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마녀와 용사는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고민해 봐야 답은 하나뿐이다. 중요한 것은 에반은 나를 죽여줄 수가 없다는 점. 언제가 되던 결국은 내 곁을 떠날 거라는 점. 이렇게 억지로 부여잡고 있어봐야 갈수록 고통스러워질 에반과 그 모습을 지켜보며 역시 고통받을 나만이 남을 터.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에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오히려 체념하게 된다. 나는 고통받을 운명이다. 그리고 에반은 그런 내 운명에 휘말린 것뿐이다.
우리를 맞이하는 것이 결국 비극이라면 어차피 슬프고 고통스럽고 괴로울 거, 차라리 후회 없는 비극이 나을지도 모른다. 짧은 행복이라도 맛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에반.”
나의 부름에 에반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쳐온다. 찬란한 태양 같던 붉은 눈동자에서 더 이상 빛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속에 진득하게 가라앉아 있는 탐욕, 그리고 그것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 꿋꿋이 인내하는 고통.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에반이 오롯이 나를 쳐다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참아내는지를.
“이미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네가 아파하는 것을 볼 자신이 없다.”
“하지만, 닉스…….”
“긴 삶을 피로 물드느니 짧지만 찬란한 삶을 함께하고 싶은데,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마녀이기를 포기했다. 사랑하는 이에게 고통을 안겨주면서까지 내 자신의 행복을 챙기려던 마녀를 집어 던졌다.
나는 그의 앞에서 여인이고 싶다. 여인으로서 사랑받고, 여인으로서의 행복을 알게 되는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다. 고통 속에 눈을 감고 마는 그런 처참한 모습 대신, 차차 나이를 먹어가다가 사랑하는 여인의 품에서 잠이 들 듯 그리 마지막을 맞이하는, 그런 에반을 보고 싶다.
나는 끝끝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없으니 에반만이라도…….
“……닉스.”
에반의 얼굴이 한가득 찌푸려진다. 나 역시 가슴께가 찢기는 고통에 숨이 턱 막혀오지만 그래도 애써 웃었다.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으면 에반은 내 애원을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 제 자신을 자책하고 내게 미안해하며 고통이라도 붙잡으려 들 테니까.
“이렇듯 고통으로 가득해, 나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 되는 건 원치 않는다. 나는 네가 어설프게 웃는 미소를 좋아했다.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고 따뜻하게 쳐다봐주는 게 좋았다. 지금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도 너무 아까운데, 차라리 짧더라도 함께 행복한 삶이 낫지 않을까?”
어차피 에반은 언젠가 나를 떠난다. 일찍 떠나든 늦게 떠나든 고통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간 에반과 함께한 시간은 짧지 않은 데다 너무나 많은 것을 나눴다. 이제 와 밀어내고 도망치고 숨는다고 해서 잊힐 리도 없을뿐더러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꼭 아파야 한다면, 적어도 영원한 죄책감만은 벗어나고 싶다. 모든 것이 무기로 뒤바뀌어 나를 산산조각 내는 것은 그대로겠지만 나는 알고 있다. 행복보다 불행이 더욱 오래 남으며, 끈질기게 곱씹게 된다는 것을.
후회는 아무리 해도 끝이 없다. 나는 지금도 후회한다. 에반의 고통을 뒤늦게 깨달은 것도, 에반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든 것도 모조리 후회한다. 지금도 이러한데, 더 긴 시간을 이렇게 보내게 된다면 에반이 떠나간 후 내게 찾아올 불행과 후회는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라.
“안 돼, 닉스. 나는 너를 두고 떠날 수 없어. 아팠다며. 슬펐다며. 고통스러웠다며. 내가 떠나고 난 후 혼자 남은 너는 차라리 죽고만 싶은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죽지 못했다며. 내가 얼마나 밉고 원망스럽고 증오스러웠을지, 이미 알아버렸어. 나는 네게 그런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영원토록 미움받고 싶지도 않아.”
겨우 말랐다 싶었던 눈물이 다시금 툭 터지고 내 입에서 눌러 참던 흐느낌이 새어 나온다. 나는 정말, 정말로 끝까지 이기적이었구나. 나를 죽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반에게 네가 나를 죽여주지 못해 고통스러웠다고 세세히 털어놓았으니, 그간 그의 불안함과 두려움은 얼마나 지독했을까.
에반이 결국 고통을 택하게 된 것은 나 때문이다. 내가 그를 그렇게 밀어붙였다. 비참함과 자괴감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괜찮아, 닉스. 금방 익숙해질 거야. 지금도 차차 익숙해지고 있는걸. 그러니 울지 마.”
에반은 미미하게 떨리는 손으로 연신 내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쉬지 않고 훔쳐도 눈물은 계속 흘러나왔다. 나는 아예 두 눈을 꼭 감고 울음을 토해냈다. 미안해서, 가여워서, 안타까워서, 그리고 또 미안해서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에반을 만나 알지 않아도 될 고통을 알게 되었다고? 틀렸다. 그건 모두 내가 자초한 거였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건 모두 내 탓이니까.
오히려 에반이 나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고 있다. 이번에 에반의 빛을 꺾어버린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사랑해, 에반.”
“……뭐?”
나는 내 눈물을 닦아주던 그의 손을 꼭 잡으며 간신히 눈을 떴다. 희생되는 것은 나로 충분했다. 에반은 부디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으면 했다.
이미 많이 뒤틀렸지만 그래도 아직 시간은 남아 있었다. 남은 시간만큼이라도 맘 놓고 너를 사랑하고 싶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고통은 그 이후에, 후회도 그 이후에 하고 싶다. 네가 떠나간 후 지독하게 긴 시간이 나를 찾아올 테니, 이 짧은 시간만큼은. 제발.
“함께 걸어갈 길이 가시넝쿨 대신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먼 훗날, 아름다웠던 기억들만 남을 테니까. 너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난 또 후회할 것 같거든. 네 붉은 눈동자를 더 봐둘걸, 너의 웃는 모습을 더 많이 봐둘 걸……. 흑……. 네게 사랑한다고…… 정말 미칠 듯이 사랑한다고 말해 둘 걸……. 흐윽…….”
입술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꾹 깨물어보지만, 울음소리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고통? 그래. 에반이 떠난 후 나는 정말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 고통의 대부분은 두 번 다시 에반을 보지 못한다는 것에서 시작했다.
또 그렇게 후회할 순 없다. 지금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도 아깝다. 더 많이, 오래오래 너를 봐둬야 조금은 덜한 후회를 곱씹을 것 같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다면. 어차피 사랑하고야 말았다면.
