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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마녀는 잔혹한 진실을 맞닥뜨린다 (32/45)

  31. 마녀는 잔혹한 진실을 맞닥뜨린다

헤레이나와 나는 그 밖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황제와 내 언니가 엮여 있다는 사실은 굉장히 충격적이었지만, 계속 상념에 빠져 있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이야기, 거의 대부분 신생 귀족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벌어지는 소소한 상황들, 새로이 만들어지고 있는 수많은 것들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괜히 옷이나 장신구, 자수에 관해 묻기도 하고 실제로 도움을 받기도 했다. 헤레이나는 황궁으로 돌아가면 내게 선물들을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내게 가장 잘 맞는 옷을 가지고 간 뒤 그것을 참고해, 탑에서 입기에도 편하면서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만들 드레스를 제작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 역시 여기까지 찾아온 헤레이나에게 보잘것없지만 작은 성의라며, 찢어져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던 드레스 천으로 만든 자그마한 헝겊 지갑을 건넸다. 여전히 나는 손재주가 좋지 않은 편이었고, 값비싼 천이라고는 하나 이미 수없이 입어 낡은 걸로 만든 지갑이 무척이나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굳이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내가 쥐여주는 것을 받아 든 헤레이나는 지갑 안에 뭔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옷 안에 감추듯 챙겼다. 나는 에반이 이토록 현명한 여인을 데려다 준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대강 상황이 정리되고 나자 에반이 탑으로 돌아왔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 모시러 왔습니다만, 조금 더 있다가 돌아가시겠습니까?”

나는 건조한 얼굴로 딱딱하게 말을 내뱉는 에반이 새삼 낯설게 느껴져 눈을 떼지 못했다. 요즈음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원래 내가 아는 에반은 조금쯤 능청지고 밝으며 짓궂은 면이 있었기에 이토록 예를 갖춰 무심한 시선을 내던지는 모습이 어색했다.

그의 질문에 힐끔 내게 시선을 던졌던 헤레이나가 곧 사르르 웃으며 답했다.

“더 이상 누를 끼칠 수는 없지요. 두 분의 오붓한 식사를 방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러곤 내 손을 가볍게 감싸 쥐며 진심이 엿보이는 다정한 눈길로 말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부인. 기회가 된다면 또 뵙고 싶군요.”

“저도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마마. 부디 평안하시길.”

헤레이나는 에반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홀로 남은 나는 찻잔 등을 치우며 헤레이나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지금껏 황제의 욕심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인간들은 하나같이 욕심에 눈이 멀어 더한 것을 가지고자 했으니까. 그 가운데 황제가 있는 거라고, 그리 여겼다.

내가 든든한 울타리에 숨어 있는 동안 저택 밖에선 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 어째서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천자가 왕관을 쓰지 못했던 것일까. 내 언니는 예상이나 했을까? 자신을 사랑하던 많은 남자 중 하나가 세상을 이렇게 피 웅덩이에 잠기게 할 거라는 사실을.

어쨌든 그가 과거 어떤 일을 겪었든 간에 헤레이나의 말대로 그가 저지른 죄가 사라지거나 흐려지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의 탐욕 때문에 희생된 이가 너무 많았다. 그는 그렇게 허무하게 죽으면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게 대화를 되짚으며 머릿속을 정리하던 나는 문득 의아한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황제는 대체 어떻게 그리 오래 살 수 있었던 걸까.

주술사 네리아토도 주술을 사용할 수 있었던 시대부터 살아왔지만, 당시에는 무척이나 어렸고 지금도 언제 꺼질지 모를 불안한 촛불과 같았다. 게다가 주술사는 원체 오래 살곤 했고, 이미 한 번 깨우쳤던 사람이니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여겼다. 실제로 어둠을 타고난 이들은 오랫동안 그리 늙지 않은 채 살고 있지 않던가. 주술사란 원래 그런 존재였으니 운과 축복이 함께한다면 가능하리라.

하지만 황제는, 내 언니에게 깊은 연정을 느꼈다던 그 황제는 거의 나와 비슷하게 혹은 나보다 더 오래 살았을지도 모른다. 황족은 지력을 타고나니 어둠만을 사용하는 지금은 네리아토와 마찬가지로 주술력을 잃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금발은 하얗게 세 백색에 가까웠고 눈매도 더욱 깊어져 있었지만, 그 누구도 제 나이로 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인간이 그다지 늙지도 않은 채 그리 오래 살 수가…….

