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해의 연인-30화 (30/110)

제30화. 마마에 걸리다(2)

흰색

꿈을 꿨다.

이름 모를 새하얀 꽃들이 가득한 꽃밭이었다. 그 꽃밭 한가운데 갓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뒷모습만 보여서, 그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꽃밭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그 사람에게 천천히 한 발 한 발 다가가던 어느 순간 아주 강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꽃들을 한번 쓸었다가 일으켜 세우고는 사라졌다. 이내 바람은 서 있는 남자에게로 가 닿더니 입은 도포자락을 펄럭이게 만들었다.

도포는 물론이고 쓰고 있던 갓까지 벗겨질듯 흔들리자, 그 사내가 한 손으로 갓의 끝을 고정시키듯 붙잡았다. 그때였다. 그가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내가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난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그 사람은 바로.

“혼아.”

내 입에서 혼의 이름이 나온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누군가의 두 팔에 안겨 있었다. 나는 나를 안고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길게 내려온 갓끈이었다. 그 갓끈 위로 코의 중간부터 턱 아래까지 흰 천으로 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가리개 위로 차갑게 굳어있는 두 눈과 마주했다. 그는 다름 아닌 정원군이었다.

“정원군마마?”

그의 존재를 확실히 알아보게 되고, 그제야 주변에서 고통에 흐느끼는 궁녀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내가 옮겨진 창덕궁의 전각이 틀림없었다. 그런 곳에 정원군이 와 있었다. 그것도 나의 상체를 끌어안아 그의 품에 몸을 편히 기대게 하고 있었다.

정원군은 힘주어 눈을 뜬 채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어쩌면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리개 뒤로 감춰진 그의 나머지 얼굴 때문에 나는 그가 말을 하려고 시도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항아님!”

운지였다. 그녀는 퉁퉁 부운 눈을 한 채 내 얼굴 가까이로 고개를 숙였다.

“정신이 드세요? 제가 누구인지 알아보시겠어요?”

운지의 두 눈에서 작은 알갱이만 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운지는 정원군의 존재를 의식했는지, 이내 옷깃으로 눈물을 훔치며 뒤로 물러섰다. 그때 정원군의 손이 내 이마에 닿았다. 이상하리만치 정원군의 손이 차갑게 느껴졌다.

“아직 미열이 있군. 운지야, 가서 약을 더 달여오거라.”

“예, 정원군마마!”

운지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 나가버리자, 나는 정원군을 향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어떻게……. 여기에…….”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목에서 따끔거리는 통증이 전해져 왔다.

“아무 말 마시오. 지금은 쉬어야 하오. 조금 뒤에 행궁에서 허 어의가 올 거요. 허 어의가 말하길 지금 운지가 달이는 약을 수시로 먹어야 한다고 했소.”

허 어의라면 아마도 허준을 말하는 게 틀림없다. 지금 내의원에서 허 씨 성을 가진 의원은 허준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했다. 허준은 왕의 어의다. 두창이 퍼지든 말든 그는 항시 왕의 곁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허준이 어떻게 이곳에 온다는 것일까?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정원군의 입에서 나오는 운지의 이름이 왠지 낯설게 들리지 않는다. 그의 입에서 운지라는 이름이 매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예전에 운지는 정원군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었다. 게다가 나인도 아니고 일개 무수리와 정원군이 통성명을 하며 알고 지낼 처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정원군이 어떻게 운지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운지를…….”

이번에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원군이 내 말을 끊었다.

“운지 그 아이가 그대가 창덕궁으로 옮겨진 사실을 내게 알려왔소.”

‘운지가 알리다니?'

그것도 정원군에게 말이다.

물론 운지는 내가 정원군의 전각에서 보모상궁으로 있었다는 걸 알고는 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원군에게 달려가 내 상태를 알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운지는 무수리다. 자신이 뵙고 싶다고 해서 정원군을 마음대로 뵐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운지는 수라간 소속 무수리였다. 지금에야 운지의 상전이 되는 내가 양화당으로 옮겼지만, 이상하게도 운지는 다시 수라간 소속으로 돌아가지 않고 내 소속 무수리로 남았다. 난 굳이 그 점에 의문을 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정든 운지와 헤어지지 않게 된 게 잘되었다고만 생각했을 뿐.

