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40/45)

* * *

에반은 닉스를 안아 들고 욕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따뜻한 물로 가득 채운 욕조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투명했던 물은 금세 빨갛게 변했다. 몇 번이고 버리고 또 버리며 치가 떨리는 핏물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흠뻑 젖어 닉스의 몸에 달라붙어 있는 옷은 에반의 손에 의해 벗겨졌다.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나신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겨우 붙잡았다.

눌어붙은 핏자국을 닦기 위해 그녀의 몸이라도 문지를 때면, 손바닥 아래로 알맞게 데워진 따뜻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고스란히 느껴져 온몸이 바짝 긴장되는 느낌이었다. 더 만지고 싶고, 느끼고 싶고, 가지고 싶은 욕구를 외면했다. 그저 눈에 담고 마음속에 담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기억 속에 새겨 넣을 뿐이었다.

막 씻긴 닉스에게 새 이불과 함께 사온 옷을 입힌 후 도로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발뿐 아니라 팔도 침대에 묶어두었다. 에반은 그녀의 옷을 벗기든 말든, 씻기고 새로운 옷을 입히든 말든, 다시 침대에 눕히든 말든 아무런 반응이 없는 닉스를 꼭 끌어안았다.

이상하게도, 닉스를 곁에 붙잡아 두었는데 날이 갈수록 속이 텅 빈 기분이었다. 가슴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렸다. 닉스를 끌어안아야지만 그것이 채워지기라도 한다는 듯, 그저 하염없이 제 품에 안은 채 누워 있었다. 그것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그 뒤로 한동안은 별다를 것 없는 나날이 흘러갔다. 에반은 이전보다 더욱 다정하게 속삭이며 챙겨주려 했다. 먹지 않는 걸 알면서 요리를 하는 것도 관둘 수 없었고, 들어주지 않는 걸 알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멈출 수 없었다. 그녀에게 받아들여지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고 필요했으면 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쓸모 있기 위해선 제 손으로 그녀를 죽이는 방법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인을 제 손으로 떠나보내야만 그 여인에게 오롯이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게 비참했다.

그래서 나비가 하나씩 하나씩 계속 늘어나는데도 닉스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아무것도 받아주지 않는 닉스에게 무엇이든 주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온 탑 안이 하얀 나비로 가득 들어차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에반은 몸을 일으켰다. 순간 현기증이 일어 비틀거릴 정도로 몸이 말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피가 빠져나가다 보니 힘이 없었다.

그런 몸을 억지로 움직여 닉스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치웠다. 하다못해 이불과 베개까지도 멀리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닉스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며 입을 달싹였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얌전히 있어.

그러나 그 말은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못하고 도로 삼켜졌다. 소용없을 거라는 걸 아니까.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대신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금방 갔다 올게, 닉스.”

다시금 주위를 훑으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단단히 확인한 후에야 탑을 나설 수가 있었다. 그리고 황궁에 도착하자, 요안은 처음으로 화를 냈다.

“이제야 나타나다니, 생각이 있는 건가?”

에반은 죄송하다는 말 대신, 조심하겠다는 말 대신 그저 지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 나와의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약속? 그래, 맞다. 자신은 이래선 안 되는 몸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약속을 지키려면, 일단 제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약속이라는 것도 자신이 살아야지 지킬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당장 자신이 죽을 지경인데. 살 이유를 잃어버릴지도 모르는데.

요안이 무슨 말이냐는 듯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길게 대답해 줄 힘조차 없었다.

“노력하고 있습니다, 폐하. 제가 죽기를 바라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지금 나를 협박하고자 하는 건가?”

그럴 리가. 에반의 입에 힘없는 미소가 걸렸다. 에반은 지금 애원을 하는 거였다. 부탁을 하는 거였다. 닉스만을 원하니 제발 그녀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던 그날처럼, 닉스를 잃을까 봐 두려우니 제발 그녀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하는 거였다.