“……안 돼, 닉스. 안 돼. 포기하지 마. 나를 놓지 마, 제발. 영원히 네 곁에 있으라고 해. 어떻게든 그렇게 할게. 아냐,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난 그렇게 할 거야. 어떻게 나보고 너를 두고 떠날 준비를 하라 그래? 난 못해. 안 해.”
에반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더니 그대로 그의 손을 잡고 있던 내 손바닥을 쫙 편 후 내리그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반응을 보이지도 못한 사이, 에반은 자신의 손바닥 또한 내리긋더니 그대로 손을 포갰다. 뒤섞인 피가 뚝뚝 흘러내려 이불을 적셨다.
“에, 에반!”
뒤늦게 상황을 판단하고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내지르며 밀어내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에반의 눈동자에 언뜻 광기마저 서려 있었다.
“아, 안 돼! 안 돼, 에반!”
나는 그에게 붙잡힌 팔을 빼내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이내 힘을 빼고 누워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불을 적시는 건 핏물뿐만이 아니었기에. 그의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 역시 내 손을 적시고 흘러내려 이불 위로 떨어지고 있었기에.
에반에게 붙잡혀 있는 손도 하염없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손이 그토록이나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반은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낌을 토해냈다. 누구의 피로 젖은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깍지 낀 손에 얼굴을 댄 채 그렇게 울었다.
“왜…… 우리는 왜 남들처럼 사랑할 수 없을까?”
“……에반.”
“나는 차라리 평범하게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얼마나 원망했는지 몰라. 닉스도, 나도 평범하게 태어나서 평범하게 만나 평범하게 사랑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루어질 수 없을 상상을 해보곤 했어. 가난해도 좋으니까 그냥 남들처럼만 그렇게 살고 싶다고.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아이도 낳고 나이도 먹고 그렇게…….”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눈물을 훔쳤다. 어느새 그는 이렇게나 마르고 푸석해져 있었다. 그간 겪어온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그 고통을 내려놓게 하고 싶다.
“그렇게 하면 되잖아. 에반, 그렇게 하자. 남들 하는 건 다 해보고 살자. 농사도 해보고 사냥도 해보고 놀러 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렇게 살자. 나이는 나 대신 네가 먹어주는 거야. 사실 나도 네가 나이를 먹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 조금 더 성숙해지면 어떤 모습일까, 주름이 생기면 어떨까 궁금했어. 아이 대신 동물을 데려다가 키우고, 죽으면 햇볕 잘 드는 곳에 묻어주며…… 그렇게 시간을 보내자. 남들 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면서 살자.”
에반의 얼굴이 괴로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나는 너를 포기하는 게 아니야. 너를 붙잡고 있는 거야. 너를 두고 떠날 생각을 하는 것도, 고통뿐인 너라도 좋으니 곁에 둘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야 나는 모든 것을 감내할 준비가 된 거야. 네 감정도, 마음도, 생각도 모조리 받아들이고 싶어졌어. 너와 함께할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내게 끝이 주어질 그날까지 오로지 너만을 생각하고 내 안에서 함께 살 수 있게…… 조금씩 조금씩 준비해 나가려는 거야.”
내 모든 짐과 고통을 에반에게 떠넘겼다. 그것을 공평하게 나눠가지고 떠날 사람은 행복하게 떠나가도록, 그리고 남을 사람은 행복하게 남도록 그리 만들고 싶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그것뿐이었다. 고통 속에서 헤어질 것인지, 행복 끝에서 헤어질 것인지. 나는 홀로 남을 시간이 어떨지 알면서도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곳은 마녀의 탑보다는 아름다우니까,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에반과 보냈던 시간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상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탑 안에 있는 것도 모두 썩어 없어지겠지만, 그래도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만큼은 그대로일 터였다. 내게 그것만이라도 남아 있다면,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깍지 낀 채 붙잡혀 있는 손에 힘을 주어 그대로 그의 목 뒤로 둘렀다. 그리고 조금쯤 체념한 빛이 감도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췄다. 서로의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인지라 누구의 것인지 모를 눈물 맛이 났다.
“사랑해, 에반.”
“닉스, 나 역시 너를 사랑해. 정말 미쳐도 좋을 만큼.”
“그래. 나를 미치도록 사랑해줘. 그리고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너를 사랑할 수 있게 해줘. 한 시간이 하루처럼, 하루가 한 달처럼 느껴지도록 모든 시간에 최선을 다하게 해줘. 지금껏 내가 살아왔던 시간보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시간보다, 너와 함께한 시간이 더욱 길게 느껴지도록, 그렇게 아낌없이 네 모든 것을 내게 줘. 나는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나도 빠짐없이 새겨둘게.”
겨우 조금 진정되었던 에반이 다시금 흐느끼고, 나 역시 울면서도 애써 웃으며 그를 타박했다.
“울지 마. 앞으로 네 모든 것이 내 속에서 살아갈 텐데, 아프지도 말고 화내지도 말고 울지도 마. 언제나 웃어줘. 다정하게 속삭여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줘. 그러면 난 영원히 행복한 여자로 살 수 있을 것만 같아.”
“사랑해. 사랑해, 닉스. 너를 정말 사랑해.”
에반은 연신 내 입술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여전히 울고 있었지만, 괴롭고 아파 보였지만 그래도 내 얘기를 이해한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에반은 언제나 다정하며 여린 남자였으니, 이렇게까지 애원하는 내 부탁을 외면하지 못할 터였다.
“긴 시간을 고통 속에서 함께하느니, 짧아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자, 우리.”
에반은 대답 대신 울음을 쏟아냈다. 감정을 이기지 못해 하염없이 토해내는 그런 울음이었다. 무엇을 선택하든 고통이 따른다면, 적어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는 언제나 내 죽음과 함께 너의 행복을 바라왔으니.
네가 나를 떠나도 나는 영원히 너를 사랑할게. 지금껏 그러했듯이.
* * *
예상했지만 에반은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나를 두고 떠날 엄두조차 나질 않는 듯했다. 아직 그는 젊었고, 주술사는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오래 사는데 벌써부터 두려움에 질려 어쩔 줄 몰랐다. 남아 있을 사람이 괜찮다는데도 떠날 사람이 막무가내로 우겨대니 우리 둘은 아까운 시간을 또 허비하고 말았다.
나는 에반이 아무 데도 가지 못하도록 꼭 부여잡고 쉼 없이 속삭였다. 지금의 에반은 내가 알던 에반과 많이 다르다고, 언제까지 나를 속상하게 만들 거냐고.
“네게 치유 주술을 사용해, 에반.”
