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요안과 네리아토는 황궁 주술사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모두들 아무것도 모른 척 입을 다문 채였다. 요안은 굉장히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고, 에반과 마찬가지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마녀에 대해서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대놓고 황궁 주술사의 혈육에 대해 알아볼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신성 주술과 관련된 책도 섞어서 찾았으며, 마녀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세상은 점차 마녀와 관련된 소문으로 떠들썩해지는데 정작 에반과 요안, 네리아토는 관심도 없는 듯 행동했다.
에반은 여전히 밤마다 시녀를 방에 들여왔고, 그림자가 사라지고 난 후에는 시녀들의 방이 아닌 다른 곳에 따로 재웠다. 그리고 곧바로 네리아토를 데리고 요안에게 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알아본 정보를 토대로 회의했다. 마녀와 만나게 된 과정이라든가, 그녀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도 아낌없이 해주었다.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 과정에서 에반의 감정은 가감 없이 드러났고, 요안과 네리아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그런 마녀라는 것도 믿기지 않았고, 그토록 오랫동안 고통받았을 텐데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믿기지 않았으며, 어렸을 때부터 봐온 그런 여인에게 깊은 마음을 품는 에반도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에반은, 단순히 요안과 네리아토는 ‘닉스를 보지 못했기에’ 그런 의문이 생기는 거라고 여길 뿐이었다. 닉스라는 여인은 겪으면 겪을수록, 함께하면 함께할수록 아름답고 따뜻하며 사랑스러웠으니까. 정말 이런 것이 사랑이라면……. 그래, 그녀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당시의 자신은 이미 죽어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죽기 위해서 마녀의 탑을 찾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러나 그녀를 만나며 살아났다. 새로운 이름을 받은 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자신에게 새로운 심장을 내어준 여인인데 어찌 전부가 아닐 수가 있겠는가. 그녀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다름없는데, 어떻게든 가지기 위해 애를 쓰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자신에겐 그녀가 전부인데.
황궁에는 수많은 책이 있었지만 왜인지 황궁 주술사에 대한 이야기는 극히 드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네리아토가 황궁 주술사는 비밀이 많은 인물이었다고 말하긴 했으나 이건 정도가 심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렇게 정보가 적을까, 의아할 지경이었다.
결국, 책으로는 한계에 부딪혔고, 네리아토와 요안은 아예 주술사와 연관이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황제에게는 에반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말해 둔 상태였다. 어차피 주술사와 관련된 이들을 만난다고 해서 그들이 뭔 짓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그다지 문제 될 일은 없었다.
네리아토는 겉으로는 신성 주술과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척 다가가선 은근히 황궁 주술사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일단 너무 대놓고 묻기엔 마녀의 시선이라는 것이 걱정되었고, 조심스레 돌려서 묻기엔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정보인데 그나마도 놓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답은 하나였다. 에반이 마녀의 시선을 붙잡고 있는 것.
그렇지 않아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녀 역시 비밀이 많았기에 순순히 대답해 줄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예 시도도 안 해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 결정되자마자 에반은 요안 대신 닉스를 찾아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밤이 깊어진 시각이었다.
탑으로 이동해오자 벽에 기댄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닉스가 보였다. 에반은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본 얼굴은 이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너무 생각도 많았고 감정도 복잡했다. 지금처럼 편안하게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부르는 대신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조용히 살피었다. 탑 안은 무척이나 어두웠지만, 그걸로는 그의 시선을 가로막을 수가 없었다. 하얗고 섬세한 얼굴과 신비로운 머리카락, 그와 마찬가지로 고혹적인 느낌까지 자아내는 속눈썹과 꽃처럼 붉은 입술.
어쩜 이토록 아름다울까. 어쩜 이렇게나 가녀리고 여성스러우며 앳되고 사랑스러울까. 청초함이 묻어나는 외모에 흐릿한 분위기가 더해지니, 사람의 마음을 닳게 하는 안타까움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불안해서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지만 그러면서도 품에 꼭 숨긴 채 아무에게도 내어주고 싶지 않은 소유욕마저 일으키는, 굉장히 묘하고 신비로운 여인이었다.
