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보모상궁이 되다(3)
흰색
전각 안에서 상석에 앉아있는 정원군의 바로 앞으로, 종이가 쪼르르 달려가서 앉았다. 그리고 나는 잠시 당황했다. 종이의 옆자리는 내가 앉아야 할 자리다. 근데 조금 전 종이와 전각 밖으로 나올 때까지는 놓아두지 않았던 방석이 내가 앉아야 할 자리에 놓여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내가 앉아야 할 방석이 놓인 자리에 가서 다소곳이 앉았다.
종이는 방금 전 자신이 누워서 떠들던 모습을 정원군에게 들켰다는 생각에 좌불안석인 모양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런 시선으로 정원군의 눈치만 살폈다. 그런 종이를 보며 나는 정원군이 아이에게는 꽤나 엄한 아버지인가보다 생각했다.
“종이야.”
“네, 아버님.”
“방금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소자, 자성문을 썼어요.”
“자성문? 그래. 오는 길에 홍문관 관원에게 들으니 네 자성문이 썩 훌륭하다고 하더구나.”
꾸짖음이 아니라 칭찬의 말이 나오자 종이도 긴장을 풀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때 웃는 얼굴로만 보이던 정원군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네 자성문은 네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그의 화살이 나에게로 향했다. 말은 그래도 여전히 입가에는 희미하지만 분명 미소를 짓고 있는 정원군이었다. 대체 그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칭찬인지, 꾸짖음인지.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난 보모상궁을 들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알고 보니 종이에게 스승을 붙여준 셈이었군.”
조선시대식 돌려 말하기는 참 수법도 다양한 듯싶다. 정원군은 지금 나를 칭찬하고 있었다.
“아, 예에…….”
“아녀자의 몸으로 소학을 배운 적이 있소?”
그의 말은 그저 단순히 물어보는 것이었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가 나의 수준을 어느 정도 낮춰 보고 있었다고 판단하고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천자문은 물론이고 소학, 사서삼경까지 배웠습니다. 굳이 아녀자임을 강조하신다면 내훈은 물론이고 규중요람까지 익혔습니다.”
“내훈은 그렇다 치더라도 퇴계의 저서까지 읽었단 말이오?”
“예.”
정원군은 적지 않아 당황한 표정이었다.
“정말 놀랍소. 난 그대가 이방에서 온 여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찌 조선의 규방여인들이 익히는 교양들은 물론이고 규중요람까지 익힐 수 있었단 말이오?”
“제 설명을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도 조선 사람이에요. 단지, 조선에서도 좀 외진 지역에 살았다고 해두죠.”
“그런 건가……. 그래서 형님도…….”
그는 무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내 시선에 급히 말을 돌렸다.
“어찌되었든 앞으로 종이를 잘 부탁하겠소.”
“정원군마마께서도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요.”
광해군을 만나는 것.
정원군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그는 우리 사이에 앉아있는 종이를 의식했는지, 조금은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건넸다.
“지금은 불가하다고 하지 않았소.”
“알아요. 그래서 잠자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잖아요. 종이와 지내면서.”
나는 그동안 정원군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강한 말투로 전달했다. 사실상 이런 말투는 조선의 여인이라면 감히 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돌려 말하는 것이 미덕인데다가, 무엇보다 여자가 감히 왕족에게 이럴 수는 없을 테니까.
나도 안다. 하지만 지금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인데,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것도 그 넓은 행궁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이 전각에서 언제까지고 모를 광해군과의 재회를 기다리며 지내는 건.
“최대한 시일을 맞춰보겠소. 그러나 그 전에 함부로 행궁 안을 돌아다니거나 한다면…….”
“알아요. 안다고요. 계속 이 곳에 가만히 종이와 있을게요. 나도 그 정도는 안다고요. 지금 그가, 아니 그 분이 얼마나 위험 속에 놓여 있는지를요.”
16년간을 세자로 시간을 보냈던 광해군.