에반은 나를 설득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면서 고집을 꺾기 위해 애를 쓰다가 결국 주술을 사용했다. 새카만 연기가 빠져나와 사라지는 걸 보며 에반도, 나도 또 울었다. 정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뭘 하는 게 좋을까? 닉스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 없어?”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남들은 보통 뭘 하고 시간을 보내지?”
고민에 빠진 에반을 따라 나 역시 생각에 잠겼다. 막상 뭘 하자고 하니 막막했다. 그래서 생각하다 말고 힐끔거리며 끄응 앓는 소리를 내는 에반을 훔쳐보았다.
치유 주술을 사용한 에반은 다시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말랐고 눈 밑이 어두웠지만, 확연히 생기가 돌았고 눈동자에는 총명한 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피를 굳혀 만든 것 같은 구슬에서 다시금 나를 밝히는 태양으로 변했다. 그 따스한 붉은 눈동자가 내게 닿을 때마다 깊은 안도감이 치밀어 올랐다.
더 이상 악몽을 꾸지도 않고, 한껏 예민해선 감정 기복이 제멋대로인 것도 아니었다. 조금쯤 능청진 목소리로 말하는 것도, 어설픈 미소를 짓는 것도 그대로였다. 그간의 에반은 마치 꿈인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물론 그가 나를 원하고 탐하는 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전보다야 확실히 조심스럽고 그 횟수도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나를 품에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나도 이전보다는 확실히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전에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냥 몸을 맡긴 거나 다름없었고, 지금은 이마저도 내게는 소중한 시간이고 기억이 될 테니까. 그의 몸을 똑바로 바라보기도 하고,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방울 하나도 아깝다는 듯 훔쳐내기도 하며 그의 머리카락이나 뺨, 입술 등을 쓰다듬기도 했다.
문득 그의 균형 잡힌 상체를 쓸어내리자 자신도 모르게 얕은 신음을 내뱉었다가 얼굴이 확 붉어지던 에반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저 그를 더 많이 보고 만지고 느끼고 각인시키려고 손을 내밀었던 건데, 의외의 반응이 돌아와 순간 분위기가 서먹해졌다. 그리고 왜인지 더 뜨거워진 에반 때문에 간만에 힘겨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 당혹스러움과 흥분으로 뒤범벅되어 이리저리 흔들리던 붉은 눈동자를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와 가볍게 내뱉고 말았다.
“시계를 가져다 놓을까? 일분일초도 허투루 보내지 않게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건 어…….”
혼자서 이런저런 계획을 늘어놓던 에반이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무심코 또 손으로 가리며 표정을 지우다가 더 이상 감추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손을 치웠다. 물론 표정은 그야말로 이도 저도 아닌 어색한 상태였다.
“방금 또 감추려고 했지?”
“나도 모르게 그만…….”
에반은 턱을 괴고 누워 손가락으로 내 입꼬리를 잡아 올리며 짓궂게 웃었다.
“무슨 생각을 했길래 얼굴이 붉어져선 그렇게 웃은 거야? 말해 봐.”
“그냥…….”
“그냥 뭐?”
나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에반은 집요하게 나와 눈을 마주치려 애를 쓰며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다시 웃어봐, 닉스. 닉스 웃는 걸 보고 싶어.”
“그렇게 웃으라고 하면 어떻게 웃어.”
“왜? 이렇게 웃으면 되지.”
그러면서 자신의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는데, 기가 막히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픽 실웃음을 흘렸다. 그제야 에반은 눈을 예쁘게 휘며 웃더니, 곧 나를 끌어안으며 내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부비적거렸다.
“아, 좋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이대로만 있어도 좋은 것 같네.”
“그래, 에반. 굳이 뭘 할 필요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시간을 함께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아.”
“하지만 그러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걸. 나는 분명 너를 쳐다보기만 했는데도 어느새 몇 시간씩 훌쩍 흘러가 있잖아.”
그건 그냥 쳐다보기만 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그렇게 대답해 주고 싶은 걸 꾹 참아냈다. 에반은 그런 생각은 꿈에도 모른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네 머릿속에 이렇게 누워 있는 모습만 가득 남길 수도 없고. 더 다양하게, 아주 많은 모습이 새겨져야…….”
에반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싶더니 곧 혼잣말에 가까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더 시간을 죽일 수가 있을 거 아니야.”
에반을 생각하며 시간을 죽이겠다고 말했더니 그것을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확실히 비슷한 모습은 언젠가 기억 속에서 하나로 묶일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사실 망각이라는 게 거의 없는 내겐 모조리 다른 에반으로 각기 다르게 살아갈 테지만.
나는 에반의 목소리에 깊이 배인 씁쓸함과 착잡함, 그리고 여전한 미련을 눈치채곤 팔을 들어 올려 등을 도닥여주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꼭 내가 아니어도 내가 사랑하는 이가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 죽을지 알지 못한 채 떠난 사람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제나 내일을 꿈꾸고 다음 달을 기약하며 먼 미래를 그린다.
그러니 우리도 끝을 생각하지 말고 오늘을 즐기면 좋을 텐데, 문득문득 이렇게 분위기가 가라앉고 만다. 차라리 에반이 내가 죽지 못한다는 사실을 몰랐으면 나았을 것을. 이렇게 나는 또 후회한다. 후회는 정말이지, 하고 하고 또 해도 끝이 없다.
“우리 온실을 꾸밀까?”
“온실?”
에반이 의아한 목소리로 묻고,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여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온실. 곡물도 심고 꽃도 심고 과일나무도 심자. 네가 주술을 걸어둔 덕분에 빛은 부족하지 않고 물 또한 넘쳐나니 내가 소홀하지 않으면 아주아주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을 거야.”
꽃은 지고 또 피는 것을 반복하며 나무는 어쩌면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 살아 있을지 모른다. 동물이나 새를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오래 살지 못하겠지만, 새끼를 낳으니까. 새끼가 커서 또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커서 또 새끼를 낳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괜찮을지 모른다.
“그거 괜찮다, 닉스. 아예 눈밭 전체를 온실로 만들어버릴까?”
“그건 너무 넓으니 나 혼자 하기엔 벅찰 것 같다.”
“왜 혼자야? 내가 있는…….”
에반은 무심코 그리 말하다가 제 자신의 입술을 꾹 깨문다. 평범한 인간인 에반이 내 영생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벅찬 일이어서, 입버릇처럼 혼자 남을 나를 걱정할지라도 때때로 이렇게 실수를 하곤 한다. 그러곤 더없이 슬픈 표정을 짓는지라 나는 서둘러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게 뭐지? 땅은 준비되어 있으니 씨를 뿌리면 되는 건가?”
