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간택령(2)
흰색
“그때 임해군마마께서 들어오셨는데요. 세상에나……!”
임해군 전각에서 일어난 일을 내게 들려주며 걷던 미영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멈춰 섰다. 종이의 손을 잡고 걷던 나도 미영이의 시선을 따라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광해군이 있었다.
언제 입궐했는지 비어있는 중궁전 전각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아마도 죽은 의인왕후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긴 하지만 그를 어린 시절부터 돌보아주었고 무엇보다도 양자로 맞아들여 그가 세자의 위치를 지난 8년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뒤늦게 광해군을 발견한 종이가 한 손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백부니……!”
하지만 종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종이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쉬이이이이잇!”
“우읍……읍!”
“조용히 해! 조용히 해, 종이야!”
종이는 내 손에 입이 단단히 봉해진 상태에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본다. ‘왜?’라는 눈빛이다. 이어 우리와 함께 몸을 숙인 미영이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언니?”
“너도 가만히 있어봐.”
나는 미영이에게도 주의를 준 뒤, 중궁전 담벼락 옆으로 기어가듯이 종이를 끌고 갔다. 미영이도 그런 내 뒤를 따라 몸을 숙인 채 따라왔다.
나는 담벼락 아래에 납작 몸을 엎드린 채, 종이에게 설명했다.
“지금, 숨바꼭질 놀이하는 거야.”
“으웁?”
“절어어얼대~ 백부님 눈에 띄면 안 돼. 아직은. 알았지?”
“으웁?”
“종이야, 놀이하는 거야. 놀이. 누나말, 무슨 말인지 알지? 소리 내면 지는 거야.”
영문은 모르겠지만 광해군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건 알았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마음은 언제 바뀔지 모른다. 나는 이 중궁전을 벗어날 때까지 종이의 입을 단단히 봉해버릴 묘책을 생각해냈다.
‘어제 들어보니, 수라간에 귤이 들어왔다던데…….’
“종이야, 황감 좋아하지? 황감?”
황감 소리에 어린 종이의 눈이 비상하게 빛을 발한다. 나에게 여전히 입을 틀어 막혀서도 고개를 아주 크게 끄덕인다.
“오늘 종이는 야참으로 황감을 먹어야겠네.”
“웁웁!”
내 말에 상당히 동의하는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종이. 나는 곧바로 종이의 입을 막았던 손을 놓아주었다.
“종이야, 어서 백부님 몰래 여기를 지나가야지?”
“응!”
“언니 왜 그러세요? 아기씨도 있겠다, 이참에 세자저하께 인사나 올리면 좋으련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게다가 너 임해군마마 전각 소속이잖아. 근데 종이 주변에 붙어있는 걸 세자저하가 아시면 뭐라고 생각하시겠니?”
“아……. 그렇지. 너무 자주 정원군마마 전각에 와서 그런지, 제 소속도 잊어버리겠어요.”
미영이까지 설득 성공.
더 말할 것도 없이, 담을 타고 그 곳을 도망치듯 빠져나가려는 바로 그때였다.
“이곳이 중궁전입니다. 어머머! 세자저하!”
“자네는 아바마마의 지밀상궁이 아닌가?”
“예에, 저하…….”
“무슨 일로 이곳에 있는 것인가?”
“예에, 그것이……. 오늘 간택을 끝내신 세 분의 처자 분들을 뫼시고 퇴궐하던 길이었습니다.”
지밀상궁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담벼락 위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중궁전 앞뜰에는 세자인 광해군을 비롯하여, 대전의 지밀상궁과 머리를 땋은 세 명의 규수들이 서 있었다.
“퇴궐하는 길은 이쪽이 아닌 것으로 아네만.”
“아, 그것이……. 처자들이 중궁전이 행궁 어디에 있는지를 묻기에…….”
지밀상궁의 변명이 광해군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아직 상중에 간택령을 내린 것은 부왕인 선조가 그랬으니 그랬다 치자.
하지만 자기들이 곧 들어앉을 중궁전 구경에 나선 처자들을 광해군이 좋은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광해군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밀상궁도 이를 눈치 챘는지, 광해군의 앞에 납작 엎드렸다.
“화, 황공하옵니다! 아, 아니!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세자저하!”
