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시간을 넘어서(1)
흰색
1592년 9월 19일 함경도 회령에서 내 아버지 김영찬이 죽었다.
-Hello?
“…….”
-who's there?
“Hi……. 아니, 저 한국인이세요?”
아빠의 낡은 전화번호부에 있는 이름 [김영아] 나의 고모다. 외국인과 결혼해서 미국에 살고 있다고 이름만 들었던.
-누구……시죠?
여성이 수화기 너머로 한국어로 내게 답한다.
“아,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경민인데요. 혹시 저를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경민이? 네가 경민이라고? 오빠 딸 경민이?
다행히도 이야기가 조금 수월하게 진행될 것 같다.
“네에……. 제가 경민이에요. 안녕하세요, 고모.”
-그래. 너 어린 시절 사진 한 장 받은 뒤로는 전혀 연락이 안 되어서. 세상에나, 지금 그럼 네가 몇 살이지?
“17살이에요.”
-우리 애들이랑 같은 나이네. 그래, 무슨 일이니? 오빠가 아니고 네가 다 나에게 전화하고?
“저, 그게요…….”
아빠의 죽음.
“아빠가……. 아빠가…….”
최대한 침착하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막상, 아빠의 죽음을 입으로 말하려는 순간, 목이 메어오며 소리가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경민아? 무슨 일이니? 응?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내가 고모에게 첫 전화를 걸었던 것은 2013년의 가을. 그러나 아빠가 돌아가신 날은 1592년의 가을이었다.
3일 뒤 미국에서 고모가 왔다.
“참, 오빠답네.”
고모는 제일 먼저 아빠의 서재를 둘러보며 입을 여셨다.
“그래도 참 깔끔해. 네 엄마가 그렇게 죽고, 갓난아기인 널 어떻게 키우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말이야.”
“네에…….”
“너도 고생이 많았겠구나. 네 아빠는 옛날부터 그랬어. 학생 때는 마치 시간여행이 자신만의 특권인양 내게 자랑하면서 이 시대 저 시대를 하루가 멀다 하고 돌아다녔지.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은 적도 있었는데……. 난 부러우면서도 그게 어찌나 화가 나던지. 너도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니? 남자만 가능하다는 게 말이야. 여자는 시간여행을 해도 돌아올 수 없고.”
나를 위로하려는 걸까? 아니면 저게 미국식인 걸까? 그 둘도 아니라면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기에 그다지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사실상 나의 유일한 친척인 고모는 아빠의 죽음에도 꽤나 담담한 태도를 보이셨다. 물론 내가 느끼는 슬픔은 고모가 느끼는 슬픔보다는 덜해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커피 드릴까요?”
“아메리카노 있니?”
“그냥……. 커피믹스인데요.”
“그럼 그냥 물이나 한 잔 주렴. 난 단거는 별로 안 좋아하거든.”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먹든 안 먹든 주는 대로 먹지 않나? 태어나서 처음 본 고모는 말만 한국말을 할 뿐이지, 행동은 외국인같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래, 지금은 어떻게 지내니? 고등학생이니?”
나와 식탁에 마주앉은 고모가 물 한 모금을 마신 후 내게 물었다.
“검정고시 준비하고 있어요.”
“그럼 학교를 안 다닌 거니?”
“네에…….”
“그래? 학교는 언제까지 다녔는데?”
“중학교 학력까지는 인정될 거예요.”
“그럼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편입하면 되겠네.”
“네?”
“네 고모부인 찰리에게도 다 이야기하고 나온 거야. 일단 넌 갈 곳이 없으니까. 적어도 고등학교 교육을 마칠 때까지는 우리와 미국에서 지내자. 그 뒤에 대학을 가든 안 가든 그때 문제고. 내가 미국에서 살고 있으니, 네가 영주권 받기도 어렵진 않을 거야. 그러니 고모와 미국으로 들어가자.”
“전…….”
“왜,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러니?”
‘친구…….’
왜 친구를 묻는 고모의 말에 순간적으로 그 녀석. 아니, 광해군의 얼굴을 불현듯 뇌리를 스쳐지나간 걸까. 그 녀석과 나는 동갑이지만 친구는 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서는 남녀간에 친구가 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아주 잠깐 머물렀던 임진년의 조선에선 그 녀석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었지. 그런 게……. 친구인 게 아닐까?
“아니요……. 그건 괜찮아요.”
“그럼 잘 되었네. 어차피 너희 엄마도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혼자라고 들었는데, 혹시 연락하고 지내는 외가 식구라도 있니?”
“외가 식구는 안 계세요.”
“그래. 있다고 하더라도 시신도 없는 오빠의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 이 세상에서 오로지 나만 빼고 말이다.”