“응? 아, 응. 어떤 꽃을 심고 싶어, 닉스?”
확연히 어색한 목소리지만 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는다.
그래, 만일 에반이 오래 살아남는 것을 택해 여전히 고통받고 있었더라면 이런 생활은 꿈도 꾸지 못했을 테지. 일분일초가 너무나 소중하고 애틋하며 간절한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거였다.
얼마나 함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과연 내가 에반을 잘 보내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에반을 보내고 난 후 어떤 끔찍한 고통이 나를 덮칠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하니까.
그저 조금만, 조금만 더 내 곁에 머물러주길.
나는 빛을 되찾아 눈부시게 아름다운 에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 * *
꿈을 꿨다.
내 주위에는 온통 새카만 암흑뿐이었다. 언제나처럼 너무나 익숙하고 안락하며, 동시에 두렵고 끔찍한 어둠 속에 오로지 나 혼자였다.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이제 곧 어디서든 괴물이 튀어나오거나 핏물이 내리고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가득 들어찰 터였다. 늘 그랬듯이.
하지만 예상과 달리 한참 동안 아무것도 바뀌질 않는다. 여전히 새카맣고 고요해 모처럼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물속에 잠겨 있는 것도 아니고 따스한 빛 속에 안겨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놓였다. 나른했고 안정이 되었다. 어둠이 나를 안아주고 있는 듯했다.
누워 있는 건지, 서 있는 건지, 과연 내가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낯선 감각에 사로잡혔다. 먼 곳에서 들려오던 박동 소리가 점차 커져, 마치 주위에 있는 어둠 자체가 쿵쿵 살아 있는 생명체로 느껴졌다.
이토록 평안한 것은 처음인지라 웃음이 비집고 튀어나올 것만 같다. 언제나 불안하게 떨리던 가슴이 진정되고, 따스함으로 가득 차 충족감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눈앞에 작은 빛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새 어둠이 익숙해진 것인지 손톱만큼 작은 빛이 눈부셨다. 미처 익숙해지기도 전에 작은 빛무리는 점차 늘어나 곧 주위를 온통 둘러쌌다. 그 크기가 각각 다르고 모양이나 색도 조금씩 차이가 있어 어느 순간, 밤하늘이 되어 있었다. 나는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밤하늘의 별과 같은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제각기 빛을 내던 그것들은 다시금 하나로 모여들고,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어둠 역시 안개처럼 스멀스멀 움직여 빛과 뒤섞이기 시작했다. 빛과 어둠. 섞이려야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그 두 개가 포개졌다 나누어졌다 반복하더니 결국 하나가 되었다. 위는 빛, 아래는 어둠.
나는 그것이 내가 사는 세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것은 태초의 세계였다. 새하얗던 윗부분에 변화가 인다. 대지가 생기고 물이 흐른다. 그리고 바람이 불고 나무와 식물들이 자라난다.
그렇게 광석과 인간이 생길 때 즈음 어두운 부분에도 차차 변화가 생긴다. 확연히 느린 속도로, 게다가 미미할 정도의 변화가. 새카만 대지와 핏물처럼 진득한 물, 뿌리처럼 생긴 나무들이 생겨난다. 역시 인간과 비슷한 존재들이 생기고 나서야 모든 것이 멈춘다.
내내 밝던 세상에는 일정 주기로 밤이 찾아오고, 내내 어둡던 세상에는 일정 주기로 크고 밝은 태양 같은 것이 떠올라 밝혀준다. 두 세계는 각각 이면에 자리 잡고 있지만 분명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 밝은 곳에 뜨는 붉은 달, 어두운 곳에 뜨는 하얀 태양이 그것이다.
빛의 세계에선 아주 다양한 생물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게다가 하나에서 수십 갈래로 나누어진 거라 약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어둠의 세계는 다르다. 어둠에서 태어난 이들은 확연히 강하고 단순하다. 그리고 그들은 과거를 잊지 않는다. 두 여신이 함께 만든 하나의 세계를 기억한다. 탐욕스럽고 잔학한 그들은 하얀 태양을 탐낸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결국 어느 날, 빛의 세계는 어둠에 휩싸인다. 차차 새카맣게 물들어 마치 오롯한 어둠의 세계가 된 것만 같다.
하지만 갑자기 빛줄기가 치솟더니 이윽고 강하게 터져 나와 각 대륙으로 퍼져 나간다. 도저히 두 눈을 뜨고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새하얗고 강한 빛인지라 손으로 눈을 가리던 내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되돌리게 될 그날까지 멈춰 있어라.”
그 이후 갑작스레 수많은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태양이 제 자신을 장렬히 불태운 뒤 재가 되어 흩어지고, 그 뿌연 잿더미 속에서 다시금 작은 불씨가 피어났다. 그것은 곧 새빨간 깃털로 변해 확 휘날리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태양처럼 붉고 아름다운 날개가 활짝 펴진다.
“어디서 찾지? 아니, 태어나긴 했으려나?”
머릿속에서 웅웅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스쳐 지나가자 이내 아기 울음소리가 세상을 가득 채운다.
“아름다운 공주님이십니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들과 기쁨을 나누는 수많은 사람을 지나쳐 순식간에 장면이 뒤바뀌었다.
우드득거리는 거친 소리와 함께 굵은 나뭇가지가 하늘로 뻗어 나간다. 땅에 박힌 채 재빠른 속도로 흙을 헤집고 깊숙이, 더욱 멀리 퍼지는 뿌리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대지 속 양분과 수분을 빨아들인다. 나뭇가지 곳곳에 싱그러운 잎사귀가 피어나고, 어느새 하늘을 가릴 정도로 크게 자라나 마치 세상을 받들고 있는 모습으로 변한다.
그리고 또 하늘이 핑 돌 정도로 재빨리 시간이 흘러가더니 어디선가 히히힝 하는 짐승 울음소리가 들린다. 내가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눈앞에 사막이 펼쳐진다. 분명 조금 전까지 질척하던 땅이 금색 모래로 변하고 푸른 잎사귀 대신 구름 한 점 없는, 별이 가득 박힌 하늘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곳을 건너가는 무리가 있다. 짐승을 타고 터벅터벅 걷는 무리를 자세히 살펴보고 싶지만, 노란 천을 둘러쓴 채 가장 앞장서 사막을 가로지르는 한 남자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떨어지는 게 고작이다.
그리고 사막에서 다시금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돌아와 아주 재빠르게 시간이 흘러간다. 수많은 장면이 그저 스쳐 지나가듯 그렇게 그려진다. 나이를 먹어 결국 죽고 다시 큰 울음소리와 함께 태어나는 사람들, 물이 넘쳐 흘렀지만 차차 말라가 지형이 뒤바뀌고, 아무것도 없던 곳에 바람을 타고 온 씨앗이 뿌리를 내고 자라나 순식간에 들판이 되기도 하며 수많은 것이 달라진다.
