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 뒤로 에반은 더 많은 피를 자신의 몸속에 집어넣었다.
피에 새겨진 잔혹성과 탐욕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에반은 점차 자신의 이성이 흐려지는 것을 알았지만, 닉스를 바라보며 가까스로 붙잡았다. 자신이 괴물이 된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오롯이 남아 있을 거라 여겼다. 아니, 자신했다.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인에게 상처를 주지는 말자. 그녀를 두렵게 만들거나 당혹스럽게 만들지는 말자. 되뇌고 또 되뇌었다.
갈수록 강해지는 잔혹성은 눈앞에 있는 여인을 울리고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만들라고 속삭였지만 눌러 참았다. 피를 갈망하고 전쟁을 원하며 고통을 바랐지만 외면했다. 끝끝내 견디기 어려울 때에는 탑 밖으로 나가 동물들을 잡아 죽였다. 난도질하고 잡아 뜯으며 해소했다. 탑 창문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 피로 물든 사체가 쌓여만 갔다.
갈수록 강해지는 탐욕은, 눈앞에 있는 여인을 오롯이 가지라고 속삭였지만 그 역시 눌러 참았다. 여인의 모든 것을, 그 깊은 곳을, 나아가 세상을 향한 욕심이 쉬지 않고 솟았지만 외면했다.
끝끝내 견디기 어려울 때에는 그녀에게서 도망을 쳤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강제로 취하게 될까 봐, 차라리 황궁으로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어떻게든 그녀와 더 오래 있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떨어지는 시간을 늘려만 갔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하루하루가 흘러가던 어느 날이었다.
모처럼 정신이 조금 맑게 개였다. 에반은 닉스를 데리고 시장으로 나왔다. 그녀가 세상을 궁금해하니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지 안심하고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끌 것 같았다.
바깥으로 나온 닉스는 즐거워 보였다. 그 모습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에반은 자신이 추악할 정도로 이기적이라는 걸 알았다. 닉스에게서 즐거움을 빼앗았다. 탑에 가두곤 오로지 자신만 보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렴 어떠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왜? 도리어 의문이 생겼다.
어차피 닉스는 자신을 만나기 전부터 탑에 갇혀 있었는걸. 그것도 자신이 원해서 스스로를 가뒀었는걸. 거기보다 더 아름다운 곳으로 옮겼고, 훨씬 더 안락한 삶을 주고 있잖아. 쓸쓸할까 봐 곁에 있어주는 이도 생겼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홀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도 있어. 그녀가 원하던 삶이 아닌가? 나는 그런 삶을 주고 있는 거잖아? 그러니 그녀는 고마워해야 해. 난 미안해 할 필요가 없어.
그녀의 마음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에반은 그저 그녀를 가질 뿐이었다. 그것에 만족하려 애쓸 뿐이었다. 더한 것을 원하려는 욕심을 억누르기 위해, 지금 이걸로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또 속였다. 그것만으로 벅차 닉스를 생각해 줄 여유가 없었다.
바깥으로 나온 김에 신전에 들러 황제의 명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한 에반은, 근처 의자에 닉스를 앉히곤 홀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대화를 마친 후 닉스에게 다가가자 그녀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닉스, 왜 그래? 혹시 어디 아파?”
“네가 그랬지? 붙잡혔던 어둠들을 모두 풀어주었다고.”
순간 에반의 얼굴이 일렁거렸다. 짜증도 치솟았다. 그 얘긴 왜 또 꺼내는 거야? 네 머릿속에서 이미 지워버린 것 아녔어?
“그래, 풀어줬어. 그러니까 그 얘긴 더 이상 하지 마.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려.”
그녀는 대답 대신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에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서둘러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하지만 닉스는 처음 보는 얼굴로 말했다.
“놔. 지금 놓지 않으면 너를 피할지도 몰라. 너를 두려워할지도 모른다고.”