그저 보고 싶었다. 다시 만나게 될 날만을 간절히 기다려왔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지, 보고 있자니 만지고 싶었다. 만지면 또 무엇을 더 원하게 될지 알 수 없으나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뺨을 건드렸다. 부드러운 피부가 손끝을 통해 느껴졌다. 단순히 쓰다듬으려고 뻗은 손이었지만, 정작 그녀의 뺨에 닿으니 이번에는 감싸고 싶어졌다. 고작 손가락 끝이 아닌 손바닥 전체로 그녀의 피부와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고 나선 내 가슴에 품고 심장으로 느끼고 싶겠지. 또 그러고 나선 아예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가지고 싶어질 거야. 그는 자신의 욕심을 눈치채곤 그녀의 뺨을 감싸기 위해 폈던 손바닥을 다시금 꽉 쥐었다.
그대로 내리기엔 아쉬워 엄지로 뺨을 쓸어내리자 파르르 떨리던 검은색 속눈썹이 천천히 움직였다. 풍성하고 그윽한 속눈썹 아래로 밤을 담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척이나 고요하고 깊었지만 투명했다.
그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는 그와 마주치는 순간 잘게 떨렸다. 미처 구름이 드리워지지 않은 하늘과 닮은 투명한 그 속에 당혹스러움이 크게 떠올랐다가 금세 감춰졌다. 먹구름이 끼듯 투명함을 막아섰다. 그녀는 속마음을 숨기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래도 그 아름다운 눈동자가 오롯하게 자신을 향해 꽂혀 있다는 점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워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던 그가 말했다.
“뭐야, 벌써 깼어?”
그는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뺨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엄지로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다시금 눈을 마주쳤다.
“닉스, 나 왔어.”
하지만 닉스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에반은 다시금 그녀를 불렀다.
“닉스.”
불러도 불러도 애가 타는 이름이었다. 수없이 불렀고 또 수없이 허공으로 흩어졌던 이름. 가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에 답답하고 미칠 것만 같은 그런 이름.
그녀는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여전히 자신의 뺨을 쓰다듬고 있는 에반의 손을 붙잡았다. 그는 자신의 손에 닿는 서늘하면서도 가느다란 손을 서둘러 감싸 쥐었다. 손 안에 들어차는 그 느낌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단순히 손을 붙잡았을 뿐이지만, 마치 그녀 자체를 곁에 잡아둔 느낌이 들었다.
“어서 와, 라고 말해 주지 않을 거야?”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는 인사를 해주던 그녀였다. 그게 얼마나 기뻤는지 그녀는 모를 테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은 듯, 모두가 밀어내던 자신을 처음으로 받아준 것만 같은 그 벅찬 감정을 알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받아주면서도 밀어냈다. 언제나 따스하게 보듬어주고 안아주었지만 그럼에도 더 가까이 다가설 수는 없었다. 그녀의 주위로 보이지 않는 벽이 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결코 들어설 수 없는 단단하고 차가운 벽이.
그게 얼마나 자신을 불안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마치 언제라도 사라질 준비를 하는 것 같아서. 자신은 단 한 번도 그녀를 곁에 둔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녀와 함께 있음에도 그건 모두 환상과 다름없는 것 같아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곁에 있는데 그녀는 그에게 붙잡혀주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그에게 붙잡힌 손마저 빼내며 고개를 저었다. 명백한 거부였다.
에반은 다급하기까지 한 손길로 그녀의 손을 다시금 붙잡았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잃기 싫었다. 함께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왜? 왜 말해 주지 않는 거지?”
“……에반.”
그녀가 이름을 불러주자 에반은 묘한 안도감에 휩싸였다. 이렇게 단순할 수가. 어째서 자신은 그녀의 앞에서는 이토록 단순해지고 마는 것인가. 고작 이름을 불러준 것이 뭐라고, 이리도 기쁘단 말인가.
“말해, 닉스.”
“왜 자꾸 이곳에 오는 거지?”
“그러는 닉스는 왜 자꾸 오지 말라고 하는 건데?”