건물들도 생겨났다 허물어졌다 반복하고, 활기차던 마을이 황폐해지고, 텅 빈 곳에 새로운 나라가 생겨나는 등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은 변화가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데, 어느 순간 산속 깊은 곳에 있는 호숫가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실바람에 흩날리는 새카만 머리카락을 발견하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가만히 서 있던 여인이 느릿하게 몸을 돌리고 감겨 있던 눈을 뜨며 물었다.
“뭐지?”
그럴 리가 없건만 보석같이 붉은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름이 끼쳐 나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는데, 갑작스레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였다. 새카만 장막을 훅 내던져 내게 덮은 듯 어둠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방금까지 봤던 것이 너무 생생하고 가슴 떨리는 터라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또 과거.”
그러자 그게 주문이라도 된다는 듯 조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많은 장면과 지식이 내 머릿속에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느끼는 것이 고작이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는 기억과 깨달음에, 살필 새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마치 애초부터 내 속에 존재했었다는 듯, 회오리치며 쏟아져 나온 것들은 알아서 제자리로 돌아가 박힌다. 순서대로 차차 정리되어 간다.
그중에는 내가 궁금해 했던 것에 대한 답들이 섞여 있어 결국 눈물을 내비치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을 몰아닥치던 모든 것들이 조금 진정이 되고 나서야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닦아내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시아.”
그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어둠이 일렁이며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사랑하는 나의 딸아.”
“……어머니.”
그것은 오롯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변하지 못한 채 그림자처럼 그리 다가와 내 앞에 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분명 느낄 수가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울고 있다는 것을.
“할 얘기가 많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해 이럴 수밖에 없던 나를 용서하거라.”
‘내 잘못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네 시간들에 대해선 사과조차 할 수 없으니, 네 못난 어미를 평생 원망하고 저주해 다오.’
내가 있는 이곳 자체가 어둠 속이기 때문인지 어머니가 말로 내뱉지 않은 속마음도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고통스러운 만큼 어머니도 똑같은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저절로 깨우쳤다. 어머니가 그것을 원했기에. 또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슬픈 희생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너만은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가장 아름다운 삶을 주겠다.”
‘이 모든 것이 끝난 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면 못난 어미 대신 자상하고 평화로우며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오래오래 사랑받으며 살 수 있도록 하마. 그 어떤 아픔과 고통도 없는, 작은 사건사고도 없는 아름다운 삶을 네게 주마.’
나는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행복한 삶에는 반드시 에반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에반을 사랑해서 이토록 큰 고통을 겪었듯, 에반이 나를 사랑해서 겪지 않아도 될 고통에 휘말렸듯, 내 어머니도 단지 내 아버지를 사랑해 이러한 비극이 생겨난 거라는 걸 깨달았으니. 그 사랑의 결실이 나였으며, 처음부터 뒤틀렸던 비극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희생을 감내하게 되었다는 걸 알았으니.
다시금 시작할 때에는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하고 내 행복을 지켜주겠노라 약속하는 어머니에게 더는 화를 낼 수가 없다. 곁에서 지켜봐 왔던 어머니는 여신이기 전에 이미 여인이었으니 더는 원망할 수가 없다.
“제가 해야 할 일을 알았어요. 저는 어머니를 용서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지만 더 이상 원망하지는 않을게요. 미워하지 않을게요.”
어머니의 슬픈 속삭임이 차차 멀어지고, 눈앞에 모여들었던 빛이 내 품 안에 안겨들었다. 나는 기꺼이 그것을 품었다. 빛은 환하게 터져 나와 내 주위 어둠을 몰아내고 나를 집어삼켰다.
더없는 불행과 함께하는 삶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왜 이리 보잘것없이 느껴질까. 내 불행이 사랑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 불행이 사랑으로 끝날 것을 알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불행은 얼마 남지 않았으며, 이것으로 인해 더없는 행복을 보장받았기 때문인가?
어쩌면 체념을 벗어나 초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닉스!”
느릿하게 눈을 떠 온 눈동자에 걱정스러움을 한가득 품은 에반과 마주쳤다. 그를 보니 평온하게 가라앉아 있던 감정이 북받쳤다. 이미 한참 전부터 울고 있었는지 그는 연신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왜 그래? 또 악몽을 꾼 거야?”
“……아니.”
나는 흐느끼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울음을 토해내며 에반을 끌어안았다. 얼떨결에 내게 안긴 그는 어쩔 줄 모르며 연신 왜 그러냐는 말만 반복했다.
“에반, 빛이 무엇인지 알았어. 내가 살아야만 했던 이유가 뭔지 알았다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닉스?”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어.”
에반이 내 얼굴 옆에 손바닥을 대고 상체를 일으키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신이 세상을 위해 준비한 안배는 너와 나였어. 어둠을 몰아내는 빛은 네가 아니라, 너와 나의 아이였어.”
“……아이? 아이라고?”
빛은 어둠을 물러나게 하고 영원한 안식을 선물하리라.
에반이 죽고 나서 그 점괘가 사라졌던 이유는 그가 빛이어서가 아니었다. 그와 내가 함께 만들 아이가 빛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카드로 미래를 점치도록 가르쳐 준 것은 진실한 거였다. 지금껏 카드로 점쳤던 미래는 틀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내 모든 어둠을 가지고 태어날 아이. 동시에 에반의 빛을 타고날 아이. 나는 그토록 증오하던 영생을 비로소 끝낼 수 있게 되었다. 평범한 인간처럼 늙어가다 결국 죽을 수 있게 되었다.
에반의 당혹스러운 물음에도 대답해 주지 못하고 그저 흐느끼기만 하자, 그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몸을 일으켜 내 배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아직 납작할 뿐인 배임에도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설마…….”
나는 그토록이나 당황해하는 그의 모습이 웃겨 울다 말고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에반, 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너와 나의 아이를.”
* * *
어둠의 세계에서 태어난 이와 빛의 세계에서 태어난 이는 비록 겉모습이 닮았을지라도 그 속은 완전히 다르다. 그러니 평범한 여인들처럼 아이를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을 터.
게다가 어둠의 세계는 탐욕과 잔학성만이 가득하다. 만일 빛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여인들처럼 몸을 섞는 것만으로 임신할 수 있다면, 어둠의 세계는 쾌락을 탐하려다 태어나는 아이들이 수없이 많을 수밖에 없다.