머릿속에 반투명한 베일 하나가 덧씌워진 듯 온전한 생각을 떠올리기가 힘든 에반이었지만, 그 말만큼은 귀에 콱 박혀 들어왔다. 그래서 그녀의 팔을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갈등하자, 닉스는 곧장 뿌리치고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반은 길가에 떨어져 있는 신발을 발견했다. 이곳에 오기 전 닉스에게 신겨주었던 신발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즐거웠는데, 설렜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닉스를 쫓아 형장에 도착하자 그 앞에 주저앉아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어떻게…….”
“닉스, 내 말 좀 들어봐.”
저 시체들은 가짜야. 그렇게 말해 주려 했지만, 닉스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아. 네 그 거짓말은 더는 듣고 싶지가 않다고.”
지금껏 닉스에게 비록 받아들여지지 않을지언정 거절당한 적은 없었던 에반은 충격을 받아 그대로 우뚝 멈췄다. 닉스가 울고 있었다. 울면서 서러움을 토해내는데, 그 목소리도 표정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가슴속이 아팠다.
괴물 피로 인해 고통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녔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치밀어 올랐다.
아냐, 닉스. 네가 뭔가 오해하고 있어.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했는걸. 그녀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지만, 이어지는 닉스의 목소리에 모든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루아단.”
대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는 닉스가, 그 때문에 슬퍼하는 닉스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원망스러웠다.
내게는 그래 주지 않으면서. 나는 언제나 밀어내기만 하면서. 곁을 내어주지 않으면서. 어째서 그 자식은 마음속에 품은 거야? 왜 그 자식을 떠올리고 잊지 못하는 거야? 내 건데. 이 여인은 내 것인데. 대체 왜 오롯이 가질 수가 없는 거지?
에반은 닉스의 팔을 잡아채곤 곧장 탑으로 이동해 왔다. 그리고 그녀를 침대에 던지듯 눕혔다.
“대체 왜 우는 건데? 대체 왜 우는 거냐고. 뭐가 그렇게 서럽고 아파서 눈물을 흘려? 그들이 뭐라고 네 눈물을 바닥에 떨구는 거야? 어?”
그녀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 피도 눈물도, 향기도 체온도.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은 자신만이 가질 수 있었다. 이렇듯 가지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게 아깝고 또 아까웠다.
“루아단은 죽어선 안 되는 남자였다. 그래선 안 되는…….”
“그 자식이 그렇게 소중했어?”
그렇지 않아도 흐릿하던 이성이 아예 사라져 가고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 채워지는 것은 탐욕. 지금껏 끊임없이 속삭여오던 그 욕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앞에 있는 여자를 가져. 네 것이니까. 완벽하게 네 것으로 만들어. 가지고 또 가져. 질릴 때까지. 그러면, 넌 조금이나마 갈증이 해소될 거야.
“너는 내 것이야. 너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야. 네 머릿속엔 나만이 있어야 해. 나만 생각해. 네 눈은 나만을 바라봐야 하고, 네 목소리는 나만을 부르고, 네 손은 나만을 만지도록 해.”
그의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입고 있는 옷이 거추장스러웠다. 그녀를 완전히 느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거칠게 벗었다.
“네 몸과 마음, 모든 곳에 나를 새겨줄게. 다시는 다른 사람 따위 떠올릴 수 없도록. 영원히.”
그러곤 닉스의 다리를 붙잡아 자신의 어깨에 걸친 뒤 그 몸을 가리고 있는 천 쪼가리를 사정없이 찢어버렸다. 자신의 것을 보겠다는데 막아서는 것이 짜증 났다. 그녀를 보고 맡고 맛보며 완전히 가질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갈증과 굶주림이 해소될 때까지.
그렇게 제 안의 속삭임에 충실히 따르던 에반의 귀에 닉스의 젖은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 제발 너를 미워하게 하지 마.”
그 말은 이성을 잃은 에반임에도 쉽사리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미 아득한 곳에 처박힌 이성이 그 말에 반응했다. 닉스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간절한 바람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축 늘어져 작은 움직임 하나 없는 닉스가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하늘이 개이고 햇볕이 내리쬐는 것처럼 그의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는 눈앞에 벌어진 일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벌인 일이 아니라고 도망치고 싶었다.
“니, 닉스.”