아무리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임금의 지밀상궁을 세자가 함부로 꾸짖을 수도, 벌을 줄 수도 없는 노릇. 광해군은 영 못마땅한 얼굴로 엎드린 지밀상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문제는 지밀상궁의 뒤를 따라 나선 세 명의 처자들이었다. 그녀들도 지밀상궁의 모습을 보며 꽤나 당황한 얼굴들이었다. 나는 그 세 명의 처자들의 얼굴을 살피며, 누가 훗날의 인목대비 김 씨인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다들 한눈에 보더라도 어린 티가 제법 나는 귀여운 소녀들이었다. 그런데 유독 그중 한 명, 마치 어른인 양 신경 써서 화장한 티가 나는 소녀가 있었다. 소녀라기보다는 이제 막 여인이 되었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내 시선이 유독 그녀에게 끌리던 바로 그때였다. 바로 그 소녀가 지밀상궁의 앞으로 나섰다.
“이 모든 것이 소녀의 잘못입니다. 소녀의 죄를 벌하여주십시오. 세자저하.”
똑 부러지는 말투. 나는 왠지 모르게 직감적으로 그녀가 훗날의 인목대비 김 씨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되돌아오는 광해군의 말투는 차가웠다. 그런데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땅에 두고서는 차근차근 말을 늘어놓았다.
“소녀들은 오늘 모두 처음으로 궐에 입궐하였습니다. 하여 궐의 곳곳이 신기하여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감히 나서서 청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소녀가 나서서 청하여 이 일을 벌여놓았으니, 이는 상궁마마님의 잘못이 아니라 나서서 일을 벌인 소녀의 잘못입니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한 그녀의 태도 때문일까? 아니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말을 하는 그녀의 기개가 마음에 든 것일까? 광해군의 굳었던 표정이 조금씩 풀리는 것이 보였다.
“허나, 특별히 중궁전을 찾은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무엇이오?”
“국법으로 치러진 간택령으로 인해, 승하하신 중전마마의 상이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입궐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무거운 참회의 마음을 지울 수가 없게 되었는데, 아직 중전마마의 넋이 머무르고 있을 중궁전에 와서 중전마마께 인사를 올리고 싶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광해군은 할 말이 없게 되었다. 말 하나로 그녀는 이 상황을 휘어잡은 것이다.
그런데 보아하니, 말은 잘 해놓고 저 처자. 숙이고 있는 고개 아래로 눈꺼풀이 심하게 떨리는 것이 담벼락 너머의 내 눈에도 분명히 보였다.
하기는, 일국의 세자의 앞이었다. 제정신을 가지고서는 안 떨리는 게 이상한거지.
“상궁은 일어나게.”
“예에, 세자저하…….”
“어서 모시고 가게.”
“예에! 화, 황공하옵니다.”
지밀상궁이 서둘러 손짓하며 규수들을 이끌었다. 광해군도 그대로 그곳을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에게 말을 올린 그 여인이 다른 규수들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꽁지 빠지게 도망친 지밀상궁과 규수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중궁전 앞에는 광해군과 규수만이 남게 되었다. 광해군도 이를 이상하게 여겼는지, 걸음을 옮기다 말고 그녀에게 물었다.
“가지 않으시오?”
“소녀……. 감히, 감히 세자저하께 한 말씀 더 아뢰어도 되옵니까?”
광해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무슨 말이 더 남아 있소?”
“그것이……. 혹시라도 세자저하를 뵙게 되면, 올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사옵니다.”
“규수가? 나에게?”
“예에…….”
“난 규수를 알지 못하오. 그런데 규수가 나에게 할 말이 무엇이 있단 말이오?”
“저하께서…… 소녀를 기억하지 못하시더라도, 소녀는 저하를……. 기억하고 있었사옵니다.”
“나를?”
‘뭐지? 이 분위기는?’
“언니, 무슨 일이래요?”
담벼락 아래에서 듣고 있었을 미영이가 담벼락 너머를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묻는다. 마찬가지로 종이가 내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누나……. 종이 뒷간 갈래.”
결국 난 광해군과 그녀의 대화를 모두 듣지 못한 채 그곳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
최종 간택에 올랐던 세 명의 아가씨가 행궁에 입궐한 후 그 다음 해 첫날, 새 왕비 간택에 관한 정식 교지가 내려졌다. 새 중전마마로 올해 17살인 김제남의 딸 김 규수가 간택된 것이다. 동시에 국혼 날짜도 정해졌다. 돌아가신 의인왕후의 삼년상이 모두 끝나는 내년 초여름이었다.
그녀가 정식으로 간택되자, 그 뒷이야기가 행궁 안을 한참 돌아다녔다. 대부분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그 처자가 불쌍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앞으로 왕비가 되어 누릴 권세에 대한 부러움 섞인 말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은 임금과 결혼하는 어린 아가씨에 대한 동정여론이 나인들 사이에서는 더 강했던 듯싶다. 거기에 그녀의 부친이 권세에 목이 말랐다느니 하는 그녀의 부친 김제남을 비하하는 발언도 몇몇 있었다.