결국,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아니라 그 조건이 달랐던 거였다. 그리고 그 조건이 뭔지 깨닫자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체 신들은 어디까지 보고 있는 걸까? 어떻게 에반이 나와 함께 오래 살기 위해 피를 주입하고, 그로 인해 어둠의 세계에 걸쳐지리라는 걸 예상했을까?
어둠인 내가 아이를 가지려면 일단 어둠이어야 했다. 그리고 쾌락을 위해서가 아닌, 탐욕으로 인해 그 무엇도 나누지 않으려는 두 사람이 기꺼이 피를 내어줄 정도로 진실한 마음이 있어야만 어둠과 어둠, 피와 피가 섞여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 거였다.
수많은 것으로 나누어져 다양성을 지닌 빛의 세계와 달리 어둠의 세계는 오롯한 어둠에서 태어나 이어져 왔으니까.
결국, 에반의 그 고통스러운 선택이 있었기에 나의 뱃속에 우리들의 아이가 자라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닉스, 닉스! 이것 봐, 열매가 맺혔어!”
“정말이네?”
나는 에반이 다급하게 부르는 통에 온실 속 식물들에 물을 주다 말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해맑은 미소로 열매를 보여주는 그를 마주했다.
온실 안은 온갖 식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더욱 넓힌 터라 드넓은 온실 끝에는 과일과 꽃나무들이 한가득 심어져 있었는데, 어느새 에반의 가슴께까지 자라났다. 그리고 드디어 첫 열매가 맺혔다.
“언제 먹을 수 있을까?”
“색을 보니 몇 개월 뒤에는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어? 여기도 있어, 봐봐.”
“진짜네?”
잎사귀에 가려져 안 보였던 열매 하나를 더 찾아내자 에반은 순수하게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나 또한 배시시 웃자, 에반이 냉큼 맨바닥에 주저앉아 유달리 부푼 배에 얼굴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아가야, 아빠가 준비한 과일 나무가 드디어 열매를 맺었어. 네가 태어날 때쯤에는 아마 온실 천장까지 자라나 수없이 많은 열매를 맺겠지. 먹을 때마다 꼭 아빠한테 감사합니다, 인사해야 해! 이거 다 아빠가 열심히 키운 거야!”
나는 그런 에반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깃털 같은 새하얀 머리카락은 내 손길에 의해 마구 뒤엉켰다가 금세 사르르 흘러내렸다.
팔 하나보다도 작은 어린 나무를 심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만치나 자라나 열매를 맺었다. 그럼에도 내 배는 이제 막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부풀었을 뿐이었다.
어둠은 시간이 열 배 이상 느리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 어둠을 모조리 가져갈’ 아이였다. 신의 피를 물려받을 아이가 여느 인간과 같을 리가 없다.
게다가 신이 직접 가진 것과 한 세대 걸쳐져 낳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기에 내 몸속에 자리 잡은 아이는 아주 느릿하게, 천천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간 앳된 티가 아예 가시고 장성한 남자가 된 에반은 나와 아이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탑 안에는 아이를 위한 용품이 가득 들어찼고, 언젠가 주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나를 위해 편리한 주술이 걸린 물건들을 꾸준히 만들어냈다.
차가운 방 안에는 몇십 년을 먹어도 거뜬할 식량이 꽁꽁 언 채 비축되어 있었고, 탑 안에 새겨져 있던 주술진은 모조리 풀려 언제든지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해놓았다.
에반의 두려움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안도한 듯 보였다. 나를 혼자 남겨두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켰으니, 게다가 자신의 분신이 내가 끝을 맞이할 때까지 곁에 있어줄 테니 완전히는 아니어도 조금쯤 마음을 놓았다.
언젠가 에반이 나이를 더 먹어 죽음이 성큼 가까워졌을 때, 그때 또다시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며 고집을 피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모든 시간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에반과 나는 태어난 이후 가장 큰 행복을 만끽하며 그렇게 추억을 쌓아나갔다.
“오랜만이군.”
“잘 지내셨나요?”
달라진 것은 또 있었다. 아무도 오지 못하도록, 그 누구도 모르도록 꼭꼭 숨겨두었던 탑 안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두 남녀가 찾아왔다. 바로 새로운 황제 요안과 황후 헤레이나였다.
“안녕하세요, 황녀 저하. 제 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내가 헤레이나 품에 안겨 있는 꼬마 공주님에게 인사를 하자, 우물쭈물하다가 곧 고개를 휙 돌리며 엄마 품에 숨어버렸다. 그 행동이 귀여워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헤레이나 역시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첫째 황태자와 둘째 황자는 씩씩한 사내아이로 성장해 아버지를 도울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고,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는 태어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셋째 황녀였다.
아이가 그토록 성장해 가는 동안 요안과 헤레이나도 그만큼 시간을 먹으며 나아가, 처음 봤을 때보다 확연히 성숙해져 있었다. 헤레이나는 성숙함이 우아함으로 뒤바뀌는지 더욱 깊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아직도 그대로인가? 어서 만나보고 싶은데 대체 언제 태어나는 거지?”
“저도 궁금한데 말이에요. 얼마나 아름다울지 기대되는걸요.”
간신히 신의 힘을 받아들이는 데 성공했지만 에반이 아니고선 버틸 수 없는 요안은 한눈에 보기에도 지쳐 있었다. 아마 보통 사람들보다도 오래 살지 못하고, 그 끝마저 평온하지 못할 터였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아니라면 절대 감당할 수 없는, 그게 바로 신의 힘이었기에. 그래도 눈빛만큼은 형형한 옛 모습 그대로였다.
그가 내 배를 보며 그리 묻자, 에반이 서둘러 나를 품에 끌어안으며 내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영락없이 내가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행동에 요안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정작 에반은 태연스러웠다.
“평범한 아이가 아니니 그럴 수밖에요. 아무렴 세상을 밝힐 아인데요. 여느 인간과 같을 순 없죠.”
태어나기도 전부터 심히 팔불출의 기색이 넘쳐나니 보는 우리들은 그저 기가 찬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만일 아이를 직접 품에 안는다면 어느 정도일지 감도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물론 에반은 결국 아이를 보지 못할 것만 같지만.
같이 영원히 사는 것도, 같이 죽는 것도 포기한 우리 둘의 마지막 바람은 에반이 죽기 전에는 아이가 태어나 우리를 꼭 빼닮은 그 모습을 에반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거였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자라난다면, 결국 부질없는 소망에 그치겠지만 말이다.
요안이 신의 힘을 받아들이는 것에 성공한 후 주술은 다시 부활했다. 하지만 이미 많은 것이 손실되었고, 남아 있는 공식적인 주술사도 에반과 요안, 네리아토가 끝이었다. 부활은 했지만 정작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없는 것이다.