이미 그 이유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닉스는 자신에게 용사이길 바라고 있었고, 마녀와 함께 있는 이가 용사가 될 수는 없었다. 예전에는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도 분명히 말했다. 언제나 이곳에 있으라고. 언제든지 찾아올 거라고. 그날만 기다리며 그토록 노력했는데 언제까지 자신을 밀어낼 참인가? 이제 더 이상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 긴 시간을 가까스로 버텨냈다. 또다시 그러라고 한다면 참을 수가 없으리라.
에반은 그런 속마음을 겨우 눌러 참은 뒤 고개를 기울였다.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하는 닉스였기에 그녀보다 몸을 낮춰 올려다보려 애썼다.
게다가 그녀는 무척이나 자상하고 여린 여인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간절하고 슬픔이 묻어나는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말했다.
“난 분명 닉스가 하라는 대로 할 테니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했어.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언제든지 만나러 올 수 있으니까, 그것만 바라고 열심히 노력했어. 근데 닉스는 왜 밀어내기만 하는 거야?”
“하지만 에반.”
“물론 닉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닉스, 한 가지만 물을게. 아직도 내가 용사이길 바라? 세상을 구하길 바라?”
대체 이 여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만 알 수 있다면 그녀를 붙잡을 방법을 찾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네가 이 세상을 구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보았던 미래에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오랫동안 꿈꿔왔고 내가 네게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 그런데 에반, 이곳은 네게 독이 될 뿐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려면 이곳에 오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너도 아마 알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내게 바라는 것은 그게 끝이야? 용사가 되는 것?”
“그래.”
닉스는 에반을 용사로 만들어 세상을 구하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래서 그녀가 얻을 수 있는 게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이 달라지면 그녀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되면 자신의 할 일은 끝이 날 텐데 더 이상 곁에 있을 필요가 있던가?
어린 시절엔 그저 ‘용사가 되어라’라는 말에 알겠다고 대답할 뿐이었지만, 이제는 그 용사가 무언지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자신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강하고 밝은 눈을 지닌 기사단장 요안조차도 괴물을 상대하며 생사를 넘나들고 있지 않던가.
“내가 어떻게 해야 용사가 될 수 있는 건데? 닉스가 말하는 용사는 대체 뭔데?”
“황제의 곁에서 세상을 밝히는 것. 너도 아마 알고 있겠지만, 세상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 너는 그 어둠을 몰아내고 새로운 희망이 될 거다.”
에반은 세상을 위협하는 존재가 마녀일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라면 그렇게 어려운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될 테니까. 게다가 그 존재에게 자신은 큰 위협이 된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도록 가르친 것은 다름 아닌 닉스였다. 그러니 그녀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 알 수 없는 존재가 마녀를 사칭해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 닉스는 그것을 예상하고 자신을 키운 걸까? 세상을 구해낼 수 있도록? 하지만 그렇게 해서 닉스가 얻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저 세상을 사랑할 뿐인가?
의문은 꼬리를 물었지만, 답은 나오질 않았다. 계속 제자리만 빙빙 도는 기분이었다. 복수도 원치 않고 그에게 바라는 것도 용사가 됨이 끝인데, 자신은 어떻게 해야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까. 대체 어떻게 해야? 속이 들끓어 미칠 것만 같았지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뭐, 됐어. 어쨌든 닉스가 내게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라는 거잖아? 그렇다면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가 있어.”
황제의 곁에 머물길 바란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게. 알 수 없는 존재와 싸우라고 해도 그렇게 할게. 원한다면 너를 이렇게 만든 사람을 죽여줄 수도 있고, 세상을 불태울 수도 있어. 원하기만 한다면. 네가 나를 필요로 하기만 한다면. 그렇게라도 곁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닉스, 너도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지.”
닉스의 검은색 눈동자의 의문이 떠올랐다. 늘 그랬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뿐인데, 그녀는 알아주지 않았다. 어쩌면 모른 척하는 걸지도 몰랐다.
“날 밀어내지 마.”
