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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의 연인-14화 (14/110)

제14화. 보모상궁이 되다(6)

흰색

그날 밤, 종이가 잠든 후에도 한참이 지나서 정원군이 돌아왔다. 그가 하루 종일 행궁 안 어디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난 그가 자신의 부인을 피하기 위해 홀로 종이를 내버려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간 종이와 정이 들어서인지, 나는 정원군을 보자마자 심통이 났다.

“대체 하루 종일 어디를 다녀오신 거예요?”

인사부터 건네야 할 첫마디가, 사납게 날이 선 말로 나와 버린 것이다. 이런 나의 태도에 정원군도 적지 않아 당황한 기색이었다. 당연했다. 내가 누구이든 간에 표면상 보모상궁인데, 감히 왕족에게 성질을 부리다니.

“무슨 일이 있었소?”

“있다마다요. 종이가 하루 종일 혼자 있었는 걸요!”

“함께 있지 않았단 말이오?”

그가 나에게 되물었다. 나는 슬슬 화가 머리 꼭대기로 치솟는 것을 느꼈다.

“저야 당연히 함께 있었죠. 하지만 종이는 부모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혼자 글만 읽었다고요.”

“난 일이 있었소.”

내 맹렬한 기세에 변명할 처지가 분명히 아닌 정원군이 변명한다. 하지만 지금 내 귀에 정원군의 변명이 제대로 들릴 리가 없었다.

“군부인은 두 아드님과 시간을 보내시느라 바쁘시던데요? 종이가 소학을 배우고 있을 정도로 총명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잖아요. 그런데 부모님들 중 그 누구도 아이와 시간을 보내주지 않는 건 훈육에 좋지 않다고요!”

보모상궁이 얼마나 잘난 자리인지는 몰라도, 감히 왕족의 교육에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가 아닌 건 분명히 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종이를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아려올 정도로 정이 들었다. 물론 매정한 엄마라도 살아 있는 엄마를 가진 종이가 훨씬 낫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건, 부부싸움에 애만 죽어나는 걸로 보이니!

나의 신랄한 교육관 비판에 정원군은 당황한 건지 아무 말도 못하고 벌린 입도 다물지 못한다. 솔직히 그 정도로 당황하는 정원군을 보자니, 행궁에서 쫓겨나기라도 할까 봐 슬쩍 겁도 났다. 그러나 진심은 통했겠지. 내가 종이를 위하는 마음은 말이다.

“아……알았소.”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말을 바꾸어 알았다고 대답하더니 말을 이었다.

“가서 쉬시오.”

그것이 다였다.

정원군도 뭐가 깨닫는 바가 있는 걸까? 부디 그러길 바랄 뿐이다.

정원군을 뒤로하고 내 처소에 도착하니 이미 무수리가 불을 때워 방이 훈훈했다. 훈훈하지만 텅 빈 방. 갑자기 이 처소보다도 훨씬 큰 전각에서 홀로 지내는 종이를 떠올렸다. 비록 지금 모습으로는 훗날의 역사 책 속의 인조를 떠올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지금은 그저 작고 귀여운 아이, 동정심이 가는 아이라는 것뿐이다.

“어휴…….”

대체 정확히 뭐 때문에 그들 부부는 그렇게 살벌한 불꽃이 튀는 사이일까? 정말 궁녀들이 말한 대로 정원군 부인 구 씨가 그의 형이었던 신성군을 잊지 못한다는 게 사실일까? 뭐, 어느 것이 맞든 이 시대에서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들은 부부가 되었으니까.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바람이 문을 흔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이의 처소에서도 가끔 느끼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어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그것이 바람이 만든 소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언니. 언니이.”

미영이었다. 나는 서둘러 문을 열어 그녀를 맞았다. 그녀는 손에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어서와!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언니가 보모상궁이시잖아요. 행궁은 좁아서 보모상궁마마님의 거처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어요.”

이제 보니 꽤나 영특한 애인 것 같다.

“근데 그건 뭐야?”

내가 그녀가 들고 있는 바구니를 보며 물었다.

“이거요? 보세요!”

그녀가 덮인 바구니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인절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서 났어?”

나는 인절미를 보자마자 얼른 하나 들어 올리며 물었다.

“오늘 임해군마마를 뵈러 오신 손님상에 나갔던 거예요. 남은 건 다 궁녀들 차지가 되거든요. 그래서 언니가 생각나서 가져왔어요.”

“고마워. 나 이거 완전 좋아해!”

“완전?”

“정말……. 정말 좋아한다는 말이야. 하하하.”

웃으며 한입 깨무는데, 떡이 찬 곳에 놔뒀었는지 딱딱하다. 내 표정이 굳는 걸 본 미영이가 서둘러 내 손에 들린 나머지 떡을 가져가 바구니에 넣으며 말했다.

“딱딱할 거예요. 바로 드시면 안 돼요.”

“하지만 전자레인지도 없고 이걸 그냥 먹어야지, 별수 있겠어?”

