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마마에 걸리다(1)
흰색
새해를 보낸 혼은 다시 건원릉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건원릉행이 될 터였다. 날이 따뜻해지고 완연한 봄이 찾아오면 의인왕후의 3년 상이 모두 끝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는 다시 이 행궁으로 돌아올 것이다.
정월초하루에 그와 후원에서 만나 대화한 일만 아니었다면, 난 그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아직도 나는 그가 말했던 ‘초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다. 분명한 건 그가 나를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루하루가 갈수록, 날이 따뜻해지며 봄이 다가올수록, 나는 말수가 적어지고 생각만 늘었다.
도무지 혼의 속은 알 수가 없다. 그의 속마음을 창문처럼 열어서 볼 수만 있다면 열어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애초에 조선의 세자인 그와 궁녀가 되어버린 내가 친구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일까? 그러나 나는 시대적 불가능을 모두 넘어섰다고 믿었다. 그 누구보다도 세자인 그가 이를 받아들여줬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와 재회 후 이어진 몇 번의 만남 속에서 우리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벽을 깨달았다. 그 벽은 우리가 처음 만난 후 다시 만날 때까지 그에게는 ‘10년’, 나에게는 단지 ‘2년’만 흘렀다는 데서 생기게 된 벽 같았다.
“휴우…….”
최근 들어 혼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쓸데없는 한숨만 는다. 내 스스로 그것을 인지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지 못하는 동안에는 얼마나 셀 수도 없이 많은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일까?
오죽했으면 퇴선간엔 며칠에 한 번 스치듯 지나는 정 상궁도 양화당에 복 나간다면서 한숨 좀 그만 쉬라고 타박했다.
정 상궁이 그렇게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요즘 양화당은 겉으로는 평온한 듯 보이지만 안으로는 술렁이고 있었다. 행궁 최고의 안주인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고 있던 ‘마녀 인빈’이 짜증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의인왕후의 상이 끝나면 곧바로 국혼이 있을 것이고, 인빈보다 어린 여자가 중궁전에 들어앉게 생겼으니, 선조의 아들을 셋씩이나 낳아주고도 중전이 되지 못한 그녀로서는 한이 단단히 맺힌 듯하다. 괜히 쓸데없는 핑계를 만들어 정 상궁을 비롯한 주변에 보이는 양화당 나인들을 걸핏하면 들들 볶아대곤 했다.
그런 인빈이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녀의 손자인 종이가 인조가 되고, 이후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조선의 왕은 모두 다 그녀의 직계 자손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오늘도 정 상궁님께 꾸지람을 들으셨어요?”
운지가 내 처소 정리를 끝내고는 끓여온 찻물을 내 옆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왜?”
“한숨이 느셔서요. 뭐, 제 천한 귀로 주워 담기로는 요즘 후궁전마다 다 한숨바람이라고 하더라고요.”
꽃다운 나이의 새 중전마마가 들어오니, 새 중전보다 나이가 많은 후궁들에게서는 한숨이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다. 나는 이를 알면서도 일부러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이제 곧 국혼이잖아.”
“그럼 세자저하께서도 돌아오시는 건가요?”
“뭐?!”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갑자기 운지의 입에서 튀어나온 ‘세자’라는 단어에 나는 눈에 띄게 움찔했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세요?”
“그, 근심? 근심은 무슨? 내가 왜?”
“한숨이 느신 게 정 상궁마마님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신 것 같아서요.”
사실 정 상궁의 타박은 구박에 속하지도 않는다. 그 순간만 기분 상하지, 돌아서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다. 내 머릿속에는 곧 혼이 돌아온다는 사실로 꽉 차 있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정 상궁의 타박은 내 머릿속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한다.
사실 혼이 환궁한 뒤의 일을 매일 같이 걱정하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를 다시 만나기를 바랐다. 그래야 둘 사이에 쌓인 오해를 친구로서 툭 터놓고 풀기라도 하지. 스마트폰도 없는 이 세상에서 친구 사이의 문제는 얼굴 보며 직접 대화로 푸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는 세자이고 나는 일개 나인이기 때문에 그가 먼저 만나려 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답 없는 문제를 껴안고 있으니 한숨만 늘어날 수밖에.
“곧 국혼이잖아. 그러면 일이 많아질 것 같아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국혼에 양화당이 바쁠 리가 없다. 일이 줄다 못해 썰렁해질 텐데…….
