최 내관 같은 믿을 만한 연락책이 우리들 중간에 있어야 하고, 매번 이처럼 낮에 궁궐 밖으로 나와 만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늘도 중전마마가 날 중궁전으로 부르셨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양화당 퇴선간이나 지키고 있어야 했었을 테니까.
혼이 왕이 되는 건 지금으로부터 6년 뒤. 난 정말 그가 오늘 내게 약속한 대로 그의 후궁이 될까?
만약 그것이 역사에 반하는 일이라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6년 뒤라면……. 이미 역사의 한 부분이 된 나에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 불안해하지 말자.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행복해야 할 많은 시간이 남았다. 그때까지는 즐거운 생각만 하는 거다. 혼의 곁에서 그의 힘이 되어줄 수 있도록.
난 혼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내가 가면 되지. 또 방법은 생각하다 보면 무슨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을까?”
혼도 내 미소를 따라 웃는다.
마냥 답이 없이 느껴지던 우리의 사이도 결국 이처럼 답을 찾았듯이, 함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도 분명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난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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