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45/45)

* * *

아무리 닉스가 그걸 원한다고 해도, 에반의 망설임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설득하려 애를 쓰고 애원하거나 울음을 토해내기도 했지만, 닉스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아, 에반.”

그 말은 에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숨이 콱 막혀 한순간에 얼굴이 파리하게 질릴 정도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닉스를 억지로 부여잡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닉스는 그런 그의 얼굴을 쓰다듬어주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함께 있어도 함께 있는 것 같지 않아.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

네가 사랑을 속삭여 줄 때가 좋았다. 네가 나를 바라보며 웃어줄 때가 좋았다. 나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것이,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쫓는 것이, 네 안에 내가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 좋았다. 어린 시절이 그러했고, 이 탑에 처음 왔을 때도 그러했다. 네가 고통받기 전까지만 해도 그 모든 시간이 행복이었다. 그러니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닉스의 속삭임 하나하나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제 메마를 때도 되었건만,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에반은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보내던 시간들이 행복했노라 말하고 있는데,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기뻤다. 그가 억지로 붙잡아 두었던 시간조차 행복이라고 말해 주니까. 그는 언제나 죄의식에 사로잡혀 그런 짓을 하는 자신에 대한 욕지기만 치밀었는데.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그의 행복을 위해 희생될 닉스에 대한 미안함이 커져만 갔는데.

“이제 더는 다른 곳을 바라보지 말자. 서로만 바라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니까.”

에반은 결국 주술을 사용했다. 그의 몸 안에 있던 어둠이 빠져나가는 걸 바라보며 에반과 닉스는 하염없이 울었다. 눈물이란 눈물은 다 쥐어짜 내고 다시는 울지 않을 거라는 듯.

그 뒤로 나름대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에반은 닉스의 말대로 그녀만을 바라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며, 매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했다. 여전히 닉스를 두고 떠날 자신이 없었고 홀로 남을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지만,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아직 멀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 걱정을 하는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니까, 차라리 조금이라도 덜 후회할 만큼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제야 닉스가 바라는 것이 무언지 알아차렸다. 자신은 떠나기 전 짧은 후회만이 남을 테지만, 닉스는 아니었다. 그를 보내고 난 후 기나긴 시간을 곱씹으며 살게 될 것이다. 그녀에게 후회만 남는 삶을 줄 순 없었다. 더 많은 추억을 만들어 조금이라도 덜 아프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닉스와 많은 것을 하기 위해 애를 썼다. 같이 온실을 꾸미기도 하고 이전처럼 요리를 만들거나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며, 현재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닉스의 눈빛과 목소리, 손짓 하나하나에서 자신을 향한 마음이 느껴져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기쁨이 차올랐다. 정말로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를 쫓았기에 벅찼다.

여전히 불안함과 의심이 끈덕지게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 했지만 무시할 수 있었다. 그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차지하고 있던 감정이 이렇듯 한순간에 사라질 수는 없는 거였으니까. 아마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그마저도 흐려져 언제 그랬냐는 듯 녹아 없어질 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잠자리에 든 에반은 잠결에 앓는 소리를 들었다. 몸을 일으키니 눈썹을 찌푸린 채 움찔거리는 닉스의 얼굴이 보였다. 또 악몽을 꾸나 싶어 그녀를 품에 안고 달래며 이름을 불러댔다. 닉스는 여전히 쉬이 일어나질 못했다.

“닉스, 일어나 봐.”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이 하얀 뺨을 가로질렀다. 안타까운 마음에 계속 닦아보지만 그만큼 또 흘러내려 얼굴을 적셨다.

“닉스!”

축축하게 젖어 아래로 가라앉은 검은색 속눈썹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그 아래로 한껏 일렁이는 검은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반은 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물었다.

“왜 그래? 또 악몽을 꾼 거야?”

“……아니.”

