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해의 연인-10화 (10/110)

제10화. 보모상궁이 되다(2)

흰색

“생각해 둔 것이라니요?”

“마침 내 장자의 보모상궁을 두려던 참이었소. 그 아이의 보모상궁으로서 이 행궁에서 머물러 주시면 될 것 같소.”

“보모상궁이요? 지금 저보고 애를 보라는 거예요?”

“그렇소.”

그는 아주 태연하게 말한다.

‘뭐지? 애초에 날 광해군과 만나게 해주려고 궁궐에 데려온 거 아니었어? 듣자하니, 새로운 보모상궁 뽑으려고 날 데려온 거야?’

지금까지 그가 내게 한 말들의 저의가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다.

“이곳은 그 아이가 머무는 전각이오. 당분간 아이와 함께 이 전각에서 머무르면 될 것이오.”

“아무리 그래도 아이……. 잠깐, 아이라면 아까…….”

나는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쿡쿡 찔러대며 깨우던 어린 남자아이를 떠올렸다.

“지금은 늦은 아침을 먹으러 갔을 거요. 조금 뒤에 이 전각으로 돌아올 터이니, 어디 가지 말고 이곳에서 그 아이를 돌보아주시오. 또한 앞으로 그 아이의 식사는 보모상궁이 챙겨야 할 것이오.”

그는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 않겠다고 말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내 말은 아무것도 듣지 않겠다는 듯, 서둘러 그곳을 나가려다가 잠시 문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돌리며 내게 물었다.

“이름이 어찌 되시오?”

“김경민인데요.”

그때 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이 내 또래들에게 쉽게 볼 수 있는 장난기 어린 미소라는 걸 깨닫는 순간, 그의 입이 열렸다.

“그럼 김 상궁이군.”

말을 마친 그는 나를 전각에 홀로 둔 채, 그곳을 나가버렸다.

‘내가 보모상궁이라고? 나 보고 유모를 하란 말이야?’

한 마디로 어이상실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일단 광해군을 만날 때까지 갈 곳이 없는 나의 거처가 해결된다. 어디 그뿐인가? 여긴 궁이다. 행궁이지만, 이곳에는 광해군도 살고 있다. 정원군의 말대로라면 행궁이 좁다고 했으니, 만날 기회는 많은 것이다.

‘아이를 달래서 궁궐을 돌아다니자고 할까?’

그럼 오늘 안으로 광해군을 만날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방법들을 떠올리며 고심하는데 갑자기 문이 열린다. 그러더니 내가 깨어날 때 보았던 그 꼬마 남자아이가 나이든 상궁의 손을 잡고 들어온다. 나는 나이든 상궁의 눈초리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네가 김 상궁인가?”

나이든 상궁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그것이 못마땅한지, 조금 불쾌하다는 말투로 내게 말했다.

“보모상궁이라 하나 정원군마마께서 머무르시는 전각의 지밀상궁인 나보다야 자네는 높지 않지.”

“아,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

나름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데, 그녀는 내 말투가 썩 마음에 들진 않은 모양이다.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서둘러 표정을 바꾸었다.

“아기씨, 이제 앞으로 김 상궁이 아기씨를 뫼실 것이옵니다.”

“할미는? 할미는?”

“쇤네는 쇤네의 일이 있사옵니다.”

“그런가?”

의외로 저 조그만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퍽 귀엽다. 문제는 내가 별로 애기들을 안 좋아한다는 거지. 그러나 네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데다가, 걸음마도 뗀 모양이니 딱히 신경 써야 할 것은 없는 듯했다.

곧 상궁의 손을 놓은 아이는 뚜벅뚜벅 잘도 걸어가더니, 안쪽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마도 이 아이에게는 그 자리가 익숙한 자신의 자리였나 보다.

“그럼 쇤네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응.”

어디서 본 걸 흉내 내는 것인지, 아빠다리를 한 꼬마는 한 손바닥으로 자신의 작은 허벅지를 툭툭 내려치며 온갖 폼을 잡는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웃음을 터트렸다가 이내 노상궁의 째림에 웃음을 삼켜야 했다.

“그럼. 어린 아기씨께서 고뿔이라도 드시면 큰일이니, 절대 밖에 모시고 나가지 말게.”

단단히 주의를 준 노상궁이 나가자 나는 재빨리 꼬마의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꼬마는 또랑또랑한 눈으로 내가 누구인지 탐색하듯이 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이 녀석과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얼굴에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그러자 나를 바라보던 이 아이의 얼굴이 슬쩍 당황하는 얼굴로 바뀐다. 그래, 그래, 나도 안다고. 지금까지 이런 말투로 너에게 말하는 이가 없었겠지. 좀 전에 그 무서워 보이는 노상궁도 너에게 깍듯하게 대하던데 말이야.

“이름 몰라?”

“아, 알아.”