그런데 좀 의외의 소문이 하나 끼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최초의 김 씨 성을 가진 왕비라는 것 때문에 시작된 소문인 듯싶었다.
애초에 최종 간택에 그녀의 이름이 올랐음에도 임금님은 주역에 충실했는지, 그녀를 뽑을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그녀는 들러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발을 내려놓고 보니, 어디선가 아주 좋은 향기가 났다고 한다. 임금님이 그 향기가 무슨 향기냐고 묻자 그 김 규수가 자신의 향기라고 하며 나섰고, 향기 때문인지 문득 얼굴이 궁금해진 임금님이 발을 치우라고 명했다.
물론 발이 치워졌음에도 규수들은 죄다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고개를 숙여도 김 규수는 너무 예뻤다고 한다. 다른 규수들은 임금님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안 꾸미고 왔는데, 그녀는 유독 아름답게 단장한 채 앉아있었다 하니 말이다.
사실 임금님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장성한 세자도 있는데다가 다 늙은 자신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싶지 않은 신하들의 마음이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꽃단장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입궐하는 규수들을 만날 생각은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좋은 향기에, 예쁜 외모에 화장까지 곱게 한 소녀라니. 조선에선 노인 나이에 들어선 임금님의 마음도 흔들린 것이다. 비록 그녀가 들러리로 최종 간택에 올라온 ‘김 씨’ 처자라도 말이다.
이런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위치가 불안할 광해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몇 달에 한 번씩 궐에 들려 부왕에게 인사하고 건원릉으로 돌아가 돌아가신 중전의 상을 치르는 데만 열중했다.
하지만 이 조선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듯이, 나도 알고 있었다. 지금 그 누구보다도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것은 광해군이란 걸.
“누나!”
정원군의 손을 붙잡고 할바마마를 알현하고 온 종이의 손에는 연이 들려 있었다. 며칠 전 할바마마를 생각하며 쓴 시를 들고 갔다가 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연 날리자! 연!”
정원군은 흥분한 종이의 이야기를 듣더니 곧바로 반대하며 나섰다.
“지금은 상중이다. 그런데 연을 날리다니?”
그러나 종이는 기가 죽지 않는다.
“할바마마가 날리라고 주신 거예요, 아버님.”
종이 이 녀석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영악한 모습이 늘어가는 것 같다.
“그래도 안 된다. 자중하거라.”
“히잉……. 할바마마가 허락하신 건데…….”
“괜찮지 않을까요? 상감마마께서 허락하시고, 또 직접 상으로 내려주신 것이잖아요.”
“안 될 말이오. 지금은 상중이오.”
으으! 이 고지식한 사람!
“상중에 간택도 하는데, 연을 날리지 못할 이유는 더더욱 없죠.”
나름 이유랍시고 꺼냈는데, 적절한 비유는 아닌 듯싶었다. 정원군이 급히 주변을 살피더니 호통 쳤다.
“지금 이 말이 얼마나 대역무도한 말인지 알고 하는 것이오?! 누가 듣기라도 했다가는…….”
“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물론 난 죽고 싶은 마음 따위는 전혀 없다. 그리고 정원군과 이 정도 농담을 건넬 사이는 되었다고 생각한다. 정원군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의 성격을 간파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문제는 부인과 자식에게는 그런 그의 좋은 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래서 내가 도와주겠다는 거고.
“종이야.”
“응, 누나.”
“할바마마께서 연을 날려도 된다고 허락하실 때, 아버님도 그 자리에 계셨니?”
정원군에게 눈웃음을 흘리며, 난 종이에게 물었다.
“응. 계셨어.”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시켜주는 종이. 나는 그런 종이를 보란 듯이 정원군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포기했다는 듯 입을 다문 채 숨을 크게 내쉬더니 말했다.
“좋소. 허락하리다.”
행궁의 정중앙에 위치한 넓은 마당. 며칠 전 내린 눈으로 하얀 눈 세상이 되어 있었지만, 궐의 나인들이 지나다니는 길만큼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종이와 나는 바로 그곳에 섰다.
“나도 진짜 오랜만에 하는 거라서…….”
일단 연을 하늘에 띄워주는 것은 내 몫이었다. 종이는 금방이라도 내가 하늘 높이 연을 날려줄 것이라고 믿고 눈을 반짝이며 쳐다본다.