닉스는 입술을 꾹 깨물며 애를 쓰다가 결국 울음을 토해내며 에반을 끌어안았다. 얼떨결에 닉스에게 안긴 에반은 어쩔 줄 모르며 연신 왜 그러냐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물로 젖은 손은 그 가녀린 등허리를 도닥이며 달래주었다.

한동안 말없이 서럽게 울던 닉스가 그의 품에 안긴 채 입을 열었다.

“에반, 빛이 무엇인지 알았어. 내가 살아야만 했던 이유가 뭔지 알았다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닉스?”

에반은 상체를 일으키며 닉스를 내려다보았다. 난데없는 얘기에 놀랍기도 놀랍지만, 그것이 빛과 관련된 것이라니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신이 세상을 위해 준비한 안배는 너와 나였어. 어둠을 몰아내는 빛은 네가 아니라, 너와 나의 아이였어.”

“……아이? 아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당혹스럽게 물었지만, 그녀는 그저 흐느낄 뿐이었다. 에반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닉스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녀가 아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도 확신을 가지고선.

에반은 닉스가 예지몽을 꾼다는 것도 알았고, 점괘로 미래를 본다는 것도 알았다. 그 예지몽이라는 것은 얼마 전 닉스가 말해 준 얘기를 토대로 지금껏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는 것도 알지만, 그녀를 움직이게 하려고 신이 보여준 것 같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닉스는 또 어떠한 꿈을 꾼 것 같았다.

에반은 조심스레 닉스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납작한 배가 닉스의 흐느낌에 따라 잔 떨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설마…….”

닉스는 울다가 말고 웃음을 흘렸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즐겁다는 듯 입이 활짝 벌어졌다.

“에반, 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너와 나의 아이를.”

닉스의 말이 그의 귀를 통해 들어와 머릿속에 콱 박혔다. 그래도 그는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입이 벌어진 채로,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닉스의 배 위에 손바닥을 올려둔 채로 멍하니 굳어 있을 뿐이었다.

닉스가 웃으며 자신을 끌어안는데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얌전히 안겨 있었다.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를 닮은 아이를 보고 싶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을 보지 못한 만큼, 꼭 빼닮은 아이가 커가는 것이라도 대신 보고 싶었다.

하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닉스가 가질 수 없다고 말했으니까. 간절했던 것도 아니었다. 지금껏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닉스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못해 넘쳐흘렀다. 그저 있으면 더 좋겠다, 이 정도였다.

근데 뭘까, 이 감정은. 에반은 심장이 간질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뱃속 아래서부터 뭔가 몽글몽글 차올라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다.

“아이…… 아이라고?”

에반의 시야가 뿌예졌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차오른 눈물이 그대로 뚝뚝 흘렀다. 닉스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흘리며 그의 품에 콕 안겨 있을 뿐이었다. 에반은 천천히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 손길이 평소보다도 더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맞닿은 체온이 어느 때보다도 더욱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아, 닉스……. 정말이야? 정말, 이야?”

감정이 북받쳐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닉스는 품속에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제야 에반은 그녀의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

닉스가 아이를 가졌다. 자신의 아이를. 그녀의 뱃속에, 두 사람의 아이가 자리 잡았다.

“으아……. 아, 진짜……. 으…….”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을 잔뜩 찌푸리며,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못 하며 그렇게 혼란스러워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입꼬리만큼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었다.

“고마워, 닉스. 고맙다고 하는 거, 맞지?”

아니, 아이를 내려준 신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신은 지금껏 닉스를 아프게만 만들었는데. 힘들게만 만들었는데.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처럼 원망하고 화를 낼 수도 없잖아?

쉼 없이 고맙다고 중얼거리는데, 닉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붉어진 눈시울을 곱게 휘며 말했다.

“아냐, 에반. 이럴 땐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그럼?”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거야, 에반. 우리 둘의 사랑이 결실을 본 거니, 누구에게도 고마울 일이 없어.”