날 거부하지 마. 제발 내 곁에 있어. 난 정말 미칠 것만 같단 말이야. 네게 버림을 받을까 봐, 두 번 다시 너를 만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
“늘 여기 있어. 언제든 만나러 올 수 있게.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데, 너는 왜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네가 힘들어질 거다.”
“난 상관없어, 닉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올 수 있어. 넌 그저 여기 있으면 돼.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네가 원하는 것은 내가 다 해줄게. 나를 통해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할게.”
에반의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결국 닉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또다시 불안하게 붙잡은 것이 고작이었지만 충분했다. 에반은 울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겨우 웃어 보였다. 자신이 날갯짓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달은 언제나 이곳에 있을 터였다. 그러니 도망가기 전에 붙잡을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어떻게 해서든.
* * *
닉스는 끝끝내 황궁 주술사와 연관이 없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오래 살았고, 그렇기에 황궁 주술사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에반은 의심의 눈초리를 감출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질 수도 없었다. 하지만 황궁 주술사의 과거를 캐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황궁 주술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가 있었다.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귀족이었다. 상단을 키워 결국엔 백작까지 올라서게 된 그 가문엔 주술사라곤 태어난 적도 없었지만, 왜인지 그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은 황궁 주술사의 혈육에 대해 알고 있었다.
“황궁 주술사께선 워낙 조용히 생활하시는 걸 좋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술각 내에서도 얼굴 한 번 뵙기가 힘들었다고 하지요. 그뿐입니까? 그 커다란 저택에 식솔도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천사 같은 집사 한 명이 전부였다고요. 그러니 이야기가 샐 틈도 없었겠지요. 게다가 가족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아끼는지라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 입을 막았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근데 그런 비밀스러운 일들을 대체 어찌…….”
“제 조부께서 말씀해 주신 이야기지요. 제 조부께선 황궁 주술사님을 직접 뵌 적이 있다고 하셨거든요. 뭐라고 하셨더라……. 아, 그래. 그분의 따님께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늦은 밤에 찾아와 크게 분노를 하셨다고……. 하마터면 비명도 못 지르고 죽을 뻔했다며 몸서리를 치셨습니다.”
백작은 조부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며 꽤나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에반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저희가 궁금한 것은 황궁 주술사의 가족입니다. 알고 계신 게 있으시다면 모두 말씀해 주십시오.”
“아, 그랬지요. 흐음. 어디 가서 말하면 목숨이 달아난다고 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남지 않았으니 괜찮겠지요?”
“물론입니다.”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맞아 맞아. 조부께서 그분의 따님께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했잖습니까? 뭐, 그 덕분에 인연을 맺어 상단을 이렇게까지 키울 수 있었다고는 말했지만, 어찌 두렵지 않았을까요. 황궁 주술사는 그 어떤 귀족도, 또한 주술사도 감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으며 그뿐 아니라…….”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듣고 싶은 건 황궁 주술사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즐거운 마음에 자꾸 말만 많아지는군요. 황궁 주술사께선 따님만 두 분 계셨습니다. 조부께서 안주인에 대한 건 전혀 들은 바가 없지만, 따님에 대해선 꽤나 많은 걸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지요.”
딸이 두 명이었다라. 에반과 네리아토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잠시 목을 축였던 백작이 말을 마저 이었다.
“한 분은 결혼 전에 양녀로 들인 따님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분이 조부와 인연을 맺으셨던 분이지요. 세상에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실은 신성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비밀스럽게 여신의 사랑을 베풀고 다녔다고 합니다.”
“서, 성녀! 성녀께서 황궁 주술사의 따님이셨다고요? 맙소사. 단 둘뿐이라 전해지던 그 신성 주술사들이 부녀관계였다니, 그런 일이!”
“예, 그렇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지요? 저 또한 어찌나 놀랐던지. 어떻게 그런 대단한 힘을 천자의 눈을 피하며 사용할 수가 있었던 걸까요. 제 조부는 그 힘을 직접 겪으신 적이 있다고 했는데…….”
“저는 또 다른 따님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합니다.”