하지만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바람은 적당해 보이지만, 과연 연이 제대로 날 수 있을까? 종이가 실망하는 건 싫은데 말이다.
자신 있게 연을 들고 뛸 준비를 하는 나를 보며 정원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연을 날려본 적이 있소?”
“그럼요. 매년 겨울마다 아빠랑 연을 날렸는걸요.”
물론 궁궐에서가 아닌, 한강 고수부지 같은 곳에서였지만.
“빨리! 빨리 누나!”
정원군이 뒷짐 진 채 나를 주시한다. 난 단번에 성공시킬 마음으로 자신 있게 연 줄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은 내 무릎 높이까지만 바람을 타고 떴다가, 땅에 끌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힘차게 이리저리 달리며 용을 썼지만, 연은 쉽사리 하늘 높이 날지를 못했다.
그때마다 종이는 웃었다 찡그렸다를 반복했다. 결국 실망하는 표정으로까지 이어지는 종이의 얼굴을 보고선, 나는 마당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 결국 지쳐서 잠깐 바닥에 주저앉아 쉬려고 했다. 그때 정원군의 한마디가 내 신경을 자극했다.
“힘들면 내관에게 시키도록 하지.”
“바람 탓이에요. 이제 조금 있으면 바람이 바뀔 거고, 그러면 연은 바로 뜰 거예요.”
‘도와주지도 않았으면서.’
내 눈에 정원군은 왕족의 체통을 지키겠다고 뛰는 것 따위는 절대 안 하는 사람으로만 보였다. 물론 그런 게 당연한 시대라는 건 안다. 양반이 뛴다는 건, 조선사회에서는 천지개벽할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힘들게 뛰어다니는 걸 구경만 하다가 하는 소리가 고작 그만두라는 말이라니!
난 심통 난 얼굴로 지금껏 사람들이 다닌 길이 아닌, 눈밭 위로 뛰기 시작했다. 게다가 계속 연에 매단 실을 잡은 팔을 이리저리 위 아래로 흔들면서 말이다.
‘제발……! 빨리 좀 뜨라고!’
나의 애타는 마음도 모른 채, 연은 좀처럼 하늘로 뜨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팔을 너무 흔들었던지, 예전에 호랑이에게 다친 쪽 팔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추위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분명한 통증으로 느껴졌다.
“아악!”
자잘한 통증이 큰 통증으로 찾아왔을 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오?!”
이를 지켜보던 정원군이 당황하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시선도 자연히 내가 예전에 다친 어깨로 향해 있었다. 나는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종이를 보면서,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쳤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다시 뛰려고 하는데, 갑자기 뛰려고 한 탓인지 선 자리에서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조심하시오!”
어느새 가깝게 다가온 정원군이 미끄러지는 날 보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가 내 옷자락을 잡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같이 밀려 넘어지고 말았다.
-우당탕!
연은 바닥으로 처박혔고, 나는 두 눈을 감아버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연이 망가지기라도 했는지, 종이가 큰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종이의 울음소리에 내가 눈을 떴을 때, 바닥으로 넘어진 내 몸 위에 정원군이 있었다. 그가 내 몸 위로 넘어진 것이다.
“괜찮소?!”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러니 내 몸이 괜찮고 안 괜찮은지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너무나도 가깝게 붙어버린 그와 나의 자세가 더 문제였으니까.
“저……. 저…….”
여전히 나를 걱정하는 얼굴의 정원군은 뭐가 문제인지 깨닫지 못한 표정이었다.
“추워요…….”
그를 일단 내 몸 위에서 비키게 하기 위한 변명.
일단 난 등을 땅에 대고 넘어졌으니, 등이 추워지기 시작한 건 사실이었다.
어쨌든 이런 나의 적절한 변명 덕분에 정원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내게서 등을 돌렸다.
“미, 미안하오!”
“아, 아니요. 괜찮아요. 전 괜찮은데…….”
나는 치마에 잔뜩 눌어붙은 눈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뒤늦게 이를 본 정원군이 넘어진 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난 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종이의 울음소리는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난 보았다. 연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어떡하죠? 전하께서 하사하신 건데…….”
“놀다보면 망가질 수 있지.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그래도 종이가…….”
내가 서럽게 울고 있는 종이쪽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을 때였다.
“대체 이게 무슨 난장판이란 말입니까.”
울고 있던 종이의 울음소리가 거짓말처럼 딱 그쳤다. 종이의 울음소리도 단번에 그치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이 세상엔 단 한 명뿐이다.
바로 정원군부인 구 씨다.
그녀가 예고도 없이 궐에,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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