네리아토는 그간 많이 사라진 주술과 관련된 지식을 재정비하느라 바쁜 삶을 보냈고, 삶의 끝에 가서는 주술력을 지닌 아이들을 데려다가 양성했다. 결국 새로운 주술사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지만, 그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닌지라 느리지만 꾸준히 주술사들을 성장시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습게도 네리아토에 이어 주술사들을 가르치게 된 이는 다름 아닌 루아단이었다. 어둠이기는 하나 실제로 다룰 수 있으니 더 나은 적임자를 찾을 수가 없던 이유였다. 그는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사막을 신경 쓰면서도, 새로이 맞이하게 된 나라가 더욱 번영하도록 아낌없이 능력을 발휘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그것을 내게 얘기해 준 것은 요안도, 헤레이나도 아닌 에반이었다. 그는 내 뱃속에 자신의 아이가 자리 잡은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 모양인지 더는 그에게 질투를 느끼지도, 내게 끔찍한 집착을 내보이지도 않았다.
물론 어디를 가든 자신과 꼭 함께여야 하고, 다른 이는 몰라도 루아단 만큼은 만나지 못하게 했지만. 그는 끝끝내 루아단이 내 과거의 남자라는 착각을 벗어던지지 못한 듯 보였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일분일초가 간절하고 모든 시간을 함께하며 잠시라도 눈을 떼거나 곁을 떠나는 일이 없게끔 했음에도, 우리 둘은 알게 모르게 조급함에 시달렸다.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붙잡고 싶을 정도로.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이보다 더 최선을 다할 순 없을까 언제나 고민하고 실행했다. 남들 다하는 것도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경험인 것처럼 그리 여기며 머릿속에 새겼고, 눈빛 하나 목소리 하나 놓치는 것도 아쉬워 매 순간순간 서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붙어 있었다. 아마 우리처럼 이렇게 사랑하는 부부는 없을 거야, 그리 말하며 웃을 정도로.
사실 에반, 나는 아직 너를 보낼 자신이 없어. 네가 나를 떠날 자신이 없듯이.
차마 내뱉지 못하는 말을 꾸역꾸역 속으로 삼킨다. 나는 오늘도 그를 보낼 준비를 하며 금세 과거가 되어버리는 시간을 하염없이 슬퍼한다. 함께하는 시간이, 같이 맞이하는 시간이 그 무엇보다도 행복하고 기쁜데, 그것은 맞이함과 동시에 스쳐 지나가 지독한 슬픔으로 변한다.
나는 점차 불어나 더는 외면하지 못하는 그것을 등진 채 눈부신 하루하루를 품에 안았다. 절대 잊지 못하도록, 영원히 내 안에 살아가도록 그렇게 빠짐없이 마음속에 새겨 넣었다.
* * *
아직 태어나려면 멀었음에도 에반은 아기를 맞이할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이가 읽을 책도 계속 가져오고, 틈만 나면 내 옆에 앉아 책을 읽어주었다. 대체 이런 정보들은 어디서 들어오는 건지 알 길이 없다.
드물게 찾아오는 헤레이나도 이런 에반의 모습에 어이없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으니 그녀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전부터 느꼈지만, 황궁 내에 에반에게 도움을 주는 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온실과 달리 이미 지어져 있는 탑은 넓힐 수가 없었다. 에반은 그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랄 공간은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스스로를 꾸짖곤 했다.
에반은 나무를 깎아 장난감을 만들거나, 나와 함께 헝겊을 꿰매 인형을 만들었다. 그것들이 탑 한구석에 쌓여갈 때마다 좁은 공간에 대한 불만은 더욱 커졌다.
“위를 터서 한층 더 쌓아 올릴까? 아이 놀이방으로 꾸미는 거지.”
아이에게 가장 맛있는 것을 먹이고 가장 좋은 것을 입히며 세상 모든 것을 쥐여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라고 하지만, 에반은 그 정도가 조금 심했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보통의 부모는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때그때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지만 에반은 아니니까. 아빠 없이 혼자 자랄 아이와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울 내게 미안해 더욱 애를 쓴다는 정도는 일찌감치 눈치를 챘다.
물론 그가 아무리 아이에게 지극정성이라고 해도 나를 두고 보이지도 않는 아이에게 모든 애정을 쏟아부을 남자는 아니었다. 아무리 우리 둘의 아이고 내 뱃속에서 자라나는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의 세상엔 내가 전부였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종종 뱃속 아이에게 화내거나 투덜거리기도 했다. 아이 때문에 나를 안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불만이 대부분이었다.
“어차피 태어날 아이에겐 이 세상 자체가 놀이터일 텐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눈밭을 뛰노는 동물들이 장난감이 되어줄 거고, 온실에서 자라나는 식물들과 바람, 밤하늘 등, 세상 전부가 아이에게 가르침을 주게 될 거야.”
“……그래도.”
“우리 아이는 틀림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의자에 앉아 있는 내 허벅지에 기대 오는 시무룩한 얼굴의 에반을 쓰다듬어주었다. 조금 더 부푼 배 때문에 그는 의도치 않아도 배에 귀를 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죽기 전에는 아이를 볼 수 있을까?”
그의 얼굴에 떠오른 흐릿한 미소에, 가슴이 저릿저릿하게 아팠다.
그는 여전히 아름답고 미끈하지만 처음 이 탑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내게 이렇듯 기대오던 모습과는 달라져 있었다.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듯 패기가 넘쳐나던 눈빛은 한풀 꺾이고, 대신 어떤 상황이든 기꺼이 받아들일 여유로움을 배워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세상을 짊어지고 지친 이들을 이끌 것 같던 어깨와 팔은, 사랑하는 가족을 감싸 안고 품을 내어줄 듬직함이 묻어났다.
에반이 나이를 먹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우면서도 슬펐다. 그가 나이를 조금 더 먹으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면서도 궁금하지 않았듯이.
나는 여전히 그대로인데 에반 홀로 끝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술사인 에반은 남들보다 천천히 늙어간다는 점이었다.
그간 함께 지내온 시간이 결코 짧은 건 아닌지라 조금쯤 여유를 간직한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평생 내 아내로 삼을 수 있다니 난 행운아야’라든가 ‘심지어 그 아내는 늙지도 않잖아. 모든 남자가 부러워할걸?’이라며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지만, 실은 서로 깊은 슬픔을 숨기고 외면할 뿐이었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만나 함께 삶을 이끌어나가는데 누구는 늙고 누구는 늙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에반은 나의 젊음을 보며 그리워하고 부러워했다. 반면 나는 에반의 늙음을 보며 부러워하고 갈망했다.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차 깊어졌다.