닉스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에반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미안하다는 사과조차 나오질 않았다. 그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앓는 소리를 냈다.
닉스를 아껴주겠다고, 닉스에게는 상처를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들은 대체 어디에 있나. 고작 이것밖에 안 되나? 능력도 안 되는 주제에, 정신력까지 이렇게 약하면 도대체 어쩌자는 거지? 보잘것없는 자신이 정말 한심했다. 비참했다.
그는 바짝 메말라 퍼석거리는 것 같은 얼굴을 몇 번이고 문지르며 정신을 차리려 애를 쓰다가 겨우 그녀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자신이 막무가내로 찢어버린 옷을 벗기고 새로이 옷을 입혀 주었다. 누워 있는 그녀에게 입혀야 했으므로, 앞에서 여며 끈으로 고정하는 간편한 옷으로 골랐다.
그녀의 나신을 보고도 이성을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가느다란 몸이 축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이성을 잃는다면, 그건 정말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돌이킬 수 없을 터였다.
그녀 위에 이불까지 덮어준 후 에반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쭈그려 앉았다. 그렇게 닉스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그는 몸을 한껏 웅크린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마치 오래전, 엄마와 형이 없었던 집에 홀로 앉아 있을 때처럼. 자신을 괴물이라 손가락질하는 세상을 감당할 수가 없지만, 제 지친 몸 하나 누일 때가 없었던 그때처럼.
그러고 얼마나 있었을까. 인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닉스가 비틀비틀 상체를 일으켰다. 에반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닉스를 살폈다.
“닉스, 정신이 들어? 몸은 좀 괜찮아?”
그녀는 에반을 바라보는 대신 제 몸을 살피고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과 달라진 옷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알 수 없어 머뭇거리던 에반은, 그저 옷만 갈아입힌 거라고 말하며 안심시키려 애를 썼다. 하지만 닉스는 말없이 옷을 여밀 뿐이었다. 그녀가 겁을 먹었다는 것을 깨달은 에반은 참담함을 느꼈다.
“미안해, 닉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럴 생각조차 없다. 하지만 결국 이런 짓을 저지른 건 자신이었다. 그것이 피의 속삭임에 넘어가고 만 것일지라도, 결국 자신의 몸과 마음이지 않던가. 정말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닉스는 그런 그를 다독여주었다.
“괜찮다. 너야말로 많이 놀랐겠군.”
그 따뜻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미안해, 닉스. 내게 능력만 있다면 이런 짓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절박함은 에반을 구석까지 몰아넣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괴물 피를 포기할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로.
닉스는 그런 그에게 어둠에 대한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왜인지 멈칫거리며 도로 앉았고, 에반은 깜짝 놀라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아직 안정을 취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식사 준비는 내가 할게. 조금 누워 있어.”
“일단 씻는 것이 우선일 것 같은데.”
그러면서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 끄트머리에 앉는 닉스는, 온통 흙투성이였다. 그게 이제 와 눈에 들어올 정도로 에반은 정신이 없었다. 사실 말이나 행동, 감정까지 절반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는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뒤늦게 그 말뜻을 알아차리곤 안절부절못했다.
닉스가 씻으러 들어가면, 그 씻는 모습을 상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또 이성을 잃고 욕실로 향할지도 모르고, 간신히 참아낸다 해도 씻고 나온 닉스를 바라보면 그대로 침대에 눕힐지도 모른다. 언젠가 보았던 젖은 머리카락과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뺨, 더욱 붉어진 입술과 향긋하고 뽀얀 피부 등이 이성을 뒤흔들었다.
“그럼 나 황궁에 가 있을 테니까 편하게 씻어.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지만……. 닉스가 씻고 나오면 또 반쯤 미칠지도 몰라서……. 그러고 싶지 않은데 거의 발작 수준이더라고. 몸이 내 마음대로 안 따라주는 그런 느낌 알아? 본능이 이성을 이기려 든다 해야 하나…….”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말해 줄 수 없어 대강 둘러댔다. 사실은 그보다 더욱 심한데. 이성 따윈 아예 존재하지도 않게 되는데. 말 그대로 발작처럼, 순식간에 괴물로 변해버리는데.