그 순간 인기척이 느껴져 뒤로 돌아보니 다시금 돌아온 에반이 거의 습관처럼 제복을 벗어 던지고 있었다. 어서 오라고 인사를 해주어야 할지, 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어물쩍거리는 사이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황후에게는 존댓말을 하는 거야?”

“뭐?”

“아니, 황제 앞에서도 반말하는 네가 황후에겐 존댓말을 하는 게 이상해서. 낯설기도 하고.”

내가 헤레이나 앞에서 예의를 갖추는 에반을 낯설게 보았듯, 그 역시 별반 다를 게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내가 그랬던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딱히 의식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나 역시 비슷하게 행동하는 것 같군.”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지낸 나는 그리 자각이 없었다. 수없이 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스러지는 것을 보았다고 한들, 내 스스로가 인간이 아니라고 여긴다고 한들, 인간을 하찮게 여기고 우습게 여기고 내 밑으로 보는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게 되었다면 내 생각과 행동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으리라.

그러니 예의 바르게 대하는 이들에겐 나 또한 예의를 갖추고, 마녀로서 움직여야 할 때는 마녀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거였다. 루아단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라는 걸 이제야 자각했다.

내가 그리 말하자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바닥을 응시하던 에반이 이내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물었다.

“다음에 또 와야 하는 거야?”

그 불쾌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건 오히려 에반의 의심만 키울 테니.

“내게 필요한 물건은 너를 통해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 정도는 괜찮겠지?”

“그게 뭔데?”

“가장 먼저 올 것은 아마 옷이겠지. 네가 줬던 옷들 중 조금만 수선하면 편안하게 입을 법한 것들을 몇 개 건넸다. 설마 황후가 이런 사소한 일로 나서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어쩐지 미안하기도 했다. 시녀나 할 법한 일을 그녀가 맡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에반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대수롭지 않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에 대해 알고, 너를 감춰야 한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어야 안심될 테니까. 모든 조건에 들어맞기도 했고.”

그의 말대로 확실히 가장 부합한 인물은 헤레이나였다. 에반이 그녀를 떠올린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오히려 그의 부탁에 선뜻 나서준 헤레이나가 대단한 거였다.

그리고 현명하기까지 한 여인이니 아마 내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보낼 터였다. 동시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 내 부탁도 반드시 들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간절함을 담아 헤레이나가 머물렀던 의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의지할 곳은 오로지 그녀뿐이었다.

내 시선이 짙은 어둠이 덧씌워져 있는 수척한 에반의 얼굴로 향했다가 다시금 의자로 돌아왔다.

헤레이나는 탑에 다녀간 이후, 에반을 통해 크고 작은 선물들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내게 어울릴 것 같다는 작은 쪽지와 함께 곱게 포장된 드레스였고, 또 어느 날은 수확하는 데 성공했다는 귀한 과일을 바구니째 보내왔다. 머리를 가볍게 정리하기 좋은 장신구나 의자에 깔고 앉을 보드라운 털방석이 오기도 했다.

에반은 조금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짓고는 했지만, 그래도 황궁에 다녀올 때마다 꼬박꼬박 챙겨오곤 했다. 가끔 내 곁에서 헤레이나가 보내온 선물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옷이나 장신구를 착용할 때는 도와주기도 했다.

그녀가 보내준 드레스는 화려하긴 하지만 그다지 풍성하지 않고, 크거나 두껍게 붙어 있는 장식들이 없어 배기지 않는 것으로 탑 안에서만 움직여야 하는 나를 배려한 것이 한눈에도 보였다.

선물 받은 옷으로 갈아입자 에반은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쁘지 않은 모양인지 힐끗거리며 쳐다보다가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도로 벗겨버렸다. 그럴 바에는 대체 왜 입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에반은 여전히 사랑스럽다는 눈길도, 다정한 손길도, 달콤한 속삭임도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함부로 다루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보였다. 화가 나거나 뒤틀린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뭔가 텅 비어버린 듯 망연하기도 하니 그의 속을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분명 내가 알던 에반과는 많이 다른데 뭐가 다른 것인지 정확히 짚어내지도 못하겠고, 무엇보다 이게 원래 그의 모습일지도 모르는 거니까. 확실한 건, 내게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게 결코 좋은 건 아닐 거라는 점.