네리아토는 성녀와 황궁 주술사의 연관을 찾게 되어 그 자체만으로 흥분한 듯했지만, 에반은 아니었다. 그가 궁금한 것은 오로지 닉스뿐이었으니까.
백작은 자꾸 이야기를 끊는 에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초리였지만 의외로 선선히 말해 주었다.
“황궁 주술사께선 부인을 맞이하시고 그 사이에서 따님을 한 분 더 보셨다고 합니다. 조부께선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성녀님을 통해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인 황궁 주술사를 쏙 닮은 성격이 답답하기는 하나 무척이나 사랑스럽다고……. 그리고 어머니를 닮아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녀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말입니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듯했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라면…….
“게다가 황궁 주술사께선 신성 주술사로 유명하시지만 실은 그 전에 암흑 주술사였다고 하지요. 실제로 조부께 찾아왔을 때도 그림자로 목을 부여잡는 등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셨다고 말씀하셨고요. 둘째 따님도 그 힘을 물려받아 어둠을 사용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었습니다. 주술력이 정말 성격과 연관이 깊은지 방에 틀어박혀 모습도 잘 드러내지 않고 그런다고 늘 섭섭하다며 투덜거리시곤 했답니다. 황궁 주술사께서도 사용하는 힘이 두 가지여서 그런지 겉모습은 어둠을 빼닮았다고도…….”
백작은 신이 나서 계속 떠들었지만 에반의 귀에는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은 네리아토도 마찬가지인지 멍하니 굳어선 하염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잔을 들고 있던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황궁 주술사에겐 두 딸이 있었는데, 그중 둘째는 어둠의 힘을 사용하며 어둠을 쏙 빼닮았다고 했다. 그리고 에반에게 황궁 주술사의 표식을 주었던 여인 역시 어둠을 사용하며 어둠을 닮았다. 그것이 과연 우연일까?
에반은 주머니에 넣어둔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로 닉스가 황궁 주술사의 딸이었다면, 요안과 네리아토 역시 그녀가 피해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부족했다. 이걸로는 닉스의 목적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에반은 지금껏 알아낸 단서를 끊임없이 떠올리고 조합해 보았다.
용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마녀, 과거 영광의 시대를 다시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 세상을 빛내었던 황궁 주술사의 표식.
혹시 왕이 되고자 함인가?
새로운 세계를 바라던 그녀가 떠올랐다. 지금의 왕은 절대 새로운 세계를 이끌어갈 수가 없었다. 새로운 세계를 위해선 새로운 왕이 필요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을 이용해 왕이 되고자 하는 걸지도 몰랐다.
아니,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얼마든지 왕관을 줄 수가 있을 테니. 자신의 손에 피를 얼마나 묻히던, 그녀가 원한다면 그 무엇이든 해줄 수 있을 테니. 그리고 정말 그런 거라면, 고작 그런 것 따위라면 어렵지도 않으니까.
게다가 그토록 따스하고 현명한 여인이 다스리는 세계라면 지금보다 훨씬 아름답고 평화로우리라, 그렇게 생각되었다.
* * *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원하는 것은 왕관이 아닌 듯했다.
에반은 공허함이 묻어나는 눈동자로 앞에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두 팔과 다리가 묶인 채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그 남자는 온몸이 피투성이였지만, 작은 상처 하나도 없는 기묘한 상태였다. 바닥에 고여 있는 피의 양으로는 이미 한참 전에 죽었어야 할 것 같은데, 두려움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은 무척이나 또렷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정작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채 그 앞에 서 있는 에반이야말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그의 두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다 못해 텅 비어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으며, 물기 하나 없이 건조했지만 그래서 더욱 불안함이 맴돌았다.
“에반, 괜찮으냐?”
보다 못한 네리아토가 그를 불렀지만, 꾹 다물린 그의 입은 벌어지지 않았다. 만약 입을 열면 그 속에 가득 들어찬 온갖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치밀어 오르는 수많은 생각과 기억을 꾹꾹 눌러 참으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나를 죽여라.”