또 닉스에게 그런 짓을 할 순 없으므로 황궁으로 도망치기 위해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다.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런 에반을 닉스가 붙잡았다.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며 바라보았다. 에반은 제복 상의에 팔을 끼다 말고 멍한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그렇지 않아도 그녀의 말과 행동이 온전히 들어오지 않는데, 혼란스러움까지 더해지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닉스. 방금 네가 한 말, 무슨 뜻인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 혹시 내가 뭘 오해하고 있는 건가?”
“아마 아닐 거다.”
“그럼 진짜로, 네가 괜찮다는 게……. 그게…….”
옷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져 팔에 걸쳐져 있던 제복이 뚝 떨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씻고 나오면 또 반쯤 미칠지 모른다고 했는데, 그래서 황궁에 가겠다고 했는데 괜찮다며 붙잡는다는 것은, 미쳐도 된다는 뜻인가? 그 미친다는 것이 닉스를 가지고 싶은 탐욕에 사로잡히는 건데, 그래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
“네가 언젠가 물었지. 너를 받아줄 수는 없느냐고.”
그녀의 말 한마디를 놓칠까 싶어 한껏 집중한 채 들었다. 그래 봤자 여전히 먼 곳에서 들리듯 흐릿했고 한 박자씩 늦게 이해되었지만, 나름대로 최대한 노력하는 중이었다.
“에반, 나는 처음부터 너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네 것이었으니 네 마음대로 해도 상관이 없다. 내 목소리도, 눈길도, 손짓도, 하다못해 마음까지도 모조리 네 것이니 더 이상 그렇게 불안해하지도, 괴로워하지도 말거라.”
에반이 멍청하게 굳어 있는 사이, 할 말을 끝낸 닉스는 욕실로 들어서기 위해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 살랑거리는 새카만 머리카락에 사로잡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던 에반은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그러곤 몸을 돌려세우자마자 입을 맞추었다.
가져. 앞에 있는 여인을 가져. 네 것이니까. 가지고 또 가지고 가져서 치솟는 갈증을 해소해. 질릴 때까지.
그래, 그럴 거야. 허락이 떨어졌으니까.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돼.
가슴 한구석에서 갑작스레 변한 닉스에 대한 의구심이 피어올랐지만, 그것은 곧 벅차오르는 환희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에반은 마치 짐승처럼, 닉스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억눌려 있던 모든 본능을 끄집어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을 갉아먹던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듯.
* * *
에반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탐욕과 잔혹성은 조금이나마 진정되었다. 닉스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속에 남아 있는 괴물의 피가 줄어들어 이성이 돌아오기 때문이기도 했고, 닉스를 가질 때마다 치솟던 욕심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모든 욕심은 닉스로 연결되었다. 그의 세상이 닉스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모든 탐욕을 그녀 하나를 가지는 것으로 해소했다.
비록 목이 타는 것 같은 갈증이 가라앉질 않아 닉스를 가만히 둘 수가 없다지만, 가까스로 망가트리거나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피할 수가 있었다. 그의 능력이 치유여서 다행이었다.
그 모든 탐욕을 받아내야 하는 닉스는 꽤 버거운지 스스로에게 치유 주술을 사용하지 말라는 부탁도 해왔지만, 에반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할 뿐이었다. 실제로 자신에게 주술을 사용하면 괴물 피가 모조리 사라지기에 작은 상처 하나도 치료 안 한 지 오래였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닉스와 함께 지내다가 에반의 곁에 맴도는 나비의 수가 다섯 마리쯤 늘었을 때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억지로 황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지금껏 미루고 미뤄왔던 일을 해치우고, 그간 닉스와 함께 지내느라 빠져나간 괴물 피를 도로 채워 넣었다.