서툰 솜씨로 자수를 놓고 있던 나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턱을 괸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에반을 힐끔 훔쳐보았다. 물어봤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겠다고 했던가. 알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고, 그래야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에반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봤는데,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그의 고통으로 얻을 행복이라면, 가지고 싶지 않다.

나는 다시금 자수에 시선을 던지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툭 하니 말을 내뱉었다.

“헤레이나가 찾아왔을 때, 놀라운 이야기 하나를 들었다.”

“어떤 이야기?”

이전처럼 다정하지 않다 뿐이지, 그래도 대화는 주고받는 정도로 거리가 많이 가까워져서 다행이었다. 그것이 서로의 속마음을 감춘 채 겉으로만 맞물리는, 그야말로 빙빙 겉돌기만 하는 대화일지라도.

“헤레이나의 아버지가 내 언니에게 깊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더군.”

“아……. 그래?”

에반은 별 흥미가 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내려놓은 책을 괜스레 휘리릭 넘기며 여전히 내가 놓고 있는 자수만 쳐다보는 눈길에도 그다지 관심이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하얀 속눈썹이 깜빡거릴 때마다 드러나는 붉은 눈동자는 빛을 잃어 더 이상 찬란하거나 투명하지 않았다. 그 속에 담긴 감정이 무언지 알 수 없다. 무력함? 공허함? 어쩌면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자 하는 검은 탐욕으로 인해 마치 아무것도 없다는 착각이 이는 걸지도. 탐욕에 미쳐 있었으면서도 보기에는 무기력하기까지 했던 ‘누군가’처럼.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문득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그게 뭔데?”

에반은 거의 바로바로 대답했다, 습관처럼. 그다지 진정성이 느껴지지도, 내 이야기에 깊이 몰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대화는 계속 이어져 간다.

“어떻게 그리 오래 살 수 있었던 걸까?”

계속해서 파라락 종이만을 넘기던 그의 손이 멈칫거렸다. 찰나였을 뿐, 다시금 원래대로 종이를 두툼하게 잡은 뒤 파라락 넘기는 짓을 반복했지만, 그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언젠가 그가 그랬던가. 나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고. 그 길이 가시넝쿨로 둘러싸여 온통 상처를 낸다 해도. 그것이 에반의 진심이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네리아토도 지금껏 살아 있는데, 뭐. 비록 거의 끝나감이 눈에 보이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에반의 말에 섬뜩함을 느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불편함이 가슴 언저리를 스쳐 지나갔다.

에반이 네리아토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던가? 아니, 호칭은 그렇다 쳐도, 어쨌건 그를 도와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만든 사람이니 이렇게 남 이야기를 하듯 그의 끝을 말하기가 어려울 텐데. 아무리 남이라고 해도 죽음을 쉬이 입에 담을 수는 없지 않던가.

에반이 낯설었다. 대체 무엇이 에반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하긴, 오래 살고 싶다고 한들 그게 마음대로 될 리가 없겠지. 그렇게 욕심이 많았던 자라면, 삶에도 미련이 많아 어떻게든 살기 위해 무슨 방법이라도 알아낸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래?”

에반은 여전히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조금 전과 달리 미미하게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한동안 의미 없이 책장만을 넘겨대다가 태연하게 물었다.

“근데 그게 왜? 만약 정말 그런 방법이 있다면 좋겠다 싶어서?”

“나쁠 건 없겠지. 너도 언젠가 그러지 않았던가. 더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그래, 그랬지. 그게 당연한 거잖아? 넌 조금 다를지 모르겠지만.”

나는 잠시 내가 놓고 있던 자수를 살피는 척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방법이 있더라도 썩 내키지는 않는군. 신의 부름에 강제로 거부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그 방법은 물론이고 과정과 결과 또한 절대 평안하지 않을 거다. 만일 정말로 있다면 말이지.”