하. 에반은 짧게 웃음을 토해내곤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뒤늦게 그 배 속에 있을 아이가 생각나 어설프게 떼어내자 그녀가 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정도로는 괜찮을 거야. 내 몸은 그렇게까지 약하지 않아.”

에반은 아무래도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는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할지도 모르니까. 아이를 가진 그녀와 아이를 위해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 * *

황궁에 들렸을 때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더 늘어 있었다. 그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닉스의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아이를 가지면 입덧이라는 걸 해요. 그러면 제대로 먹지 못하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뭘 어떻게 해요, 어떻게든 먹여야지. 아이는 엄마 배 속에서 엄마가 먹는 음식을 받아먹는다고요. 엄마가 굶으면 아이도 굶어요. 자칫하면 엄마 몸에 있는 영양분을 빼앗아가 엄마만 말라갈 수도 있어요.”

“어머, 얘. 그렇다고 억지로 먹일 순 없잖아? 네가 못 겪어봐서 모르나 본데,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치미는데 억지로 쑤셔 넣는다고 될 것 같니? 그것도 고문이 따로 없어.”

“그러지 말고, 웬만하면 먹고 싶다는 걸 재깍재깍 가져다줘요. 그래 봤자 얼마 먹지도 못하고 또 게워낼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그래도 그중 속에서 받는 게 한두 개는 있을 거예요. 그런 거 위주로라도 드시게 해야 해요.”

“게다가 애 가졌을 때 서운한 건 평생 간대요. 아이가 성장해 결혼할 때까지 서운함을 내비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시면, 진짜 진짜 조심하셔야 해요.”

에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에게 미움받는 것이 가장 두려운 그였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슬프고 자괴감이 들 터였다.

“우리 언니는 아이 가졌을 때 남쪽 어느 음식점에서 딱 한 번 먹어본 요리가 그렇게 생각나서 미칠 뻔했다더라. 그것도 진짜 난감한 것 같아.”

“우리 어머니는 나 가지셨을 때 속에서 받는 음식이 꿀뿐이었대. 그래서 음식을 꿀에 비벼 먹고 물에도 꿀을 타 먹고,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드셨다더라. 지금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잖아. 아주 질려서.”

에반은 앞에 빙 둘러앉아 마치 참새 떼처럼 지저귀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하나같이 황궁에서 일하는 시녀들이었다. 에반은 처음, 닉스에게 항료를 선물하기 위해 시녀의 도움을 받은 이후로 궁금한 것이 생기거나 필요한 게 생기면 시녀들을 불렀다. 그렇게 그에게 불려갔던 시녀가 또 다른 시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또 요청하다 보니 어느덧 무리가 생겨났다.

그녀들은 아예 우르르 몰려와 자기네들끼리 회의도 하며 최대한 도와주려 애를 썼다. 대외적인 모습과 달리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만은 한없이 다정하고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하지만, 아는 게 없어 쩔쩔매는 순박한 그의 모습이 귀엽고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그 책 가져가시게요?”

시녀 중 하나가 그의 무릎 위에 놓인 책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책 표지에는 ‘임신과 출산’, ‘임신한 여자에게 해서는 안 될 말 100가지’, ‘아빠 닮은 딸, 엄마 닮은 아들’, ‘임신에 따른 여인의 몸 변화’와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

“어? 어. 도움이 될까 싶어서.”

“하지만 그 책들은 하나같이 남자가 쓴 건데요? 그보다는 차라리 여인들이 쓴 일기장이 더 도움이 될 걸요.”

“맞아.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나도 저 ‘임신한 여자에게 해서는 안 될 말 100가지’라는 책을 훑어본 적이 있는데, 어이가 없더라. 여자가 엄청 예민하고 까다로우며 욕심만 많고 자존감이 낮은 존재로 취급해.”

“진짜? 황당하다.”

에반은 무릎 위에 놓인 책 중 시녀가 말한 걸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앞뒤로 살피다가 시녀 중 하나에게 건넸다. 도로 가져다 놓으라는 뜻이었다.