얼마나 더 넣어야 제 몸에 있는 빛이 반응하지 않을까? 혹시 영원토록 제자리인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생각이 들어 평소보다 더 많이 집어넣었다.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견디기 어려운 고통스러움에 헐떡거렸다. 닉스와 함께 있을 때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 가장 곤란했다. 닉스를 쉬지 않고 괴롭히는 탓에 그녀가 기절하듯 잠이 드는 일이 잦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시금 에반의 몸속으로 들어온 괴물 피는 그의 이성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속삭임이 더욱 강해졌다. 결국 그는 탑으로 돌아오자마자 닉스를 안고 말았다. 그 속삭임에, 어둠에 지배되고 싶지 않은데 쉽지 않았다. 이만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멍하니 앉아 있는 것 같은 그의 머릿속에선 본능과 이성이 몸을 차지하기 위해 쉼 없이 싸우고 있었다. 차라리 이성을 놓아버리면 편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드문드문 떠올라, 간신히 정신을 차린 후에는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을 책망해야만 했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닉스가 차려준 음식을 욱여넣는데, 그녀가 말했다.
“우리 집에 가고 싶어졌다, 에반.”
에반은 닉스가 탑 안에만 있었으면 했다. 그나마 이곳은 덜 불안하니까. 그녀가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가장 먼저 자신을 떠날 것만 같았다.
닉스는 그가 그녀를 죽여줄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이미 ‘진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일렁거렸다. 그가 그녀를 죽여주지 못한다는 진실. 그래서 안심시키면서 도망칠 기회만 엿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나는 네 것이니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을 텐데.”
에반은 계속 망설였지만 그녀의 부탁을 쉬이 거절할 순 없었다. 에반은 늘 그렇듯 닉스에게 약했다. 절대 탑을 벗어나지 못해, 라고 속삭였던 것과 달리 제 스스로 시장에 데려갈 정도로.
닉스가 원하니까. 다름 아닌 닉스가 그에게 부탁해오는 거니까. 그녀가 원한다면 세상을 안겨줄 수도, 세상을 모조리 불태울 수도, 하다못해 제 목숨이라도 줄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 밖으로 나왔다. 바깥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이 쏟아지는 그 속에 닉스가 서 있으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그랬다. 닉스는 새하얀 눈 속에서 더욱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느릿하게 움직이거나, 입술에 묻은 눈을 맛보는 모습 하나하나가 매혹적이었다.
“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닉스는 눈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
“너와 닮았으니까.”
에반은 닉스의 대답이 금세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게 서 있었다. 어렸을 때도 닉스는 자신의 하얀 머리카락을 보고 눈을 닮았다고 했다. 이렇게 아름답고 깨끗한 것이 자신과 닮았다는 말도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런 눈을 자신과 닮아서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얘기는 자신을 좋아한다는……?
그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닉스가 그의 손을 잡고 주술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괴물 피에 사로잡힌 에반은 한 생각을 끈덕지게 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녀가 살던 집으로 이동해오는 순간, 눈밭에서 있었던 일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곳에서 에반은 신성 주술과 관련된 책도 읽고 지식도 쌓으며 시간을 보냈다. 어차피 책을 읽는다 쳐도 틈만 나면 정신이 멍해지는 터라 책장이 한참이 지나도 안 넘어가는 일이 잦았지만, 억지로 부여잡고 머릿속에 쑤셔 넣었다.
뭔가 떠올리고 끈질기게 붙잡는 것이 어려워서 그렇지, 기억력은 이전보다 훨씬 좋았기에 한 번 읽은 건 차곡차곡 저장되어 갔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몸이 자신 것 같지 않은, 자연스럽게 그리되는 게 아니라 해야 한다고 명령을 내리고 억지로 움직이는 느낌. 에반은 애초에 어둠이 아니고 그 세계의 존재가 아닌 자신이 억지로 피를 받아들여 생기는 문제점이라고 여겼다. 아마, 이전 황제 역시 이런 상태였을 것이 분명했다.
에반의 머릿속이나 몸이 이렇듯 정상이 아님에도 겉으로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가끔씩 멍하게 정신을 놓기도 하고 반응이 느릿할 때도 있었지만, 웬만하면 이전과 비슷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인지 닉스는 속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는 에반을 눈치채지 못했다.
