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에반은 혹시라도 닉스가 뭔가를 알아내고자 할까 봐,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어떻게든 이성을 부여잡고 그녀의 말과 행동에 반응해 주었다. 언젠가 생각했지만, 자신은 정말 닉스를 지독히도 사랑했다.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되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렇듯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고 있을 정도로.
지금의 그는 정신을 부여잡고 있을수록 괴로웠다.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본능에 맡기면 고통스럽지라도 않았다. 그녀를 탐하고 싶은 욕구와 아껴주고 싶은 이성이 부딪히면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는 자신이 끔찍할 정도로 미워졌고,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웠으며, 결국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이어졌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정이 변하는 것은 본인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도 다시금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정신을 잃은 자신은 닉스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고, 어떤 상처를 입힐지 알 수 없으니까.
그리고 닉스가 해달라는 것은 웬만하면 다 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날 있었던 일에 얽매여 있는 대신, 차라리 시선을 다른 곳에 두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녀가 먼저 그러고자 하는 것이 기쁠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원한다는 말 한마디에 황후를 찾아가 닉스를 만나달라고 부탁했고, 그녀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자리도 비켜주었다. 혹시 몰라 멀리서 귀를 기울이기는 했으나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그 뒤로 황후가 주는 물건들을 닉스 앞으로 배달해 주기도 했다. 황후가 보내오는 옷이나 장신구는 확실히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뭔들 안 어울리겠느냐마는 그렇듯 꾸미고 부끄러워하는 닉스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행복하다고, 그리 여겼다.
그것이 무척이나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기 전까지.
헤레이나가 자신의 몸보다도 훨씬 큰 액자를 선물했던 날이었다. 탑 안은 조금 썰렁한 편이었고, 확실히 여인의 눈은 날카롭다고 생각하며 벽에 걸어두었다. 그 자체로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그게 신기해 눈을 떼지 못하는데, 닉스가 말을 걸어왔다.
“에반, 전에 온실에서 벌어졌던 일은 무엇…….”
“그만.”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묻지 않았으면 했다. 알려고 하지 않았으면 했다. 자신은 닉스에게서 희망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희망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곧장 더없는 절망으로 취급받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닉스는, 이미 뭔가를 알아차린 듯했다.
“너는 황제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미 알고 있지 않나? 파멸할 것을 앎에도 왜 같은 길을 가려 하는가?”
에반은 헤레이나와 닉스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를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에반은 그만둘 수 없다고 말했다. 황제가 어떻게 되었든,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괴물이 된다 해도 오래오래 살아, 그만큼 오래 닉스의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자신의 몸과 정신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닉스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냥…… 그냥 함께하다가……. 이전처럼 그리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끝을 맞이하면 되겠지. 나를 더 이상 미안하게 만들지 말거라, 에반. 더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지 말거라. 나는 지금도 충분히 네게 고통만을 안겨주는 나를 미워하고 있으니, 더 이상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 말거라.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에게 커다란 짐을 떠안긴 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내 처지를 헤아려주거라.”
닉스가 미안해 할 일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잘못인걸. 그녀를 죽여주지도, 그렇다고 저주를 풀어주지도 못하는 자신 탓이었다. 그가 정말 그녀를 죽여줄 빛이었다면, 그러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괴물 피로 이성이 흐려지고 그녀를 상처 입히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저 그녀의 말대로 짧지만 행복한 삶을 살다가, 그 끝에 가서 같이 죽음을 맞이하면 되는 거였다. 그것을 해주지 못하기에 이런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이마저도 하지 말라 하면 나는 견딜 수가 없어. 약속을 지켜야 하잖아. 약속했잖아.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는 없는데, 어째서 말리는 거야. 날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 셈이야.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네게…….”
네게 죽음을 주고 싶은데.
에반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여인의 단 하나뿐인 소망조차 들어주지 못하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처지인지.
에반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꼭 주먹 쥔 채 바닥만 내려다보다가 또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겠지. 늦기 전에 수습하러 갔다 와야겠어.”
그녀의 앞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애원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 흐려지는 이성을 붙잡기도 버거웠고, 그녀에게 화를 내며 상처를 줄까 봐 불안했다.
그래서 황궁으로 와 이미 헤레이나에게 모든 사실을 전달받은 요안 앞에서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만을 내뱉다가 다시 탑으로 돌아왔지만,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 또 펼쳐진 후였다.
이미 한 번 겪어보았지만 심장이 멈춘 닉스는 그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치유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을 때, 더없는 안도와 분노가 한 번에 솟아올랐다.
