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해의 연인-31화 (31/110)

제31화. 국혼 날

흰색

의인왕후의 상이 모두 끝나고 혼이 행궁으로 돌아왔다.

이제 행궁은 국혼 준비로 분주해졌다. 그러나 양화당을 비롯한 여타 후궁들의 전각은 아니었다. 특히 의인왕후의 사망 이후에 후궁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양화당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마녀 인빈은 국혼을 앞에 둔 만큼 시끄러운 일을 안 만들려고 꽤나 고분고분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 주변의 나인들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그녀의 눈치를 보느라 조심하는 턱에 양화당은 매일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그 자체였다.

“후궁에 날아다니는 모든 새는 다 떨어뜨린다는 인빈마마셨잖아요.”

미영이는 혼이 환궁한 뒤로 부쩍 내 처소를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았다. 나는 그녀가 동궁전에도 들릴 겸, 내 처소로 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퇴궐하지 않는 운지는 우리의 대화를 조용히 들으며 구석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이제 인빈마마보다 서른 살이나 어린 상전을 모셔야 하잖아요. 그러니 그 속이 그 속이 아닐 텐데요.”

까르르 웃는 미영이를 따라 운지도 웃는다. 아마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궁 안의 어지간한 나인들은 다들 인빈의 추락을 고소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추락일까?

지금까지 그녀가 후궁에서 세도를 누렸던 것은 단지 미색 때문이 아니었다. 굳이 미색이라면 이미 그녀는 오래전부터 하향길에 들어섰다.

그런 그녀가 공빈이 죽은 뒤부터 지금까지 선조의 총애를 받았던 것은 네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공주를 낳은 데다, 선조의 속마음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작 주변 나인들의 이런 속내는 모르고 말이지.

“어린 중전마마가 총애를 다 독차지하시면 어떻게 되는 거죠?”

“총애보다는……. 네 말대로 서른 살이나 어린 중전마마께 고개 숙이는 인빈마마가 볼 만하겠는데?”

자업자득이다. 그러나 19살의 새 중전도 꽤나 고생할 것 같다. 거의 이모할머니뻘인 선조의 후궁들에게 인사를 받아야 할 테니 말이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오시는 길에 세자저하라도 뵈셨어요?”

바느질하던 운지가 미영이에게 건넨 ‘세자’라는 말 한마디에 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마치 뭔가 잘못한 것만 같은 기분이다. 특히 미영이에게 말이다.

“물론이지! 그리고 익위사 한 분이랑 친해졌어.”

“세자저하를 호위하는 익위사요?”

“응. 사실 저하를 엿보다 딱 걸렸거든! 그래서 사정 설명을 했지. 우리 멋지신 세자저하, 멀리서 지켜만 보는 거라고. 그랬더니 이해해 주던데?”

“그래도 익위사면……. 사내와 나인은 어울리면 안 되잖아요. 더구나 미영 항아님은 동궁전 나인도 아니신데요.”

“아이참, 괜찮다니까! 그분, 좋은 분 같았어. 그리고 나처럼 세자저하를 사모하는 나인들이 한둘이 아니래.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으신 게 아니라는 투로 이야기하던데?”

혼을 사모하는 나인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말에 갑자기 숨을 쉬는 게 어려워졌다. 따뜻한 봄이 찾아온 뒤로는 저녁에 처소에 불도 때지 않는데, 온몸이 불에 덴 듯 화끈거린다. 아니, 내 얼굴만 뜨겁다.

모든 게 다 남의 사정일 뿐인데, 왜 내게서 이런 반응이 오는지 모르겠다. 누가 혼을 좋아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아니지, 그를 만나면 주고받을 이야깃거리는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인기 많더라.’라고. 그럼 혼이는 뭐라고 말할까? 그냥 웃고 말겠지.

“그만 가봐야겠어요. 운지야, 나 간다.”

“또 오세요.”

“응. 그리고 가는 길에 또 동궁전을 지나가봐야지!”

오늘 혼을 보았다는 사실에 신난 미영이는 날아갈 듯한 걸음으로 내 처소를 떠났다. 나는 미영이가 나가자마자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운지가 묻는다.

“무슨 일이세요?”

“아니야, 아무것도.”

사실 운지에게 모두 말할 순 없지만 속상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멀리서나마 미영이는 혼을 봤다고 말한다. 그가 환궁한 후 거의 매일 같이 말이다.

그런데 그와 ‘친구’라고 말하는 난 뭐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에게 연락도 할 수 없고, 말도 주고받을 수 없는 친구.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는 시간은 그가 허락하는 시간 안에서만 가능하다.

불공평하지만 여긴 조선이니까, 그가 날 친구로만 생각해준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젠 나도 모르는 마음이 내 안에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 자신도 확신할 순 없지만.