“어머? 궐이라고 방법이 없을까 봐요?”

그녀는 뚜껑을 닫은 바구니를 방에서 가장 뜨뜻한 곳에 놓더니, 이불로 그 위를 덮었다. 열기로 떡을 데우려는 것을 알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금방 떡이 쫄깃해지겠네.”

“호호. 조금만 있으면 돼요.”

“그래, 근데 이 시간에 여기 와 있어도 돼?”

“오늘 당직도 아닌 걸요. 그래서 오는 길에 슬쩍 세자저하를 뵐 수 있을까 해서 동궁전도 가봤죠.”

세자라는 말에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그래서?”

“오늘은 못 뵀어요. 뵙는 날이 있으면 못 뵙는 날도 있는 거죠. 그저 멀리서 보는 거지만요.”

“왜 그렇게 그 녀석, 아니 세자저하가 좋은데?”

“잘생기셨잖아요.”

생각해보니 잘생기긴 했다. 8년 전도, 지금도. 지금은 좀 더 남자다워졌다, 일까?

“그건……, 그렇지. 또?”

“예전에 임해군마마께서 술을 드시고 궁녀들을 막 때리신 적이 있어요.”

“뭐? 정말?!”

“네. 그때 제가 뭐가 밉보였는지, 아니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서인지 정말 딱 죽을 만큼만 맞았어요.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였어요. 아마 그때 전 ‘여기서 죽는구나’ 싶었어요.”

“괜찮니? 요즘도 그래?”

“요즘은 눈치껏 피해요. 하하.”

“그랬구나…….”

“네에. 그런데 그때 그 소식을 들은 세자저하께서 직접 납시셔서 임해군마마를 말리셨어요. 그 덕에 전 보시다시피 이렇게 무사할 수 있었고요."

‘광해군이……, 그랬구나.’

“그 뒤로 좋아진 거야?”

“그 전에는 단지 늠름하시고 잘생기셔서 좋았는데, 그 후로는 그분의 인품에 넋이 나간 거죠. 뭐…….”

미영은 자신의 두 손을 맞잡으며, 붉어진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그분이 곧 왕이 되시겠지요? 그런 분이 왕이 되신다면, 전 세자저하를 위해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 물론……. 이런 말은 어디 가서 함부로 할 말은 아니지만요.”

“걱정 마. 절대 어디 가서 말 안 할 테니까.”

친구와 비밀이야기를 하듯이, 나는 미영이와 이야기하며 기분이 좋아졌다.

“떡이 다 됐겠어요.”

미영이 덮어놓았던 이불을 치우고 인절미를 가져왔다. 그녀의 말대로 인절미는 말랑말랑해져 있었다. 우리는 그날 날이 새는지도 모르고 밤새 웃고 떠들었다.

***

전날 미영이와 늦게까지 떠든 여파로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했다. 정확히 종이의 아침 식사 시간이 막 시작했을 때 깬 것이다. 뒤늦게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종이의 전각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정원군과 종이가 나란히 한 밥상을 두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정원군은 종이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허겁지겁 뛰어온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친우라도 생겼소?”

지나가는 식으로 한 말이지만, 괜히 그 말에 당황한 내가 서둘러 둘러댔다.

“보모상궁은 궁에서 친우를 만들면 안 되나요?”

“그건 아니오. 단지, 조금 전 유 상궁이 밤새 전각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고 말하더군.”

내가 늦는 사이에 정원군 앞에서 내 뒷담을 하고 있었을 유 상궁을 떠올리며 빠드득 이가 갈리려 하는데, 행복한 얼굴로 정원군과 식사 중이던 종이가 나에게 묻는다.

“누나는 밥 먹었어? 여기 와.”

종이의 말 한마디에 내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무리 내가 보모상궁이라지만 종이는 내 상전이었다. 누나라는 말을 평상시에도 이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정원군이 알아서 좋을 게 없었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서 들었음에도 정원군은 별 반응이 없다. 그는 묵묵히 식사를 계속하면서 내게 다시 말을 던진다.

“급히 온 것을 보아하니 아직 식전인가 보오.”

“예, 아직요. 곧 먹을 거예요.”

원래는 종이와 같이 먹었다. 그 때문에 수라간 궁녀들도 종이가 먹을 밥공기와 더불어 내 밥공기를 꼭 올렸는데……. 오늘은 정원군이 먹는 밥공기가 원래 내 밥공기인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만, 수라간을 찾아가서 밥을 얻어먹어야지 뭐.

그때였다. 정원군이 안쪽으로 놓아두었던 작은 반상을 슬쩍 들더니 내가 서 있는 쪽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반상을 덮고 있는 보자기를 치웠다. 그 안에서 등장한 것은 내 전용 밥공기와 수저 세트였다.

“그건……!”

“종이가 챙겨야 한다더군.”

“헤헤.”

