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39/45)

* * *

용사는 마녀를 붙잡아 두는 것에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부 끝난 건 아니었다. 동화가 끝났다고 모든 이야기가 그대로 끝난 건 아니기에.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제야 시작되려 하고 있는 참이었다.

에반은 닉스를 가둘 탑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며 어디를 가든 그녀를 꼭 끌고 다녔다. 오로지 자신만이 그녀를 죽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렇기에 그녀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불안함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여전히 닉스는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그가 봐온 모든 것은 환영이었다는 듯.

그리고 자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있을 닉스가 불안했고, 간신히 옆에 붙잡아둔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를 죽여줄 생각도 없었으니, 사실상 자신은 쓸모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기도 했다. 그녀는 쓸모가 없는 자신의 곁에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언제 떠나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그런 온갖 다양한 이유로 그는 그녀를 곁에 묶어두었다. 그녀가 마녀인 것을 숨길 겸, 그 외모 또한 감출 겸 자신의 옷을 꽁꽁 두른 채였다.

물론 자신의 곁에 있는 여인이 마녀라는 사실을 다른 이들이 알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반역자나 마녀의 일당 중 하나라고 몰아붙일 만한 이들은 없었으니까.

에반은 새롭게 열릴 세상에 자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할지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숨어버리면, 곤란한 건 다른 이들이었다. 어차피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요안과의 ‘거래’ 때문이었다.

새로운 황제가 된 요안은 닉스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요안을 위해 모든 힘을 사용하는 대신, 마녀만큼은 오롯이 에반에게 쥐여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러니 그녀를 끌고 다니든 말든, 숨기든 말든 에반이 자신의 것을 제 마음대로 하는 것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사실 에반은 닉스가 원하던 것이 죽음이었다는 걸 알고, 그럴 줄 알았으면 새로운 세상이고 뭐고 진작 그녀를 옭아맬 걸 그랬다며 후회했다. 자신은 이미 요안에게 묶인 몸이고, 앞으로 닉스와 함께 보낼 시간을 쪼개 그를 위해 사용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면,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요안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다시금 마녀를 사냥하자며 사람들을 뒤흔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아무리 빛을 사용하는 에반이라고 해도 나라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살 자신은 없었다. 물론 닉스가 원한다면야, 자신이 있든 없든 그렇게 하겠지만.

어쨌든 탑만 완성되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녀 자체를 지울 수 있을 터였다. 영원히 자신만이 그녀를 알 수 있게 될 터였다.

어서 탑이 완성되기만을 기다리며 반역자들을 처벌하고, 농작지에 축복을 내리고, 망가진 황궁 주술진을 보수하고, 이런저런 회의 등에서도 참석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마녀, 네 생각은 어떤가?”

지금껏 닉스를 에반의 그림자 정도로 취급하던 요안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요안의 시선이 마녀에게 닿아 있었다.

마녀에게 천을 둘러 얼굴의 반 이상을 가렸음에도 두려움에 질렸다. 그 눈동자가 천 너머를 꿰뚫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닉스를 탐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심장에 커다란 돌이 매달려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에반은 서둘러 닉스의 앞으로 걸어가 그녀를 등 뒤로 감췄다. 요안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목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불안하게 뛰고 있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무엇을 물으시는 겁니까, 폐하.”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다. 네가 그랬지, 에반. 마녀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나는 지금 누구라도 좋으니 해결 방안을 제시해 주었으면 싶은데, 이런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에반은 자신의 실책을 꼬집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닉스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을 요안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한 분노도 스멀스멀 치밀어 올랐다.

닉스만을 원한다고 했다. 닉스라는 여인을 자신에게서 빼앗아가지 말라고, 그리 부탁했다. 그에겐 오로지 닉스만 있으면 되었다. 제 자신의 모든 힘을 그를 위해 사용할 테니 닉스의 죄를 덮고 지금까지 그랬듯 ‘그림자’로 취급하라고, 세상의 눈을 피해 마녀를 가둘 곳이 완성되면 영원히 감추겠다고, 그리 애원했는데. 그를 믿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 안일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안이 이미 마녀의 얼굴을 알고 있다는 것이 내심 걸렸던 에반은, 이렇게 대놓고 말을 걸어오는 것에 극심한 불안함을 느꼈다. 닉스를 보는 것은, 그녀를 만지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어야 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닉스를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만, 그럴 순 없었다. 지금 요안을 등진다는 것은 나라 전체를 등지는 것과 같았다. 자신은 몰라도 닉스를 위험에 처하게 하거나 불안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아무도 모르는 곳, 누구도 오지 못하는 곳에 꽁꽁 숨긴다고 해도 반드시 찾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그것을 피해 도망치기란 어려울 터였다.