“그 부적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제 몸에서 피가 사라져 갑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사용하셨다간, 결국 말라죽고 말겠지요.”

요안의 얼굴에 당혹감이 일렁거렸다. 에반은 손바닥으로 메마른 눈과 퍼석한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제가 필요하시다는 거, 압니다. 그게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거라는 사실도 압니다. 세상을 위해 저를 거두고 먹이고 키우고 가르쳤던 것도 알고, 사실 약속이 아니더라도 그 은혜에 보답할 길은 이것뿐이라는 것도 알아요. 아는데…….”

밤낮없이 일하느라 피곤에 지친 요안의 얼굴을,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피곤해 보이는 에반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 이 나라가 최우선이듯, 제겐 닉스가 최우선인 것뿐입니다. 그런 제 세상이 무너지고자 하는데, 어쩔 수가 없잖아요? 일단 제 세상이 존재해야 저도 숨이라도 쉬고 그럴 테니까요. 일단 저부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발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단장.”

에반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저 메마르고 메말라 부스러질 것 같은 눈으로 요안을 쳐다볼 뿐이었다. 닉스가 온전해야, 자신도 온전할 수가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품에 안전히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지만, 다른 것에 시선을 돌릴 수 있을 터였다.

지금 이렇게 있는 와중에도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의 그림자가 자신을 쫓아다니지 않으니, 그녀가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이 들고 있었다. 자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뭘 하고 있을지 두려워서 상상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분명 그녀는 자신의 탑에 있는데, 이전보다 더욱 불안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걸 알게 되었던 날엔 이러지 않았는데, 이제는 자신의 곁을 떠나기만을 원한다는 걸 더욱 확실히 깨닫게 되어 숨이 콱 막혔다. 사랑하는 여인이 스스로 죽기만을 바란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잠시 말이 없던 요안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이다가, 이내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네가 그러니, 내가 정말 못된 왕이라도 된 기분이군. 아니, 못된 상관인 건가? 공적인 일과 사적인 감정을 모조리 해결할 수는 없다고 하더니, 이런 거였군.”

그러곤 고개를 끄덕거리며 에반의 애원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알겠다. 최대한 버텨보도록 하지. 하지만 당장 급한 일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네가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길수록 굶어 죽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고, 민심이 흔들린다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네게 무거운 짐을 안겨주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네가 아니고선 해줄 사람이 없으니 나로선 어쩔 수가 없다, 에반.”

요안이 최대한 양보해 주는 거라는 걸 안다. 전쟁이 끝난 직후였고, 왕이 새롭게 바뀌었다. 그때를 놓쳐선 안 되는 일들이 존재했다.

에반은 곧장 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아내며 요안의 뒤를 따랐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가면 될 거라고,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애써 좋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소망은 부질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한동안 황궁에 오지 않아도 좋다는 허락하에 서둘러 탑으로 돌아왔는데, 그런 그를 반겨주는 건 싸늘하게 식은 닉스였으니까.

에반은 멍한 표정으로 닉스에게 다가갔다. 닉스의 입에서 새어 나온 피는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목과 온 침대를 붉게 물들였다. 아니, 흘러나오는 피는 멈추었다. 이제는 따뜻하지 않은 핏물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몸에 손을 대었지만 딱딱했다. 원래 서늘한 몸이었지만, 이건 느낌이 아예 달랐다. 가슴도 더는 오르내리지 않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그대로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가슴 위에 귀를 가져다 대어보아도,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니, 닉스?”

뒤늦게 치료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에반이 주술을 사용했다. 하얀 빛이 쉼 없이 흘러나와 닉스의 몸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조용하기만 했다.

“닉스! 닉스!”

소리를 지르며 닉스의 몸을 흔들었다. 침대에 묶어두었던 팔을 풀어 그대로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축 늘어지는 닉스의 몸이 믿기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안색이 파리하게 질릴 정도로 끊임없이 주술을 사용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 안 돼. 안 돼, 닉스. 안 된다고. 안 돼, 제발. 제발, 닉스.”