그런데 고모의 말투가 ‘시간여행자’ 집안 출신 치고는 상당히 ‘시간여행’에 반감을 가진 듯한 태도다. 말투에서 그런 것이 너무나도 짙게 느껴졌다.
“고모도 시간여행을 하신 적이 있으세요?”
“물론이지. 나에게는 끔찍한 기억이었지만.”
‘끔찍한……?’
나에게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단어다. 더불어 그 끔찍함은 최근에도 겪었었다. 시간여행에서 아빠를 잃었으니까.
“여자는 갈 수는 있지만 돌아올 수는 없지 않니? 그 때문에 오빠가 어린 시절에 장난친다고, 날 고려시대 어딘가에 내버려두고 일주일 만에 찾으러 왔었지. 그때 이후로 난 다시는 장난으로라도 오빠의 시간여행에 따라가지 않았어. 당시 사춘기였는데 고려시대에 버려졌다는 게 얼마나 충격이었던지……. 우리 집안의 여자에게 시간여행이란 끔찍한 저주와도 같다고 생각해, 난.”
“네에…….”
“다행인 건 찰리와의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말이야. 그 두 아이는 시간여행자가 아닌 것 같더라고. 혼혈이라서 그런 건지……. 어쨌든 난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너도 미국에 와서 새 출발을 했으면 좋겠구나. 아무래도 네 대에서 이 질긴 집안의 운명이 끊기려면 말이다.”
“그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제가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시간여행자가 되나요?”
“당연하지. 네 아빠는 대체 지금까지 네게 뭘 가르쳐준 거니?”
도를 넘어선 듯 느껴지는 고모의 아빠 비판에 나는 고모가 싫어졌다. 물론 고모에게 있어서는 시간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매우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서 그런 듯 보이니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말이다.
“제가 궁금해 한 것에 대해서만 말씀해주셨어요.”
“그래? 어쨌든 모두 잊어버리렴. 그리고 이 집은 전세라고? 내일 나와 집주인부터 만나자. 집도 처분해야 하고. 아니지. 일단 네 아빠를 행방불명으로 신고부터 해야겠다. 그러고 나서 일정기간이 지나면 자연히 사망처리를 할 수 있으니까. 한국도 미국과 법이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내 아버지 대는 그렇게 했던 것 같아.”
“고모의 아버지라면……. 할아버지요? 할아버지도 실종되셨어요?”
“실종되기는! 과거의 역사 어느 곳에서 죽었지. 그래서 내가 우리 집안이 저주받았다고 말하는 거란다. 우습지 않니? 역사에 개입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개입해 버리고……. 그로 인해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잖니. 실제 역사는 하나도 바꾸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인간이란 그렇게 멍청하고 어리석은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난 하루라도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구나.”
그녀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혼잣말로 중얼거리듯 영어를 몇 마디 내뱉었다. 슬랭인지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좋은 의미의 말 같지는 않았다.
“난 나리호텔에서 머물고 있어. 이건 내 객실 번호. 무슨 일은 없겠지만, 혹시 급하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하렴. 일단 내일 점심 때쯤에 다시 오마. 그때 약속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요. 집에 있을 거예요.”
“알았다. 그럼 내일 보자꾸나. 문단속 잘하렴.”
고모가 나간 후, 집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창 밖에서는 아파트로 들어오는 어떤 자동차의 소리도 들려왔다. 고요함만 가득한 집 안에서 나는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재빨리 훔쳐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나는 조금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부엌으로 가서는 밥솥을 열었다. 밥솥을 열고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3일 전에 그 녀석이 왔을 때 이후로 집에서 밥을 먹은 적이 전혀 없다는 걸 말이다. 한 끼 정도나 먹었을까? 그것도 대부분 밖에서 간단한 패스트푸드로 때웠던 것 같다.
밥을 떠놓고도 도무지 목구멍으로 넘길 기분이 아니어서, 나는 밥그릇에 물을 부어넣었다. 엉성한 죽을 만들어서 그것을 억지로라도 한 스푼 뜨려는데, 3일 전에 맞은편에 앉아서 밥을 아주 맛있게 먹던 그 녀석이 떠올랐다.
‘그 녀석은 이 자리에서 부서진 옥패를 소중히 손에 쥐었지.’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었다. 그래 맞아. 광해군의 모친 공빈 김 씨는 그가 2살 때 죽었다. 2살 때라면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그와의 공통점을 찾아가며, 이런 상황에 놓인 나 자신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지. 그곳에서 십여 년을 살다가 그곳에서 죽고.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복위될 거라고 믿었다지.’
그 녀석. 다름 아닌 광해군의 인생을 생각해보면 내 인생이 더 나은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그의 신세가 나보다는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있지 않느냐.’]