‘누나, 나 잘했어?’ 눈빛으로 나를 보며 웃는 종이. 나는 그 녀석을 향해서 눈웃음 짓다가, 다시 나를 돌아본 정원군과 시선이 마주치자 곧바로 정색했다. 정원군은 나의 그런 급격한 표정 변화에도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와서 드시오.”

“네?”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아버지와 아들. 그것도 그냥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정원군. 즉 왕자와 그 아들이 밥을 먹는 자리에 끼라고 말한 정원군의 말에 놀란 것이다.

“누나, 어서 와.”

게다가 종이는 나에게 손짓까지 한다. 정말 이들 부자 사이에 보모상궁의 신분인 내가 끼어서 함께 식사를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잔뜩 안은 채 나는 그들이 식사 중인 밥상으로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다가가자 정원군이 자리를 조금 옆으로 옮긴다. 종이도 이를 보더니 옆으로 옮겨가고. 결국 나는 종이를 가운데 두고 정원군과 마주앉게 되었다.

정원군은 그런 내 앞에 반상에 있던 밥공기를 옮기더니 직접 놓아주었다. 수저세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정원군과 감히 겸상해도 되는지에 대한 생각에 수저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 이런 데에서는 눈치 없는 종이가 끼어들었다.

“누나, 누나가 좋아하는 고기는 내가 다 먹었어.”

평상시에 종이가 좋아하는 고기를 내가 선점해서 당당히 먹은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먹을 것에 그다지 욕심이 없는 종이는 내가 고기를 좋아한다 하자 두말없이 늘 고기를 내게 주었었다. 물론 종이도 고기를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으응……. 그래. 잘했어. 앞으로도 종이가 고기 다 먹어.”

나는 그런 종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었다. 어쨌든 종이는 이런 식으로 해야 진짜 칭찬을 한 것이라고 여기는 어린아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나와 종이를 정원군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감히 왕자의 아들을 머리 쓰다듬는 죄를 저지른 하찮은 궁녀가 된 기분이라, 서둘러 수저를 들어올렸다.

그때 정원군이 내게 말했다.

“언제부터 종이의 이름을 부른 것이오?”

종이의 이름을 부른 게 거슬린다는 말일까? 아무리 보모상궁이라도 정원군 전각의 지밀상궁이나 다름없는 유 상궁도 어린 종이에게 깍듯이 대하는데……. 나 같은 게 이름을 부르는 건 안 될 일이겠지.

“그게…….”

“처음부터요. 종이는 처음부터 종이였어요.”

또다시 정원군과 나 사이의 대화에 자랑스럽게 나서는 종이. 그러나 정원군의 얼굴은 화난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별로 상관없다는 듯 내게 말했다.

“종이에게는 부를 이름이 따로 있소. 단지, 그 이름을 아바마마께서 지어주셨고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들 안 부르는 것이지만.”

“이름이 또 있어요?”

사실 원래 이름과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는 건, 조선시대에 흔히 있던 일.

“천윤(天胤)이야.”

그때 종이가 말했다. 나는 그제야 인조의 또 다른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천윤. 해석하자면 하늘이 정한 장자라는 것이다. 이 이름을 광해군이 싫어했었다는 이야기. 선조가 그 만큼 첫 손자를 예뻐했다는 증거였겠지만 말이다.

“그럼 앞으로 천윤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난 종이가 좋은데.”

종이의 말에 정원군이 종이를 보며 말했다.

“천윤은 할바마마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그러니 어디 가서라도 그 이름이 싫다고 해선 안 된다. 알겠느냐?”

“네, 아버님.”

약간 혼내는 말투 같은데도 종이가 웃으며 곧장 대답하는 거 보니,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부자의 식사 분위기가 좋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그들 부자가 좋든 말든 난 지금 불편하다는 거지!

이런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정원군이 그 특유의 헛기침 소리를 냈다. 늙은이 흉내를 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일찍 밥상에서 일어섰다.

‘알고 보니 나보다 겨우 한 살 많으면서, 폼은!’

이건 어디까지나 내 속마음이다.

“식사가 끝나면 종이와 함께 나갈 채비를 하시오.”

“나가요? 어디 가나요?”

“오늘도 하루 종일 일이 있으니, 종이를 그곳에 데려갈 생각이오.”

“저는 굳이 안 가도 되지 않을까요……?”

그 순간 나는 내게 어제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군부인은 두 아드님과 시간을 보내시느라 바쁘시던데요? 종이가 소학을 배우고 있을 정도로 총명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잖아요. 그런데 부모님들 중 그 누구도 아이와 시간을 보내주지 않는 건, 훈육에 좋지 않다고요!’]

‘설마……. 내가 어제 했던 말 때문일까?’

나의 추측에 대한 확신은 정원군의 이어진 다음 말에서 나왔다.

“내가 일부러 종이와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 같으니, 직접 확인할 기회를 주려는 것이오.”

정원군에게 단단히 찍힌 게 확실해 보였다.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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