“그런가?”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툭 하니 내뱉은 에반이 뒤이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만큼 간절하지 않다는 뜻이겠지. 그런 걸 신경 쓴다는 건.”

그 뒤로 우리 둘의 대화는 끊겼다. 한참이나 넘어가지 않는 책을 들여다보던 에반은 나비가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 옷을 갈아입고 황궁으로 떠났다.

나는 그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가장 최근에 에반을 통해 헤레이나가 보내온 보석함을 열었다. 가득 깔린 장신구를 쏟아낸 다음 바닥을 들어 올리자 작은 종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간 헤레이나는 내가 쥐여 보낸 지갑 안에 있던 쪽지를 읽은 후, 계속해서 내 요구에 응해주고 있었으니까. 종이를 펼치자, 거기에는 마지막 통보와 함께 내가 가장 원하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부탁하신 것은 액자 안에 넣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부디 그것을 사용하시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아마 내 애원이 통한 모양이었다. 나를 가엾게 여겨, 진실로 불쌍히 여겨 마지막 부탁을 들어달라는 나의 간절함에 그러겠노라 대답이 왔다.

그제야 나는 안도했다. 만일 일이 잘못된다 하더라도, 그가 그 어떤 말로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신의 낫이 마녀의 손에 들어왔으니까.

그것은 에반의 힘이 담긴 검이었다. 나 스스로 심장에 박아 넣을.

* * *

“이쯤에다가 걸어두면 되려나.”

에반은 헤레이나에게 받은 액자를 들고 어디가 좋을지 고민했다. 에반의 상체를 완전히 가리고도 남는 커다랗고 두꺼운 액자에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만큼이나 신비롭고 몽환적인 새하얀 호숫가가 그려져 있었다.

물색도 하얀색에 가까웠고 그 주위는 마치 눈이 쌓인 것처럼 하얬으며 곧게 뻗어져 있는 나뭇가지들조차 흰색이었다. 다만 나뭇잎은 싱그러운 녹색이 아닌 달콤한 분홍색으로, 서늘하고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그대로 사르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 속에 담겨 있을 사신의 낫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화폭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태연하게 에반이 하는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는 결국 침대 건너편에 보이는 벽에 그림을 걸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삐뚤어지지는 않았는지 조금 멀찍이 서서 살펴보다가 만족한 듯 관심을 껐다.

시릴 정도로 하얗고 차가워 보이는 호숫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내가 입을 연 건 그 때였다.

“에반,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다.”

“뭔데?”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곧장 대답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무기력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어진 내 질문에 불길이 치솟듯 확 달라졌다.

“전에 온실에서 벌어졌던 일은 무엇……,”

“그만.”

딱딱한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나지막하게 내뱉는 말은 경고에 가까웠다. 더 이상 말을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하지만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지?”

“내가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니, 알아야겠다.”

에반의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지나 싶더니 곧 그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낮게 깔린 분위기가 익숙했다. 언젠가 내가 자꾸 목숨을 끊고자 했을 때, 피가 스며들고 있는 융단을 밟으며 내게 걸어오던 에반의 발을 보며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두려울 정도로 고요한 분노.

이전의 에반은 나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했다. 심지어 내가 여러 번 그의 앞에서 자살을 시도했었음에도, 자신의 마음과 상처를 숨기며 애원할 만큼 인내심이 강한 남자였다. 자신의 욕구와 생각, 감정을 내게는 오롯하게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갈수록 그런 인내심이 바닥을 치나 싶더니 이제는 제 자신의 감정의 고삐도 제대로 잡아채지 못한다. 그것을 피곤하고 힘들고 조급해져서 그런다고 생각했는데,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무언가가 에반의 이성과 감정을 잔뜩 뒤흔들고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거세게. 그리고 이제 와선 제 스스로도 눈치 못 챌 만큼, 혹은 눈치챘음에도 포기할 만큼 그것은 에반을 집어삼켜 버렸다.

“너는 황제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미 알고 있지 않나? 파멸할 것을 앎에도 왜 같은 길을 가려 하는가?”

에반의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깃들었다. 설마 내가 눈치챌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걸까. 어쩌면 탐욕에 눈과 귀를 비롯한 모든 것이 멀어 제대로 파악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힘들지도 모른다.