“그럼 이름이 뭔데?”

생전 나와 똑같은 옷을 입은 여인들로부터는 이런 ‘반말’을 들어본 적 없는 꼬마는 잠시 정체성에 혼란이 온 게 분명했다. 계속 굳은 표정으로 어찌할 줄 모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 함부로 이름 말하지 말랬는데…….”

“옳거니! 그래그래, 나도 알아. 근데 난 앞으로 너를 돌봐줘야 하거든? 그럼 네 이름을 알아야 돌봐주면서 잘 지내볼 거 아니야?”

“끄응…….”

작은 손을 주먹을 쥔 채, 자신의 이마를 슬그머니 문지르는 녀석. 꽤나 당황스럽긴 한가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에는 존대라도 쓸걸 그랬나? 하지만 아무리 조선시대라고 해서 나보다 한참 어린 녀석에게 허리 굽힐 순 없지.

“응? 이름이 뭔데?”

“종(倧)이야.”

“종? 외자야?”

“외자?”

“이름이 하나뿐이냐고.”

“이름은 원래 하나인데…….”

내가 바보지, 어린아이를 두고 무슨 어려운 말을.

“응응, 맞아. 이름은 하나지.”

‘정원군의 아들일 테니까, 왕족이고……. 대부분 직계 왕족은 이름을 한 글자로 지었지. 근데, 아까 그 정원군……. 상당히 젊던데. 벌써 이만 한 아들이 있네?’

“몇 살인데?”

“다섯 살.”

“그래, 종아. 앞으로 이 누나와 잘 지내보자.”

“누나?”

“응. 누나. 얼마동안은 누나와 지내야 해.”

“이름이 누나야?”

“아니, 내 이름은 경민이야. 김경민. 그러니까 앞으로 날 부르고 싶으면 경민이 누나, 이렇게 불러. 알았지?”

“끄응…….”

또다시 고민에 빠진 얼굴이 되는 종(倧)이. 나와 주고받는 대화가 모두 낯선 모양이다.

“어서, 누나~ 해봐. 누나아~.”

“누, 누나아…….”

“옳지! 그렇게!”

내가 귀엽다는 듯, 그 어린 녀석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리고 난 후회했다. 내가 꼬집은 게 아팠든 어쨌든 종이의 눈빛이 겁에 질린 눈빛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미, 미안. 이건 네가 귀여워서 그런 거야! 예뻐서 그런 거라고!”

혹시라도 그 노상궁에게 울며 달려가기라도 하는 건 아닐까, 나는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내가 걱정하는 얼굴로 바뀌자마자 그 녀석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걸린다. 그래, 내가 이 미소를 알지. 아까 나를 김 상궁이라고 불렀던 정원군! 넌 분명 그 정원군의 아들이 틀림없어!

“헤헤…….”

“이 녀석이……!”

나는 꼬마인 종이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종이의 머리에 꿀밤이라도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주먹을 들어 올리는데도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고 있는 종이를 보면서, 결국 손을 내리고 종이와 함께 웃고 말았다.

눈이 아주 많이 내렸던 1599년의 겨울. 나는 정원군의 장남 이종을 만났다.

종이는 지금으로부터 24년 뒤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반정을 일으킨 장본인, 바로 인조였다. 이 순진무구하고 어린 종이가 훗날의 인조라는 걸 내가 알게 되는 건, 그로부터 얼마 뒤의 일이었다.

***

종이는 좋은 녀석이었다. 게다가 조그마한 게 어찌나 눈치가 빠르던지.

보통 보모상궁은 상전이 식사를 끝마치기 전에는 절대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상전이 밥을 먹고 남긴 걸 먹어야 했다. 그러나 첫 식사에서, 내가 종이 앞에 펼쳐진 진수성찬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종이는 수라간 궁녀에게 딱 한 마디를 했다.

[‘밥 한 공기 더.’]

당연히 종이의 명령이니 주저 없이 밥공기를 대령한 궁녀. 종이는 그 밥공기를 나에게 건넸다. 난 처음으로 어린아이도 엄청 영악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음과 동시에, 이 조그마한 녀석이 좋아졌다. 그렇게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눈이 그치고 열흘 뒤, 1600년의 새해가 밝았다.

새해 첫날 선조가 궐에서 망궐례를 올리고, 이 날 내내 종이와 나는 방 안에만 갇혀 지냈다.

그날 나는 이상한 사실을 하나 알았다. 새해인데도 불구하고 종이의 어머니가 종이를 만나러 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노상궁에게 듣기로는 셋째를 낳고 몸이 좋지 않아서 외가에 나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종이가 사는 전각과 작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전각에는 정원군만 홀로 거처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원군도 거의 종이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왕실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왜란 이후에 종친들도 일이 많아졌기 때문일까?