그는 차마 닉스에게 화를 낼 순 없어 탑 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 특히 그녀의 심장을 찌른 검과 그 검을 담았던 액자는 본래 모습이 뭐였는지도 알 수 없게 산산이 조각을 내었다.
황후 헤레이나야말로 마녀였다. 닉스와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 그녀가 자신의 몸을 지킬 검을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의심했어야 하는 건데.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닉스는 이미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였으니까.
“왜 나를 속였어?”
닉스가 그리 물을 때, 에반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왜 내게 죽여주겠다고 속삭였느냐고, 왜!”
닉스의 눈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차마 닦아줄 수가 없었다. 에반은 닉스가 자신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그녀를 달래러 애를 썼다. 그의 힘이 담긴 검을 제 심장에 박아 넣었으나 이렇게 도로 되살아나고 말았으니, 이미 그가 자신을 죽여줄 빛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깨달았을 터였다.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닉스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에반의 속에서도 울음이 울컥울컥 치밀었다.
“네가 죽고 난 후 나는 어쩌면 좋지?”
닉스는 숨이 막힌 것처럼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오열했다. 하지만 쉼 없이 흐르는 눈물과 크게 벌려진 입과 달리 새어 나오는 소리는 끅끅거리는 숨넘어가는 소리가 끝이었다. 에반은 자신의 가슴에 상처를 내는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그를 뿌리치고 있었다.
“차라리 나를 찾아오지 말지 그랬어! 그저 나 혼자 쓸쓸히 시간을 죽일 수 있게 만들지 그랬어! 왜 나를 찾아왔어, 왜!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안기냔 말이야!”
그러곤 고개를 치켜들고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는 닉스를 바라보며 에반도 가슴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닉스는 진실을 알게 되었고 상처 입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그녀는 무너지고 말았다. 자신을 뿌리친다. 지금껏 곁에 있었던 이유가 사라졌기에, 그를 더 이상 받아주지 않는다. 거부한다.
“왜 나를 찾아와서, 왜 나를 찾아와서…….”
그를 원망한다. 미워한다.
“……그러지 마.”
에반의 세상도 무너져 내렸다.
“찾아온 건 내가 맞지만 그걸 거두어 이렇게 만든 건 닉스잖아. 받아주고 키워주고 가르친 것도 닉스고, 내가 너를 갈망하다 못해 미치게 한 것도 닉스잖아. 그러니 나를 미워하지 마. 나를 원망하지 마.”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너잖아.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닉스. 나는 그저 너와 함께 있고 싶었을 뿐이야. 네 그림자가 나를 쫓아다닌다는 걸 알았던 그때부터, 네가 나를 괴물이 아닌 하나의 사람으로 봐주었던 그 순간부터, 내 세상엔 네가 전부였어. 홀로 남았던 내게 다가와 모든 것이 되어준 건 너였어. 너를 잃으면 전부를 잃고 마는데, 살 수가 없는데, 그런 내가 어떻게 너를 쫓지 않겠어?
그래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니까, 네가 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기뻤으니까 더는 욕심내지 말자고 노력했어. 내 존재가 필요해지면 내 곁에 있어줄 테니까 그저 쓸모 있기 위해 노력했어.
근데 그 노력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어. 나는 네게 그 어떤 것도 해줄 수가 없으니까.
“너무 아파. 나도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
가슴속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에반은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게 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 죽음을 줄 수도 없고, 저주를 풀어줄 수도 없다. 쓸모가 없다.
하지만……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절망스럽게 만들었는지 알면서도 포기할 수가 없다. 놓을 수가 없다.
“노력할게. 닉스,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네가 죽을 수 없다면 내가 살게. 내가 아예 미쳐서, 결국 미쳐 버려서 전 황제처럼 그렇게 된다 해도, 너를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을 거니까. 그것만은 맹세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마. 내가 더 노력할게. 너를 위해 괴물이 될게. 어떻게든 오래 살게. 네가 아프게 하지 않도록, 어떻게든…… 어떻게든…….”
그러니 제발, 닉스. 제발, 나를 버리지 마.
에반은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뿌연 시야로 자신처럼 울고 있는 닉스가 들어왔다.
“죽여주겠다는 약속도, 저주를 풀겠다는 약속도 지킬 수가 없지만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킬게. 그러니 아파하지 마. 할 수만 있다면 네 고통도 모조리 내가 가져오고 싶어. 네 슬픔도, 두려움도 전부 내가 떠안고 싶어. 그로 인해 네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웃을 수만 있다면…… 난 무엇이든 감당할 수 있을 텐데.”