무엇보다 자신은 닉스에게 가장 좋은 것만을 해주고 싶었다.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높은 지위와 많은 재물 등이 필요했다.

결국 에반은 무거운 발을 옮겨 비켜섰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요안과 닉스를 딱딱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최대한 빨리 탑이 완공될 수 있도록 재촉해야겠다는 생각과 그때까지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요안조차 보지 못하도록 숨겨두어야겠다는 생각만이 들어차 있었다. 단 둘뿐인 탑에 들어서야지만, 이 불안함이 조금이나마 가실 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려. 곧 너와 내가 살 곳이 완성될 테니까.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 그 누구도 오지 못하도록 만드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네. 아무래도 꾸미는 건, 조금 나중에 해야겠어.”

그렇게 닉스를 황궁 내 여느 외딴 방에 가둔 에반은,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탑을 짓는 것에 허비했다. 과거 모든 주술을 사용할 수 있었던 영광의 시절에는 건물을 짓는 것쯤은 우스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에반은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탑을 짓도록 해야 했고, 그런 그들이 굶주리거나 추위에 시달리다가 죽지 않도록 작업 환경을 안락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아낌없이 힘을 사용하기도 했다.

닉스와 함께 지낼 탑이 세워지는 곳은 주술이 아니고선 올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르고 험준했다. 중앙에서 곧바로 주술로 이동해 오니, 탑을 짓기 위해 찾아왔던 이들은 이곳이 어딘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뿐더러 혹여 예상한다 쳐도 올라올 수 없을 터였다.

이렇듯 그냥 보기에 온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산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다 똑같아 보이는 눈 산 중에서도 유독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곳을 택한 이유에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겠다는 굳센 의지가 섞여 있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로 힘을 쓴 덕분에 탑은 예상보다 일찍 완성되었다. 에반은 곧바로 닉스에게 찾아갔다. 닉스는 언제나처럼 텅 빈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언젠가 무얼 보느냐는 그의 질문에 ‘절망’이라고 답했다.

그녀는 그에게 붙잡힌 이후 늘 이런 상태였다. 아니, 처음에는 울기도 하고 애원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되어 체념한 것 같았다.

에반은 줄이 끊긴 인형 같은 닉스를 보는 것이 괴로웠지만 무시했다. 그 줄을 끊은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외면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놓아줄 자신은 없었으니까. 그럴 생각이, 아예 없었으니까.

“닉스, 같이 갈 곳이 있어.”

닉스는 그를 바라보지도,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도 않았지만 에반은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동했다. 그녀가 추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금세 추위도 더위도 거의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어두운 곳에서 온통 새하얀 곳으로 이동해오자, 닉스는 조금 버거운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완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그 작은 행동마저도 사랑스러웠기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닉스의 눈동자에 차차 초점이 돌아오고, 그녀는 시선만 돌려 주위를 살폈다.

“닉스, 여기 기억나?”

그런 그녀의 팔을 가볍게 잡아당기자 드디어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행동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기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곳엔 아무도 없으며, 드디어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들뜬 것도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던 날 생각했어. 이곳에 집을 짓고 싶다고. 그래서 닉스와 함께 살고 싶다고.”

비록 그때처럼 따뜻하게 바라보지도, 말을 걸어주지도 않았지만 괜찮았다. 언제나 자신은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을 바라왔으니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니까.

닉스의 시선이 자신의 등 뒤에 있는 탑에 닿아 있다는 것을 느낀 에반은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 우리가 살 집이야, 닉스.”

하얀 세상 속에 있는 닉스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언젠가 같이 눈을 보러 왔던 그날처럼.

