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 신을 원망하는 이는 마녀뿐만이 아니다 (31/45)

  30. 신을 원망하는 이는 마녀뿐만이 아니다

에반이 탑으로 돌아온 것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아니, 기나긴 내 시간으로 따지자면 아주 찰나에 불과하겠지만, 새하얀 탑에 갇힌 이후로 혼자서 해가 지고 뜨는 것을 몇 번이고 본 적은 없기에 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끝내는 에반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래서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의 품에 매달렸다. 그러곤 뭔지 모를 감정이 휘몰아쳐 그대로 흐느끼고 말았다.

그런 나를 한눈에 보기에도 수척해진 에반이 감싸 안아 주었다. 그의 따뜻한 체온에 안심되어 눈물이 그치기는커녕 멈출 줄을 몰라 한참을 그렇게 울음을 토해냈다.

에반은 나를 토닥이며 연신 같은 말을 속삭였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묻지 마. 나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을 거야. 그날 네가 본 것은 잊어버려, 제발. 그러면 너와 나는 행복할 수 있어. 네가 말한 대로 행복하게 될 거야.”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온실에서 내가 본 것은 분명 이해할 수 없는 거였고,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에반에게 고통이 되면 되었지, 그것이 새로운 지식이나 세상을 위한, 혹은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그대로 넘어갈 생각도 없었다.

돌아온 에반의 얼굴이 더욱 퍼석해진 것과 그날 밤에는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던 붉은 눈동자가 피를 굳힌 구슬처럼 탁하게 반질거리는 점, 그전과 달리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왜인지 능청지고 밝게 나를 대하는 점 등이 내게 감추는 것이 많으며, 그게 결코 좋은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었으니까.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에게 맞춰주며 기회를 엿보았다. 어떻게 해야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알아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확신에 가까운 직감 하나가 루아단은 알고 있을 거라고 내게 속삭였다. 그것은 그 늦은 시각,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온실로 내달리게 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카드를 뒤집었을 때와 예지몽을 꾸고 난 직후에도 종종 느끼던 그런 기분이었다. 기억 속 청년이 죽음을 맞이하던 날, 내가 탑을 나서게 한 그 기이함이었다.

루아단을 풀어주지 않고 가둔 것에는, 지금껏 살려둔 것에는 어떠한 이유가 있는 거라고. 그게 이번 일과 연관이 있는 거라고 그리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루아단을 만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일 이렇게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어 보이는 에반에게 루아단이라는 이름을 꺼내놓는다면, 이전처럼, 혹은 이전보다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일 테니까.

가장 좋은 것은 내가 루아단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는 거겠지만 그게 불가능에 가까우니, 지금의 상황을 직시하며 루아단과 내 사이를 이어줄 누군가를 찾는 편이 빨랐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새롭게 나라를 다스리게 된 황제. 진실을 바라볼 줄 아는 그라면 에반의 상태가 평범치 않은 것을 알아차리리라. 자신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리라.

그렇게 결정을 내린 나는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한 짓은 에반이 내게 선물한 선물들을 몽땅 풀어 널브러트린 거였다. 그중엔 머리를 장식하는 장신구도 있었고, 신을 일이 없는 구두도 있었으며, 시간을 때우기 좋은 자수나 책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고급스러우며 화려한 드레스였는데, 나 혼자는 입을 수가 없거나 따로 수선이 필요한 옷도 있었다. 아무래도 에반은 지금껏 기사로 성장했으니 여인의 옷이나 치수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으리라.

일부러 자수를 깔짝거려보기도 하고, 거울 앞에 앉아 한참을 머리와 씨름하기도 했다. 뒤이어 내가 옷을 계속 입었다가 벗는 것을 반복하자 처음에는 흥미롭고 또 만족스럽게 쳐다보던 에반이 결국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들어?”

“나 혼자 입으려니 벅차군. 몇 개는 혼자서는 입을 수 없는 거고.”

“내가 도와줄까?”

“아니, 괜찮다. 늘 이렇게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무래도 손을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미묘한 차이지만 여자의 몸은 워낙 예민하니, 차라리 잘 아는 사람에게 보이고 수선을 하는 게 어떤가?”

에반의 인상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나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사실 나는 머리를 만져본 지도 오래되어 기껏 받은 이 장신구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무래도 나도 여인은 여인인지라 요즘 유행하는 것에 대해 알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자수를 해본 적이 없으니 배워보고도 싶고, 같은 여인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화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하군.”

“그런 화제가 뭔데?”

나는 괜히 고개를 숙이며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몇 번이고 다시 묻고 나서야 대답해 주었다.