정말로 에반이 황제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거라면, 새카만 천으로 제 자신의 머리 안을 한 겹 덮어씌운 듯 조금쯤 아둔하게 움직이는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오로지 더 가지고, 가진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움직일 뿐, 정작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한 건지 모르던 황제처럼.

“너 또한 황제가 어찌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는지 궁금해 했다더군. 그래서 황제의 유품을 비롯한 것들을 네가 조사할 수 있게 허했고, 그 뒤로 네가 황제의 방에 아무도 들이지 못하게 했다고 들었다. 너는 그곳에서 알아낸 거겠지. 황제가 그토록 오래 살 수 있었던 ‘방법’을. 내 말이 틀렸나?”

에반의 붉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나 싶더니 곧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억누르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헤레이나인가?”

분명 그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지 않았었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에반의 목소리에 역시 그날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그가 헤레이나와 소통한 방법을 알아차려 오늘 가져온 액자를 살피게 될까 봐, 서둘러 그의 생각을 방해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대체 그 방법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단 하나 분명한 것은, 네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두고 보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에반의 얼굴에 걸린 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힘이 묶인 채 탑에 갇혀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이런 말을 하는 내가 가소로운 모양이었다.

“방해해야겠지.”

“방해?”

그의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지만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가 아니라 요안이.”

그제야 에반의 웃음이 사라졌다. 에반이 달라진다면 곤란한 건 내가 아니라 요안이었다. 에반의 힘을 가장 필요로 하고, 그의 힘을 마녀가 아닌 세상에 쏟아 붓게 하여야 하는 요안이 만약 그가 이렇게 미쳐가고, 또 어쩌면 세상을 피로 물들였던 황제처럼 변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알아내고, 네가 다시는 무슨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겠지.”

“내가 말했지. 모르는 것이 행복할 거라고.”

그의 얼굴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잔뜩 일그러졌다. 목소리 또한 잔혹할 만치 날카로웠다.

“방해하지 마. 알려고 하지도 마. 그저 나 외에는 모든 관심을 끈 채 여기 얌전히 있으란 말이야. 나와 행복하고 싶다며?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며? 근데 왜 일을 그르치려 들어, 어? 잘못되면 내겐 행복이, 네겐 미래가 송두리째 사라질 일이야. 감이 안 와?”

나는 그의 눈동자에 드러난 분노 아래로 불안함이 일렁이는 걸 눈치챘다. 그것은 지독한 두려움이기도 했다. 에반은 지금까지 애써왔던 것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에반이 나의 저주를 풀지 못한다면, 약속을 지킬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의 손으로 나를 죽여주는 것. 꺼져 가는 내 마지막을 지켜보며 고통스러워하는 것.

그게 아니라면 그는 또다시 나를 혼자 두고 먼저 죽을 수밖에 없다. 혼자 남은 나는 끝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에반과의 추억이라는 무기로 난도질당하며 고통받을 테고, 그런 나를 두고 떠날 에반은 죄책감과 누군가에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품에서 내어주게 될 거라는 불안함에 시달릴 테니까.

나를 죽여주는 것도 고통이요, 죽이지 않는 것도 고통이니 에반이 필사적으로 다른 방법을 찾으려 했던 것도 이해가 간다. 어떻게든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 나와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그의 눈에, 여느 인간과 달리 오래 산 황제가 들어오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테고.

그리고 정말로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가던 방법이 따로 존재하는 거라면, 그게 어떤 방법이든 어떤 결과를 낳든 유혹에 빠지지 않고는 못 배겼을 터.

그게 지금의 상황이었다.

나는 헤레이나가 내게 보내왔던 쪽지들을 떠올렸다. 어느 날엔 치마 밑단 속에, 또 어느 날엔 털방석 안에, 또 어느 날엔 실통에 들어 있던 쪽지들이었다.

―대부분 본인의 집무실과 아버지께서 드나드시던 방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천궁 내에 있는 감옥에서도 본 적이 있다는군요. 늦은 시간, 말도 없이 찾아와 있었기에 자세한 건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피에 젖은 그의 모습을 봤다는 이가 많습니다. 간혹 광기가 서려 있기도 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나의 아버지도 때때로 고통스러워하거나 잔혹해지셨습니다. 식사를 무른 적이나 잠을 설쳐 틈틈이 졸았던 적도 많았던 것 같군요.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져 나중에는 본래의 자상한 아버지를 보는 것이 더욱 드물 정도였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에반과 황제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알아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는데도.