참았던 눈물이 끝내 쏟아지기 시작하고, 에반은 뭐가 안 된다는 건지도 모르면서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세상이 무너진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감정이 북받쳐 그는 거의 오열에 가까운 울음을 내뱉었다. 이건 꿈인가? 그래, 꿈이야. 꿈일 거야.

하지만 계속 사용하는 힘 탓에 핑 도는 머리가, 자신의 품에 들어찬 차디찬 몸이, 토할 것 같은 이 기분이 모조리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믿고 싶은데, 이건 틀림없이 현실이었다.

“미, 미안해. 내가 미안해, 닉스.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닉스……. 제발 일어나. 일어나 봐.”

뭐가 미안한 건지도 모르면서 연신 사과를 해댔다. 아니, 그냥 다 미안한 것도 같았다. 그녀를 억지로 잡아둔 것이,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이, 그런 그녀를 두고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다 제 잘못이었다.

억지로 힘을 쥐어짜는 바람에 속이 답답하게 아파와 옷을 잡아 뜯고, 자꾸 앞으로 흘러내려와 닉스를 바라보는 시야를 방해하는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올리며 그렇게 얼마나 닉스를 끌어안고 울어 재꼈을까.

처음으로 그의 힘이 바닥을 드러낸 듯, 가느다랗게 이어지는 하얀 빛만이 전부일 때가 되어서야 닉스의 몸에 변화가 찾아왔다.

꼭 끌어안고 있어 완전히 맞닿아 있는 상체로 미미하지만 뛰기 시작하는 심장박동이 전해졌고, 깜짝 놀라 품에서 떼어낸 채 바라보자 마치 숨을 처음 쉬는 사람처럼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는 멈추더니, 이내 자연스럽게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차갑기만 하던 몸은 슬슬 체온이 돌아오고, 여전히 눈을 감고는 있었지만 그 아래로 설핏 움직이는 눈동자가 느껴졌다.

에반은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안도를 비롯한 온갖 감정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울음이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닉스가 되살아났다. 그녀는 정말 죽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진실이 있었음을, 그중에서도 이것이 진실이었음을 감사했다. 그리고 닉스의 영생을 감사했다. 그저 짧은 생각으로, 이렇듯 그녀를 도로 제 곁에 데려다 놓은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닉스는 정신도 돌아온 듯,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닉스.”

닉스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그는 울음을 삼켰다.

“닉스, 심장이 멈췄었어. 숨도 끊어졌었고 몸도 딱딱했어. 알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치료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어. 네가 깨어나지 않을까 봐……. 정말, 두려웠어.”

말을 하다 보니 감정이 북받쳤다. 하마터면 세상을 잃어버릴 뻔한, 그대로 그녀를 따라 죽어버릴 뻔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원망스러운 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너는 대체 왜 나를 봐주지 않아? 왜 내가 받는 상처는 알아주지 않아? 내겐 너밖에 없는데. 혹시라도 너를 잃을까 봐 두려운데. 닉스, 제발 내 곁에 있어. 나는 네가 없으면, 살 수 없어. 살아갈 필요가 없어. 사는 의미가 없어. 내겐 네가 전부야.”

그것은 투정이었다. 제발 자신의 고통을 알아달라는.

그리고 그의 말에 닉스 역시 감정이 몰아치는지,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내며 처음으로 속마음을 내뱉었다.

“너는 정말 너무하다.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잔인하다. 나는 어떻게 하라고. 홀로 남을 나는 어떻게 하라고. 영원히 지옥 속에서 살아갈 텐데. 나를 잃을까 봐 두렵다고 했나? 그런 네가 왜 내 두려움은 몰라주는 거지? 살 수 없는데, 살아갈 필요가 없는데, 사는 의미조차 없는데, 그런데도 죽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내 고통을 왜 몰라주는 거지? 왜 내가 죽음을 원하는지, 나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인지 정말로 모르는 것인가?”