***

선조의 가례 날은 초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더웠다.

가례는 왜란으로 인해 임시로 사용하는 이 행궁이 아닌 태평관(太平館, 조선시대 명나라 사신을 대접하던 영빈관)에서 치러졌다. 이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선조는 태평관으로 갔고, 행궁에는 가례를 마치고 선조와 함께 오는 새 왕비에게 인사를 해야 할 사람들로 분주했다. 그중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인빈이었다.

후궁들의 우두머리로서 서른 살이나 어린 새 왕비에게 인사를 올려야 하는 인빈은 당연히 아침부터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특히 그녀가 석어당에 심어놓은 심복이 ‘용안이 오늘따라 좋아 보이시고, 웃음이 끊이지 않으셨으며, 대전의 모든 나인들에게 상을 내리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욱 그랬다.

인빈이 어린 시절부터 곁에서 돌봤다는 정 상궁마저 뺨까지 얻어맞았다고 하니 인빈이 기분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나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인빈은 무엇을 먹을 기분은 아니었는지, 아침부터 점심까지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자연히 불 땔 필요 없는 퇴선간은 조용하다 못해 심심할 정도였다.

“넌 좋겠다. 아이구야.”

정 상궁의 옆에 있다가 인빈이 던진 반상에 이마를 맞았다는 양화당 지밀나인이 울먹이며 퇴선간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다시는 전각 안으로 발을 들이고 싶지 않다며, 정 상궁이 부를 때까지는 자신이 퇴선간을 지킬 테니 나보고 비켜달라고 했다.

마침 태평관에서 가례가 끝난 선조와 새 왕비가 행궁으로 온다는 소식이 들려와 나는 새 중전의 얼굴도 확인할 겸, 퇴선간을 지밀나인에게 떠넘긴 후 서둘러 정문으로 향했다.

“언니!”

임해군 전각도 할 일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정문으로 가는 길에 미영이를 만난 것이다.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국혼 날에 들뜬 우리는 팔짱까지 낀 채로 국혼이 치러지는 중심인 행궁의 서청(西廳)으로 향했다.

행궁의 정전이자 편전으로 사용되는 서청을 바라보기 좋은 장소인 뒷문 주변에는 이미 많은 나인들이 몰려 있었다. 뒷문 앞으로는 악사들이 대거 운집해 있었고, 덕분에 앞을 내다보기에는 좋아도 밖에서 문 안쪽을 들여다보기는 어려워 함부로 돌아다녀서는 안 되는 나인들이 구경하기에 최적의 장소임에는 틀림없었다.

이 때문인지 문 주변에 몰려든 나인들 중에는 소속 전각을 알 수 없는 상궁들도 몇 끼어 있었다. 그들도 새 왕비의 얼굴이 자못 궁금하긴 궁금한 모양이었다.

“세자저하다! 세자저하에요!”

미영이 갑자기 서청을 보며 외쳤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서청 앞에는 검은 면복 차림의 혼과 세자빈 유 씨로 보이는 여자가 아청색의 적의를 입은 채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이 입은 의복은 왕과 왕비의 대례복과 거의 흡사하게 보였다.

-뿌아앙아아앙!

선조와 새 왕비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우리가 서 있는 문 앞쪽에 앉은 수십 명의 악사들이 웅장한 궁중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혼에게서 잠시 눈을 떼고 정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선조와 새 왕비 김 씨가 나란히 서서 들어오고 있었다.

다소곳이 두 눈을 내리깐 채 길고 풍성한 다홍색 대례복 때문에 넘어지기라도 할까,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19살의 소녀. 나와 동갑이지만 훨씬 어려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무슨 죄인인 양 도무지 눈을 들어 앞을 내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51살의 선조는 아주 의기양양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조금 뒤 왕과 왕비는 세자와 세자빈이 기다리고 있는 서청 앞에 도착했다. 혼은 기다렸다는 듯이 두 손을 모아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맞이했다. 자그마치 자신보다 만 7살이나 어린 새어머니를 말이다.

선조는 뭐가 흡족한지 세자와 세자빈의 인사에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것이 예법에 맞지 않았는지 주변에 선 신하들이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선조의 웃음소리 때문이었는지 고개를 숙이고만 있던 19살의 새 왕비가 두 눈을 들어 올려 세자와 세자빈 쪽을 바라보았다. 혼 역시 그런 세자빈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다.