더 늦기 전에 막아서야만 했다. 그의 말대로 에반이 오래 살면 살수록, 그리하여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행복하겠지만, 그것은 에반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전제가 따라야 했다. 그의 고통으로 내가 행복하다면, 그것은 더없는 죄가 아니겠는가.

―고통에 질린 신음을 들었다는 이가 많았습니다.

함께하는 것이 고통이 되어선 안 되지 않겠는가.

“나는 네가 아파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뭐?”

“나라고 해서 어찌 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싫어할까. 하지만 그걸 위해 네가 많은 것을 희생하게 된다면,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네 고통이 커진다면 나는 그것을 포기하겠다.”

피곤함에 지친, 몰라보게 해쓱해지고 창백해진, 퍼석하고 메마른 눈동자를 지닌 에반이 보였다. 찬란한 보석 같던, 희망으로 내리쬐던 태양 같던 눈동자는 피를 굳힌 구슬처럼 진득하고 탁하게 변해 있었고, 그의 몸 곳곳은 미처 사라지지 못한 상처들로 가득했다.

이런 걸 신경 쓴다는 건, 그만큼 간절하지 않은 거라고 했던가?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죽음을 원하는 만큼이나 그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고 싶기도 한걸.

하지만 그보다 더 간절하게 그의 행복을 바라기에, 끝이 얼마나 슬프고 괴롭든 간에 그전까진 여느 연인들처럼 시간을 공유하며 수많은 감정을 나누고 싶기에…… 그렇기에 그를 막아설 수밖에 없는 거였다. 지금의 그와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하든 간에, 이전에 느꼈던 꿈만 같은 행복을 느낄 수가 없을 테니까.

“그냥…… 그냥 함께하다가……. 이전처럼 그리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끝을 맞이하면 되겠지. 나를 더 이상 미안하게 만들지 말거라, 에반. 더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지 말거라. 나는 지금도 충분히 네게 고통만을 안겨주는 나를 미워하고 있으니, 더 이상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 말거라.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에게 커다란 짐을 떠안긴 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내 처지를 헤아려주거라.”

“아니야, 닉스. 그런 게 아니야.”

에반의 얼굴이 마치 울 것처럼 흐려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 떨어질 것만 같지만, 메마른 눈동자는 그것조차 힘겨워하는 듯 보였다. 그는 보는 이마저 가슴이 저밀 정도로 슬픈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네 잘못은 없어. 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사과는 내가 해야 하는데. 내가…….”

에반은 결국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려 나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서려 했지만, 얼굴을 가리지 않은 손으로 가로막는 바람에 멈추어 섰다.

“가까이 오지 마. 내가 네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지금도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야. 내가 대체 어떤 기분인지도 모르겠어. 슬픈 건지, 화가 나는 건지. 너를 지키고 싶은 건지, 망가트리고 싶은 건지.”

“그게 네가 감당해야 할 고통의 일부라면,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지금도 아까운 시간이 재빨리 흘러가고 있는데, 너와 나는 이렇게 멀리 떨어져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조차 없지 않던가. 그게 네가 원하는 건가? 이게 진정 우리가 함께 있는 거라 여기는가?”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것밖에 없는데, 이마저도 포기하라고?”

에반은 절망이 깃든 목소리로 비명처럼 내질렀다. 그리고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혼잣말을 내뱉듯 덧붙였다.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이마저도 하지 말라 하면 나는 견딜 수가 없어. 약속을 지켜야 하잖아. 약속했잖아.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는 없는데, 어째서 말리는 거야. 날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 셈이야.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네게…….”

“……에반.”

“닉스.”

그는 한숨처럼 내 이름을 부르더니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조금이나마 진정이 된 건지, 아니면 그저 그렇게 보일 뿐인 건지 고요하게 텅 빈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그는 아무런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로 내게 애원했다.

“제발 아무것도 묻지 말고 이대로 있어줘. 내가 조금 더 노력할게.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지금은 조금 힘들어서 그래. 이해하지?”