닉스가 먼저 유혹을 해 같이 씻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닉스를 구속하고 있던 팔찌를 풀어주기도 했으며, 먹고 자고 책을 읽는 등 탑에서와 다를 것 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에반의 체력이 한계에 달했는지, 점점 조는 시간이 늘었다. 밤에 자려고 누워도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도로 깨곤 하니 피곤이 쌓일 법도 했다.
에반은 여전히 자신이 꾸는 꿈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악몽이라기보단 피가 어둠에 반응하거나 혹은 그렇게 반응한 피를 태우는 자신의 빛 때문에 고통스러운 걸지도 몰랐다.
그래도 괜찮았다. 행복했으니까. 에반은 지금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다. 구속하고 있던 팔찌를 풀었는데도 닉스는 그의 곁에 있었다. 끊임없이 속삭여 주었다. 그녀는 그의 것이라고, 불안해하지 말라고.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적어도 닉스가 그의 손에 죽을 수 있다고 믿는 한, 곁을 떠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아니었다.
무심코 잠이 들었던 에반은 일어나자마자 닉스부터 찾았다. 팔을 뻗어 옆을 더듬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에반은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입은 닉스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두려움에 질렸지만, 애써 다독였다. 전처럼 욕실에 있을 거라고, 그것도 아니면 주방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깜빡 잠이 든 그를 두고 식사를 준비하러 간 거라고, 그리 여기며 여기저기 둘러보았지만 왜인지 인기척도 없었다.
그제야 점점 심장이 빨리 뛰고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의 걸음이 더욱 다급해졌다.
“닉스?”
불안해하지 말라며. 믿어주길 바란다며. 마지막 희망인 나를 두고 떠날 일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나 그래도 되는 거지? 네 말 믿어도 되는 거지?
닉스의 아버지가 썼다던 방문도 열어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에반의 이마에 솟은 식은땀이 흘러내려 턱 끝에 맺혔다. 설마, 그녀를 죽이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그래서 이대로 도망친 건 아니겠지?
닥치는 대로 문이란 문은 다 열어보았지만 그녀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뛰다시피 본래 방으로 돌아온 에반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다가 베개 위에 놓인 쪽지 하나를 발견해냈다.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에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쪽지를 몇 번이고 읽고 또 읽다가 결국 그대로 놓아버렸다. 팔랑팔랑 허공을 가르며 바닥에 떨어진 종이가 그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믿었어? 멍청하게. 그러니까 가지라고 했잖아,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도록 완벽하게. 아니, 빼앗겨도 아쉽지 않을 만큼 질리게. 차라리 망가져 버리게.
그의 머릿속에 조소 섞인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갑작스레 주위 모든 것이 아득하게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처박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없었다, 닉스가. 정말로 사라져 버렸다. 왜? 대체 왜?
그를 이리로 데리고 온 것도, 그를 유혹한 것도, 그래서 안심시킨 것도 모조리 이걸 위해서였다는 걸 깨닫자 미칠 듯한 비참함이 그를 내리눌렀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여놓고, 그대로 도망쳐 버린 그녀에 대한 원망이 스멀스멀 차올라 숨이 턱턱 막혔다.
“어, 어디로? 어디지? 대체 어디지? 어디로 간 거지?”
닉스를 찾아야만 했다. 그녀를 봐야만 했다. 이대로는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죽을 수도 없었다. 닉스를 두고 죽으면 안 되었다.
살 수 없는데, 죽어서도 안 된다. 에반은 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어디야?’만 중얼거리다가 문득 떠오른 장소에 고개를 들었다.
“사막?”
갑자기 닉스가 자신을 받아들여 주기 시작했던 건, 그래서 그를 안심토록 했던 건 형장에 내걸린 어둠들을 보고 난 후였다. 그게 연관이 있을 거라 여겼다.
루아단 등이 죽었다고 생각한 그녀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녀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그녀가 사막에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은 익히 들었고, 그만큼 의미가 남달랐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쩌면 닉스에겐 마지막 속죄였던 걸지도 모른다.
에반은 보이는 대로 옷을 챙겨 입곤 곧장 사막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는 걸 확인했다.
“……에반?”