거짓말을 한 것이 얼굴에 드러나기라도 할까 봐 신경이 쓰이는데, 때마침 운지가 끓여놓았던 차를 찻잔에 따라 내게 건넸다. 그것을 냉큼 받아 얼굴을 조금이나마 가릴 겸, 목도 축일 겸 천천히 불어가며 마시려고 했다.
“그래요? 그런데 요즘 미영 항아님은 정말 좋아보이세요. 아무래도 세자저하께서 곧 돌아오시는 것 때문…….”
-탕!
그대로 내 손을 떠나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찻잔. 다행이 단단한 자기라 그런지 깨지지는 않았다. 단지 뜨거운 찻물 일부가 내 치마를 적셨다.
“어머나, 항아님! 괜찮으세요?”
“난 괜찮아, 미안. 내가 치울게.”
“아니에요. 가만 계세요. 세상에, 치마를 갈아입으셔야겠어요.”
운지가 쏟아진 물을 치우기도 전에 먼저 내 옷부터 챙겨준다. 그런데 물을 쏟은 게 그렇게 민망한가? 왜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리지?
내가 치마를 갈아입는 사이 내가 벌인 일을 말끔하게 뒷수습한 운지가 나를 보며 걱정스럽게 묻는다.
“얼굴이 빨가세요. 혹시 열이라도 나시는 거예요?”
“열은 무슨. 난 괜찮아.”
“그래도요. 조금이라도 열이 나시는 것 같으면 제게 말씀하세요. 내의원에서 의녀님을 청해볼게요.”
“아니라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러자 운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안 돼요! 괜찮은 것 같아서 그냥 가벼이 넘기시는 건요. 안 그래도 궐 밖에 요즘 마마가 돈다던데요?”
“마마가?”
“네. 그것 때문에 궁궐에 들어올 때마다 문 앞에서 검진을 받고 있어요. 전 어렸을 때 두창(痘瘡, 천연두)에 걸린 적이 있어서 괜찮다고 말했는데도, 매번 꼭 검진을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상감마마께서 계시는 이 행궁 안까지 두창이 퍼지면 큰일이니까 그런가 봐요.”
생각해보니 임진왜란 이후에 자주 전염병이 창궐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전염병 역시 전쟁이 남긴 상흔의 하나일 것이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이 마마라 불리는 두창에 걸린 종친들은 많았다. 두창만큼은 신분고하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든 찾아올 수 있는 병이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걱정해줘서 고마워. 조금이라도 열이 나면 바로 말해줄게.”
“네. 항아님.”
운지가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
운지가 지나가는 것처럼 말했던 두창은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며칠 뒤, 두창이 행궁 안에서도 퍼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두창 증상을 보인 건 수문장이었다. 궁궐의 수문장이 두창에 걸렸다 하니, 마치 두창이 손님처럼 문을 두드리며 천천히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두창 증상을 보인 수문장이 두창 판정을 받고 격리된 지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선조의 후궁 순빈의 아들 순화군이 두창 증상을 보여 궁궐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리고 순화군이 두창 판정을 받은 그날 저녁, 그의 부인 황 씨와 딸까지 두창 증상을 보였다. 순화군이 머무르는 전각은 즉시 폐쇄 조치가 내려졌다.
그 덕에 바빠진 것은 내의원이었다. 내의원에서도 이미 두창에 걸린 경험이 있어 면역체계가 형성된 의원들을 중심으로 궁궐의 모든 나인들을 검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계속해서 두창 환자들이 늘어났다. 선조는 왕명으로 두창에 걸린 나인들을 완공이 덜 끝나 공사 중인 창덕궁에 남아있는 빈 전각들에 모아 격리시켰다.
그 외에도 각 전각 소속의 나인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다른 전각으로의 이동을 금했다. 음식도 그 전각에서 직접 요리해 먹을 수 있도록 수라간 궁녀들을 짝을 지어 나누어 주요 전각으로 보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더는 미영이도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궁궐 안에는 흉흉한 소문만 돌았다.
‘창덕궁에 그나마 남아있던 멀쩡한 전각들이 마마에 걸린 나인들로 가득 찼대.’
‘일단 거기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내버려둔다나 봐.’