에반은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내리친 것 같은 충격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금 닉스가 하는 얘기는, 자신과 같았다. 닉스는 자신이 떠나거나 죽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녀에게 자신이란 그 정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것을 틀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와 같다고, 그를 보내고 살 자신이 없다고. 그래서 차라리 먼저 떠나려 하는데, 왜 그것을 허락하지 않느냐고.

닉스가 처음으로 숨을 헐떡이며 크게 우는 모습을, 에반은 넋을 놓고 가만히 지켜만 볼 뿐이었다. 에반은 어쩌면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더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닉스가 끝내 정신을 놓았을 때, 그런 그녀의 곁을 지키는 대신 어디론가 이동했다. 그곳은 마녀 일당이 갇혀 있는 천궁 내 감옥이었다.

* * *

“어떻게 해야 저주를 풀 수 있지? 대체 어떻게 해야?”

에반이 그렇게 외치며 모습을 드러내자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일으키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루아단. 마녀의 일당 중 한 명으로, 다른 이들과 달리 마녀와 친밀한 관계였던 것 같은 이였다.

“너는 닉스의 저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나? 그녀의 저주를, 그녀의 영생을 끝내고 싶은데, 그렇게 해야 하는데…….”

에반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머릿속이 온통 복잡했다.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왜 여기로 찾아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닉스가…… 계속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다. 내 앞에서 울더군. 죽여달라고. 제발 죽여달라고.”

닉스는 죽음을 바라고 있다. 그건 닉스의 입으로 이미 들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달랐다. 지금껏 에반은 닉스가 자신을 떠나고 싶어 한다고, 곁에 있고 싶지 않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만일 그게 아니라 자신이 떠나고 난 후를 두려워한 거라면? 홀로 남을 삶이 두려웠던 거라면?

그녀의 영생을 감사해 했던 조금 전의 자신에게 욕지기가 치밀었다. 도로 제 자신의 품에 안겨주었던 여신에게 기도를 올린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그것은 틀림없이 저주인데.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유인데. 추악한 이기심이고 욕심이었다.

그리고 한 조각 기대를 품었다. 어쩌면 닉스도 그와 같은 감정일지 모른다고, 그래서 홀로 남는 것이 두려워 밀어내는 거라고 말이다.

혹시 그녀가 죽을 수 있게 되면, 혼자 남지 않을 수 있게 되면 자신을 밀어내지 않을 건가? 떠날 필요가 없어지는 건가? 그렇다면 굳이 지금 바로 죽여줄 필요 없이, 내내 함께 살다가 그 끝을 같이 맞이하는 것은?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내가 어떻게 그녀를 죽이지? 혹시라도 아플까 쉬이 건드리지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 그녀의 심장에 검을 꽂지?”

에반은 닉스를 아프게 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심장에 검을 꽂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피를 흘리며 신음할 때마다 반쯤 이성을 잃었던 이유에는, 너무 소중하고 가여운 그 몸에 상처가 나고 또 아파한다는 사실이 끔찍할 정도로 싫었던 것도 있었다.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 가장 아껴주고 싶고, 모든 상처를 치유해 주고 싶은 이런 마음이 깊지 않았더라면, 그는 진작 그녀를 강제로 안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저주를 풀 방법을 알아내야만 했다. 그게 닉스와 에반, 두 사람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었다. 저주를 풀어 영생을 끊어내면, 어쩌면 그를 받아줄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가장 원하던 일을 해낸 그를, 예전처럼 따스하게 바라봐줄지 모를 일이었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 에반은 여기까지 찾아왔다. 같은 어둠이고, 닉스에 대해 뭔가 아는 것이 있어 보였던 루아단에게로.

“대체 얼마나 더 그녀를 아프게 만들 생각인 겁니까?”

“……뭐?”

갑작스레 들리는 목소리에 손바닥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리자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루아단이 보였다. 그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동자 속에 담겨 있는 감정은 틀림없이 원망과 분노 등이었다.