차라리 이 모든 것을 자신이 떠안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닉스가 행복할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할 텐데, 그마저도 그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 * *
닉스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에반은 괴물 피를 집어넣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이전보다 더욱 간절해졌다. 닉스가 또다시 자신을 떠나려고만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그를 거둔 이유도, 데려다가 가르쳤던 이유도 모조리 그가 그녀를 죽여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억지로 탑에 가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도 따뜻한 시선과 손길을 내어주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 처음 탑에 갇혔을 때처럼 텅 빈 채 그를 외면할 것이다. 그는 희망이 아니니, 그걸 막아설 수가 없다. 그런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 그녀를 홀로 남겨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그는 절박하게 매달렸다.
그 탓에 몸도 마음도 정신도 망가져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대부분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저 갑작스레 고통이 찾아오면 몸부림 치고 잠잠해지면 한숨을 돌리며, 그렇게 피폐해져만 가던 중이었다.
“……에반.”
에반은 닉스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에반이 괴물의 피로 알게 된 지식들을 모조리 말해 준 뒤, 한참을 가만히 누워 있기만 했다. 얼마 만에 듣는 닉스의 목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자신을 부르는 것이 기쁘기만 한 건 정말 미친 걸까?
하지만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는 더는 그를 불러주지도, 바라봐주지도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질려 있었으니까.
“이미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네가 아파하는 것을 볼 자신이 없다.”
그때는 에반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이 이런 짓을 하는 건 결과적으로 닉스를 위한 길이었다. 자신이 떠나면 닉스는 큰 고통을 겪을 테니까, 그걸 원치 않은 에반은 자신이 아픈 것을 택했을 뿐이다.
그녀의 곁에 있고 싶고, 또 그녀에게 외면당하고 싶지 않음과 동시에, 그녀를 아프거나 힘들거나 슬프게 만들지도 않고 그래서 결국 미움받지 않는 것.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왔다. 그리고 이것이 단 하나 남은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니 고통스러운 것이 대수일까.
“긴 삶을 피로 물드느니 짧지만 찬란한 삶을 함께하고 싶은데,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에반은 그녀의 말뜻을 금방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결코 좋은 얘기가 아닐 거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렇듯 고통으로 가득해, 나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 되는 건 원치 않는다. 나는 네가 어설프게 웃는 미소를 좋아했다.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고 따뜻하게 쳐다봐주는 게 좋았다. 지금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도 너무 아까운데, 차라리 짧더라도 함께 행복한 삶이 낫지 않을까?”
닉스는 지금 에반에게 더 오래 살려는 짓을 그만두라고 말하고 있었다. 에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었다.
“안 돼, 닉스. 나는 너를 두고 떠날 수 없어. 아팠다며. 슬펐다며. 고통스러웠다며. 내가 떠나고 난 후 혼자 남은 너는 차라리 죽고만 싶은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죽지 못했다며. 내가 얼마나 밉고 원망스럽고 증오스러웠을지, 이미 알아버렸어. 나는 네게 그런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영원토록 미움받고 싶지도 않아.”
닉스는 또 울음을 터트렸다. 에반은 가슴이 아파와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녀를 웃게 하고 싶었는데, 늘 울리기만 하는 이런 상황이 너무 싫었다.
“괜찮아, 닉스. 금방 익숙해질 거야. 지금도 차차 익숙해지고 있는걸. 그러니 울지 마.”
눈물을 훔치고 또 훔쳐도 계속 흘러내려 울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이 고작인데, 작게 흐느끼던 닉스가 입을 열었다.
“사랑해, 에반.”
“……뭐?”
이미 그녀의 입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지만, 지금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때는 에반이 쓸모 있다고 믿던 때였다. 그가 그녀의 곁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그를 거짓말로 붙잡을 필요 따윈 없었으니까.
닉스는 놀라 굳어버린 에반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함께 걸어갈 길이 가시넝쿨 대신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먼 훗날, 아름다웠던 기억들만 남을 테니까. 너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난 또 후회할 것 같거든. 네 붉은 눈동자를 더 봐둘걸, 너의 웃는 모습을 더 많이 봐둘 걸……. 흑……. 네게 사랑한다고…… 정말 미칠 듯이 사랑한다고 말해 둘 걸……. 흐윽…….”