* * *

탑에 들어온 지 며칠이 흘렀다. 에반은 황궁에 가봐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차마 닉스를 혼자 둘 수가 없어 무시했다. 그저 하염없이 창밖만을 내다보는 닉스를 바라보고, 그녀를 위해 요리하며 청소하고 책을 읽어주는 둥, 함께 있지만 함께 있는 것 같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야말로 에반의 세상은 닉스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잠깐씩 자리를 비울 때는 닉스에게 필요해 보이는 것을 가져올 때뿐이었다. 요리 재료가 그러했고, 의자나 담요가 그러했다.

그녀는 그를 받아주지도, 거절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속이 텅 빈 인형 같았다.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짙은 속눈썹이 하늘하늘 깜빡거리고, 가녀린 몸은 혈색이 돌았으며, 가슴도 느릿하게 오르내리는데도 그랬다. 말을 걸든, 건드리든, 품에 끌어안든, 허벅지를 베고 눕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시선이 닿는 일이 없다.

에반의 가슴이 시큰거리며 아파온다. 이대로 계속 두면 결국 말라비틀어져 가루로 변할 것만 같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걸며 건드렸다.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그게 재미있어?”

에반은 종일 앉아 창밖만을 내다보는 닉스에게 말을 걸었다. 역시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그저 그가 가져온 의자에 앉아서 그가 둘러준 담요를 덮은 채, 공허한 검은 눈동자에 창밖 풍경만을 담아내고 있을 뿐이다.

“닉스.”

내 이름을 불러줘. 내 부름에 대답해줘. 네 목소리를 듣고 싶어.

“뭘 보고 있는 거야?”

날 바라봐줘. 네 그 눈동자에 나를 담아줘. 예전에는 그렇게 해주었잖아.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그 커다랗고 깊은 눈동자에 나를 비추었잖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네 머릿속을 알고 싶어, 닉스.

울컥거리며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가슴께가 찢어진 것처럼 싸하게 아려오고, 어느새 눈 주위는 시큰거리며 감정의 파편을 흘려보내려 준비 중이다.

에반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를 등진 채 걸음을 옮겼다. 괜찮다, 괜찮다. 제 스스로를 다독였다. 원래 그랬으니까. 닉스는 원래부터 자신을 봐주지도, 신경 써주지도 않았으니까.

이전에 조금쯤 따뜻한 시선으로 자상하게 불러줬던 것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로 하여금 원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럴 이유가 없는 지금은, 이용해먹기 위해 구슬리던 그 모든 행동을 그만두었을 뿐이다.

그래도 지금은 곁에 있잖아? 벗어나지 못해. 그거면 되니까, 더는 욕심 내지 말자. 그 욕심이 닉스를 얼마나 힘들게 할지, 아프게 할지, 그래서 결국 제 자신에게 어떤 상처를 입힐지 알고 있으니까 이쯤에서 만족하자.

에반은 더 이상 미움받지 않기 위해, 그녀를 울리지 않기 위해 상처받은 가슴을 감추고, 치솟는 감정들을 억눌렀다. 그가 감정을 드러낼 때마다 닉스는 눈물을 흘리니까, 그의 속마음을 내뱉을 때마다 그녀는 절망 어린 표정을 지을 뿐이니까. 그것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든 것을 속으로 눌러 참아야 했다.

원래부터 그가 바라왔던 것은 그녀 하나였으므로 결국 곁에 둔 것으로 만족하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 * *

비록 닉스의 껍데기만 손에 넣었을 뿐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나름대로 평화로운 나날이 흘러갔다. 에반이 가슴속은 쉼 없이 찢어져 피가 멈출 새가 없었음에도, 겉으로는 웃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가지기 위해 눈을 가렸던 그때처럼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조금쯤 장난기가 묻어나는 표정으로 제 상처를 감췄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 것이, 그녀에게 자신은 고작 이만큼의 가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받는 것이, 그 어떤 노력을 해도 그녀의 마음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는 것이, 그녀를 텅 비게 만들고 아프게 만든 것은 자신이라는 걸 깨닫는 것이, 그럼에도 포기할 수가 없는 자신이 추악하게만 느껴지는 것이 모조리 날카로운 흉기로 변해 그를 상처입혔다.