“아직도 그녀의 진심을 알아차리지 못한 겁니까? 들리지 않습니까? 애처롭게 울부짖는 그 속이 보이지 않습니까?”

에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역시, 루아단은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그 마음이 너무도 깊기에 그만큼 고통받고 두려움에 떠는 그녀를 왜 몰라주는 겁니까?”

순간 에반을 제외한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에반은 자신이 뭔가를 잘못 들었나 싶었다. 방금…… 뭐라고? 루아단의 입술이 다시금 움직이는 게 무척이나 느릿하게 눈에 박혀 들어왔다.

“그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녀를 알기 훨씬 전부터.”

* * *

에반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옮겼다. 창가 사이로 스며들어온 달빛은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렸고, 그것은 더욱 휘청휘청하게 흔들린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에반은 비틀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움직여,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힘없이 누워 있는 닉스에게로 다가갔다.

“……닉스.”

침대 앞에 쭈그리고 앉은 그는 닉스의 손을 잡아 입가로 가져왔다. 그리고 입술을 문지르며 이제는 눈물이 말라 있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쉼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혼란스러움을 한가득 담은 채,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녀를 알기 훨씬 전부터.”

혹시 닉스의 저주에 대해 아는 게 있을까 싶어 찾아갔던 루아단에게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에반은 손을 뻗어 닉스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금 전 루아단이 해주었던 이야기를 되짚어보았다.

“그녀는 이미 당신을 떠나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꿈인 건지 아니면 다시 과거로 돌아온 건지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건 그대로 두면 또 당신이 죽을 거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당신을 지키고자 마음을 먹었고, 그것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의 뒤를 쫓으며 보살피고, 그를 데려다가 가르쳤으며, 그를 먹이고 입히고 재웠다. 루아단은 그것을 ‘그녀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된 이후로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움직였단 말입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자신을 위했다면,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거라면 닉스는 이래선 안 되었다. 그녀를 죽일 수 있도록 모든 상황을 이끌었는데, 그녀를 죽이고 살아갈 자신은 생각해 주지도 않았는데, 그걸 위해서 다른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위험에 처하기까지 했는데, 그 말을 믿으라고?

“당신의 행복을 바라니까. 그리고 당신이 없는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으니까.”

에반은 닉스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과 말을 떠올려 보려 애를 썼다. 그녀를 잊지 않기 위해 늘 더듬고 또 더듬은 지라 남들에 비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많은 편이었지만, 선명하지도 않았고 왜곡된 것도 많았다. 특히 그녀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기억은 거의 없었다. 아주 단편적인, 짤막한 장면이나 분위기 등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에반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으로 닉스의 뺨을 쓸어내렸다. 묻고 싶었다. 그게 정말이냐고.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거냐고. 정작 답을 들을 자신이 없어 묻지는 못하겠지만.

그의 손이 멈칫했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새 또 마음이 가벼워져선, 들떠선, 벅차올라선.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그를 믿을 수가 없는데, 그리고 애초부터 그녀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는 건데.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감출 수가 없었다. 한번 치솟은 그 감정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에반은 머뭇거리다가 닉스의 손목에 채워둔 구속 팔찌를 풀었다. 침대에 묶어둔 발목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를 싫어해서가 아닌, 그를 피해 도망치고 싶어서가 아닌, 조금이라도 그를 마음에 품었기 때문에 그런 거라면 이렇듯 강제로 묶어둘 필요는 없었기에. 자신과 함께 살고 싶은데, 함께 있고 싶은데 홀로 남게 될 것이 두려워 도망친 거라면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정말 그런 거라면 좋을 텐데.

에반은 울컥 치미는 울음을 삼켰다. 어느 쪽이든, 자신이 그녀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만은 사실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는 홀로 남을 닉스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왜 죽고 싶어 하는지 살필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지, 왜 차라리 자해를 택할 정도로 아파하는 건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닉스의 눈이 느릿하게 떠졌다. 달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검은색 눈동자가 자신 쪽으로 향했을 때, 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말았다. 그러곤 자신의 손등 위에 이마를 올렸다. 미안해, 닉스. 미안해.