에반은 그녀가 떠나보낼 준비를 할 생각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절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닉스. 안 돼. 포기하지 마. 나를 놓지 마, 제발. 영원히 네 곁에 있으라고 해. 어떻게든 그렇게 할게. 아냐,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난 그렇게 할 거야. 어떻게 나보고 너를 두고 떠날 준비를 하라 그래? 난 못해. 안 해.”
떠날 수 없다. 그녀를 홀로 남겨둘 수 없다. 그리하여 그녀가 긴 시간 동안 고통받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는다. 자신은 영원히 그녀의 곁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행복이다. 간절한 소망이다.
에반은 단검을 꺼내 그와 그녀의 손바닥을 그었다. 그리고 겹쳐 잡았다. 닉스의 피는 괴물의 피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오래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그녀를 두고 죽을 수 없다는 생각밖에는. 그녀를 고통 속에 남겨둘 수는 없었다.
그는 울음을 토해내며 맞닿은 손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나는 너를 포기하는 게 아니야. 너를 붙잡고 있는 거야. 이제야 나는 모든 것을 감내할 준비가 된 거야. 네 감정도, 마음도, 생각도 모조리 받아들이고 싶어졌어. 너와 함께할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내게 끝이 주어질 그날까지 오로지 너만을 생각하고 내 안에서 함께 살 수 있게…… 조금씩 조금씩 준비해 나가려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우는 닉스는,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검은색 눈동자에 그만을 오롯이 담으며 미소 지었다.
에반은 흐느끼는 것도 멈추고 그녀의 말만을 곱씹었다. 밀어내지도 않고 뿌리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버리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는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함께할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홀로 남을 그 시간 동안, 고통받지 않도록.
사실 에반은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끊임없이 괴물의 피를 주입한다고 해도 영원히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고작 시간을 느려지게 할 뿐이다. 그마저도 그가 지닌 빛이 자꾸 몰아내니, 어쩌면 지금도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저 알면서도, 놓지 못했을 뿐이다. 희박할지라도 부여잡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의 구덩이에 떨어질 것만 같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존재가 닉스를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자신의 이기심으로 닉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알고 있는데.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인정하면, 더 이상 그 곁에 있을 수 없을 것만 같으니까. 차라리 죽고만 싶을 테니까.
그녀의 곁을 떠나선 살 수 없으니, 그 곁에 있을 수 없다면 자신의 세상을 무너트리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하면 그것은 또 닉스에게 고통이 되리라. 결국 에반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닉스는 깍지 낀 손을 그대로 에반의 목 뒤로 둘렀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사랑해, 에반.”
“닉스, 나 역시 너를 사랑해. 정말 미쳐도 좋을 만큼.”
“그래. 나를 미치도록 사랑해줘. 그리고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너를 사랑할 수 있게 해줘. 한 시간이 하루처럼, 하루가 한 달처럼 느껴지도록 모든 시간에 최선을 다하게 해줘. 지금껏 내가 살아왔던 시간보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시간보다, 너와 함께한 시간이 더욱 길게 느껴지도록, 그렇게 아낌없이 네 모든 것을 내게 줘. 나는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나도 빠짐없이 새겨둘게.”
에반은 다시금 흐느꼈다. 비로소 닉스의 진심을 알 것 같았다. 이제야 닉스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홀로 남는 고통을 이미 겪어봤음에도, 그를 위해 놓아주려 하는 닉스의 마음을 모를 수 없었다. 차라리 자신이 고통스럽고 싶다는 생각으로 괴물이 되려 했던 그처럼, 닉스는 차라리 자신이 고통스러울 길을 택했다. 에반을 위해.
“울지 마. 앞으로 네 모든 것이 내 속에서 살아갈 텐데, 아프지도 말고 화내지도 말고 울지도 마. 언제나 웃어줘. 다정하게 속삭여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줘. 그러면 난 영원히 행복한 여자로 살 수 있을 것만 같아.”
“사랑해. 사랑해, 닉스. 너를 정말 사랑해.”
에반은 연신 닉스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는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그녀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했다.
그녀의 선택을 받아들일 자신은 없지만,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길이라면 결국 자신은 따르고 말 거라는 사실쯤은 알았다. 그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긴 시간을 고통 속에서 함께하느니, 짧아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자, 우리.”
에반은 대답 대신 울음을 쏟아냈다. 감정을 이기지 못해 하염없이 토해내는 그런 울음이었다. 무엇을 선택하든 고통이 따른다면, 적어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의 세상엔 네가 전부니까.
삶이 끝나도 나는 영원히 너를 사랑할게. 지금껏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