당혹스러운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닉스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짧은 시간 내 그의 속은 완전히 타들어 가 시커먼 재도 남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 대한 원망과 분노만이 가득 들어찼다. 왜 그렇게 자신을 아프게 만드는 건지, 왜 그렇게 괴롭게 만드는 건지.
그리고 놓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붙잡고 있었던 가느다란 희망마저도 거센 모래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그것은 어쩌면 그녀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지 모른다는, 실낱 같은 기대였다.
이제 에반은 알았다. 닉스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같을 리 없다는 걸. 닉스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면, 이런 짓은 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가 노력했던 것들이 부질없게도, 닉스는 여전히 그를 필요로 하기에 곁에 두었던 것뿐이었다.
“바보같이. 이미 알고 있었는데 혹시나 하는 기대에 얽매여선. 처음부터 희망 따윈 없었는데. 노력할수록 상처로 돌아올 뿐이었는데.”
에반은 끝내 상처받은 마음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것이 뭔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위해 부여잡고 있던 모든 걸 내려놓았다. 그의 머릿속이 까맣게 채워졌다. 오로지 본능만이, 탐욕과 잔혹성이 새겨진 그것만이 남아 그에게 속삭였다.
다른 사람의 고통 따윈 상관없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지고 싶은 대로 가질 거야. 내 것이니까. 모조리 다 내 것이니까.
더 이상 그를 괴롭게 만드는 건 없었다.
* * *
“널 두고 떠나지 않을 거야, 절대. 넌 영원히 내 것이야. 영원히 네 곁에서 함께할 거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다. 에반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하나만이 존재했다. 닉스, 그녀가 사라질까 봐 불안했던 어린 시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쓸모 있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녀의 껍데기만이라도 곁에 두었음에도 그마저 허락지 않겠다는 듯 자해했던 것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공허함과 불안함, 두려움이 지금 그를 잡아먹어 버렸으니까. 달라진 게 없다. 그때와 지금, 더 나아진 건 하나도 없다. 오히려 더욱 비참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만 생각했다. 영원히 살 거라고. 그래서 영원히 그녀를 곁에 둘 거라고. 괴물 피를 주입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그럴수록 그의 머릿속은 더욱 까맣게 물들었다. 그곳에 오롯이 존재하는 건, 단 하나 닉스였다.
그렇게 텅 비어 있던 에반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그를 끌어안는 닉스의 행동에 얼핏 정신이 돌아왔다. 주위가 눈에 들어오고 맞닿은 살을 통해 체온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진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는데. 그저 미칠 듯한 갈증과 비참함에 시달렸을 뿐인데.
“에반.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하기 훨씬 이전부터 너를 사랑했다.”
에반의 귀에 똑똑히 박혀오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거짓말.”
에반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예 그 달콤한 속삭임을 피해 도망쳐 버렸다. 듣고 싶지 않았다. 더는 아프고 싶지 않았다. 또 무엇을 원하기에 자신을 뒤흔드나 싶었다. 자신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는데.
하지만 닉스는 멈추지 않았다. 계속 그의 이성을 깨우려 애를 썼다. 그와 있었던 일이나 과거 얘기, 별 볼 일 없는 소소한 얘기들을 끊임없이 내뱉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에반의 머릿속을 휘적거렸다. 가라앉아 있던 기억과 생각, 감정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군. 나는 너를 보자마자 눈과 태양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사랑한다더니, 왜 거부하느냐고 물었던가.”
에반은 무심코 대답했다. 갑자기 떠오른 기억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려 애를 써도 지독히도 생각이 안 나더니, 지금은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히 떠올랐다.
이것은 괴물 피의 영향이었다. 어쩌면 닉스의 기억력이 좋은 이유도, 괴물과 같은 세상의 존재이기 때문일지 몰랐다.
에반은 닉스의 말 한마디로 과거 일이 툭툭 생각나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계속 말해 보라 했다. 닉스는 과거 일을 언급하며, 그를 사랑한다고 또 거짓말을 했다.
“나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그럴 수 없어. 너는 내가 필요한 거야. 네게 죽음을 안겨줄 유일한 존재니까, 의지하고 마음을 열었던 거라고.”