괴물 취급받던 자신을 하나의 오롯한 사람으로 봐줬던 닉스가, 차라리 괴물로 여기는 것을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관심 한 조각 내어주지 않으니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자신은, 닉스에게조차 인정을 받은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에게 이름을 주고 가르치고 했던 모든 행위가 정말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던 거였다. 쓸모없어진 지금은, 싸늘한 눈길조차 줄 필요가 없는 그런 존재였다.

닉스를 만나 겨우 회복했던 자존감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내거나 애원을 하다가, 금세 정신을 차리곤 다시금 웃었다. 그녀를 욕심내는 건 자신이었으니, 그 욕심만큼 채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녀를 다그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럴 자격이, 그에겐 없었다.

그래도 함께 있어 행복했다. 그는 정말로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게 기뻤다. 그녀 옆에 있는데도 함께하는 것 같지 않은 공허함과 이렇게라도 옆에 붙잡고 있다는 충족감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온통 뒤죽박죽 섞였다.

그를 받아주진 않지만 그렇다고 거절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 서늘하고 가느다란 몸을 마음껏 끌어안고 잠을 잘 수도 있었다. 자신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것도 아니니 마음껏 들여다볼 수도 있었고, 그 하얀 피부를 쓰다듬거나 입술을 문지를 수도 있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공간에 사랑하는 여인과 단둘이 있으려니 원치 않아도 탐하고 싶다는 욕구가 솟아올랐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녀에게 미움받는 것만큼은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기에. 그 아름다운 눈동자에 경멸이나 증오 따위의 감정이 떠오르면 정말 죽고 싶어질지도 모르기에.

껍데기일 뿐일지라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은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닉스가 에반을 거부한다면, 그는 정말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에반에겐 닉스가 전부였다.

아슬아슬하지만 억지로 괜찮다고 다독이는 생활을 하던 에반은, 더는 황궁을 모른 척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닉스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 외면했지만, 계속 이렇게 지내다간 그를 필요로 하는 요안이 온 나라를 뒤지고 다닐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에반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내 황궁으로 이동했다. 요안은 그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직접 찾으러 가기 전에 와줘서 고맙군.”

그러곤 곧장 몸을 일으켰다. 에반을 지나쳐 문 쪽으로 다가선 요안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말을 내뱉은 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

“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에반.”

에반은 그사이 더욱 피곤해 보이는 요안의 얼굴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해야 했을 일들을 미뤄두었으니, 아마 요안이 많이 곤란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책망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에반은 겨우 죄송하다는 사과 한 마디 내뱉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말을 거짓으로라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닉스와 함께 있는 시간이 소중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어찌 흘러가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기에, 또 이런 일이 없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했다.

에반의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요안은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뱉곤 입을 열었다.

“네가 필요할 때, 그때만이라도 부를 수 있도록 방법을 마련해라.”

“……예, 알겠습니다.”

요안은 지금 많이 양보해 주고 있었다. 에반은 요안을 주군으로 모시고 제 자신의 모든 능력을 그를 위해 사용하겠다며 약조한 상태였으니까, 이건 배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그를 최대한 배려해 주는 것은, 아마 요안도 마녀를 손에 넣은 에반을 강제로 몰아붙였다가는 정말로 나라 전체를 등질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비록 지금은 요안과의 거래와 그에 대한 미안함, 황궁에 드나드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이익을 포기할 수가 없기에 아까운 시간을 쪼개고 쪼개는 거지만, 닉스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에반의 생활을 무너트릴 정도로 더한 것을 요구하게 된다면 결국 그는 숨어버리는 것을 택할지 모를 일이었다.

에반은 요안의 뒤를 따르며 어떻게 해야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에게 급하다는 연락을 전해올 수 있을지 방법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이동 주술 같은 걸로 편지 등을 곧장 보내오는 것이 가장 빠르고 간편한 방법이었으나, 혹시라도 자신이 아직 발견해내지 못한 주술이 걸린 물건 등으로 직접 찾아올까 봐 불안해서 그런 짓은 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주고받거나 하지 않으면서 급하다는 뜻은 전할 방법, 그런 것이 필요했다.