에반은 닉스의 눈과 자신의 이마 사이에 손 하나밖에 없는, 무척이나 가까운 그 거리에서 입을 열었다.

“네가 왜 죽음을 원하는 걸까, 생각해 보았어. 사람들은 늘 바라지. 살고 싶다고. 더 오래오래 살아남고 싶다고. 우리를 이렇게 만든 황제 또한 영생을 바랐어.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너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으니까.”

닉스가 없는 세상은 살아갈 이유가 없지만, 닉스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 또한 영생을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그래서 네가 죽음을 바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어. 왜 그렇게 내 곁을 떠나려고만 하는 건지, 나를 혼자 두려고만 하는 것인지. 그것만 생각했지…….”

에반은 목소리에 겨우 참았던 울음이 스며드는 걸 느꼈다. 잠시 말을 멈추고 꾹꾹 눌러보지만, 차오른 눈물은 결국 뺨을 가로지르고 떨어져 그의 손을 타고 흘렀다.

“언젠가 그랬지. 추억은 사람을 아프게 한다고. 그래, 남겨진 사람의 고통은 모두 똑같겠지. 왜 몰랐을까. 왜 나는 네가 언제나 혼자 남겨진다는 것을, 몰라줬을까. 나는 너를 사랑해, 닉스. 나는 너를 아프게 만들고 싶지 않아. 너를 고통 속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아. 그리하여 네게 미움받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아.”

손바닥 아래로 닉스 또한 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가슴이 아팠다. 왜 나는 늘 너를 울리기만 하는 걸까. 네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노력하는데도, 항상 울리고야 마는 걸까.

“그러니 약속할게. 나는 네 저주를 풀기 위해 노력할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혼자 남겨두지 않을 거야. 만일 내가 너의 저주를 풀지 못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땐 내 손으로 너의 삶을 끝내줄게. 그러니 닉스, 나를 밀어내지 마. 그렇게 스스로를 아프게 만들지 마. 응? 제발.”

닉스가 곁에 있어만 준다면, 그녀가 자신을 밀어내지만 않아 준다면, 그녀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제 손으로 심장에 검을 박아넣는 거라 해도 그리할 터였다.

오래오래 함께 살다가, 그 끝에 가서 같이 죽음을 맞이하리라. 네게 안식을 주고 나 또한 따라가리라, 그리 마음먹었다. 이제는 그런 고통보다 홀로 남는 고통이 더욱 크다는 걸 알았으니까. 닉스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건지 알았으니까.

그의 말에 울음을 터트렸던 닉스가, 가까스로 물었다.

“……정말 그래 줄 수 있는 건가?”

“……반드시.”

에반의 목소리에도 흐느낌이 섞여 있었지만, 그 뜻은 충분히 전달되었는지 이불을 부여잡고 있던 닉스가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는 에반의 손을 감싸 쥐었다. 잠시 동그랗게 뜨였던 에반의 눈이 가느다랗게 휘었다. 하지만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탓에, 웃기보단 우는 것에 가까운 표정이 되었다.

“닉스가 먼저 내 손을 잡아준 건 처음 아닌가? 언제나 뿌리치거나 반응조차 없거나 둘 중 하나였잖아.”

에반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속삭였다.

“이제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봐도 되는 거지? 그렇게 믿어도 되는 거지?”

그를 받아들여 주기만 한다면, 에반은 그야말로 세상을 온전히 가진 것과 다름없었다. 부디 함께 탑에서 살던 그때처럼 행복한 나날이 흘러가기를. 그때의 닉스처럼 자신을 바라봐주고 불러주기를. 에반은 단 하나뿐인 소망을 담아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 * *

저주를 풀겠노라, 그게 안 되면 자신의 손으로 죽여주겠노라 약속을 한 이후로 닉스는 더는 자해하지도 않고, 그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에반은 닉스가 자신을 좋아한다던 루아단의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기대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다시금 따뜻한 시선으로 자신을 봐주는 그녀의 행동에 행복해했다. 마치 어렸던 그 시절, 탑에서 함께 보내던 그때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이 행복을 언제까지고 계속 이어가고만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무엇이든 하리라 생각했다.