“에반. 내가 죽기 위해 네게 고통을 안겼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나 또한 언제나 네게 미안했다. 너를 아프게 만들어 나 또한 아팠다. 하지만 너를 사랑해서 그랬다는 것도 진실이다. 나는 이미 겪어봤으니까, 네가 죽고 혼자 남아 더없는 절망을 맛보았으니까. 또다시 그 괴로움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던 거였다. 언제나 죽음을 바라왔지만, 지금처럼 간절했던 적은 없었다. 지금처럼 다른 이의 죽음을 보는 게 두려웠던 적이 없었다.”
닉스가 이토록 길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속마음이라는 건 더 놀라운 일이었다. 닉스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깊숙한 곳에 감췄다.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건 에반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만약, 내가 만약…….”
너를 죽여주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래? 에반은 뒷말을 삼켰다. 그래도 내 곁에 있을 거냐고, 네가 말하는 그 사랑이라는 감정이 변하지 않을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닉스의 감춰왔던 진심은 그를 더욱 아프게만 만들었다. 그가 진실을 말한다면, 모조리 사라져 버릴 그런 허상이나 다름없었다.
“근데 뭐? 이제 와서 왜 이런 말을 하는 건데? 이제 와 진심을 알게 된 내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해?”
“그저 네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 어차피 결국엔 고통을 벗어날 수 없을 거라면, 네 선택이 그러했다면, 남은 시간만이라도 행복했으면 한다.”
“행복?”
그래, 행복. 행복 말이지.
“나는 지금 행복해. 네가 내 곁에 있으니까. 그리고 사랑하노라 말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진심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어. 나는 지금 이 상황 자체만으로 행복해.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행복해질 거야. 영원히 행복할 거야. 그렇게 만들 거야, 반드시.”
그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은,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행복을 지켜줄 길은, 약속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그러려면 그는 더 오래토록, 영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오래오래 살아야만 했다.
그는 결국 그녀를 홀로 두고 황궁으로 이동해 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니까. 하루라도 더 살려면 자신의 몸속에 괴물의 피가 조금이라도 더 있어야 했다.
에반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괴물 피를 조금이라도 더 넣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그 욕심은 결국 화를 불러오고 말았다.
유독 붉은 달이 선명한 날이었다. 붉은 달은 자신의 몸속에 있는 피를 들끓게 만들었다. 그는 고통이 찾아오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 온실로 향했다. 이미 이성을 잃어버려 문조차 제대로 잠그지 못한 것이 큰 실수였다.
“에반…….”
온실 속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던 에반은,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에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크게 뜨인 검은색 눈동자가 보였다. 어째서 닉스가 이곳에 있는 거지?
“멈춰! 크으으, 더 이상 다가오지 마! 아무것도 보지 마! 아무것도! 당장 이곳에서 나가, 닉스!”
에반은 서둘러 바닥에 있는 것들을 품에 안았다. 이렇게 고통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는 위험해서라도 주술을 사용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곧바로 황궁으로 이동해 왔다. 그리고 끝내 정신을 놓고 말았다.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왜인지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그를 발견한 시녀 때문에 황제의 귀에 들어갔고, 결국 의원에게 치료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에반은 정신을 잃은 지 며칠이나 흘렀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껏 이리 오랫동안 정신을 못 차렸던 적은 없었고, 그건 그만큼 몸이 망가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무슨 일인 건가, 에반.”
“그냥, 조금 피곤한 것 같습니다.”
에반은 의구심을 품은 요안의 시선을 피하며 그리 답했다. 그리고 탑으로 돌아오자 닉스가 그의 품에 안겨왔다. 그의 품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 미미하게 떨리는 몸이, 그가 없는 동안 많이 불안해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에반은 그런 그녀를 다독여주며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으니까.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말해 줄 수 없으니까.
닉스는 몰라야 했다. 몰라야만 행복할 수 있었다. 만일 죽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그에게 말했듯 더없는 절망을 맛볼 테니까. 그리고 이번엔 그 절망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 따윈 아예 없으니까.
닉스는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영원히 살아갈 자신으로 인해 홀로 남지 않으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