정원군을 응시하며 눈으로 물었다. 운지와 그에 대해서 말이다. 아니, 묻고는 있지만 어느 정도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내가 수라간으로 가게 된 것은 정원군이 인빈에게 부탁해서였다.

‘설마.’

내가 결론을 내기 전 운지가 약을 달여 안으로 들어왔다. 정원군이 운지에게서 막 끓인 탕약을 받아들더니 자신이 직접 내게 먹이려는 듯 수저까지 운지에게서 받았다.

그는 탕약을 한 수저 뜨더니 그것을 입으로 직접 불어 내 입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그러자 정원군이 화가 난 얼굴로 내게 소리쳤다.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몸이 아픈 상황에서 쓸데없는 고집을 피운다는 걸 나도 잘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 사이에 내가 모르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최대한 두 눈에 힘을 주어 정원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운지를…… 아는 거예요?”

그러자 그의 옆에서 탕약 그릇을 받쳐 들고 있던 운지가 당황한 얼굴로 바뀌었다. 나는 그런 운지의 얼굴을 보며, 내 예상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정원군도 잠시 운지 쪽을 쳐다보더니,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운지는…… 내가 그대의 곁에 붙인 아이요.”

‘역시 그랬구나.’

정원군을 처음 본 날, 운지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척했다. 그렇다면 그것도 모두 둘이 짠 것일까? 생각해보니 그날 내가 운지에게 그가 정원군임을 가르쳐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지는 왜 정원군이 일개 나인의 처소에 직접 찾아왔는지를 묻지 않았다. 그때 내가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건 내가 정원군 전각에서 보모상궁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운지가 알고 있어서라고만 생각했다. 그랬는데…….

“모든 게 다 그대를 위해서였소. 또한 운지가 아니었다면 오늘 같은 일이 그대에게 일어났음에도 나는 전혀 몰랐을 것이오. 자, 그러니 어서 이 약부터 드시오. 어서.”

간청하듯 정원군이 나를 설득했다. 나는 두 눈을 무겁게 감았다 뜨고는 정원군이 주는 탕약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지금으로써는 몸이 먼저 나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낫고 나서 정원군과 운지의 문제를 시간을 두고 다시 곰곰이 생각해볼 생각이었다.

정원군이 일일이 불어가며 주는 약을 거의 다 먹었을 때였다. 뒤늦게 의녀가 한 명 들어오더니 당황한 듯 정원군 앞에 엎드리며 말했다.

“정원군마마! 소인이 하겠사옵니다! 어찌 마마께서 직접 하시옵니까?!”

그러나 정원군은 그런 의녀가 있는 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무심하게 대꾸했다.

“거의 다 되었으니, 너는 다른 나인들이나 살펴 보거라.”

“하오나, 정원군마마! 이곳은 병자들이 거하는 전각이옵니다. 그러니 행궁으로 돌아가시지요.”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러나 의녀는 좌불안석이었다. 아무래도 정원군이 계속 이곳에 있다가 두창이라도 걸리면 그녀에게도 죄가 돌아올까 겁이 난 모양이었다. 그런데 보니 의녀도, 운지도 입에 마땅한 가리개를 하고 있지 않았는데 정원군만 하고 있었다.

운지는 이미 두창을 한 차례 치렀다고 했고, 두창 환자들을 돌보는 의녀 역시 전에 두창에 걸려본 적이 있던 의녀만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말은, 가리개를 하고 있는 정원군은 두창에 걸린 적이 없다는 말이 된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놀란 마음에 막 정원군이 입에 넣어준 약을 기침과 함께 뱉고 말았다.

“콜록! 콜록! 콜록콜록!”

내 입에서 나온 탕약은 입 주변을 타고 흘러 정원군의 소매 옷깃을 적셨다. 운지도 이것을 보더니,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듯 나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되었다.”

그는 단번에 운지의 청을 거절하더니, 깨끗한 천으로 내 입 주변을 세심히 닦아주었다. 나는 그런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행궁으로 돌아가세요…….”

“아무 말 마시오. 내가 어찌 이런 그대를 두고 행궁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이오?”

그의 눈에 내 상태가 썩 좋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건 일단 둘째 치고라도, 고집을 부리는 정원군 때문에 의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간다. 약을 다 먹이고 나자, 정원군은 다시 나를 이부자리에 눕혔다. 그러더니 운지를 돌아보며 말한다.