“꼭 임신했다고 해야 할 말, 안 할 말 가릴 필요는 없어요. 그때 들어서 속상할 말은, 임신하지 않았을 때 들어도 속상한 말이에요.”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성격이 다르듯이, 임신과 출산 과정도 여인들마다 달라요. 책이든 우리 얘기든 그저 참고만 하시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분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실 거 아녜요?”

그건 그렇지. 에반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초에 평민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커온 에반은, 지금 앞에서 저들끼리 꺄르르 웃으며 편하게 얘기하는 여인들이 기분 나쁘다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우면 고마웠지.

에반은 결국 그녀들이 추천해 주는 책을 몇 개 들고 탑으로 돌아왔다. 도중에 시장에 들러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일 정도로 새콤한 과일 몇 개를 사든 채였다. 왜인지 몰라도, 임신한 여인들은 새콤한 과일을 좋아한다는 말에 준비한 거였다.

“나 왔어.”

“어서와.”

에반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닉스를 도로 앉혔다. 그런 그의 행동에 닉스가 곱게 눈을 흘겼다. 아무렇지도 않고 그렇게 위험한 것도 아니니 너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그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보통은 아이를 가진 상태로도 밭일을 한다는데, 그건 그거였고 이건 이거였다. 다른 여자들이 임신 중 일을 하든 말을 타든, 닉스만큼은 손에 물 한 방울조차 묻히게 하기가 싫었다.

“그건 다 뭐지?”

“아, 이거? 그냥 좀 읽어보면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리고 이건 너 먹으라고 사왔어. 혹시 막 새콤한 게 생각나고 그러지 않아?”

“전혀……. 생각나는군. 고마워.”

닉스는 고개를 저으려다 말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기대하는 에반을 눈치채곤 마지못해 그렇다고 해주었다. 그제야 에반은 뿌듯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닉스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걸 확인받고 받고 또 받고 싶어 했다.

닉스는 이 세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인지, 애초에 인간이 아니기 때문인 것인지 여느 여인들과 달리 입덧도 하지 않고, 특별히 끌리는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가리지 않았다.

그 점이 못내 서운한지라 에반이 먼저 이것저것 사다 바쳤다. 자신의 능력이라면 세상 끝에 있는 걸 달라 해도 줄 수 있는데, 정작 원하지를 않으니 뽐낼 수조차 없었다. 먼저 사다 주고 생색내는 것도 한두 번이지.

“에반, 그런 것 좀 그만 읽었으면 좋겠는데.”

닉스는 그걸로도 부족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말리곤 했다. 에반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도 소용이 없었다. 물론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에반은 닉스의 곁에서 책을 읽다 말고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그녀를 끌어안곤 했으니까.

“괜찮아, 닉스. 괜찮아. 내 능력은 치유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인 것 같은데. 에반,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으니 겁먹지 마.”

책에는 아이를 낳는 고통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었고, 결국 못 견디고 죽는 사례들도 적혀 있었다. 에반은 겁에 잔뜩 질렸지만, 정작 닉스는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죽지 않는데 뭘 걱정하느냐는 태도였지만, 그게 더 마음에 안 들었다.

“그렇다고 안 아픈 건 아니잖아? 그리고 이 아이는 닉스의 어둠을 모조리 가지고 태어날 아이라며. 그럼 완전히 마음 놓고 있을 순 없다고. 자, 가자.”

“……어딜?”

“적당한 운동이 필요하대. 탑 안은 너무 좁으니까 어디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가야겠어.”

그러곤 대뜸 그녀를 데리고 깊은 산속이나 드넓은 초원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위험하다며 꼼짝도 못 하게 하던 에반이, 이번엔 운동해야 한다고 데리고 나오니 닉스의 눈동자에 어이없다는 감정이 담겼다. 하지만 에반은 뻔뻔한 표정으로 ‘필요하대’라고 말할 뿐이었다.