명나라에서는 그가 즉위한 후에도 그의 공식 등극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거기에 몇 년 뒤에는 적통 영창대군이 태어난다. 그로 인해 그는 서출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등극해야 했다. 그것도 보통 탈상을 한 뒤에 등극하는 과정을 모두 무시하고, 선조가 죽은 다음날 급히 즉위식을 치러야 했을 정도로 광해군은 매우 위험한 상태였다.
내 입장에서야 그가 무사히 왕이 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는 사건이 일어나야만 아빠를 만날 수가 있다.
“약속할게요. 가만히 기다릴게요.”
“정말이오?”
“정말이에요.”
마음 같아서는 손가락이라도 걸자고 하고 싶지만, 조선시대에서는 단단히 다짐하는 태도를 보이는 수밖에 없다. 정원군은 나의 다짐과 같은 약속을 받고 나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밖에서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원군마마. 유 상궁이옵니다.”
“들어오게.”
“예.”
유 상궁은 다름 아닌 그 노상궁.
그녀는 내가 정원군을 비롯하여 종이와 꽤나 가까운 자리에 ‘방석’을 깔고 앉아있는 것을 알고는 날 향해 찌푸린 인상을 숨기지 않은 채 들어와 말했다.
“중전마마께서 아기씨를 보고 싶다고 하십니다.”
“중전마마께서 말인가?”
“예에.”
지금의 중전이라면 의인왕후다. 그녀는 평생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광해군과 그의 친형 임해군을 직접 키웠다. 또한 광해군을 양자로 맞아들여 그를 세자로 옹립하는 데 힘을 보태준 여인이기도 하다. 광해군에게는 거의 친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녀는 몇 년 안에 죽을 것이고, 훗날의 인목대비가 되는 김 씨가 두 번째 선조의 중전이 되는데……. 그건 아직도 먼 훗날의 이야기인가?
“알겠네. 나는 전하를 알현하러 가야 하니, 유 상궁이 종이를 데려가게나.”
그때 종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내 뒤로 와서 몸을 숨기는 게 아닌가.
“안 갈래요.”
중전은 종이에게 할머니가 된다. 그런데 종이의 지금 태도는 상당히 할머니를 싫어하는 것 같이 보인다.
“종이야.”
“종이, 안 갈래요. 안 갈래요, 아버님.”
이유야 모르겠지만 중전이 부르는데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원군의 얼굴에서 난처함을 읽은 내가 몸을 돌려 종이의 손을 잡았다.
“종이야. 중전마마께서 부르시잖아.”
“싫어. 종이 안 갈래.”
고개를 저으면서까지 말하는 거 보니, 진짜 가긴 싫은 모양이다. 왜 그런담?
“그럼 나와 같이 갈까?”
그냥 해본 소리였는데, 종이의 두 눈이 반짝인다.
“정말? 누나도 같이 갈 거야?”
“응. 같이 갈게.”
“보모상궁은 중전마마께서 계시는 전각에 ‘감히’ 들어갈 수 없소.”
유 상궁이 지적하며 나섰다.
‘이 할머니야, 일단 애부터 달래야 할 거 아니야? 내가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는 나중 문제고!’
“그럼 종이도 안 가.”
아니나 다를까, 유 상궁의 말에 종이가 안 가겠다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결국 정원군이 골치 아프다는 듯,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다녀오게.”
정원군의 이 말은 그가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중궁전 앞은 칼바람이 불었다. 그랬다. 나는 새해가 밝았음에도 아직 겨울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중궁전 밖에 서 있는 나인들은 모두 토끼털로 보이는 꾸러미 안에 두 손을 넣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목에 목도리 같은 것도 두르고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뜨뜻하기 그지없던 전각 안에서만 지내다가, 급하게 종이를 따라온 나는 아무것도 걸친 게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시게.”