“행궁에서는 아직 기별이 없느냐? 벌써 축시(새벽1~3시)가 다 된 것 같은데, 왜 아직도 허 어의는 오지 않은 것이냐?”

“아마도 전하께서 침수 전인 듯싶습니다. 허 어의께서 전하께서 침수 드신 이후에 온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지요.”

그저 무수리인 줄 알았던 운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너무나도 낯설게만 느껴진다. 대체 그녀의 정체가 무엇일까? 그저 정원군이 보낸 무수리가 아니다. 지금 그녀의 대답은 무수리들이 사용하는 말투와는 거리가 멀다.

“안 되겠다. 허 어의가 도착할 때까지, 내의원의 다른 의원이라도 불러야겠다. 답답하여 이대로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할 수가 없구나.”

정원군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갔다. 의녀도 그런 정원군의 뒤를 따라 나가자, 운지가 내 곁을 살폈다. 약기운 때문인지 나는 잠이 쏟아졌지만, 애써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뜬 채 운지를 올려다보았다. 운지는 그런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왜…… 거짓말했어?”

“항아님, 용서해주세요. 정원군마마의 명이셨어요.”

“그분이 네게 뭘 하라 했는데…….”

“딱히 무엇을 하라고 하시진 않으셨어요. 그저 항아님의 곁에서 시중을 들라고 하셨을 뿐이에요.”

“내가 아파서…… 바로 그 분에게 가서 알렸어?”

“어쩔 수가 없었어요. 창덕궁으로 옮겨진 나인들은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하잖아요? 항아님이 큰일 날까 봐 걱정되었어요.”

운지가 정원군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일단 무시하고 보더라도, 날 걱정해주는 건 진심인 것 같았다. 그녀의 눈가를 적신 눈물 자국만으로도 충분했다. 단지 조금 속상한 건,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주었어도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에서 오는 아쉬움이었다.

‘그녀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겠지…….’

“정원군마마께서 창덕궁에 오신 지는 얼마나 되신 거야?”

“두 시진 정도 되셨어요. 처음 항아님이 이곳으로 옮겨졌을 때, 바로 오셔서 상태를 보시고는 다시 행궁으로 직접 가셔서 허 의원님께 처방을 받아오셨어요. 그 뒤에는 항아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직접 약을 먹이셨고요.”

“직접? 계속?”

“네. 어찌되었든 정말 다행이에요, 항아님. 처음에 상태가 너무 안 좋으셨어요. 열이 얼마나 높으셨는지……. 정원군마마께서 계속 항아님께 약을 먹이셔도 열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이곳에 있던 어떤 의녀는 항아님이 오늘 안에 죽을 거라고 말했다가 정원군마마께서 불같이 화를 내셔서 바로 내쫓겼어요. 전 정원군마마께서 그리 화를 내시는 건 처음 보았어요.”

나를 향한 정원군의 마음은 모두 정리가 되었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길 바랐다. 만나지 못한 몇 달의 시간동안 그가 나를 완전히 잊어주길 바랐다.

그런데…… 운지를 보니 알 것 같다. 나는 그를 보지 않고 살았다고 여겼지만, 그가 보낸 운지가 늘 내 곁에서 함께 하고 있었고, 그처럼 그는 늘 내 주변 어딘가에 있었던 거야. 난 그걸 몰랐을 뿐이고.

“그런데 항아님.”

운지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얼굴로 날 내려다본다.

“‘혼’이 누군가요?”

운지의 입에서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혼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놀라고 말았다.

“왜 갑자기 그 이름을…….”

“역시나…… 사람의 이름이었군요.”

조금 전 정원군의 말처럼 열이 남아있어서인지 머리가 콕콕 쑤셔온다. 아니면 괜히 운지가 귀찮은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신경이 쓰여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정원군마마께서 항아님께 약을 먹이기 시작하셨을 때, 그 이름을 중얼거리셨어요. 전 그래서 항아님께서 정신이 돌아오신 줄 알았는데 아니셨고요.”

“내가…… 그 이름을 말했다고?”

“네, 몇 번씩이나요. 전 그때 정원군마마의 옆에 앉아 있었지만 똑똑히 들었는걸요. ‘혼아’라고 말씀하신 것을요.”

***

내게 찾아왔던 두창은 정확히 열흘이 지나고 나서야 완전히 날 떠났다. 같은 시기 한성에서도 두창이 완전히 물러간 듯했다.