그가 아무 말 없이 우뚝 서 있자, 남자는 비웃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결국 세상은 어둠에 휩싸이리라. 마녀가 너를 죽일 테니까.”
에반은 남자의 목소리에 결국 이성의 끈을 놓고 말았다. 네 그 더러운 입에서 마녀라는 말이 나와? 감히 마녀를 입에 올려?
에반은 뒤로 돌아섬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헛소리를 해대는 남자의 입에 검을 박아 넣었다.
“커……커컥!”
“에, 에반!”
네리아토가 에반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검은 위에서 아래로 남자의 몸을 꿰뚫었다. 에반은 분노로 일렁이는 얼굴로 검을 쥐고 있는 두 손에 힘을 주었고 더 이상 그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손끝으로 파르르 떨리는 느낌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내 잠잠해지고 나서야 에반은 다시금 몸을 돌렸다. 그의 몸에 박아 넣은 검 따윈 필요 없다는 듯 빼 들지도 않은 채였다.
감옥을 빠져나오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습격을 당했다. 그것도 마녀의 일원이라고 우기는 자에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녀를 이용해 개인적인 시간을 만든 뒤 요안에게 갔다 온 길이었다. 백작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에반과 네리아토는 백작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며 황궁 주술사와 그의 가족에 관한 정보를 더욱 얻어냈고, 결국 그들은 탑에 갇힌 마녀가, 그러니까 에반에게 황궁 주술사의 표식을 준 이가 황궁 주술사의 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에반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건 마녀는 동화 속, 혹은 소문과는 달랐고 그 사실을 믿어주는 이가 생겼으니까. 적어도 적이나 방해자로 여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과 그녀의 관계가 잘 풀리도록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황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늦은 시각을 틈타 몰래 들어왔던 밤손님을 맞이하며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닉스. 거짓말이지? 이건 모두 거짓말일 거야. 그렇지?’
에반의 걸음이 차차 느려지다가 결국 멈추었다. 그의 호흡이 가빠져 있었다. 두 눈동자가 자잘하게 떨렸고, 식은땀마저 비죽 솟아나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복도가 그의 마음을 더욱 아득하게 만들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끔찍한 감정이 그를 내리눌렀다. 모든 것을 다 잃은 후, 마지막 남은 형마저 잃었던 그날과도 비슷한 감정이었다. 분노와 슬픔,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이 그의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는 비틀거리는 발을 옮겨 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간신히 손바닥으로 붙잡은 뒤 몸을 기대었다. 고개를 치켜들자 창문을 통해 밤하늘이 보였다. 너무나 아름답고 고요한 그 밤하늘은 지금의 현실을 더욱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그는 눈물만 흐르지 않을 뿐, 언제 울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눈빛으로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퍽퍽하게 메마른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통에 마치 잔상처럼 뿌옇게 흐렸다.
“내게 명령을 내린 것은 마녀였다! 너를 죽이라며 나를 보낸 것이 마녀였단 말이다!”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인간은 고통과 두려움에 약했다. 에반의 능력 중에는 치유가 있었고, 죽지 않을 만큼 고통을 준 뒤 치료하는 것을 반복하며 그를 심문했다. 몸과 마음이 지쳐 버린 그는 결국 순순히 불었으나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뿐이었다.
“마녀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복수하고 싶지 않으냐고.”
“내게 힘을 가르친 것은 마녀…….”
“흉터로 뒤덮여 있는 얼굴과 검은색 머리카락…….”
“용사는 밝은 색을 지니고 있으며 빛이 난다고…….”
“그런 자를 찾아내어 죽이라고 했다.”
‘죽이라고, 했다. 용사를.’
나를, 이 에반을 죽이라고 했다. 마녀가. 다른 이도 아닌 닉스가.
필요가 없었나? 자꾸 매달리는 것이 싫었나?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인가? 나는 결국 그녀에게 버림을 받고 만 것인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 닉스는 언제든지 자신을 죽일 수가 있었다. 탑에 막 찾아왔던, 제 몸 하나 지키기도 버거웠던 그런 어린 애 따위는 우습게 죽일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죽지 않도록 가르친 것은 그녀였다. 내내 쫓아다니면서도 죽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잠을 잘 때, 씻을 때, 식사할 때 그는 언제나 빈틈투성이였으니 그 그림자로 목만 쥐어도 가볍게 목숨을 취할 수 있었을 터였다. 너무나 손쉽게, 마음만 내키면.
