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세자와 궁녀(4)
흰색
혼이 내 처소를 다녀간 새벽.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이 펑펑 내리던 눈이 그쳤다.
이처럼 쏟아진 눈 덕분에 이른 아침부터 행궁의 모든 나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양화당도 마찬가지였다. 양화당의 나인들은 정 상궁의 지도 하에 양화당 곳곳의 눈을 쓸어 한곳으로 모았다. 그들은 얼마 뒤 손이 새빨개진 상태로 퇴선간으로 몰려들었다.
“차암! 이럴 때는 퇴선간에서 일하고 싶다니까.”
한 나인이 아궁이에 두 손을 뻗으며 투덜거렸다. 나는 그저 눈웃음만 지었다.
사실 양화당 나인들은 이 겨울만 지나면 다시는 퇴선간을 찾지 않을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과 잠깐 동안이나마 가깝게 지낸다고 해서, 내 양화당 생활이 편해질 것 같진 않았다. 무엇보다 난 ‘마녀 인빈’에게 찍힌 나인이니까.
눈 치우기가 어느 정도 끝나자 양화당에서 가장 막내인 젊은 내관들까지 퇴선간으로 몰려 들어왔다. 순식간에 퇴선간은 양화당 나인들로 가득 찼다. 퇴선간의 일을 맡은 나는 그들에게 밀려 구석진 자리로 밀려났다.
그러나 내 소임인 아궁이의 불이 꺼질 염려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당장 불이 급한 나인들이 나를 대신해서 열심히 불을 살리고 있었으니까.
“대체 여기서 뭣들 하는 게야!”
양화당 나인들이 퇴선간으로 몰려온 것을 알아챈 정 상궁의 등장에, 나인들이 우르르 도망치듯 퇴선간을 빠져나갔다. 홀로 퇴선간에 남게 된 나를 한번 노려본 정 상궁이 혀를 차며 돌아섰다.
그런데 돌아선 정 상궁이 무엇엔가 흠칫 놀라하며 바쁘게 자리를 떠났다. 마침 퇴선간의 문을 닫으려고 했던 차에 퇴선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 상궁이 놀란 이유가 분명 있었다.
“세, 세자저하!”
혼이 온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있는 퇴선간에서는 정 상궁의 목소리만 들릴 뿐, 양화당 앞마당은 건물에 가려져 볼 수 없었다.
양화당의 주인인 인빈과 혼은 그의 어머니 공빈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선조는 헛소문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공빈이 죽은 것은 산후병이 아니라 인빈이 저주해서 죽은 것이라는 소문까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공빈이 낳은 혼과 인빈이 낳은 신성군 이후(信城君 李珝)는 서로 맞붙었던 세자후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혼과 인빈은 결코 친해질 수가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혼이 양화당에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설마…….’
[ ‘앞으로 너를 만나고 싶을 때는 양화당으로 직접 가마.’ ]
장난으로 끝났던 어젯밤의 일이 떠오르면서 난 괜히 긴장되었다. 혹시라도 혼이 나를 만나러 양화당에 온 것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만약 그가 정원군과 함께 왔다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사이는 좋은 편이니까. 그런데 정원군이 온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오늘 귤시도 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래저래 혼의 일정까지 걱정하는 나다.
조금 뒤 양화당은 다시 조용해졌다. 혼이 양화당까지 왔다가 인빈을 보러 들어갔는지, 아니면 이 좁은 행궁에서 하필 인빈의 양화당을 지나가다가 나인들을 칭찬하고 그냥 간 것인지, 퇴선간 구석에 처박힌 나인인 나는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아무런 기별도 없이 양화당이 들렸다 말없이 사라진 혼에게 자그마한 섭섭함이 일었다.
그날 해가 지고 나서 나는 퇴선간을 정리하고 내 처소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채비랄 것이 딱히 다른 게 있는 게 아니어서, 아궁이의 불이 다 꺼질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었다. 그 일은 꽤나 지루한 일이었다.
찬물이라도 시원하게 부어버리면 간단히 끝날 테지만, 날씨가 추워졌다. 괜히 찬물로 불을 껐다가는 다음날 얼어버린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게 더 힘들어진다. 나는 숯을 치워내고 남아있는 불씨를 꼬챙이로 치며 얼굴이 새카매지는 것도 모르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때였다. 깜깜한 어둠을 등지고 퇴선간의 문이 열리며 정 상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런 정 상궁의 등장에 아궁이에서 시선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정 상궁의 표정이 아무래도 영 꺼림칙해 보인다.