내가 창덕궁에서 머무르는 동안 정원군은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를 찾아와 내 상태를 살폈다. 그는 세심하고 꼼꼼하게 내가 매일 먹는 약의 양을 챙기고, 어떤 날은 선조의 곁을 지키다 퇴궐하는 허준을 직접 데리고 와서 날 진맥하게 했다.

이런 정원군의 정성에 나보다도 더욱 감동한 것은 내 곁에서 지켜본 운지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정원군을 알게 된 이전의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았다.

“전 사실 남원 고을의 한 반가의 고명딸로 태어났어요. 덕분에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의 많은 애정을 받았지요. 그런데 집안이 역모에 휘말리게 되면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었는데, 다행이 유모의 딸로 위장하여 살아남아 사노비가 되었지요. 왜란이 일어난 후 노비의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을 쳤어요. 그렇지만 왜란 중에 여인 된 몸으로 지낼 곳도 음식을 먹을 곳도 없었고, 마지막에는 한성부의 관기가 되고 말았어요. 관기로 지내던 때에 정인을 만나 지금의 두 아이를 낳았고 관기임에도 불구하고 절개를 지키며 지내고 있었지요.”

“정원군마마는 어떻게 알게 된 거니?”

운지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 어떤 높으신 분께서 저를 아들들과 떼어놓아 첩으로 들이려 하셨고, 절개를 지키기 위해 아이들과 한밤중에 도망을 쳤지요. 그러다가 막다른 곳에 이르러 우연히 정원군마마와 마주치게 되었어요. 그 분이 뉘신지도 모르고 무작정 매달려 사정했어요. 정원군마마께서는 제 사정을 모두 들으시고는 외거노비(外居奴婢, 관아 밖에서 거주하는 노비)로서 아들들과 함께 살면서 궁궐에서 무수리로 일하게 해주셨어요. 절개를 지키고 살 수 있게 길을 주신 거죠. 그러다가 지난 해 항아님께 보내신 거고요.”

“정원군마마께서는 모든 사실을 아시는 거야?”

“정원군마마께서 아시는 것은 제가 한성의 관기 출신으로 절개를 지키려 한다는 것뿐이세요. 제가 반가의 여식이고 역모와 관련 있는 집안 출신이라는 것은 모르세요.”

“그랬구나.”

정원군은 다른 마음이 있어서 운지를 내 곁에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운지가 믿을 만한 여인이라고 여겼고, 말 그대로 나를 곁에서 충성스럽게 모실 사람이라고 여기고 보낸 것이었다. 그러니 이 모든 사실이 드러났다고 해서 운지를 내보낸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지야.”

나는 운지의 두 손을 잡았다.

“네 말을 모두 믿어. 하지만 앞으로도 내 곁에 있고 싶다면 지난 번 일처럼 내가 아프다고 해서, 또는 내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해서 제일 먼저 정원군마마께 가서 알리거나 하면 안 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운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겠어요.”

“괜찮겠어? 정원군마마의 명으로 내 곁에 있었던 거잖아.”

“괜찮아요. 안 그래도 정원군마마께서 며칠 전 제게 말씀하셨어요.”

“말씀하셨다니?”

“만약 항아님께서 제가 정원군마마가 보냈다는 이유로 저를 내보내시려 하신다면, 저는 더 이상 정원군마마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운지는 정원군에게 있어서 믿을 만한 사람. 그런 충성된 사람을 내게 보내겠다는 말이었다. 정원군은 알고 있었다. 운지가 그가 보냈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상 내가 운지를 예전처럼 계속 곁에 둘 것인지, 아니면 내보낼 것인지 결정하게 될 것이란 걸. 그러나 그는 운지가 내 곁에 남기를 바랐다. 자신과 운지의 인연이 끊어내더라도 말이다.

그는 그만큼 나를 위하고 있다. 지금 곁에 있지 않음에도 그런 그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져 온다. 그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되었던 그때의 모습 그대로.

창덕궁에서 행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인빈에게 불려갔다.

양화당의 궁녀로 있으면서도 퇴선간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인빈을 대면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때문에 이번 인빈과의 대면은 거의 반년 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인빈은 변해 있었다. 살이 빠진 듯 얼굴은 전보다 핼쑥해 보였고, 마치 며칠 잠을 자지 못한 듯 얼굴은 파리했다.