그런데 굳이 다른 이를 보내 죽이라고 했다? 말이 되질 않는다. 오히려 위험해지는 것은 닉스였다. 자신이 위험에 처하면서까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는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게다가 그녀는 용사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음에도 애매하게 찾아 나서도록 만들었다.
에반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되레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아니다. 닉스는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다. 정말로 마녀가 복수를 원해 어둠을 불러 모았다고 한들, 그리고 알 수 없는 일을 도모했다고 한들, 그건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쩌면 자신도 이용하기 위해 데리고 온 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분명 얼마 전에도 용사가 되라고 말했다. 아직은 쓸모가 있다는 뜻이다.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죽이라고 했을 리는 없다. 적어도 죽일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위험에 처할 것이 뻔했다. 죽일 생각은 없었을지 몰라도 어찌 되든 상관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녀에게 자신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만 그녀를 그토록 원하고 아끼고 갈망하고 소중히 여기는 거였다. 알고 있었지만,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녀에게 자신은 조금쯤 소중할 거라고. 그러니 지켜주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거라고.
왜 그렇게 자신을 고문하는 걸까? 왜 이토록 착각하고 기대하고 욕심내게 하는 것일까?
차라리 처음부터 받아주지 않았다면. 차라리 홀로 두었다면. 잠깐 맛보았던 달콤함을 갈망하게 만들 거면 차라리 아예 주지 말 것을.
그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 손으로 천천히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이제야 조금쯤 뚜렷하게 보이는 달에 시선을 던졌다.
그 빛을 받아 에반의 붉은 눈동자가 요요히 빛났다. 머리카락도, 눈썹도, 속눈썹도 하얗게 달빛을 머금어 시리도록 차갑게 보였다.
언뜻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금방이라도 칼에 베일 것 같은 날카로움이 숨어 있었다. 또한, 끔찍할 정도로 진득한 어둠이 그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 * *
이미 모든 내용이 황제의 귀에 들어갔고, 더 이상 건질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인지 명령도 없이 독단적으로 그에게 검을 꽂았음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마녀에 대한 이야기도, 마녀가 이 모든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도, 심지어 그뿐 아니라 몇몇 어둠들이 모여 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도, 그곳이 어디인지조차 밝혀진 마당에 더 살려둘 필요가 없기도 했다.
다만 황제는 조금 고민하는 듯했다. 어둠이 모인다는 그 장소에 들어가 모조리 처리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러면 닉스가 무척이나 위험해지기에 에반이 나서 반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곳에 찾아갔다가 모조리 놓쳐 버리고 다시 잠적하면 어찌할 것이며, 어차피 마녀가 노리는 것은 자신인데 굳이 나설 필요가 있을까? 어찌 되었건 자신이 있는 한 황궁에는 한 발자국도 들어서지 못할 텐데. 오히려 덫을 두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황제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아니면 먼저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인지 일단 지켜보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곳을 나서면 마녀의 그림자가 따라붙을 테니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모른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황제가 머무는 곳을 벗어나며 네리아토에게 속삭였다. 네리아토는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남자를 심문했으니 피곤할 법도 했으며,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모양인지 갈수록 눈이 깊어져만 갔다. 이렇듯 무너져 내린 에반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너무 날카롭고 예민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베일 듯한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그래도 요안에게는 말해야겠지.”
이미 황제에게도 네리아토만 잠시 나갔다 오겠노라고 말해 둔 상태였다. 사실 에반이 밤에 데리고 나가는 것이 더욱 쉽고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어쩌면 마녀가 의심할지도 모르니 일부러 마차를 타고 가는 쪽을 택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요안에게 말하지 않을 일은 없을뿐더러, 만난 적도 없는데 모든 상황을 알고 있으면 이상할 테니까. 그래서 가서 침입자에 대한 이야기만 하되, 나머지 자세한 것은 자신이 찾아가 말하겠다고 일러두었다.