“정 상궁 마마님.”
영문도 모르는 채 내가 정 상궁에게 인사를 했을 때였다. 그런 정 상궁의 뒤로 익숙한 얼굴의 내관이 나타났다.
“이 아이가 마지막입니다.”
정 상궁이 말하자, 그 내관이 나를 보고는 활짝 웃었다.
“이 항아님이 마지막이시구려.”
그의 목소리는 듣는 순간, 난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바로 혼과 재회했던 그날, 내가 말을 타기 위해 등을 밟았던 바로 그 내관이었다. 만약 그 내관이라면 동궁전 내관이 틀림없었다.
어쨌든 내가 그를 기억한 것과는 반대로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했으면 했다. 본의 아니게 등을 밟은 것도 미안하지만, 숯검댕인 내 얼굴을 혼에게 가서 고해바치지나 않을까 신경 쓰였다. 혼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어젯밤처럼 큰소리로 웃으며 놀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나에게 내관이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날이 어두워져 있었지만 나는 동궁전 내관이 내미는 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것은 황감이었다.
“세자저하께서 양화당의 모든 나인들에게 하나씩 주라 하셨네.”
내관의 설명에도 나는 어리둥절했다. 어째서 혼이 양화당의 나인들에게 황감을 돌리라고 한 것일까? 내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황감을 받아들기 주저할 때였다. 사실상 내 상전이나 다름없는 정 상궁이 설명을 덧붙였다.
“오늘 낮에 세자저하께서 양화당에 납시셨다. 그때 인빈마마를 잘 모시고 있다며 양화당의 모든 나인들에게 상으로 내려주신 것이다. 그러니 어서 받거라.”
혼이 인빈을 잘 모신다는 이유로 양화당 나인들에게 상을 주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세자의 신분으로 귀하디귀한 황감을 동궁전 나인도 아닌 양화당 나인들에게 돌릴 이유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가 이런 상을 양화당 나인들에게 내린 이유는 하나뿐이다. 어젯밤 혼과의 마지막 대화가 떠오르며 나는 그제야 이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아침부터 혼이 양화당을 찾았던 이유가 내가 먹고 싶다던 황감을 주기 위한 명분 찾기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기분이 좋아져 까르륵 웃음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재치도 대단하다 싶었다. 양화당의 나인들은 모르겠지만, 그들 모두 내 덕분에 황감을 먹게 된 것이다.
“이 아이는 황감을 싫어하는 모양입니다. 다른 나인에게 줄 터이니, 제게 주시지요.”
정 상궁이 그때까지도 황감을 받지 않은 나를 보며 내관에게 말했다. 나는 서둘러 소리쳤다.
“저 황감 좋아해요! 아주 좋아해요!”
내관이 웃으며 내 손에 황감을 쥐어준다. 정 상궁은 그런 내가 아니꼽다는 식으로 쳐다보고는 돌아서서 퇴선간을 나갔다. 나는 혼이 보낸 황감 한 개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비록 한 개이지만 어떠랴? 혼은 이 한 개의 황감을 내게 전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동궁전 내관이 건넨 황감 한 개를 품고 내가 기쁨에 빠져 있을 때였다. 정 상궁이 가버린 것을 확인한 내관이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하얀 면주머니를 내게 내밀며 속삭였다.
“항아님, 어서 이것을 받으시게.”
난 얼떨결에 그 면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주머니는 무엇이 들었는지 꽤나 묵직했다.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주머니를 바라보는 내게 동궁전 내관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저하께서 항아님께 보내시는 것이네.”
“이건 뭔데요?”
“그것도 황감이네.”
“황감이요?”
“저하께서 양화당의 나인들에게 모두 한 개씩 황감을 내리셨네. 그러나 항아님께는 ‘한 개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라고 하셨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며 부끄러워졌다. 물론 한 개 갖고는 어림도 없는 건 사실이다. 미영이도 입이고, 운지도 입이니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내관에게까지 저런 말을 하다니. 아니면 나보고 들으라고 내관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일까?
“나는 이만 가보겠네.”