“남자와 여자는 생김새, 성격, 취향과 생각하는 것까지 많은 게 다르지 않던가. 그래서 보통 서로 상담을 주고받곤 한다. 특히 남편에게 사랑을 받는 정보 같은 건 알게 모르게 유용하니…….”

내가 그리 말하자 에반의 눈이 차차 크게 뜨이나 싶더니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연신 남편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말을 이었다.

“누구든 상관이 없다, 에반. 이왕이면 결혼했으면 좋겠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여인들끼리는 서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편이니 괜찮고. 옷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여인의 눈과 사내의 눈은 차이가 크기 마련이니 아마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그저 자수나 귀족 여인들의 취미 생활, 문화 등을 아는 정도면 된다. 아무래도 황궁에서 일하는 시녀가 편하겠지. 네가 입단속 시키기도 좋을 테고.”

황궁에서 일하는 시녀라면 그녀를 통해 편지를 보내는 일 정도는 쉬울 터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 몇 개를 손에 쥐여주며 황궁 주술사 에반의 부인이 보내온 편지라는 한마디만 하면 된다고, 에반은 대부분 나와 함께 있으니 그의 눈을 피해 편지를 전하는 일은 간단한 거라고 그리 말하면 될 터였다.

나는 에반에게 그러겠노라는 대답을 듣기 위해 언젠가 지나가듯 했던 약속을 끄집어냈다.

“에반, 네가 그러지 않았던가. 나를 위해 탑에 누군가를 데리고 와주겠다고. 그저 나를 달래기 위해 했던 약속이었나?”

두 번 다시 떠올릴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약속을 이렇게 들먹이게 될 줄이야. 조금 억지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쓸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에반은 난감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나는 그가 왜 내 앞에서 과장해서 표정을 짓거나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으니까.

“알겠어. 네가 원한다면야.”

그리고 며칠 후, 에반이 데리고 나타난 인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여인이었다.

“이렇게 뵙는 것은 처음이군요.”

넘실거리는 선명한 금발, 바다를 연상케 하는 새파란 눈동자, 연약하고 보드라워 보이는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붉은 입술, 한없이 가녀린 여인이지만 타고난 기품과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강인한 성품에 의해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 여인은 다름 아닌 헤레이나였다.

“화, 황후마마.”

설마하니 황후가 이런 탑에, 그것도 마녀를 만나러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기에 당황한 내가 어설프게나마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올리자, 헤레이나는 서둘러 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도리어 인사는 제 쪽에서 드려야 하니까요. 꼭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영애. 아니, 부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요? 보기와 달리 오랫동안 사셨다고 들었거든요. 게다가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지는 않았으나, 황궁 주술사께서 부인으로 대하고 계시니.”

그렇게 말하며 헤레이나는 슬쩍 자신의 뒤편에 비껴 서 있는 에반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건조한 얼굴로 서 있을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다못해 손님에게 차를 내어놓을 탁자 하나 없었기에 창밖을 바라보기 위해 놓여 있던 의자로 이끌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후를 바닥에 앉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손님을 세워둘 수도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헤레이나는 어쩔 줄 모르는 내게 설핏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게 예의를 갖추실 필요는 없답니다. 저는 사과를 하기 위해 찾아온 죄인인걸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자,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슬프게 웃었다. 그 처연한 얼굴은 나조차도 홀릴 만큼 아름답고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녀가 다시금 말을 이었음에도 한참이나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제 아버지께서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를 저는 알고 있으니까요. 뒤늦게, 너무나 늦게 알게 된 그 모든 진실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는걸요. 부인께 그토록 큰 고통을 안긴 대가로 저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살았으니 저 또한 죄가 있는 거겠지요.”

어떻게 그런 아버지 밑에서 이런 딸로 자라날 수 있었을까. 사람이 환경에 따라 얼마나 변화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는 헤레이나의 존재 자체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 말 하지 못하자 그녀는 더욱 서글프게 웃었다.

“황궁 밖에는 나가보지도 못한 제가 어찌 그 커다란 고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마는, 삶이 끝나기 전에는 꼭 한 번 뵈어 사죄하고 싶었습니다. 그간 얼마나 힘들었을지, 또 외롭고 두려웠을지……. 정말 죄송합니다.”

“……마마께서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나는 허리를 숙이는 그녀를 붙잡아 말렸다. 그녀는 이렇게 먼저 불러줘서 고맙노라 말하며 내 팔을 살며시 잡았다. 그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시선이 빼앗겼다. 고된 것이 무언지 모를 이 여인이 나의 고됨을 이해하려 애쓰는 자체만으로도 내겐 큰 위로로 다가왔다.