결국 닉스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빙긋 웃었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에반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벅찼다. 이 모든 것이 행복이었다. 그녀가 그의 곁에 있었다. 그의 곁에서 웃고 있었다. 어찌 행복하지 않을까.

“늘 하얀 세상에만 있다가 이렇게 따뜻한 곳으로 오니까 이상하다, 그치?”

“그래서 더 좋은걸. 온실에 심을 꽃이나 몇 개 파갈까?”

“그것도 좋고.”

에반은 닉스를 내려다보며 마주 웃어주었다. 따스한 햇볕, 발아래로 느껴지는 푹신한 잔디, 바람결에 푸스스 우는 나뭇잎, 가까이서 들리는 새 지저귐, 맞닿은 손으로 느껴지는 체온. 이 모든 것이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새겨질 터였다.

먼 훗날 죽음을 앞둔 그때 떠올리며 미소 지을, 소중한 추억이.

* * *

닉스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무척이나 느리게 자라났다. 요안과 헤레이나 사이에 아이가 셋이나 태어났음에도, 닉스의 배는 그저 눈에 띌 정도로 부푼 것이 전부였다.

그간 탑을 제외하곤 많은 것이 달라졌다. 요안은 신의 힘을 받아들이는 데 성공했고, 주술이 부활했다. 하지만 네리아토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주술사들을 양성할 수가 없었다.

결국 요안은 사막에서 살 수 있도록 보내주었던 루아단에게 도움을 청했다. 에반은 닉스의 배 속에 자신의 아이가 자리 잡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의 마음속에 자신만이 가득하다는 걸 이제는 믿게 된 건지 이전만큼 루아단이 불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닉스와 만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것이 질투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세상이 그렇게 변하는 동안, 에반도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갔다. 여전히 처음 만났던 날처럼 아름답기만 한 닉스를 바라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지만 금세 묻어둘 정도로 여유로워졌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닉스의 곁을 떠날 때가 다가오면 더 오래 살겠다고 애원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결국 약속을 지켰다는 안도감이 차지하는 비중도 컸다. 자신이 떠나도, 닉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배 속 아이가 그녀를 지켜줄 것이다.

어떻게든 더 오래 살기 위해 몸에 좋다는 건 다 챙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 그는, 그만큼이나 닉스의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도 온갖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를 대신할 아이니까. 아이에게 고맙고 닉스에게 미안한 만큼 그는 더욱 노력했다.

아이를 위해 탑을 꾸미고, 아이를 위해 장난감을 만들었다. 그의 손재주도 썩 좋은 편은 아닌지라 닉스와 에반은 장난감을 만들다 말고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를 앉혀놓고 동화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닉스는 어디서 그런 걸 배워오느냐고 물었지만, 대답해 주지 않았다. 시녀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은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때론 닉스의 손을 잡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넓었고 다양했다. 마녀의 숲과 황궁, 새로운 마녀의 탑 등이 전부였던 닉스와 에반은 생각보다 훨씬 찬란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며 차곡차곡 추억들을 쌓아 나갔다.

“닉스, 가고 싶은 곳 없어?”

“……바다?”

“바다?”

닉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곳들도 함께 다시 찾아가 보며 기억을 덧씌웠다. 그녀의 안에 자신이 살아갔으면 했다. 자신을 떠올릴 때 후회하지 않았으면 했다. 아프거나 힘들지 않았으면 했다.

슬픈 건 어쩔 수가 없을 테니까, 떠나갈 그보다 남겨질 그녀가 더욱 슬플 수밖에 없으니까,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을 안겨주고 싶었다.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 봐도 끝이 없어서 시간이 흐르는 것조차 잊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 가자. 어디든.”

에반은 닉스의 손을 꼭 붙잡았다. 자신이 끝을 맞이하는 그날까지, 이 손을 놓는 일은 없을 터였다. 간신히 손에 넣은 마녀를 놓아주는 일은 없을 터였다.

영원히. 죽어서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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