어찌 되었건 소문 속 주인공이 탑 안에 갇혀 있는 마녀라는 사실은 밝혀진 것과 다름없었다. 네리아토는 에반이 걱정되어 아무 말 하지 않는 듯했지만, 속으로는 고민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 사실을 전달받은 요안 또한 마녀를 적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자신은 마녀와 요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무조건 닉스를 택하겠지만, 둘 다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 마녀는 필요 없어진 용사를 버릴 테니까. 자신은 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 걸까.
에반은 네리아토를 보내고 난 후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바로 탑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벽에 기댄 채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닉스가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을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천궁 깊은 곳에서 빠져나왔을 때부터 자신을 따라오는 그림자를 느꼈으니까. 그녀는 지금 이곳에 있다. 여기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바라왔던 것처럼 그렇게.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나 이곳에서 나만을 바라보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내 것인데.’
이 여인은 나의 것인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가지기 위해 애써왔는데. 손에 넣을 날만 기다려왔는데. 그의 속에서 끝없는 소유욕이 치밀어 올랐다. 꾹꾹 눌러 참아 자신조차 외면했던 집착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 그를 삼켰다. 단단히 믿고 있던 그녀에게 받은 큰 상처로 인해 순수하게 갈망하던 감정이 잔뜩 일그러지고 말았다.
잊힌 마녀를 찾아낸 것은 자신이었다. 잃어버린 그녀의 본 모습을 찾아낸 것도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에게 닉스밖에 없듯 그녀 또한 자신밖에 없으면 했다.
그래서 그토록 노력해왔는데, 보란 듯이 탑을 나서 그가 모르는 일을 도모하고 다녔다. 많은 이들을 만나고 다녔다. 혹시라도 흉터가 모조리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자유롭게 나갈까 봐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았다는 듯 비웃는 것 같아 자신이 정말 한심하고 멍청하게만 느껴졌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막아설 수가 없다. 자신은 원하는 것밖에는, 바라는 것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그녀가 이토록 자상하고 따스한 여인이라는 것을, 실은 이렇게나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으면 했는데, 어쩌면 이미 알아차린 자들이 있을지 모른다. 자신 말고도 그녀를 탐내는 이가 있을지 모르고,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쓸모 있는 사람을 만들어놓고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꽉 쥔 그의 주먹 탓에 핏줄이 불거졌다. 꾹 다문 잇새로 씁쓸한 핏물이 느껴졌다. 저 새카맣게 흐트러지는 머리카락도, 꼭 감고 있어 보이지 않는 두 눈동자도, 마치 어둠을 빚어 만든 인형 같은 그녀를 아무에게도 내어줄 수가 없었다. 아무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놓고 두 번 다신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닉스.”
그는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닉스.”
불러도 불러도 가져지지 않는 이름을 다시 되뇌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은 마음과 달리 그의 움직임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너무 가녀려 쉽게 부서질 것만 같은 그녀를 막 대할 순 없었다.
그는 팔을 뻗어 그녀의 목 뒤로 두르며 품에 가두었다. 꽉 힘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이렇듯 그녀를 자신의 품에 가둘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그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 강제로 손에 쥔다고 한들, 언제까지고 그의 곁에 머무를 리는 없을 테니까. 도망치면 찾아낼 길이 없다. 그걸 알고 있기에 지금껏 억지로 참아냈던 것이 아닌가?
일을 그르쳐선 안 된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쥐고 스스로 도망칠 수 없게끔 그리 만들어야만 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조금 기다리는 수밖엔 없다.
“……에반.”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그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여줄 순 없었다. 모든 것을 알아냈다는 걸 들키면 그대로 도망칠지도 모르니까, 속여야 했다. 무너진 가슴을 감춰야 했다. 지금껏 그래 왔듯 그저 웃으며 착한 용사 노릇을 해야만 했다.
이렇게 불안하고 아프기만 하더라도 곁에 있는 것을 포기할 수 없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