헤레이나는 내가 이끄는 대로 의자 앞에 섰다.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했더니 그녀가 두꺼운 겉옷을 벗는 순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풍성한 드레스 위로도 확연하게 드러나는 부푼 배. 내가 시선을 떼지 못하자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만나뵙게 될 거예요. 힘찬 발길질을 보아 폐하의 짐을 덜어줄 왕자님이 아닐까, 기대하고 있답니다.”

“홑몸도 아니신 분이 어찌 이런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라면 뱃속에서도 기뻐할 테니 괜찮습니다. 가능하다면 손을 잡고 다시금 찾아오고 싶을 정도인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상기된 얼굴로 웃는 것을 보아하니 거짓은 아닌 듯했다. 어찌나 행복해 보이는지, 문득 과거에 소망하던 미래가 떠올랐다. 평범하게, 한 남자의 품에서 사랑받으며 살고 싶었던 나의 미래가.

헤레이나를 의자에 앉히고 나 또한 곁에 침대에 걸터앉자 그녀는 에반에게 슬쩍 눈치를 줬다.

“여인들끼리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줄 수는 없나요? 그간 늘 혼자 지내며 외로우셨을 텐데, 같은 여인만이 할 수 있는 위로가 있지 않겠어요?”

썩 내키지 않는지 머뭇거리던 에반이 결국 허리를 가볍게 숙여 보이곤 빛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아무리 그래도 헤레이나는 황후니 에반은 그녀의 말을 쉬이 무시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가 가고 난 뒤에도 창밖에 멀거니 시선을 던지던 헤레이나는 주위가 무척이나 고요해 어딘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만 잔잔하게 들리게 된 후에야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를 내게 향하며 웃음을 머금었다.

“그간 별다른 관심이나 욕구가 없었다고 들었는데, 굳이 누군가를 불러들였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요. 모쪼록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헤레이나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나는 굳이 황제에게 전할 필요도 없이 그녀에게 부탁할 수 있게 되어 차라리 잘된 일이라 여겼다. 나는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하기로 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에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내야만 했다.

일부러 한참 기다려보았지만, 주위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에반이 돌아오기 전에 헤레이나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황궁에서의 에반은 어떤가요? 이상하지 않던가요?’

하지만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입속에만 맴돌았다. 헤레이나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깃들었지만,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헤레이나를 믿지 못한다기보다는, 이곳에 에반이 없음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컸다. 내가 못 느낀다고 해서 에반이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어쩌면 나보다 감각이 더욱 뛰어나 먼 거리에서 내 목소리를 듣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제가 실례할 뻔했군요. 차라도 대접해야 하는 건데.”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그녀의 거절에도 나는 주방으로 걸어가 물을 끓였다. 그래도 에반이 이것저것 가져다 놓은 게 있어서 다행이었다. 게다가 내가 더 이상 죽지 않겠노라 약속한 이후로 접시나 컵도 다시금 제자리에 놓였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본의 아니게 그 어떤 것도 대접하지 못할 뻔 했다.

내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헤레이나는 탑 안을 훑으며 감탄했다. 이토록 아담하고 아름다운 집이라니, 그야말로 동화에서나 나올 법하다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창가에 찻잔을 내려놓아 주자 그녀는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며 웃었다.

“늘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시겠군요. 부럽다고 말을 해도 괜찮을까요? 진심이니 부디 마음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 역시 이곳이 마음에 들어요.”

차를 한 모금 머금은 그녀가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실 어떤 곳일까,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답니다. 곁에서 봐온 바로는 황궁 주술사의 애정이 가히 삐뚤어졌다 말할 법도 하니까요. 품에 가두고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하는 그 강한 집착은 저 또한 익히 알고 있기에, 마녀를 세상으로부터 숨기겠다는 그 말을 듣고 사실 동정을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다가 신경 쓴 티가 역력한 안락한 집을 지어놓고, 세상과 완전히 격리해 놓지도 않은 채 필요하다는 말에 제게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깊은 마음만큼이나 지독히도 아끼고자 하는 모양이군요.”

헤레이나의 말대로 에반의 애정은 너무나 깊고 깊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자 하는 집착이 동반되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에반은 그런 자신의 욕구를 억지로 참아내곤 했다. 그가 말했듯, 나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를 아프게 만들지도, 울리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나는 결국 지쳐 까맣게 타버린 마음을 놓아버리고 만 에반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문득 의아한 것을 느끼곤 입을 열었다.