나는 정 상궁의 안내를 받아 인빈이 정면으로 보는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러나 곧 정 상궁의 눈치로 몸을 납작 엎드렸다. 인빈은 먼저 정 상궁을 물린 후, 나와 단둘이만 남은 자리에서도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이런 나를 두고 잠에라도 빠진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지만, 괜히 인빈의 짜증을 불러올까 시선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침묵을 깨고 인빈이 말했다.

“차라리 네 년이 마마에 걸려 죽었더라면 내 속이 더 편안했을지도 모르겠구나.”

인빈의 목소리에 한숨이 묻어나왔다.

“고개를 들거라.”

나는 그녀의 말에 따랐다. 그러나 그녀와 시선을 마주칠 수는 없어서, 괜히 이곳저곳 다른 곳을 쳐다보며 시선을 돌려댔다. 인빈은 그런 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말했다.

“복도 많은 계집이구나. 순화군의 여식은 곰보가 되었다던데, 네 년은 오히려 더 안색이 좋아 보이니 말이다.”

“모든 것이 마마의 덕입니다.”

“내 덕?”

대충 아부라도 떨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꺼낸 말이 화근이 된 것 같다. 돌아오는 인빈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인빈이 앙칼진 웃음을 터트렸다.

“내 덕? 내 덕이라고? 이 계집이 나를 정녕 놀리려는 게로구나!”

그러더니 인빈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내게 호통 쳤다.

“네 년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아느냐? 나뿐만 아니라, 내 아들까지 죽게 만들려고 네 년이 작정하지 않은 이상에야!”

“예?”

“하찮은 퇴선간 나인인 네 년이 마마에 걸려 죽어간다 하여 정원군, 내 아들이!”

그녀는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조금 뒤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내 아들의 첩이 되길 거부한 건 너다. 나인이 되고 싶다 했지. 그래서 내 덕을 베풀어 그리 해주었다. 그런데 나인이 되니, 내 아들에게 미련이 남더냐?”

“그럴 리가요. 전 나인이 되어서 좋은 걸요. 나인이 되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요.”

“그래? 그리 말하면서 두창에 걸려 다 죽어갈 때, 내 아들을 그리 곁에 붙들어 두었느냐?”

정원군이 두창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두창에 걸렸을까 봐 인빈은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내가 그를 불러서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입장에서라면 충분히 이해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혹시 정원군이…….

“정원군마마께서 아프신 건 아니죠?”

“허!”

어이없다는 듯 웃던 인빈이 손을 부르르 떤다.

“아프다? 내 아들이 아프길 바라였느냐?”

“그게 아니라!”

“잘 들어라. 네 년이 죽어간다고 정원군이 네 년 곁을 지키며 허준을 창덕궁까지 불렀다지? 고작 나인 하나 때문에 말이다. 이 사실이 전하의 귀에 들어가면 어찌 되는 줄 아느냐!”

인빈이 흥분으로 거칠어졌던 숨을 가다듬으며 내게 말했다.

“넌 정식으로 나인이 되었다. 또한 양화당의 나인이지. 다른 말로는 넌 전하의 여인이기도 하다. 물론 너 같은 하찮은 계집이 평생 전하의 얼굴을 뵐 일은 없겠지. 그러나 잘 들어라. 혹여 너와 정원군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전하의 귀에 들어가게 될 시, 네 목숨은 없는 것이다. 알겠느냐?!”

인빈의 말대로다. 원칙적으로 모든 궁녀는 왕의 여자다. 물론 나 같은 퇴선간이나 지키는 나인에게는 왕의 여자라는 말이 허울 좋은 이름뿐인 것이긴 해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 왕의 여자인 나인이 왕자인 정원군과 소문이라도 난다면? 정원군은 아버지의 여자를 건드린 파렴치한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땐, 내가 죽는 것뿐만 아니라 정원군도 죽을 수 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닥쳐라! 어디서 함부로 그 주둥아리를 놀리는 것이냐? 내가 내 아들 속도 모를 것 같으냐? 왜 내가 널 보기 싫은데도 내 곁에 두었겠느냐? 잘 들어라. 두 번 다신 정원군의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내 귀에 쓸데없는 소문들이 들려왔다가는, 네 년을 요절내고 말 것이야.”

이를 갈며 인빈이 내게 말했다. 새삼스럽지만 인빈은 ‘마녀’가 분명한 것 같다.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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