정원군 처소의 유 상궁은 추위에 코끝까지 얼얼해지는 나를 향해 매정하게 말하곤 종이의 손을 잡고 중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종이는 싫은 표정만 잔뜩 짓고서도 아까와는 다르게 나도 들어가야 한다고 고집 부리지는 않았다.
사실 그것도 그럴 것이, 중궁전 앞에 도착한 순간 나는 종이가 왜 중궁전에 오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를 알아챘다. 중궁전 안에서 엄청 독한 한약 냄새가 밖에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밖에서 느끼는 것이 이 정도인데, 안에는 얼마나 독한 한약 냄새가 가득할까. 어린아이에게는 고역 아닌 고역일 것이다.
‘중전이 많이 아프다는 거겠지?’
경동시장 구석에 자리한 수십 년 된 한의원에서 나는 냄새보다도 더 진한 한약 냄새가 흘러나오자, 중궁전의 작은 열기를 받기 위해 전각 가까이로 다가가는 것을 포기했다. 멀찍이 서서 추위를 참는 것이 훨씬 나았다.
새삼스럽게 따뜻한 종이의 처소가 그리워졌다. 바깥에 나와 보니 그곳이 천국과도 다름없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는 중이었다. 그때, 중궁전 앞에 서 있는 내관으로 보이는 이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새로 왔다던 정원군마마님 전각의 보모상궁이시오?”
“아, 네에…….”
나는 추위로 굳어가는 두 손을 싹싹 비벼가며 대답했다. 내관은 추위에 떠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내게 중궁전을 담벼락처럼 둘러친 작은 전각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그를 따라가자 살짝 열려있는 문이 있었다. 내관이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전각 안에는 작은 주방이 꾸며져 있었고 궁녀 몇 명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녀들은 내관의 등장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뭣들 하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내관은 그녀들을 한번 노려보며 일일이 눈길을 주고는, 다시 나를 돌아보며 그녀들에게 소개했다.
“정원군마마 전각의 보모상궁이시다. 정원군마마의 아기씨께서 중전마마를 뵙고 나오실 때까지, 이곳에 계실 것이야.”
“예에…….”
내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눈가에 고마움의 눈물이 다 맺힐 뻔했다. 딱히 앉을 만한 곳은 없었지만, 늘 따뜻한 불을 피워놓는지 안이 한증막처럼 따뜻했다.
내관이 나가고 다시 문이 반쯤 닫히자 기다렸다는 듯이 궁녀들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많아 보았자 십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의 그녀들은 처음 보는 나에 대한 호기심을 나타냈다.
“마마님은 언제 궁에 왔어요?”
“와, 피부 곱다. 얼굴에 뭘 바르나요?”
“지금 정원군마마 전각엔 큰아기씨만 있지 않나요? 그럼 마마님은 큰아기씨를 돌보시나요?”
“아마 그럴걸. 정원군마마와 군부인이 싸우시고, 홧김에 친정으로 가신 거잖아. 행궁이 사람 많다는 핑계로.”
쏟아지는 질문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본 적도 없는 정원군 부인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싸우시다니, 두 분이?”
싸움과는 전혀 거리가 먼 듯 보이던 정원군 얼굴을 떠올리면, 더욱 더 상상이 가지 않는다.
“어머, 모르셨어요?”
질세라 이야기를 시작하는 궁녀. 역시 여자는 뒷말하는 재주는 타고난 모양이다.
“두 분이 원체 사이가 안 좋으셔요. 뭐, 싸운다기보다는 신경전이랄까. 주변에 있는 나인들만 죽어나는 거죠. 그런데 집수리가 덜 끝났다는 명목 하에 궐에 붙잡아 놓고 있으니……. 그 좁은 전각 안에 두 분을 가둬놓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그.래.서. 군부인께서 산후 요양을 핑계로 어린 아기씨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신 거고요.”
“근데 왜 종이, 아니……. 큰아기씨는 안 데려가셨데요?”
“그거야 당연하죠!”