“그런 마음을 익히 알고 있다는 말씀은…….”

헤레이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 또한 오랫동안 제 방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지요. 물론 저는 먹고 싶은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하다못해 씻고 단장하고 잠이 드는 그 순간까지 안락한 황궁 안에서 보살핌을 받았으니 남들이 보면 그저 부러울 일일지도 모르겠지만요.”

나는 의외의 말에 놀라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녀가 공주 작위를 받기 전까지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 이후로도 귀족들의 시선을 피해 자신의 방과 황제의 거처 정도만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그게 당연히 그녀의 의지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단 말인가? 그녀를 봐온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에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당연히 존재할 법도 했지만, 이건 너무 충격이었다.

내가 당황한 것을 느꼈는지 그녀는 서글픈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제 아버지에 대해 드릴 말씀이 많았는데, 해도 괜찮을까요? 거북하시거나 내키지 않으시면…….”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내 말에도 헤레이나는 머뭇거리며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던 황제를 잊지 못했고 그 탓에 겪었던 고문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꿈속이나마 그를 내 손으로 죽였던 그 감촉이나 감정 등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 불편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내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는 것이리라.

내가 괜찮다는 듯 다시금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녀는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제 아버지는 모든 것을 탐내셨습니다. 돈도, 자리도, 여인도, 하다못해 삶까지도 모조리 자신의 손에 들어와야 직성이 풀리셨지요. 그로 인해 이런 비극이 생겨났고 부인과 같은, 감히 용서를 구하기도 죄스러울 정도로 고통을 받는 피해자들을 만들어냈어요. 그 시작은 욕심이었으며,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었습니다.”

끝없는 탐욕은 결국 사람을 파멸로 이끈다는 것을 황제를 보고 깨달았다. 제가 가진 것에 만족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자신이 가지지 못한 힘을 시기하고 두려워해 죽음으로 내몰고, 더한 것을 탐하고 싶지만 원망을 감당하기는 어려우니 마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결국 많은 것을 손에 넣었지만, 끝내는 비참한 마지막을 맞이하고 말았다. 지금껏 노력했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허무하게.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아버지도 처음부터 그러셨던 것은 아니랍니다.”

언제부터였을까. 끔찍한 욕심에 사로잡히기 시작한 것은. 내 기억 속 황제는 처음부터 그런 모습이었다. 그야 황제를 마주하게 된 날이 바로 마녀가 된 날이었으니까.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이기 전에는 선황이 영광의 시대를 이끌었고, 그 이후에 언제 어떻게 다음 황제가 즉위했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헤레이나 역시 잠시 목을 축이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는 유독 저를 예뻐하셔서 기분이 괜찮으신 날에는 제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곤 하셨지요. 그것이 제가 아버지를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제가 거의 성년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만요.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황후를 비롯해 수많은 비, 황녀를 통틀어 금발, 푸른 눈동자를 지닌 것은 저뿐이라는 사실을요.”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그녀가 말하기 전까지 다른 황족들의 생김새에 대해선 아예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야 지금껏 그림자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봤으니 헤레이나의 금발과 푸른 눈 역시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온통 회색빛이었으며, 실제로는 황궁에서 에반에게 붙잡혔던 날 딱 한 번 본 것이 전부였으니까.

내가 놀라워하자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아버지는 저를 보며 어린 시절을 떠올리셨던 것 같아요. 태어났을 때부터 황제가 될 운명이었고, 그렇게 가르침을 받고 당연하다는 듯이 수많은 것을 거느리며 성장하셨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고 하셨지요. 자신이 원했던 것 중 손에 넣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처음부터 모든 것은 자신이 아닌 황제가 될 사람, 즉 천자의 것이었다고. 원해서 이리 태어난 게 아니고 황제가 되겠노라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억지로 떠밀고 감당하라 하더니 결국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다고,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빼앗겼다고요?”

“네. 그것에 관해서는 제게도 정확히 말씀해 주시지 않았지만 아마도 천자가 따로 존재했던 거겠지요. 어쩌다가 천자가 아닌 제 아버지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 건지도 알 수 없어요. 천자께서는 어찌 되셨는지는 더더욱.”