동궁전 내관이 가버린 후, 나는 황감이 잔뜩 담긴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
1602년 새해가 밝았다.
그때까지도 선조의 고뿔은 쉽게 낫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침전인 석어당(昔御堂)에서는 웃음이 그칠 날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종이의 재롱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선조는 종이를 너무나도 예뻐했고, 심지어 올해부터는 자신이 직접 훈육하겠다고까지 했다.
그러나 궁중 나인들은 선조의 생각의 뿌리까지 알아차리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다들 선조가 기뻐하는 이유는 이제 날이 따뜻해지면 죽은 의인왕후의 상이 모두 끝나고, 열아홉 살의 젊은 새 중전을 맞이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소곤댔다.
그 일이 내게는 좀 다르게 다가왔다. 지금까지는 그저 역사책을 보는 듯한 관점에서 선조와 인목왕후의 국혼을 떠올렸다면, 이젠 나와 동갑인 그녀가 쉰 살이 넘은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상황에 동정심이 일었다. 게다가 올해 열아홉이 된 소녀의 앞에는 엄청난 파란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파란이 시작되는 첫 해인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혼을 떠올리면 그가 인목왕후를 내쫓고 어린 이복동생을 잔인하게 죽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그 일은 지금으로부터 12년 뒤의 일이지만.
12년. 얼마나 먼 시간일까? 몇 날 몇 밤을 더 자면 찾아오는 날일까? 그리고 그때가 되면 혼은 역사책에 기록되었던 것처럼 잔인하고 매정한, 무서운 군주로 변하게 될까? 그리고 그때의 나는, 지금과도 너무나도 달라졌을 그의 이름을 편하게 부를 수 없게 될까?
분명한 사실은 그 전에 아빠를 다시 만날 것이라는 거다. 고모가 내게 말했던 대로 내가 이 시대를 떠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아빠에겐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시대에 남게 된 나를 아빠가 자주 보러 조선으로 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모 말처럼 아빠도 어쩔 수 없게 된다면…….
적어도 양화당 퇴선간에서 평생을 마치고 싶진 않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가장 큰 바람이었다.
***
정월 초하루, 부왕에게 새해 인사를 올리려 혼이 건원릉에서 돌아왔다.
새해 인사뿐만 아니라, 망궐례(望闕禮, 특정한 날 중국 천자가 있는 곳을 향해 제사지내는 것)에 참석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그 때문에 혼은 모든 일정을 합해서 나흘 정도 행궁에서 머무를 예정이었다.
그가 행궁에 도착하기 전날, 나흘 중 언제 나를 만나러 와줄 것인지에 대한 생각으로 밤잠을 설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자인 그의 일정은 빡빡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지난번처럼 몰래 밤에 찾아오는 방법밖에는 없을 터였다.
덕분에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지난번처럼 내 처소로 그가 찾아온다면 안으로 들여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미영, 운지와 함께 마냥 수다를 떨 때는 방이 좁든 크든 크게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런데 혼이 들어와 앉으면 방이 왠지 좁게만 느껴진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것이었다.
그 다음 이유는 둘만 방 안에 있는 게 어색할 것 같았다. 불편하다기보다는, 어색해질 것 같았고 나는 저번과 같은 상황이 또다시 일어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다행이 당일은 그렇게 춥지 않았다. 눈이 내릴 기세도 아니었다. 그래도 난 어느 정도 더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저번처럼 그가 잠옷과 다름없는 옷차림으로 방문한다면, 운지가 나중에 빨래거리로 귀찮아지겠지만 마루로 이불을 꺼낼 심산이었다. 이불이라도 있으면 추위를 피할 수 있을 테니까.
문득 내가 생각을 너무 복잡하게, 그리고 많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하게 혼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다.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잊어버릴 수없는 그의 신분 때문에 신경을 쓰는 걸까? 아니면 친구이기 때문일까? 굳이 친구라고 한다면 미영이도, 운지도 친구다. 그러나 그들에 관해서는 이처럼 복잡하고 오랫동안 생각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머릿속을 비우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결국 이 문제는 현재로써는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혼이 행궁으로 돌아온 첫날밤, 밤이 늦도록 혼에게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나는 포기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내 방의 기름등은 꺼지지 않았다. 뚜껑만 덮으면 불은 저절로 꺼진다. 그럼에도 나는 무엇을 기대하는지, 몸을 웅크린 채 기름등을 바라보며 멍하니 깊어가는 밤과 함께 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행궁은 고요하다 못해 그 흔한 겨울의 차가운 바람의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난 기름등의 뚜껑을 덮었다. 그런데 불을 끄자마자, 곧바로 문 밖에 서성이는 사람의 그림자가 비춰졌다.