“닉스, 혹시 먹고 싶은 음식 없어?”

“없다.”

에반은 일부러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닉스의 눈동자에 난감한 기색이 서렸다. 에반은 그게 무척이나 좋았다. 자신의 말과 행동에 휘둘리는 것이 마치 그 정도로 존재가 크다는 뜻인 것 같아 기뻤다.

닉스가 그를 이용하기 위해 곁에 두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런 행동이나 표정은 시도할 수조차 없었는데, 어쩌면 그에게 조금쯤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응석을 부리게 되는 기분이었다. 그런 것도 상대방이 받아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시도할 수 있는 거니까.

“무엇이든 괜찮은 건가.”

“뭐든 만들어줄게. 이왕이면 닉스가 먹고 싶은 거였음 좋겠어. 사실 나는 닉스가 뭘 좋아하는지도 전혀 모르니까, 생각나는 게 없으면 가장 좋아하는 걸 말해도 좋아.”

닉스는 돈가스라는 음식을 얘기했다. 황궁에서 가져온 요리 책임에도 그 조리 방법이 터무니없이 간략하게 나와 있었다. 거의 재료 소개와 마찬가지일 정도로. 그래도 닉스가 먹고 싶다고 하니 만들 수밖에. 에반은 최선을 다해 요리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너무 어렵네. 고기를 익히려니 겉이 타고, 그렇다고 덜 익히자니 핏물이 자꾸 흘러나와 난리도 아니야. 고기는 완전 질기고.”

접시에 담긴 것은 요리라고 보기 어려운 새카만 덩어리 하나였다. 그렇게 탔음에도 핏물이 마치 소스처럼 흥건했다. 자신이 내놓고도 부끄러운지라, 도로 가져가던 참이었다.

“먹고 싶다.”

닉스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에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정말 먹고 싶어졌다.”

심장이 기분 좋게 쿵쿵 뛰었다. 닉스는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받아주는 일도 없었고,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니 닉스가 그의 몸을 붙잡는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껏해야 그림자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게 고작이었는데.

아무리 저주를 풀거나 죽여주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들, 싫어하는 이의 몸을 건드리는 건 어렵지 않을까? 마녀의 숲에 있는 탑에서 지낼 때도 자신이 먼저 다가서면 다가섰지, 먼저 다가오는 일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거기까지 떠올린 에반은 자신이 정말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닉스는 그저 이 요리의 맛이 궁금했던 걸지도 모르는데, 이런 행동 하나하나에 흔들리고 있는 자신이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은 끝이 없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소소한 것이라도 기대하고 욕심내면, 더욱 큰 것을 바라거나 제 혼자 실망하고 상처받을 텐데.

그러지 말자. 그러지 말자. 에반은 스스로를 타이르며 창문틀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닉스가 고기를 한 점 잘라 입에 넣었다.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는 모습에 시선이 빼앗길 만도 하건만, 그보다는 요리를 맛본 그녀의 반응이 더욱 궁금해서 온 정신이 그리로 향했다. 자기도 모르게 바짝 긴장한 채였다.

“맛있군.”

빈말이든 아니든, 어쨌든 맛있다니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원체 자상한 여인이니 그다지 신뢰가 가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더 맛있게 만들어주겠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던 에반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닉스가 웃고 있었다.

아니, 사실 웃었다는 표현은 옳지 않았다. 그저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간, 아주 흐릿한 미소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표정이 확연히 풀리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터라 그렇지 않아도 가녀리고 신비롭던 닉스가 더욱 매혹적으로 변해버렸다. 온통 새하얀 풍경을 담아내고 있는 창문 앞에 앉아, 투명한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미소를 짓는 닉스는, 그간 상상해오던 모습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닉스, 지금…… 웃어?”