그때 난 알아차렸다. 혼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여리는 것을 말이다. 다른 이들이야 어린 새어머니를 보고 긴장한 아들의 태도로 치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결정되어 치르게 된 국혼에 그가 놀랄 이유는 없었다. 그런 그가 새 왕비의 얼굴을 보자마자 놀란 것이다. 이와 반대로 새 왕비의 태도는 달랐다. 그녀는 아주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태연스럽게 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새 왕비의 얼굴을 보고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2년 전, 중궁전 앞을 서성이던 혼 앞에 나타났던 처녀. 바로 그 처녀가 지금 새로운 왕비로 간택된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두 사람은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그런데 왜 혼은 그녀를 보고 놀라고, 그녀는 혼을 보고 놀라지 않는 것일까?

왕과 왕비가 서청에 들고 몇 차례 만세와 천세 소리가 오갔다. 그렇게 행궁으로 돌아온 후 첫 예식이 끝나고 왕과 왕비는 각자의 전각으로 가서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다. 이때 왕비는 처음으로 평생을 살게 될 중궁전에 첫 발을 디디게 된다.

다음으로 신하들의 하례가 이어졌다. 말 그대로 축하인사다. 이 자리에서 대답하는 건 오직 왕뿐이고, 왕비는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으면 된다.

이어 연회가 벌어지고, 그동안 왕과 왕비는 내전으로 들어가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후궁, 손자들의 공식 축하 인사를 받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후 왕실 가족들만 참석하는 연회가 따로 베풀어지고, 그 연회가 모두 끝마치고 나서야 신방에 들게 되는 것이다.

“다들 여기서 뭐하는 것이냐?!”

서청의 지밀상궁이 모여들어 구경 중이던 행궁의 나인들을 쫓아내기 위해 나왔다. 그 때문에 나는 미영이와 헤어지고 양화당으로 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그런데 양화당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궁전 최 내관과 여러 나인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 계시지?”

“이쪽은 찾아보았느냐?”

“예. 하오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저쪽으로 가 보거라! 어서!”

“예, 나으리!”

최 내관과 나인의 대화에서 혼이 거론되자, 나는 급히 어디론가 가려는 최 내관에게 다가갔다.

“최 내관 나리.”

그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고는 무슨 생각인지,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항아님? 혹시 세자저하를 보지 못하였나?”

“세자저하요? 세자저하라면 조금 전에 서청에 계셨잖아요.”

“그건 나도 아네. 그 이후에 보셨는지 말이네.”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최 내관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내게서 돌아섰다. 나는 그렇게 가버리려는 최 내관을 다시 붙잡았다.

“세자저하께서 어디 계신데요?”

“그것은 나도 모르네. 조금 뒤에 서청에서 하례식이 있는데, 누구보다도 먼저 당도하셔야 할 세자저하께서 사라지셨으니!”

“세자저하께서 사라지셨다고요?”

“지금 길게 말할 시간이 없네. 난 그만 가 봐야 하니, 혹 세자저하를 뵈면 동궁전으로 알려주시게나.”

“알았어요.”

최 내관이 가버리고 나는 멍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서청 앞에서 왕비를 마주한 순간 당황한 얼굴을 하던 혼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유야 모르지만 혼이 사라진 이유가 서청 앞에서 왕비와 마주쳤을 때 당황한 일과 연관이 있음을 직감했다.

행궁은 좁다. 그가 면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사라졌다면 어디에 있든 분명 한눈에 띌 것이다. 그렇다면 눈에 띄지 않는 장소는 어디일까?

짐작 가는 곳이 한곳 있었다. 물론 내가 짐작하는 그곳에 혼이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 발걸음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짐작한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행궁 후원.

정월초하루에 잠시 돌아왔던 혼과 재회했던 곳이다. 낮에도 가끔 나들이를 나선 선조의 후궁들이 종종 눈에 띄는 곳이지만, 국혼이 있는 오늘은 그 누구도 오지 않을 것이다. 왕실 사람들은 모두 조금 뒤에 있을 하례식에 참석하려고 한참 분주하기 때문이다.

정월초하루 밤, 혼을 만났던 바로 그 장소에는 사람의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홀로 남겨둔 채 사라졌던 후원 깊숙한 장소가 아직 남아있었다.

후원 깊숙한 곳으로 향하는 작은 길. 주변을 감싸는 아기자기한 꽃들이 가득한 그 길은 겨우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갈 정도로 아주 좁았다.

그 길을 따라 후원 깊숙이 들어갈수록 꽃들은 드문드문 보일 정도로 사라지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꼿꼿이 자란 대나무들이 숲을 이루며 길로 들어선 이를 맞이한다.

온통 대나무의 초록빛으로 물든 그 숲에서 면복 차림인 그를 발견하는 것은 어쩌면 매우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는 길을 벗어나 대나무 숲 사이에 서 있었던 것이다.

“혼!”

나는 바로 그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주저했다. 그것은 혹시라도 주변에 궁궐 나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이곳에서 그가 내게 말했던 ‘초심을 되찾을 때까지 나를 만나지 않겠다’는 말이 떠올라서였다.