어쨌든 종이의 부모님이 바쁜 것과 관계없이, 종이의 하루 역시 바빴다.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글공부로 시간을 보낸다. 점심을 간단히 먹으면 홍문관에서 관리가 나와 종이를 가르친다. 보통 왕실의 자제들은 종학에 모여 공부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종이의 나이가 아직 어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왜란 이후로 종학은 열리지 않았다. 거기에 추운 날씨까지 더해져 굳이 공부하고 싶어 하는 왕실 자제들이 없어 종학이 비공식적으로도 열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종이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하루에 단 한 차례 홍문관 관리가 나와 종이를 가르쳤다.

종이는 천자문을 반 정도 떼고, 바로 소학강해를 하고 있었다. 홍문관 관리는 매정하게도 종이에게 자성문(自醒文)을 매일 숙제로 내주었다. 이것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자신이 하루에 잘못한 것을 한 가지씩 글로 적는 것이었다. 종이는 이 자성문을 쓰느라 오후 일과를 다 보냈다.

숙제라 해도 종이가 어린 나이여서 그런지, 사실상 B4용지 크기의 한지를 반 정도만 채우는 정도로 글을 적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방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종이로서는, 그 반을 채우는 것도 힘들어했다. 결국 내가 나섰다.

그날은 눈도 오랜만에 그치고 해서 나는 종이와 함께 전각 밖으로 나와 마루에서 자성문을 쓰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종이야. 넌 아까 편식했잖아.”

“편식?”

“수라간에서 가져온 음식을 남겼잖아. 남긴 것을 잘못했다고 적으면 되지.”

“난 그 많은 거 다 못 먹어. 그래서 같이 먹었잖아.”

‘그런 거였나? 다 못 먹을까 봐 나와 한 밥상에서 밥을 먹게 한 건가? 요 녀석.’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종이야. 지금 전쟁이 막 끝났지?”

녀석은 반쯤 드러누워서 한지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전쟁이 끝나면 백성들은 어떨까?”

“좋지.”

“뭐, 좋긴 하지. 근데 전쟁으로 인해서 땅을 많이 잃었잖아.”

‘어린아이니까 최대한 쉽게 가르쳐야지.’

“응.”

내 어설픈 설명이 어느 정도 먹혔는지, 종이가 계속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백성들은 어떨까?”

“슬프겠지.”

“그거 말고! 우리도 물론이지만 백성들은 땅에서 곡식을 얻잖아. 그 곡식이 무엇이 되지?”

“밥.”

“그래! 밥이야, 밥! 그런데 땅을 잃으면 그 밥을 얻을 수 있을까? 없을까?”

종이는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들어 날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없어. 그러면 밥 못 먹어.”

“그래, 맞아. 그런데 종이는 매일 밥을 먹니? 안 먹니?”

“먹는데.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런데 백성들은 못 먹는 밥을 많이 먹는 종이가 그걸 남겼어. 그건 잘한 일이니?”

종이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이 녀석과 같이 지낸 지 거의 보름. 이런 표정만 보면 대충 이 녀석의 속내를 읽을 수 있다. 지금 건 뭔가 잘못된 것을 발견, 깨달았을 때의 그런 표정인 것이다.

“종이가……. 밥을 남긴 건…….”

“응응.”

“잘못했어…….”

“왜 그렇다고?”

“백성들은 밥을 못 먹는데, 종이는 많이 먹을 수 있는데, 종이는 남겼으니까…….”

“그래! 아이구 똑똑해라! 바로 그걸 쓰는 거야!”

내가 나름 분명한 결론을 내린 종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했다. 종이는 헤벌쭉 입이 벌어져서는 날 보고 웃었다. 이 녀석, 칭찬이 너무 고팠는지,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해주는 걸 아주 좋아한다. 이것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다.

“어험.”

갑자기 들려온 헛기침 소리에, 종이와 나의 시선이 마루 밖을 향했다. 그곳에는 왕자군의 의관을 차려입은 정원군이 서 있었다. 종이는 정원군을 보자마자 누워 있던 자세에서 서둘러 일어섰고, 나도 그런 종이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님.”

종이가 조그마한 손을 모으며 정원군에게 인사하고, 나는 그런 종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눈치껏 고개를 숙이며 정원군에게 인사했다.

“정원군마마.”

그는 우리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은 채 마루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전각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종이는 자신이 혼날 것이라고 여겼는지, 내 손을 움켜잡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종이 혼나는 걸까?”

“왜?”

“아버님도 스승님도 공부할 때는 바른 자세로 앉아서 하랬는데, 종이는 누워 있었어.”

“아니야, 괜찮아. 혼내지 않으실 거야. 만약 혼내시면,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하면 돼.”

“누나도 내 옆에 있을 거지?”

“응.”

그때 안으로 들어간 정원군이 들어오라는 신호라도 보내는 건지, 다시 한 번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제야 종이는 내 손을 놓고는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유오디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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