에반은 경악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붙잡고 빤히 들여다보았다. 미소는 금세 사라져 있었지만, 방금 본 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았다.

“방금, 웃은 거지? 그렇지?”

당황한 모양인지 닉스의 검은색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여는데, 그 말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에반의 심장이 크게 뛰었고, 입술은 바짝 말랐다. 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은 것처럼 체온이 급격히 상승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시선은 말을 하느라 달싹거리는 입술에 고정되어 있었다. 붉고 적당히 부풀어 오른 입술이 분명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몇 번 본 게 있으…….”

에반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대로 닉스의 입술을 삼켰다. 다급하게 입을 맞추고는 자신도 놀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떼어내자 닉스는 놀란 듯 크게 뜨인 눈동자에 오롯이 자신만을 담고 있을 뿐이었다.

거부하거나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은 그 반응에, 에반은 다시금 가볍게 입술을 포갰다. 제 자신의 입술에 닿는 그 말캉거림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떼어냈다가 다시금 맞추고, 또 살짝 떨어졌다가 조금 깊게 문지르며 보드라운 입술을 느끼던 에반은 점차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닉스의 반응 같은 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온 정신을 닉스의 입술을 느끼는 것에만 집중한 채, 거의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더욱 맞닿고 싶고, 하면 할수록 갈증이 생기는지라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밀어붙이던 에반은 자신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의자가 뒤로 넘어가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결국 넘어지는 닉스의 어깨를 가뿐하게 감싸 안아 다치지 않도록 보호했다. 의자가 완전히 바닥에 닿고 나서야 조금 더 편안하게 그녀를 맛볼 수 있었다.

“으, 으읍.”

닉스가 의자에 앉은 상태 그대로 넘어갔기에 자세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지만, 에반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입을 맞추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녀의 머리를 붙잡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깜짝 놀란 듯 어쩔 줄 모르는 혀를 쫓아 빨아들이고, 입속 구석구석을 핥았다. 그 자극 때문에 고이는 그녀의 타액이 달콤했고, 입속에 가득 들어차는 숨결이 달콤했다. 자신을 밀어내거나 피해 도망치지 않는 그녀가 지독히도 사랑스러운지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렇게 한참을 놓아주질 못했다.

간신히 떼어낸 후에도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젖은 턱과 살짝 달아오른 뺨, 늘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는 귀 등에 자잘하게 입을 맞추며 연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흐읏, 닉스.”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은 조금 전 격렬한 입맞춤으로 도톰하게 부푼 입술을 문질렀다. 그리고 살짝 파고들어 가지런한 치아를 쓸고 이내 말캉거리는 혀를 눌렀다. 자신의 손 때문에 입을 살짝 벌린 채 눈을 흐릿하게 뜨고 있는 닉스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자극적이었다.

“닉스가 웃다니…….”

닉스가 웃었다. 자신 앞에서. 자신 때문에. 언제나 닉스가 웃는 것을 바라왔고, 그녀를 웃게 해주고 싶다고 원해왔는데,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행복해서. 기뻐서.

그는 닉스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를 끌어안고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맛보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어 올라 괴로울 지경이었다.

“기쁜데, 정말 기쁜데……. 그만큼 괴롭다.”

이대로 닉스를 안는다고 해도, 그녀는 거절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그녀라면 그가 애원하면 기꺼이 받아줄 것이다. 하지만 에반이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의 몸만을 취할 거였으면 일찌감치 그러했을 테니까.

아쉽고 또 애타는 마음에 한참을 입술만 지분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던 에반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닉스의 치마 끝을 잡아 정리해 주고, 의자를 세워 도로 원래대로 되돌려준 에반은, 다급하게 욕실로 들어섰다. 이대로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테니까, 급한 불이라도 끌 생각이었다. 그게 얼마나 가겠느냐마는, 당장 고통스러우니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