‘내의원 의원들은 모두 행궁에서만 머물라는 지시가 내려졌다지?’
‘그럼 뭐야? 우리가 마마에 걸려 창덕궁으로 가게 되면……. 꼼짝없이 죽게 된다는 거야?’
그중 정확한 사실은 없었다. 그나마 진실에 그 누구보다도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상궁들은 두창으로 죽은 나인이 모두 합해 열 명이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나인들은 없는 것 같았다.
다행히도 날이 점점 따뜻해지는 3월 말에 들어서자 두창 환자는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다. 창덕궁에 갔다가 무사히 건강을 되찾아서 돌아오는 나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창덕궁에서 있었던 일을 되도록 진실에 가깝게 이야기를 해 줬는데, 소문이 완전히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창덕궁 빈 전각에서 지내는 동안, 하루에 한 번 의녀를 본 것이 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한 얼굴들이었다. 비록 그중 몇몇 나인들의 얼굴에는 두창으로 인한 흉터자국이 남았지만 말이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이부자리를 깔아주던 운지가 말했다.
“다행이에요. 마마가 이제 수그러드는 기세라서요.”
나는 한쪽 구석에서 한글로 가득한 소설을 읽고 있었다. 양화당 한 나인이 키득거리며 읽던 걸 빌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피곤해서 그런지 재밌는 소설에도 흥이 나질 않았다. 옛날 한글로 쓰여 있어서 그런 걸까?
“그래도 아직 미영 항아님은 이곳에 못 오시나 봐요?”
거의 한 달째 미영을 보지 못한 운지가 아쉬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야, 나는 고개를 들어 운지를 바라보며 답했다.
“응. 완전히 마마가 사라진 건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아.”
“하루라도 빨리 다시 뵈었으면 좋겠어요.”
“미영이도 너를 보고 싶어 할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책을 보는데 왠지 눈꺼풀이 심하게 무거워졌다.
“피곤하세요?”
“조금.”
“어서 자리에 누우세요. 전 그만 가볼게요.”
“그래, 내일 아침에 봐.”
“예, 항아님.”
난 운지가 깔아준 이부자리에 몸을 뉘였다. 이를 본 운지가 내게 묻는다.
“불 꺼드릴까요?”
‘응.’
마음속으로는 소리를 내려고 했던 것 같은데, 막상 이부자리에 눕고 나니 졸음이 쏟아지면서 난 마치 정신을 잃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운지가 그런 나를 보고 작게 소리 내어 웃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기름등을 꺼주고는 내 처소를 나갔다.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비록 운지가 내 살림을 도맡아 하는 무수리라지만, 그녀가 퇴궐도 하기 전에 그녀가 깔아준 이부자리에 덥석 누워버린 것이나, 불도 끄기 전에 잠부터 급히 든 이런 경우는 말이다.
환절기도 지난 것 같은데 몸이 왜 이렇게 천근만근 무거운 걸까?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종일 퇴선간 일이 힘들었던 것 같다.
두창 때문에 수라간 궁녀 두 명이 양화당으로 온 뒤부터 사실 일이 조금 많아졌다. 수라간 궁녀들이 양화당 퇴선간에 죽치고 앉아 있는 탓에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드는 일을 거들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수라간 궁녀들이 있으니까 내일 하루쯤은 쉴 수 있으면 쉬었으면 좋겠다.’
평소와는 다르게 급속하게 잠에 빠져들며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었다.
“항아님!”
내 눈앞 세상이 돌고 있었다. 분명 눈을 뜬 것 같은데, 곧바로 힘없이 감긴다. 다시 눈에 힘을 주어 뜨려고 하고, 또다시 감기고. 이렇게 뜨고 감기를 반복한다. 쉴 새 없이.
“항아님, 정신 차리세요!”
머리도 천근만근 무겁다.
“세상에! 이를 어쩌지? 이를 어째?!”
운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아침인가? 운지 주변이 환한 것 보면 낮인 것 같다. 그리고 어제 운지가 퇴궐하는 것까지 본 것 같기도 하다.
“운지.”
“네! 항아님? 정신이 드세요? 잠드시면 안 돼요! 세상에 열 좀 봐!”
당황한 운지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끊긴 필름을 한 장 한 장 보듯이 느리게 진행된다. 이어 내 이마에 차갑고 축축한 무언가가 놓인다. 그 축축한 걸 치워내고 싶은데 손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다. 어째서지?