“안녕하세요.”

요안이 신의 힘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심을 한 이후로 그의 체력과 기력, 그리고 회복력 등을 더욱 높여주기 위해 천궁에 새겨져 있는 주술진들을 보수하고 새로이 새기느라 복도를 가로질러 가던 에반에게 인사를 건네는 여인이 있었다. 유리나 황녀였다.

여인이 화사하게 웃으며 다가왔지만 에반의 얼굴에는 그 어떤 변화도 일지 않았다. 유리나는 그런 에반의 반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눈을 가늘게 휘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많이 바쁘신가 봐요. 얼굴 뵙기가 너무 어려워서……. 어머,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닌가요? 어쩜 좋아, 얼굴이 수척해지셨네.”

유리나가 부채를 들지 않은 손을 뻗었다. 그러곤 공들여 관리한 검지로 에반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손가락에 닿는 피부가 무척이나 고왔다. 유리나는 내심 놀랐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눈앞의 남자는 검을 휘두르던 기사답게 유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뿐인가? 발자국에서 얼음이 묻어날 듯한 서늘함, 새하얀 겉모습과 달리 어두운 속내를 감추는 듯한 비밀스러움마저 배어 나왔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아직 앳된 감이 덜 가시기까지. 그야말로 군침이 도는 매력적인 사내가 아닐 수 없다.

황제는 헤레이나에게 빼앗기고 말았지만, 눈앞의 사내만큼은 손에 넣고 싶었다. 자신을 담는 매혹적인 붉은 눈동자가 지독히도 만족스러웠다.

유리나는 일부러 허리를 살짝 숙이며 가까이 다가섰다. 커다랗고 촉촉한 눈망울이 위를 올려다보는 형태가 되며 더욱 강조되었다. 거기에 훤히 드러난 가슴팍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유리나는 조금 전 손목에다가 묻힌 향료가 체온에 녹아 은은하게 퍼지는 것을 느끼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지나쳐 턱까지 살살 쓰다듬었다.

에반은 그런 유리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툭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그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유리나는 황홀하다는 듯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느라 내리깔아진 새하얀 속눈썹이 아름다웠다. 그녀가 딱히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자 에반은 곧장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유리나는 다급하게 불렀다.

“제 방에 새겨진 주술진도 살펴봐 주셨으면 좋겠는데, 가능하실는지요?”

“어디에 있는 건지 알려주시면 들르겠습니다.”

유리나는 그녀의 방 위치를 알려주었다, 일부러 욕실이 딸린 방으로. 그는 장소를 알아내자마자 망설임 없이 제 갈 길을 갔다. 평민이라고 했던가? 무례하거나 거친 것쯤은 눈감아줄 수가 있지.

이른 아침에 들르겠다고 하니 시간이 애매하긴 하지만 조금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될 터였다. 그녀는 내일 아침 그의 앞에서 갈아입을 옷을 미리 정해두어야겠다는 생각에 조금쯤 다급한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정작 에반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닉스에게 줄 선물만을 떠올리겠지만, 유리나가 그 사실을 알 길은 없었다.

* * *

해야 할 일이 쌓여 있어 황궁에 드나드는 일이 점점 잦아질수록, 에반은 요안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기 위해 더욱 애를 썼다. 오래 걸릴수록 의무적으로 황궁에 와야 하는 시간이 많아지니 마음이 조급했다.

그런 마음가짐 때문일까. 결국 그런 주술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실상 에반의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방법이나 다름없었다.

“제가 꼭 필요한 일이 있을 땐, 이 부적을 사용하십시오.”

에반은 요안에게 자신이 만든 부적들을 건네주었다. 당장 주술을 사용할 수 없는 요안이기에 닉스가 그에게 주었던 황궁 주술사의 표식까지 함께 넘겼다. 그 목걸이 안에 부적을 넣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었다.

요안이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며 에반의 앞에서 부적 하나를 목걸이에 넣자 곧장 뽀얀 빛무리와 함께 부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에반의 곁에 빛으로 이루어진 나비 한 마리가 떠올랐다.

“어떤 식으로 부적이 나비로 변해 네 곁으로 가 있는 거지?”