그가 내게 했던 말.
[‘내가, 네가 알고 있는 내가 조선에 있지 않느냐. 그러니 이젠 너도 조선에 아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 말하지는 못하겠지.’]
그가 내게 했던 말들.
내가 단지 조선인이었다면, 진짜 그 시대에 살아가는 조선인이었다면……. 차라리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조선인이 아니다. 슬픔도 외로움도 고통도 모두 혼자 이겨내야 한다.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이 시대 이곳에서 살다 죽을 때까지 말이다.
***
1599년(선조 32년) 봄, 경기도 연천.
“참말이냐? 그것이 참말이냔 말이다.”
“예에,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뢸까요. 똑똑히 제 두 귀로 들었습니다요. 세자저하께서 어제 황해도 수안 행궁으로 떠나셨으니, 조금 있으면 이 연천을 지나실 것이랍니다요.”
“그 먼 황해도까지는 어이하여?”
“아이참, 아기씨도. 수안행궁에 중전마마가 계시잖아요. 중전마마께 뭔 일이라도 생긴 모양인가 보죠.”
“그래? 허나, 아버님께 듣기로는 세자저하께서 얼마 전에야 몸이 다 나으셨다는데, 그 먼 길을 또다시 떠나셔야 한다니…….”
계집종의 말에 유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올해 16세의 소녀. 곱게 땋은 머리칼에 반짝이는 두 눈을 가진 그 소녀는 처녀티가 완연했다.
그녀는 얼마 전 전라도에서 돌아온 광해군이 수안행궁에 있는 중전마마를 보러 간다는 말에 상당히 들떠 있었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출궁해서 한성을 빠져나가는 세자, 광해군을 볼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어서 채비하자꾸나.”
“네?”
“세자저하를 멀리서나마 보려면 아버님이 안 계신 틈에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
“아기씨! 아버님이야 세자저하께서 연천을 지나시니 그곳으로 벌써 가셨지요. 그나저나 아버님 눈에 안 띄고 세자저하를 뵈올려면 꼭꼭 숨어 눈만 이렇게 빠끔 내놓고 보셔야 할 걸요? 그렇게 보아서는 세자저하의 발치나 제대로 볼까 모르겠네. 그러지 마시고 아버님께 부탁해 보셔요. 세자저하의 후궁이라도 될 수 있게 말예요. 아버님이 아기씨를 그리 아끼시니 또 알아요? 오늘 세자저하께 아기씨 이야기를 꺼내실지 말예요.”
“남사스럽게…….”
양반가의 규수임에도 체면치례 불구하고 문 밖을 나서려는 소녀도, 막상 대놓고 후궁이니 뭐니 하며 말을 꺼내는 계집종 앞에서는 얼굴이 탐스럽게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그녀의 이름은 김인아(金仁兒). 연천군수 김제남의 둘째 여식으로, 현재 부친을 따라 임지인 연천군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7년 전. 그녀가 8세밖에 되지 않았을 때 유모와 함께 황해도로 피난하던 도중에 왜적을 만났던 그 어린 소녀였다.
당시 어린 나이의 그녀였지만, 자신을 품에 안고 왜적의 칼을 맞고 죽었던 사내 하며, 그 앞으로 검을 들고 나섰던 광해군을 똑똑히 기억했다. 물론 검을 들고 나섰던 사내가 광해군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부친에게서 듣게 되었지만 말이다.
인아는 자신의 몸에 늘 지니고 다니는 작은 비단 주머니를 풀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광해군이 잃어버린 옥패의 부서진 반쪽이었다. 그녀는 마치 그것이 광해군인양, 아주 조심스럽게 손으로 쓸어보더니 말했다.
“어서 나가자꾸나.”
“네, 아기씨.”
계집종도 뭐가 신이 났는지, 인아가 외출 시 사용할 장옷을 챙겨들고는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로부터 3년 뒤.
광해군을 양자로 들였던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가 승하하게 된다. 그리고 광해군을 향한 연모를 키워가던 이 어린 아가씨는 19살의 나이로 51세 선조의 두 번째 정비가 된다. 그녀가 바로 훗날의 인목대비라 불리게 되는 여인으로, 광해군에 의해서 온 가족이 참변을 당하고 어린 아들인 영창대군을 잔혹하게 잃게 되는 비운의 여인이다.
***
“저하의 말을 듣자하니, 아직도 저하께서는 그 여인을 잊지 못하신 듯합니다.”
세자 광해군과 나란히 말을 타고 가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가 있었다. 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였다. 현재 선조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 씨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는 인빈 김 씨의 소생 중에서 유일하게 광해군과 사이가 좋았다.