‘그는 초심을 되찾았을까? 그에게 말을 걸어도 되는 걸까?’

나는 한참을 망설이며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혼을 응시했다. 그는 아주 깊은 사색에 잠긴 듯했다. 그리고 그 사색이 오로지 걱정거리로 가득한 것도 분명해 보였다. 그의 얼굴만 보더라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오늘은 국혼 날이다. 그는 아직 모르는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새 왕비는 대군을 낳는다. 그리고 그 대군은 그의 손에 죽게 된다. 이 일로 왕비 김 씨는 그를 평생의 원수로서 원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 기록된 분명한 사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를 전혀 알지 못하는 그에게 지금 고민이란 어린 새어머니의 등장일까? 언제 그녀가 낳을지 모르는 이복동생에 대한 걱정일까?

……아니다.

그런 것들은 그를 단편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이나 하는 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 그에게서는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해가 될 수도 있는 경우를 떠올리며 걱정하는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쓸쓸함과 외로움에 가깝다.

그것은 그가 홀로 있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그의 어머니 공빈 김 씨가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았더라면, 그는 세자가 되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공빈이 그의 중전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에게는 역사에 기록된 것과는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수많은 대나무 잎들이 바람에 춤을 추며 쏴아-쏴아- 빗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바람을 피해 고개를 돌리던 혼이 나를 발견했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 자리에 서서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먼저 나를 만나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내가 먼저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본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내가 서 있는 길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한다.

문득 나에게 다가오는 그의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길 위로 들어섰다. 바로 내 앞에 마주선 것이다.

정월 초하루의 그 날처럼 우리가 마주보고 선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나는 긴장된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나오게 될 첫마디가 너무나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또 한 번의 바람이 대나무 사이로 불어왔다. 그리고 혼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였구나.”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미소를 본 순간. 마치 엄청나게 큰 종이 내 귀 옆에서 울리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리고 그 큰 울림은 내 몸 전체를 흔들었다.

처음 대나무 사이로 서 있는 그를 보며 느낀 두려움, 긴장 그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내 몸을 흔들고 빠져나가며 온몸을 떨게 만들었다. 그것은 기쁨이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특별한 행복감. 그리고 그 행복감은 그가 준 것이었다. 단 한마디로, 단 한 번의 미소로.

마치 마법에서 풀리듯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혼이를…….

“저하.”

그때 갑자기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분홍 빛깔의 당의와 금실이 수놓아진 남청색의 치마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인빈에 버금가는 커다란 가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단번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세자빈 유 씨였다.

그녀는 세자와 가깝게 서 있는 나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몸을 숙인 채 혼의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빈궁.”

혼이 그녀를 부른다. 단지 그것뿐인데, 몸을 숙인 내 두 눈이 따끔거리며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신첩이 얼마나 찾았는지 아시옵니까? 서둘러 서청으로 가셔야 합니다. 그 전에 의복을 갈아입으셔야지요.”

“근심을 끼쳐 미안하오. 내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 이곳에 있었소.”

걱정하는 기색이 완연한 세자빈의 목소리. 이에 상응하는 미안한 마음이 느껴지는 혼의 목소리.

밀물이 일듯이 갑자기 깨달은 내 마음이 혼란스러움에 너무나도 아프다. 그랬다. 혼을 향한 짝사랑을 품은 미영이의 마음에 미안함을 느꼈던 것은 내가 혼과 친구사이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만 들어도 두근거리고 불안함을 느꼈던 것도 내가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것 때문이 아니었다.

난 혼이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알 수가 없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생겨난 마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서 가시지요.”

세자빈의 말에 혼은 그 자리를 떠났다. 당연한 것이다. 세자빈은 우리의 사이를 모를 테고, 굳이 바쁜 와중에 설명할 이유가 없었다. 세자빈 앞에서 나를 아는 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한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는데…….

마음이 아프다. 너무 아파.

“너는 누구냐? 동궁전 아이가 아닌 듯한데?”

혼을 먼저 보내고도 그의 뒤따르지 않고 서 있던 세자빈을 날 향해 묻는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금방이라도 떨어지려는 눈물을 참으려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

“소인은 양화당의 나인이옵니다.”

“양화당?”

의외라는 듯 세자빈이 반문한다. 그럴 수밖에. 혼의 어머니인 공빈은 살아있을 적부터 인빈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 영향으로 혼과 인빈의 사이가 가깝지 않다는 것은 선조도 아는 사실이다.

세자빈은 잠시 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급한 용무가 떠올랐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묻지 않은 채 그곳을 떠났다.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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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시선을 회피하며) "전 빈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요?" [ 광해군은 13살인 1587년(선조 20) 12살의 유씨와 혼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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