궁녀 하나가 자랑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큰아기씨가 얼마나 특별한데요. 임금님의 첫 손자이신데, 부르실 때마다 임금님 뵈려면 궁에 남아있어야지요.”
“임금님의 첫 손자……?”
나름 머리를 굴려보았다.
임금님의 첫 손자라……. 근데 이 말이 상당히 거슬린다. 뭔지는 몰라도 내 기억 속 어딘가에 꼭꼭 감춰두었던 무언가가 마치 똬리를 튼 채 고개를 들어올리는 듯하다. 바로 인조는 선조의 첫 손자였다는 사실. 그래서 어린 시절 선조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럼 종이가……. 멋 훗날의 인조?! 에엑?!’
종이가 인조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나머지에 대한 기억은 막혔던 물꼬가 트인 듯 술술 하나씩 기억나기 시작했다. 내가 정원군의 이름을 듣고도 기억하지 못한 것. 그것은 정원군의 이름을 모른다기보다는, 그의 이름을 다르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종(元宗). 그는 훗날 인조로 인해 왕으로 추존된다. 즉 죽어서 왕이 되는 사람이다. 광해군이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도 왕으로 기록되지 못한 것에 비한다면, 정원군은 광해군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이다.
그럼 나는 지금 훗날 인조가 되는 종이의 보모상궁인 거야?
“근데 큰아기씨를 군부인께서 싫어하시는 이유가 신성군을 닮아서라는 말도 있던데? 그래서 큰아기씨가 곁에 오는 것조차도 싫어하신대.”
신성군. 그는 인빈 김 씨의 아들이다. 사실상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선조가 세자 후보로 광해군보다 앞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에 병으로 죽는다. 신성군과 정원군의 모친은 인빈 김 씨. 속칭 양화당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며, 그녀는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이 죽은 뒤에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장남……. 누구더라? 그 장남이 죽고 나서 차남인 신성군이 유력한 세자 후보로 거론된 것도, 모두 선조가 인빈을 총애해서였어. 만약 신성군이 죽지 않았다면, 1592년에 세자는 광해군이 아닌 그가 되었겠지만.’
어쨌든, 일어나지도 않은 역사에 대해서 가설이나 세우고 있을 때가 아니다.
“큰아기씨가 신성군마마를 닮아요?”
“저희도 신성군마마를 뵌 적이 없어서 몰라요. 상궁마마님께 전해들은 적은 있죠. 원래 정원군부인께서는 신성군마마의 양첩이 되실 분이셨는데, 신성군이 돌아가시면서 정원군마마와 혼인하게 되셨대요. 그때 그 혼인을 끝까지 안 하시겠다고 군부인마님이…….”
“어머? 그래서야? 그래서 두 분 사이가 안 좋은 거야?”
“아니면 애초에 정원군마마를 싫어하시나보지.”
“와~ 말도 안 돼. 정원군마마와 같으신 멋지신 분을 어찌 싫어할 수가 있단 말이야? 내가 듣기로는 인빈마마 소생 왕자님들 중에서 가장 잘생기셨다고 하던데!”
“그거야 이미 앞서 두 분이 돌아가셨으니, 우리가 알 턱이 있나.”
“뭐, 이러나저러나 역시 행궁에서 가장 잘생기신 분은…….”
그때 반쯤 열린 문틈으로 시선을 주던 궁녀 하나가 소녀다운 비명을 질러댔다.
“세자저하다! 세자저하께서 오셨어!”
‘세자? 광해군?!’
세자가 나타났다는 말에, 불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던 궁녀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몇 달 만에 보는 그 녀석의 얼굴을 보려, 궁녀들을 젖히고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내가 알던 광해군이 아니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그와 헤어진 후 8년이나 지난 뒤. 내가 알던 소년티 팍팍 나던 광해군은 온데간데없고, 7년 전보다도 더욱 키가 크고 의젓해진 그가 흑색의 용포를 입고 당당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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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에피네프린 (cell****) 2013-08-15 14:32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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