“하지만…….”

“이런 건 우습지도 않아. 내게는 고통으로 다가오지도 않는다고. 그러니 걱정하지도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고 미안해하지도 마. 나는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너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에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왜인지 나는 과거 어린 시절의 그가 겹쳐 보이는 것을 느꼈다. 간절하고 애달픈 그 눈동자가 떠올랐다. 불안에 떨고 있던 작은 소년은, 이윽고 청년으로 뒤바뀌었지만, 그 느낌은 쉬이 지울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다 불안해.”

“난 왜 이렇게 보잘것없을까?”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뒤죽박죽, 그의 얼굴과 목소리들이 온통 뒤섞인 채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알 수 없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직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음에도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가슴이 싸하게 아프고, 식은땀마저 비죽 솟았다.

언제나 나를 믿지 못하고, 죽음에 대한 내 마음이 변할까 봐 두려워했으며, 그리하여 제 자신을 떠날까 봐 불안해하던 에반의 모습들이 주르르 떠올라 내 머릿속을 채웠다.

“너는 내가 필요했던 거야.”

‘그러니 필요 없어지면 나를 버리겠지.’

‘쉬이 거두었듯 그렇게 쉬이.’」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건만 어째서인지 갑작스레 떠오른 말이 내 가슴속을 온통 뒤흔들었다. 에반의 목소리로 내뱉은 적이 없는 말임에도 그게 진실인 양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숨이 가빠졌다.

나는 다급히 숨을 몰아쉬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나 못지않게 혼란스러운 듯 우두커니 제자리에 서 있다가 나지막하게 말을 내뱉었다.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겠지. 늦기 전에 수습하러 갔다 와야겠어.”

그러곤 그대로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가 떠난 후에도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과 발이 떨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수많은 장면에 시달리다가 덜컥 온 세상이 멈추는 기분을 받았다.

빛은 어둠을 물러나게 하고 영원한 안식을 주리라.

“빛은 나고 어둠은 닉스인 걸까?”

쿵쿵 크게 울려 퍼지는 내 심장 소리만이 나를 잡아먹을 듯 주위를 에워쌌다. 내가 실타래의 끝 부분을 잡아채자 그 뒤로 자연스럽게 순서대로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에반은 뭔가를 눈치챘고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했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정확해지면 알려주겠노라, 말을 돌리기 급급했을 뿐.

“왜?”

나는 곧장 몸을 일으켜 헤레이나가 보내온 그림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바들바들 떨려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손으로 마치 내던지듯 바닥에 내려놓고 뒷부분을 열었다.

액자 크기와 동일한 두툼한 판자가 하나 나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두 개를 덧붙인 듯 홈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손톱을 끼고 벌리자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이 되어 있는 얇고 작은 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늘하고 날카로우며, 일견 찬란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그 단검은 헤레이나가 나를 위해 보내온 사신의 낫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검을 쥔 채 들어 올렸다. 섬뜩한 감촉이 손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은은한 빛무리와 검신 전체에 새겨져 있는 주술진들이 결코 평범한 검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에반은 대체 왜 내게 그 뭔가를 알려주지 않으려 했던 걸까. 무엇이 그를 그렇게 두렵게 만들었던 걸까. 또 불안하게 만들고 조급하게 만들며 결국 그런 짓까지 하게 만든 걸까.

“약속은 지킬 수 있어. 반드시 지킬 거야. 그렇게 할 수 있어.”

“어떻게든 지킬 거야.”

설마, 에반. 너는…….

나를 죽여줄, 마녀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할 빛이 아닌 건가?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것뿐인데, 이마저도 포기하라고?”

“내게 죽음을 주지 못할 거라 여긴 건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들고 있던 검을 심장에 꽂았다. 절대 실수를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듯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통에 덜컥 멈추어 섰던 손에 힘을 주어 끝까지, 검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길게 파묻었다.

검에 새겨져 있던 주술진이 반응해 선명한 빛을 뿜어댔다. 그에 몸속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마치 그대로 녹아내리는 것처럼 크나큰 고통이 나를 덮쳤지만, 육체의 고통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만일 내가 다시 살아난다면, 내가 생각한 것이 진실이라면 나는 이보다 더한 고통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면서도 연신 신을 찾았다.