에반은 그냥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고 대답해 줄 뿐이었다. 사실 그 부적은 에반의 피로 그린 것이며, 그 부적에 걸려 있는 주술이란 것은 에반의 몸에 있는 피를 가지고 빛으로 변환시키는 거였다. 피와 피가 이어져 있고 부적을 태우면 육체에 있는 피가 반응을 보이게끔 해두었으니, 그가 어디에 있건 빛으로 이루어진 나비가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는 건 부적을 많이 사용할수록 그의 몸에서 피가 사라진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아무리 치유력이 있는 빛을 사용하는 에반이라고 해도 무리가 갈 수밖에 없는 일이기에, 요안에게 사실대로 말했다간 최대한 사용하지 않기 위해 오래오래 붙잡아 둘지도 몰랐다. 그래서 에반은 굳이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에반은 요안에게 부적을 건네준 이후, 웬만하면 나비가 나타나야지만 황궁으로 이동해 왔다. 가끔은 나비가 서너 마리가 될 때까지 끈덕지게 버티고 있을 때도 있었다.

지금이 가장 바쁠 때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사실 에반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거의 요안과의 의리, 닉스를 주겠다던 약속을 지켜준 대가 그 정도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에반의 생활은, 탑으로 돌아온 그를 반겨주는 것이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닉스가 아닌, 온통 피로 범벅된 바닥 위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는 닉스가 된 그날 이후로 완전히 뒤흔들리게 되었다.

화려하거나 아기자기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 따뜻하고 아늑하던 탑 내부가 소름 끼칠 정도로 새빨간 피로 물든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에반의 귓가에 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점차 가빠지는 자신의 숨소리도 들려왔다. 시야가 흔들리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몸이 흔들리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세상이 무너지고 있는 건지 온통 흐릿했고 일렁거렸다.

지금 자신 앞에 펼쳐진 모습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멍하니 서서 바닥에 누워 있는 닉스를, 그녀의 몸 아래로 흘러나오는 핏물을, 그 핏물이 흐르고 흘러 바닥에 떨어져 있는 칼까지 적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에반이 정신을 차린 것은, 창백할 정도로 질린 닉스가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고 나서였다.

“니, 닉스!”

에반은 닉스의 이름을 부르며 다급하게 달려갔다. 그러면서 닉스를 치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알 수 없으나 죽은 사람이라도 살려낼 것처럼 많은 힘을 퍼부었다.

닉스 앞에 털썩 주저앉은 에반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싸 자신의 품으로 이끌었다. 피를 토해냈는지 닉스의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파리한 그 안색이 걱정되어 피에 젖어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살피는데, 피에 흠뻑 젖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가슴께가 찢어져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에반은 닉스가 자신의 심장을 찌르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왜, 대체 왜 이런 짓을. 에반은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에 숨을 멈추었다가 다시금 몰아쉬며 조심스레 옷을 여미어주었다. 그런 그의 입은 연신 다행이라는 말만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다행이라는 생각만이 들어차 있었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자신의 힘이 빛이어서 다행이라고.

닉스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걸 쉬이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피투성이가 된 닉스를 보자마자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에반은 그녀의 머리를 더욱 꼭 끌어안으며 울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눈이 시큰거리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 같았지만, 콱 감아버렸다.

온몸에 힘이 없는 듯 축 늘어진 닉스를 침대에 눕혀준 에반은 칼을 비롯한 날카로운 물건들은 모조리 치워 없앴다. 닉스의 몸에 상처를 낼 만한 것은 다 내다 버렸다. 하다못해 깨질 수 있는 접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닉스는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옷을 찢어 만든 끈으로 목을 매달고 있었다. 재빨리 발견한 덕분에 아무 이상도 없었지만, 그의 힘으로 치료하고 또 치료해도 목에 난 자국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에반은 닉스를 품에 끌어안은 채 애원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닉스, 제발……. 제발 이런 짓은 하지 마. 제발…….”

여전히 닉스는 그의 곁에 없었다. 이렇듯 육체라도, 빈 껍데기만이라도 곁에 붙잡아두려 애를 쓰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마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자꾸 어디론가 떠나려고만 했다. 그녀를 보낼 수가 없는데, 그녀가 없으면 자신은 살 수가 없는데.