“내가 잊지 못하였다고? 그 말은 내가 그 여인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광해군이 웃으며 정원군의 말을 받았다.
“저하의 말씀대로라면 벌써 7년도 지난 일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저하께서는 어제 있었던 일인 양 그 여인에 대하여 말씀하시지 않으십니까? 그러니 이 아우는 그리 여길 수밖에요.”
“글쎄다……. 무탈하게 살아 있다면 이미 다른 이의 아내가 되었을 여인인데, 어찌 내가 그런 마음을 품겠느냐.”
25세의 광해군은 십대 시절의 마지막을 전쟁 속에서 보내며 더욱 늠름해지고 사내대장부다워졌다. 그런 그에 비해서 선조의 피난길에 동행하며 자란 19세의 정원군은 광해군과 비교해 약골로 보일 정도로 마른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이의 여인이 되었다 하여 순순히 잊으실 저하로 보이시지는 않습니다만.”
“하하하. 그저 어디에서 잘 살고 있는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구나.”
“저는 그 여인이 보고 싶습니다.”
뜬금없는 정원군의 말에 광해가 귀를 세운다.
“오오? 너는 어찌하여 그 여인을 보고 싶다 말하느냐?”
“이 아우의 어린 시절부터 저하께 누누이 듣지 않았습니까? 저하께서 세자라는 것을 알고도 그리 소리를 높인 여인에 대해서요. 그러니 호기심이 듭니다.”
“그래? 보여줄 수만 있다면 네게 보여주고 싶구나…….”
말끝을 흐리는 광해의 얼굴을 살피며 정원군이 물었다.
“정말 밤이라는 걸 믿을 수 없는 정도로 밝은 세상이 있습니까?”
광해군은 그것이 자신이 정원군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광해군은 바로 확답을 주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세월이 흘러서인지 그 세상은 잘 기억나지 않는구나. 아마도 그때 별빛을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밝은 빛을 내던 불들은 그 뒤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이젠 잘못 본 것이라 우기시는 것입니까?”
“우기다니?”
“그 나라에서 보았다던 여인에 대해서는 매일 같이 이야기를 들려주실 정도로 생생히 기억하시면서, 어찌 그 나라에 대한 것은 잊으셨다 말하시니 말입니다.”
“나도 그것이 이상하다. 아마도 그 놀라웠던 세상은 놀라움으로 그쳤지만……. 네 말대로 그 여인은 내 마음에 남아 오래도록 나를 괴롭혀서 그런가 보다.”
“그 덕에 저하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이 아우에게는, 그 여인이 마치 제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느껴지니 말입니다.”
“허허, 아우가 나를 놀리는구나.”
“어찌 감히 신하된 몸으로 형님 저하를 놀릴 수가 있겠사옵니까.”
태평하게 말을 받아치는 정원군을 보면서 광해도 뭐가 좋은지 히죽거렸다.
“그런데 저하. 이 아우, 한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무엇이냐?”
“이번에 중전마마를 배알하고 한성으로 돌아온 뒤에 말입니다. 저에게 사냥을 가르쳐주시는 겁니다.”
“나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구나.”
광해가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정원군의 모친 인빈 김 씨는 선조의 총애를 등에 업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모함했다. 그러다보니, 한성에서 광해군은 죽은 듯이 동궁전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사냥? 전후 복구에 여념이 없는 한성에서 세자가 사냥을 나간다면 인빈이 이 기회를 절대 놓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제게 가르침을 달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걱정 마십시오. 어머님께도 먼저 말씀드리고, 아바마마께는 제가 직접 청을 드려 허락을 받아낼 생각입니다. 그러면 신하들도 감히 왈가왈부하지 못할 것입니다.”
“좋다. 그럼 이 일은 수안에 계신 중전마마를 배알하고 돌아온 후에 더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자.”
“예, 형님. 그럼……. 더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무슨 이야기를 말이냐?”
“시치미를 떼시는 것이옵니까? 그 신비한 나라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 나라 여인들은 참말로 그리 사내에게 대든답니까?”
“하하. 아우가 나와 황해도행을 가겠다고 자처한 이유가 그것이었나? 내게 7년 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말이야.”
“거짓을 고하진 않겠습니다. 그런 마음도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하오나 어쩌겠습니까? 저하께 듣는 그 이야기야말로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가 않으니 말입니다.”
“이것 참, 심심한 여정이 되진 않을 것 같구나.”
광해군이 호탕하게 웃었다. 정원군도 그런 광해군을 따라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그런 그들과 함께, 그들을 뒤따르는 수십 명의 병사들의 머리 위로 봄의 태양이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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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양 (luck****) 2013-08-16 13:26 |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