모든 것을 강제로 가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중 제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었다더라. 그 허무함은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닐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죄가 흐려지는 건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저를 보며 유약하고 공허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셨는지 아낌없는 애정과 관심, 온갖 풍족함을 베풀어주셨어요. 그것이 과해 제 방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그저 답답하고 외롭다 여길 뿐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많이 닮은 덕분에 이런 행복을 누린 거겠지요. 정말 우스운 일이에요. 아버지는 언제나 집요할 정도로 비슷한 생김새의 여인들만을 고집했는데, 정작 가장 많은 애정을 퍼부은 것은 아버지와 닮은 저였으니까요. 어쩌면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하고 싶으셨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자 에반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황제의 취향이 확고했다던가. 그렇다면 황후, 황비, 황녀와 죽임당한 황자들까지 모조리 비슷한 생김새와 분위기를 지닐 확률이 높기는 할 터였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난 후 이리 변했다는 건가요?”

왜인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던 헤레이나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또 없을 거예요.”

“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되묻자 그녀는 여전히 찻잔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애초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했기에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은 그리 아쉽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좋으니 단 하나, 가장 원하는 하나만큼은 손에 넣고 싶어 하셨어요. 지금껏 욕심내고 바란다 해서 천자나 황태자의 이름이 아닌 오롯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없었음에도, 끝끝내 놓을 수 없었던 건 바로 한 여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결국 사랑하던 여인마저도 가지지 못하고 빼앗기고 말았던 거지요.”

이전까지의 나였다면 이해 못 할지도 몰랐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 깊은 애정이라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지옥 끝까지 밀어 넣고, 또 천국 입구까지 데려다 놓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내 곁에 있는 에반만 봐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에 잡아먹히지 않았던가.

“아버지는 그 뒤로 변하신 것 같아요. 그 어떤 것도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하셨던 건지도 몰라요. 돈, 명예, 하다못해 감정마저도 내어놓지 않았어요. 동정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으셨어요. 간절하게 원했던,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가지고 싶었던 그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집요할 정도로 비슷한 여인만을 찾아다니셨어요. 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 황족들은 거의 다 닮았지요. 색이 옅은 금발, 은발, 은회색……. 자색 눈동자와 청자색 눈동자…….”

에반에게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하나같이 찬란하고 반짝거리는, 달빛을 머금은 듯한 시린 색상.

그리고 그 때였다. 왜인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여인이 있었다. 내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깃든 것을 알아차렸는지, 헤레이나는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명이라는 것은 참 짓궂지요.”

“혹시, 손에 넣고자 했다던 그 여인이…….”

“화려하고 선연한 은발에 보석같이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를 지녔던, 세상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찬양하는 성녀이자 하나뿐인 당신의 언니셨습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내가 손으로 입을 꾹 막으며 크게 당황해하자 헤레이나는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아버지께선 당신이 그분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모르셨던 것 같아요. 저 역시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어 크게 놀랐으니까요. 이런 것을 두고 혹 운명의 장난이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답니다. 물론 제 아버지를 받아주지 않은 그분에게 책임을 떠넘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 아버지가 한 여인을 지독하게 사랑했듯, 그분의 마음 역시 그분 것이니까요. 어떤 이유든 간에 제 아버지가 해온 일은 결코 정당화될 수도, 용서받을 수도 없는 거지요. 다만…… 저는 결국 아버지의 손을 놓고 말았지만, 그래서 아버지를 죽음으로 밀어 넣은 것과 다름없지만, 그래도 딸로서 아버지 대신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라도 말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참을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제 언니는 마지막까지 아무와도 결혼하지 않았어요. 워낙 바빠 모든 사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한 남자만을 사랑하고 만남을 유지했던 것 같지도 않고요.”

그러니 착각이 아닐까요? 미처 내뱉지 못한 말이 입속을 맴돌았다. 그래, 내 언니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 주목을 받았고,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대륙에서 유명한 분이셨다. 집 안에 쌓여 있는 온갖 귀중한 물건들은 선물로 받은 것들이고, 귀찮아진다며 어디를 나가든 꼭 얼굴을 비롯한 상체 대부분을 면사로 가릴 정도였다.

그러니 그렇게 마음을 내보이던 남자 중 하나가 황제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만, 빼앗겼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혹시 다른 비슷한 여인이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꼭 같은 남자에게 빼앗겼던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요.”

“네?”

“신이요. 어쩌면 세상을 떠난 그분을 신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잖아요?”

신이 사랑한다는 세상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고, 제 자신조차 신의 품에 안기고 싶지 않아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가고, 세상을 안정시킬 천자를 탄생시키지 않기 위해 아들이란 아들은 모조리 죽이고, 교리를 비롯한 신학을 대부분 유실시키고.

헤레이나의 말대로 그저 탐욕이라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의 뒤에 감춰진 또 다른 이름은 복수일지 몰랐다.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된 남자가 사랑하던 여인마저 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신의 품으로 보내야 했다면……. 신에 대한 원망과 분노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리라.

0