닉스는 그런 자신을 전혀 돌아봐 주지 않는다. 홀로 남을 그에게 관심조차 없다. 그렇기에 그로 하여금 자신을 죽여주게끔 일을 진행시켰을 터였다. 사랑하는 여인을 제 자신의 손으로 죽인 에반의 마음 따윈, 끝끝내 모든 것을 잃은 채 살아갈 에반 따윈 어떻게 되든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도 그의 앞에서 죽고자 애를 쓰고, 그 끔찍한 모습을 계속 지켜보게끔 만드는 거였다. 에반의 생각과 감정, 마음 같은 건 전혀 상관없다는 듯.

이제는 그걸 모를 수가 없는데, 너무나 뼈저리게 깨달아버렸는데, 그런데도 포기할 수가 없다. 에반의 마음속에 닉스에 대한 원망이 싹 텄다. 지금껏 자신이 닉스를 아프게 만들고 힘들게 만든다며 스스로에게 상처가 되었던 자책감이, 닉스에 대한 원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렇게 아프고 힘들게 만들 거면 차라리 거두지 않았으면, 그의 세상이 되지 않았으면, 처음 봤던 그날 그냥 죽여주었으면. 이렇게 차라리 죽는 게 덜 아플 것 같은 고통을 안겨줄 거라면,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잔인하게 밀어낼 거였다면.

그녀와의 기억으로 살아갈 자신과 달리 닉스는 단순히 이용하기 위해 그를 곁에 두고는, 필요 없어진 지금 와서야 보내달라는 듯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모든 것을 잃었던 그때 그의 전부가 되었던 여인이, 다시금 모든 것을 잃게 하려는 지금 이 상황이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그렇게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는 원망과는 달리, 여전히 닉스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과 그녀를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하고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는 닉스의 발목을 침대와 연결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그럴 수밖에 없는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속삭였다. 그리고 한동안 황궁에 가지 않고 닉스 곁에만 머물렀다. 그녀가 고통받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로 인해 자신이 또 고통스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가 곁에 있자 닉스는 다시금 텅 빈 상태로 돌아왔다. 침대에 눕힌 그대로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감는 것을 반복했다. 자신에게 그 어떤 것도, 감정이나 마음, 작은 움직임조차도 주지 않겠다는 듯한 행동에 슬퍼졌지만, 그래도 그녀가 제 스스로 자해하는 것보다는 나았으므로 꼼짝없이 붙어 있었다.

그렇게 닉스만을 지켜보는 사이, 하나둘 생겨났던 나비는 어느새 열 몇 개까지 늘어나 허공을 누볐다. 그의 피를 이용해 만들어진 나비이기 때문인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그것은 이따금 닉스에게 내려앉기도 하고, 그의 눈이나 코에 내려앉아 거슬리게 만들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잡아채면 그대로 부스러져 사라졌다.

부적에 들어가는 피의 양은 적지 않았고, 그 탓에 나비가 생겨날수록 몸에서 힘이 빠졌다. 에반은 억지로 외면하고 또 외면하다가 체념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제복을 입은 뒤 침대에 누워 있는 닉스에게 말했다.

“잠시 다녀올게. 금방 올 테니 얌전히 기다려.”

그리고 황궁에 갔지만 온 마음과 정신이 탑에 있으니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저 거의 얼굴만 비치는 것과 다름없었다.

당장 급하다는 것만 재빨리 처리하고 순식간에 탑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얼마 전과 마찬가지로 온통 새빨간 세상 속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 닉스였다. 온몸이 피로 젖어 온전한 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기대고 있는 침대는 물론이고, 바닥조차 피로 흥건했다.

에반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 안을 가득 채우는 것은 원망과 분노라는, 닉스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감정이었다.

그녀를 치유하고 침대에 눕힌 에반은 흐린 눈으로 숨을 헐떡거리는 닉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체 왜…….”

그의 목소리에도 그녀는 허공만을 응시할 뿐,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에반은 손을 뻗어 거칠게 그녀의 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게끔 치켜 올렸다.