그래서 나는 에반을 바라보며 나의 늙음을 상상하고, 에반은 나를 바라보며 자신의 젊음을 떠올렸다. 적어도 탑 안에서의 우리는, 같은 시간대를 보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에반이 죄책감으로 일렁이는 눈빛으로 편지 하나를 건넸다.
“미리 알려줬으면 네게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할 수 있게 데려갔을 텐데……. 미안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꺼내 읽었다. 망설임의 흔적이 한껏 묻어나는 그 편지에는 루아단의 마지막 인사가 담겨 있었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닉스 님을 만나게 된 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기쁜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함께 아름다운 세상이 올 수 있도록 애써왔던 것들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 같군요. 간간이 전해 듣는 소식에 의하면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시다던데 다행입니다. 마음이 놓여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가득 번진 마지막 문장은 몇 번이고 고쳐 쓴 티가 역력했다.
―보고 싶습니다. 내게 새 삶을 주는 대신 나의 심장을 가져가신 분이시여. 너무 보고 싶어서, 차마 오래오래 건강히 살다가 오시라는 말은 못할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끝으로 갈수록 바들바들 떨리던 손은 결국 마지막 문장에서 힘없이 툭 편지를 놓치고 말았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엎으려 몰아치는 슬픔을 토해냈다.
그런 내 등을 감싸 안아 도닥거리는 에반은 쉬지 않고 사과를 해댔다. 미안해. 미안해. 미리 알았으면 만나게 해주었을 텐데.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야. 그 역시 감정이 북받치는 듯 반쯤 울먹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마지막을 맞이했지? 가족들 품에서 눈을 감았나?”
“……아니. 그는 홀로 살았어. 그래서 편지를 더 늦게 전달받았어.”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하지, 왜 그리 쓸쓸하게 죽었을까. 가슴이 아파 울부짖었다.
“그는, 그는 어떻게 살았어? 말해 줘, 내게. 하나도 빠짐없이.”
“응, 다 말해 줄게. 그러니까 일단 울음부터 그쳐. 아기가 많이 놀랐을 거야.”
울음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편지가 다 젖어 찢어질까 조심스레 여며 가슴 속에 품었다. 그렇게 하면 그가 내 속에서 살아가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러나 마음을 추스를 시간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에반이 내게 겉옷을 입혀주더니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괴로웠다. 나는 모처럼 나들이를 가는 것임에도 기뻐할 수가 없었다.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그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깊게 가라앉아 있는 눈동자는 억누르고 있는 슬픔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발끝부터 치고 올라와 나를 집어삼켰다.
수도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에 나와 울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비통함이 가득했다. 황궁에서부터 시작된 행렬은 계속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끝도 없이 길게 이어졌다.
오래전,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후로 처음 보는 황태자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느라 일그러진 얼굴로 앞장서서 행렬을 이끌고 있었다. 장성한 그는 제 아비를 꼭 닮아 있었다. 오만하지만 올곧은 눈매를 보아 하니, 제가 쓰게 된 왕관의 무게를 잘 알고 있을 듯했다.
나는 슬피 우는 사람들을 훑다가 아리땁게 성장해 가는 황녀의 손을 꼭 잡은 채 눈물을 훔치는 헤레이나를 찾아냈다. 늙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는 떠나가는 자신의 남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이 마치 나처럼 보여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고개를 돌리니 에반은 눈을 재빨리 깜빡거리며 고인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애를 쓰고 있었다.
“진작 내려놓았으면 더 오래 사셨을 텐데. 왜 그렇게까지…….”
요안은 아직 젊었다. 아니, 평범한 사람들과 비교하면 나이 지긋이 먹었다고 말할 만했지만, 그래도 주술사니 여유로웠다. 그래서 이렇게 재빨리 이별이 찾아올 줄 몰랐다. 신의 힘을 강제로 받아들인 탓에 빠르게 약해지던 육체는 손 쓸 새도 없이 그렇게 마지막을 맞이하고 말았다고, 뒤늦게 에반에게 전해 들었다. 예고치 못한 이별에 숨이 턱턱 막혔다.
이별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장례 행렬은 한 번 더 이어졌다. 남편을 보내고 시름시름 앓던 헤레이나 역시 결국 그를 따라간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볼 기회는 내게도 주어졌다. 헤레이나가 나를 보고 싶다고 요청해 온 탓이었다.
“여전히,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마마께서도 처음 뵈었던 그날처럼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그리 얘기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부인.”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을 내뱉는 헤레이나를 지켜보는 것이 너무 힘들어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숨죽여 울었다. 수없이 많은 이별을 겪어왔지만, 이렇듯 나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프고 슬펐다.
같은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마지막을 맞이하는 게 특이할 것도 없건만, 나는 한 번에 몰아닥치는 것 같은 이별에 결국 무너져 내렸다.
“언제나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으려 노력해 왔습니다. 이렇듯 죄인의 딸의 마지막 인사를 받아주기 위해 찾아와 주셔서, 기쁘군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입니다.”
“제게도 마마께선 언제나 감사한 분이셨으니 그런 말 마세요.”
헤레이나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곧 뵙도록 해요, 우리.”
나는 그 인사가 정말 가슴이 아리도록 고마워서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하얗고 가느다라며 곱던 손은 어느덧 쭈글쭈글해지고 나무토막처럼 거칠어졌지만, 그 따스함만은 그대로였다.
그것이 딱딱하게 굳어 차가워질 때까지 손을 놓지 못하던 나는 에반의 손길에 의해 이끌리듯 떨어지고 나서야 미처 내뱉지 못한 말을 속삭일 수 있었다.
“그곳에서도 언제나 행복하시길.”
황후 헤레이나는 황제 요안의 곁에 함께 묻혔지만, 세상 누구보다도 늠름했던 기사와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던 공주는 내 가슴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터였다.
이제 눈 덮인 깊은 산속에 마녀와 용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아마 그 누구도 동화 속 주인공들이 어떻게 마지막을 맞이했는지조차 알지 못할 터였다. 동화가 끝나고 나서도 각자 주어진 삶에 충실하게 살아가다가 눈을 감는, 그런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으니까.
그래도 죽음만을 원하던 마녀와 그런 마녀만을 원하던 용사는 비극적이던 삶 속에서 행복을 거머쥐는 데 성공했다. 결국, 용사는 마녀를 손에 넣었고, 마녀는 죽음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틀림없이 해피엔딩이리라.
둘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누구도 오지 못하는 곳에서 남은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것이다.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동화 속 결말처럼,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