“열을 식혀야 해요! 지금 열이 너무 높으세요!”
나는 눈을 뜨고 버티는 것도 힘들어, 결국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더 흐른 걸까?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게 어찌된 것이냐? 어제까지도 멀쩡하던 아이가 왜 이리 되었어?”
정 상궁이다. 그녀는 문 안쪽으로 들어오지도 않은 채, 열린 문 앞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운지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의원을 불러주세요! 제발 의원을 불러주세요, 마마님!”
간절하게 애원하는 듯한 운지의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정 상궁의 싸늘한 말 한마디.
“이 아이가 마마에 걸린 게 맞는다면 이곳에 둘 수 없다. 당장 창덕궁으로 옮겨야 한다.”
“일단 의원에게 내보이기라도 한 후에 옮기게 해주세요. 열이 너무 높아요. 이대로 옮기다가 자칫 큰일이 날 수도 있어요. 네? 마마님. 제발.”
운지가 흐느낀다. 나는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피곤하고 몸에 기운이 없고, 열이 좀 나는 것 같긴 하다. 그런데 그런 일로 운지는 의원을 불러달라며 사정하고. 정 상궁은 계속 매몰차게 거절한다.
“뭣 하는 게냐? 어서 의녀들을 불러와 이 아이를 옮기지 않고!”
그때까지도 나는 단지 두창이 아닌 지독한 감기에 걸린 것이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정 상궁이 부른 의녀들이 날 부축한 채 내 처소 밖으로 끌어냈을 때였다. 전엔 그저 따스한 봄바람 정도로 느껴졌던 바람이 순간 내 뼛속을 통과하는 듯한 통증을 내게 선사했다. 동시에 나는 내가 당장이라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
공사가 반 이상 끝났다는 창덕궁의 밤은 스산하기만 했다.
두창에 걸려 누워있는 나인들은 고통스러운 숨소리를 내뱉으며 때로는 서럽게 울부짖기도 했다. 말 그대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나는 그날 밤이 되자 상태가 더욱 나빠졌다. 나 스스로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간병하는 듯 돌아다니는 의녀 한 명이 보이긴 했지만, 그녀는 나를 비롯한 두창에 걸린 나인들에게 물 한 모금 주는 일이 없었다. 마치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러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목말라…….’
처음에는 단순히 목이 마른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목이 따가워지더니 코로 숨을 쉬는 게 어려워졌다. 나는 결국 입으로 숨을 쉬기 시작했고, 입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따가운 목은 마치 칼로 베이는 듯 아파왔다.
이젠 서러워서가 아니라 아파서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소리 내서 울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울면 가뜩이나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막힌 코가 더 단단히 막혀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 진짜로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이대로 여기에서 홀로 죽고 싶지 않았다.
‘난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내가 태어나고 자란 미래에서 두창은 예방접종으로 거의 사라진 지 오래지만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고 아빠와만 자라서일까? 아빠는 나에게 두창 예방접종 같은 걸 왜 진작 해주지 않은 걸까? 아니면 이게 두창이 맞기나 한 걸까?
왜란 이후 조선에 나타난 신종 역병들은 수도 없이 많다. 어쩌면 내가 걸린 건 두창이 아니라 아예 걸리면 살아날 가망이 없는 전염병인지도 모른다.
힘없이 누워있던 내 양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다 문득 건원릉에 있는 혼이 생각났다. 이 순간만큼은 혼이 나에게 했던 마지막 말 한마디에 그간 심각하게 고민했던 모든 생각들이 다 부질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싫어. 죽기 싫어. 나 살고 싶단 말이야.’
아직 나에겐 못다한 것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먼저 아빠를 만나야 했다. 아빠가 왜란에서 겪게 될 그 끔찍한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도, 난 반드시 아빠를 만나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경고해줘야 했다.
혼과도 만나야 했다. 지난번 만남으로 어색해진 분위기를 모두 털어버릴 시간이 우리에겐 필요했다. 미영이도 만나야 한다. 그러니 난 절대 여기서 죽을 순 없었다.
고모가 말한 대로 집안 사람들이 모두 시간여행을 하다가 죽게 되었다는 그 저주 노선에 나까지 포함되고 싶지는 않았다.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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