“대체 왜 이렇게 나를 괴롭게 만들어, 왜!”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성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그저 화가 났다. 피로 흠뻑 젖은 닉스가, 자신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해 애를 쓰는 것만 같은 닉스가 미웠다.

그리고 그때였다. 지금껏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던 닉스가 입을 열었다.

“……그냥 죽여.”

“……뭐?”

“나는 죽고 싶어. 계속 이렇게 죽을 거야. 그러니 그렇게 신경 쓰지 말고 차라리 그냥 죽여. 아니면 버려. 내게 관심 가지지 마.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스스로 목숨을 끊든 말든 신경 쓰지 말라고.”

왜, 이제 와서 내게 그런 말을 해?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너잖아, 닉스. 네게 마음을 열게 만들고 너를 의지하게 만든 건 너였으면서. 내가 너를 외면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거면서. 네가 그렇게 만들었으면서.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닉스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자상하던 여인은 더는 없었다.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데도 사무치게 그리웠다.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모습을 보고 놀라 화를 내던 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던, 그러지 않겠노라 약속을 해주던 여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과연 진실이었던 것은 있을까? 내게 주었던 모든 것들 중에.

“……아니, 안 돼. 넌 내 것이야. 네 모든 것은 나의 것이라고. 그러니 함부로 하지 마. 내 허락 없이 죽지 마.”

죽고 싶다는 말을 듣고 싶지가 않았다. 그의 곁에 있고 싶지 않다는 그 말을 듣고 싶지가 않았다.

에반은 그간 어떻게든 붙잡고자 애를 썼던 인내심이 바닥을 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피를 핥으며, 자신의 손으로 들어오지 않아 아깝기만 한 그 피를 차라리 입으로 삼키며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몸에 닿자, 억누르던 탐욕이 치밀어 올랐다. 모든 피를 낱낱이 가지고자 하던 행위는 점차 애무로 변해갔다.

“이런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죽음의 고통에 비하면 장난 수준이잖아? 이토록 피에 흠뻑 젖을 정도로 고통에 무딘데도 난 뭘 망설인 걸까.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데, 다른 것은 볼 것도 없겠지. 안 그래?”

자신은 혹시라도 깨질까 봐 손도 못 댔는데, 부질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완전히 가질 수 없다면, 그 몸만이라도 취하고 싶다는 욕구가 솟았다. 자신의 것이라는, 드디어 가졌다는 충족감을 잠깐이나마 맛보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공허함에 사로잡혀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어차피 그녀의 마음을 가질 수가 없는 거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이 관계를 벗어날 수 없는 거라면, 자신의 욕심만이라도 채우고 싶었다. 자신을 이토록이나 아프게 만드는 여인을 똑같이 아프게 만드는 것쯤은 상관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여줘.”

그런 그의 귓가에 닉스의 목소리가 선명히 꽂혔다. 에반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닉스의 눈에 맺힌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닦아낸 에반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야말로 이성을 잃어버린 자신에게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죽여줘, 제발. 나를 죽여줘.”

“하……. 닉스.”

닉스는 보는 이의 마음조차 아프게 만들 정도로 슬프게 울었다. 그 눈동자에는 원망도, 미움도, 경멸도 없었지만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이.

그는 그녀의 몸에서 내려와 옆에 누웠다. 그러곤 닉스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느껴졌지만 힘주어 끌어안은 뒤 머리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여전히 뜨거운 자신의 몸과 그녀를 가지고 싶은 욕심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죽지 말라고 해도, 죽일 수 없다고 해도 너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겠지. 이러다가 나 정말 미칠지도 몰라. 그러니 자꾸 그런 짓 하지 마, 닉스. 그래도 나는 너를 죽이지 못해. 버릴 수도 없어. 왜 몰라주는 거야.”

에반은 이미 알고 있었다. 거짓이라도 죽여주겠노라 한 마디만 속삭이면 될 일이라는 걸, 그렇게 하면 닉스를 곁에 붙잡아둘 수 있다는 걸. 하지만 그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닉스가 자신과 함께 살고자 했으면 싶었다.

자신이 그러하듯, 닉스도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으면 싶었다. 더는 떠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건 너무 큰 욕심일까, 닉스?’

에반은 자신의 품에서 울고 있는 닉스를 느끼며 지친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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