그 그림자가 혼이라고 확신한 서둘러 문을 열고 반가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혼아!”
그러나 그곳에 서 있는 것은 혼이 아니었다. 내 입에서 나온 이름에 당황한 얼굴로 서 있는 정원군이었다.
“저, 정원군마마…….”
그가 들은 걸까? 제발 아니길 바랐다. 그는 내가 혼을 마음에 두고 있고, 그의 여자가 될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혼의 이름을 제 멋대로 부르며 문을 열고 나왔으니!
“저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오?”
약간 화가 난 듯한 정원군의 목소리. 내가 부른 혼의 이름을 들은 것이다. 마땅히 부정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은 나는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언제 오신 거예요?”
“조금 되었소.”
무뚝뚝하게 돌아오는 답변. 그런 후 아차 싶었는지 정원군은 내 시선을 회피한다.
“그런데 왜 이곳에…….”
내 물음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정원군이 꾸러미 하나를 전각의 작은 마루 위에 올려놓는다.
그 꾸러미는 어디서 본 것 같았다. 그랬다. 동궁전 내관이 가져다준 황감도 저와 비슷한 주머니 안에 들어있었던 것 같다.
“이건 뭐예요?”
“황감이요.”
정원군의 말을 듣고 꾸러미를 풀어보니, 빛깔 좋은 황감이 한두 개가 아니다. 달빛을 받은 황감은 아주 탐스럽게 보였다.
“전하께서 하사하신 건가요?”
“그렇소.”
여전히 무뚝뚝하다. 그는 아까부터 계속 화가 나 있었다. 내가 그를 혼이라고 착각하고 부른 뒤부터 말이다.
“그런데 이걸 왜 저에게…….”
“종이는 더 이상 황감을 먹지 않소.”
“종이가 황감을 안 먹는다고요? 종이는 황감을 매우 좋아하는데요?”
“황감을 보면 자꾸 그대 이야기를 꺼내서, 황감을 주지 않고 있소.”
아직은 종이가 나를 잊지 않은 모양이다.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져왔다. 종이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보더라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더 이상 만나면 안 되니까.
“이 황감은 제게 주시는 건가요?”
정원군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헛기침을 두어 번 한다.
“황감을 좋아하지 않소? 난 그대가 황감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종이와 함께 지내던 시절 정원군은 황감이 생기는 대로 종이에게 보내주었다. 나와 종이는 그것을 사이좋게 나눠먹었고, 종종 정원군은 그런 우리를 흐뭇한 얼굴로 보았었다. 그때부터 그는 나를 좋아하고 있었던 걸까?
“좋아해요. 좋아하지만 이런 귀한 걸 받을 순 없어요.”
“종이가 주는 것이라 여기시오. 그 아이도 그러길 바랄 것이니.”
정원군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는 듯 돌아섰을 때였다. 그가 멈춰 섰다. 누군가를 본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정원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내관 한 명이 서 있었다. 혼의 명으로 양화당에 귤을 가져다주었던 바로 그 동궁전 내관이었다.
내관이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의외의 장소에서 정원군을 발견하고 놀란 듯 보였다. 그는 재빨리 다가와 정원군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정원군은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하더니, 한마디를 했다.
“동궁전 최 내관이군.”
그 말을 끝으로 정원군은 그곳을 떠났다. 정원군이 가버리자 최 내관이 내게로 다가왔다.
“아직 침수 전이셨군.”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저하께서…….”
여기까지 말했던 최 내관이 주변을 살피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저하께서 찾으시네.”
“저를요?”
“그러하네. 침수 들었다면 굳이 깨우지 말라는 명은 있었네만, 혹 잠들려거든 이미 잠들었다고 전해 올릴 수는 있네.”
나는 고민하지도 않은 채 서둘러 답했다.
“아니에요. 전 안 잘 거예요. 어디죠? 저하가 계시는 곳이요.”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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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의 밀회(月下精人),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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