‘신이시여, 이제 그만 저를 거두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부디 이제 그만…….’

* * *

짓궂은 바람은 내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리고 지나갔다. 나는 이리저리 흩날린 머리칼을 정리하다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목덜미가 시린 기분이 들어 걸치고 있던 겉옷을 더욱 여몄다.

소리 없이 쌓이는 눈은 무척이나 포근해 보이건만 바람은 이토록이나 차갑기 그지없었다. 금세 손끝이 얼어붙은 느낌인지라 한 손으로 들고 있던 컵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한 온기가 몸까지 녹이는 듯했다.

춥다, 춥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입김이 그리 말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들어가고 싶지가 않다. 그저 깃털처럼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내 곁에 앉은 에반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겉옷을 꽁꽁 여민 에반은 여전히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다만 지친 자들을 짊어지고 세상을 향해 검을 휘두르던 늠름한 청년에서 현명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 깊게 팬 주름이 그간 그가 맞서온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여전히 선명한 붉은 눈동자만이 옛날,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남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내 곁에 앉은 이 남자는 여전히 나를 비추는 태양이었다.

그가 그렇게 시간을 맞이하는 동안, 나에게도 역시 많은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이리저리 흩날리는 머리칼은 더는 새카만 색이 아니었고, 컵을 쥐고 있는 손도 화상 흉터와는 다른 시간의 흔적이 가득했다. 힘을 잃은 육체는 내게 말해 주고 있었다. 네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노라고.

흘러가는 시간이 이토록 기쁜 것은, 끝을 함께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언제나 꿈꿔왔듯이 마지막까지 같은 것을 바라보며.

에반은 깊어진 눈매로 날 바라보며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속삭였다.

“평생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했소.”

그리 말하는 에반을 바라보며 나는 웃었다. 미처 닦아내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금세 식어버렸지만 차가운 온도 앞에서 얼어붙은 내 얼굴을 짧게나마 데워주었다. 나는 그에게 속삭였다.

“당신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어 기뻐요.”

조용히 눈이 내리고 있는 새하얀 세상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눈부셨다. 나를 바라보며 웃어주는 에반의 모습마저 삼킬 정도로. 잠깐이나마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뜨기 위해 버텨보았지만 결국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내려앉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땐…….

평화롭던 나의 세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차라리, 차라리 꿈에서 깨지 말 것을. 이런 현실로 돌아올 거라면 그냥 꿈속에서 영원히 떠돌도록 그리 해줄 것을.

환히 밝아져 있는 탑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울었다.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속이 갈기갈기 찢어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것만 같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자 흠뻑 젖어 있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어쩌면 꿈을 꾸고 있을 때부터 울고 있었던 걸지 모른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어째서 나는 지금껏 에반이 나를 죽여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까.

기억 속 청년의 손으로 내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을 때, 그때 나는 알아차려야 했다. 그는 나를 죽여줄 빛이 아님을.

아니, 사실 그때의 나는 알아차렸다. 그는 내게 안식을 줄 용사가 아님을.

그런 내게 에반이 용사라고 알려준 것은 사라진 점괘였다.

사실 나는 오롯한 어둠도 아니고 그의 빛으로 치유도 받으며 그의 힘이 담긴 이 탑 안에서도 멀쩡한 것을 알고 있었는데, 어쩌면 그가 나를 죽여줄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근데도 이렇게 치닫게 된 것은 점괘 때문이었다. 꿈 때문이었다. 내게 미래를 보여준다고 믿었던 그 모든 것들 때문이었다.

왜 내게 행복한 꿈을 보여준 건가? 지금껏 그가 빛이라는, 내게 안식을 선사해 줄 빛이라는 거짓을 왜 내게 속삭여주었던 건가?

그러고도 모자라 혹시라도 그를 의심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희망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지금 역시 내가 가장 원하던 미래를 꿈으로 보여주니, 이 얼마나 잔인한 짓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더더욱 지옥으로 이끌고, 그 어떤 희망마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가로막으면, 나는 어쩌라고. 대체 나는 어찌하라고.

신은 그저 나를 가지고 놀고 있을 뿐인가? 내가 기대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인가?

왜 이런 짓을…….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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